채운산(彩雲山)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아 산세가 가파르지 않게 보였다. 키가 큰 소나무들이 거의 없고 어쩌다 이제 자라나는 다북솔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아카시아 나무들만 눈에 띄어 거의 민둥산 같은 느낌을 주는 산의 원경이 송두리째 눈 안에 들어왔다. 그래도 연연불망(戀戀不忘)했던 봄은 겨우내 감춰 두었던 풀 한 포기까지 빠트리지 않고 싹을 틔우니 온 산이 연초록빛 춘색(春色)으로 생기로운 변화를 이루었다. 무엇인가 허한 듯 하면서도 찬찬히 바라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그 산자락 밑에 강경역이 오붓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역 구내 한쪽 구석엔 남녘 끝머리 목포역를 출발하여 서울로 가는 증기기관차가 원행에 갈증난 목을 흠신 축이려는가 급수탑(給水塔)밑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반대편 선로엔 화물칸 높이가 반쯤 밖에 안 되는 곳간 열차가 역을 무정차로 통과하며 ‘꿰에엑 꿱꿱’ 기적소릴 날카롭게 남겼다. 그리고 역사를 힘껏 뒤로 밀쳐내어 빨간 외눈박이 신호등이 외롭게 껌뻑거리는 철로 건널목을 지나 호남선 철길을 따라 다음 역인 채운역을 향해 질주를 했다.
역 구내의 서쪽머리 끄트머리쯤, 높다랗게 치솟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양조간장 공장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올라 잠시인들 하늘 한구석을 검게 흐려 놓았다. 나루터로 들어서는 황산동 끝머리 털보 아저씨네 자전거포에는 우리 나이보다 한두 살쯤 더 많아 보이는 빡빡머리 아이가 자전거를 수리하고 계신 아저씨 옆에서 서툰 몸짓으로 일을 거들고 있었다. 점포 앞에는 우리 학교 학생 한 명이 먼 길을 달려오느라 타이어 튜브에 펑크가 났는지 자전거를 타지도 못하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질질 끌며 오고 있었다.
겨우내 얼음이 얼었던 연못이 해동으로 이제서야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햇볕이 깃드는 누런 갈대 숲 사이로 작은 붕어들이 거무스레한 등 머리를 설핏 내보이며 떼를 지어 오가고 이따금씩 숨이 차오르나 큰 붕어들이 물 위로 대가리를 볼끈거리다가 도로 위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자동차의 소음에 놀라 냉큼 물밑으로 몸을 숨겨 달아나고 있었다.
민출하게 뻗어난 미루나무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학교 울타리 밖으로 악대부의 연습하는 악기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회색 돌탑으로 세워진 육중한 교문 앞에는 열중쉬어 자세로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기율부원들의 강압(强壓)스런 모습이 보였다.
찐득찐득한 검정 콜타르 냄새가 지긋하게 배어나는 케케묵은 교실 안에 들어서니 이제 서로 말문이 트였는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후 아침 조회를 알리는 교내 방송이 들려와 모두 서둘러 운동장으로 향했다.
손바닥을 맞고 때론 엎드려뻗쳐 자세로 엉덩이를 맞아 가며 배운 그 지긋지긋한 ‘학도호국단’ 교련이 시작되었다. 오와 열을 맞춰 운동장을 한 바퀴를 돌며 행군을 했다. 앞에 서 가던 가죽혁대를 차고 팔에 완장을 두른 중대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우로 봐!’하고 구령을 붙이자 뒤를 따라 걸어가던 우리들 모두는 고개를 우측을 향해 45도 각도로 돌려 지휘대에 올라서 계시는 교장선생님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운동장 가득 차게 들려오는 밴드부의 행진곡 연주도 처음 얼마 동안은 아주 맛깔스럽고 웅장하게 들려오더니 고된 훈련에 지쳤던지 이제는 별스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보다는 제발 지루한 제식훈련이 어서 빨리 끝나길 우리 모두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첫 수업 시간인 영어 시간이 되었다. 미끈한 모습이 꼭 유럽 귀족풍을 풍기게 하는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일일이 하시다가 중간 정도에 앉아 있는 급우을 불러 일으켜 세우고, 참나무로 가늘게 깎은 지시봉으로 손바닥을 내려치셨다.
“야, 이놈아. 이게 영어문자냐? 아니면 니 맘대로 낙서를 한 거냐?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잔뜩 그려 놓고 이걸 숙제라고 해왔냐?”
갑자기 교실 안이 주눅이 든 것처럼 온통 분위가 착 가라앉았다. 선생님이 입모습을 잘 보라고 하시면서 알파벳 A부터 시작하여 Z까지 따라서 소리를 내라고 하셨다. 그러다 우리들이 내는 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손에 들고 있던 지시봉으로 교탁과 칠판을 치시며 큰소리로 화를 내셔 영어 공부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좀 특이했던 점은 군내에 있는 모든 학교들이 영어를 ‘유니온 잉글리쉬(UNIQN ENGLISH)’라는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독특하게 우리 학교만은 교과서를 ‘렛츠 런 잉글리쉬(LET'S LEARN ENGLISH)’로 배웠다. 그런 탓에 혹여라도 책을 실수로 분실을 하면 다른 학교 학생들은 선배들이 남긴 책이나 또는 읍내에 있는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우리 학교 영어 교과서는 분실을 하면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학급 인원이 49명이었던 우리 반에서 절반 이상이 강경 읍내에 있는 3개 국민학교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소수에 불과한 변두리 학교 출신인 우리들은 교실 분위기에서 꿔다 놓은 보리쌀 자루처럼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는 여름방학 전 1학기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입학 성적순에 관계없이 비밀투표로 실시되는 반장과 부반장 선거에서도 당연히 수가 많은 시내 출신인 아이들이 당선이 되었다. 그렇게 선출된 반장은 학도호국단 훈련 시에 제 1중대 1소대장이 되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엽다고 공민 과목을 가르치시는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우리들에게는 참 다정스럽게 대해 주셨다. 그러나 상급생들의 말에 의하면 수업 방법이 아주 엄하셔서 학도호국단 교련 선생님 그리고 3학년 영어과목 선생님과 더불어 학교 내에서 3대 호랑이로 불려졌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선생님에게 한 대만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그 통증이 신체 부분 중에 두 눈구멍과 두 귓구멍 그리고 두 콧구멍과 입 하체 부분에서 요도와 항문의 9개 부분까지 그 통증이 짜릿짜릿하게 느껴 온다고 하여 ‘아홉 구멍’이라는 아주 독특한 별명이 붙어져 선배들로부터 대물림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수하(垂下)한 수양버들이 연초록빛 실가지를 죽죽 늘어뜨려 이따금씩 선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버드나무 가지를 장난스레 가볍게 흔들었다. 번득거리는 교실 유리창 너머 철로가 보리밭에는 아낙네들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 밭을 매는 머리 위로 한 덩이 뭉게구름이 성글게 떠 있었다. 들녘으로 논갈이를 하러 나가는지 기다랗게 쟁기가 올려 있는 지게를 걸머지고 손에 잡은 줄이 넉넉하게 누런 황소를 느긋하게 몰며 동구 밖을 나서고 있어 그 또한 놓치기 싫은 정겨운 모습 중에 하나였다.
교실 옆 악기 창고 기와지붕 위에는 아침만 되면 수많은 참새들이 떼로 몰려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온 교정이 시끄러울 정도로 짖어댔다. 그래서 주산 선생님이 불러 주시는 ‘털고 놓기가’로 시작되는 호산의 숫자소리가 귓가에 어눌하게 들렸다.
학교생활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급우들과 자연스레 대화가 서서히 이루어지면서 처음보다는 서먹함이 덜해졌다. 학과 과목은 교련을 포함하여 14개 과목이 되어 교과서와 노트 그리고 도시락까지 넣으면 책가방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어학부문인 국어와 영어 그리고 사회학 부문인 공민과 국사, 지리에 많은 흥미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체육부문에서는 축구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제일 흥미를 갖지 못하고 어려워한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었으며, 특히 주산 과목에서 가감산은 겨우겨우 턱걸이를 하여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승산과 제산에서 크게 뒤떨어져 졸업 때까지 공인 3급도 못 따고 3년 내내 끙끙대며 고생을 했다.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에는 뭔 놈에 선배들이 그리도 거들먹거리며 교실로 몰려와 특별활동 부서인 자기들의 부서에 가입을 하라고 졸라대는지 정말로 귀찮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축구부와 문예부 둘을 놓고 며칠을 두고 생각한 끝에 적성에 맞는 문예부에 가입을 했다. 그 후 문예부에서 1년에 한 번씩 졸업식 때에 발간하는 교지에 글들을 올렸다.
언변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모인 웅변부에서는 군내 각급 기관에서 주관하는 학생 웅변대회에 학교를 대표하는 연사들이 출전을 했다. 군내 남여 중고등학교에서 출전한 연사들 중에 영예의 입상을 하게 되면 학교의 명예는 물론 그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져 모든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점심시간에는 서먹함이 채 가시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국민학교 때와는 달리 각자 자기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고 어쩌다 옆이 있는 급우와 반찬을 나눌 정도였다. 국민학교 때처럼 크게 편을 갈라 둘러앉는 일은 없어 매사를 처리하는 방법이 거의 독립적이었다.
학교에 등교하는 방법도 다양각색이었다. 시내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도보로 그리고 금강을 건너 세도 나루터를 거쳐야 하는 모래밭에 참외, 수박과 땅콩이 그리도 많이 나는 부여군 세도면과 모시의 원산지인 서천군 한산면에 사는 일부 학생들은 나룻배로 금강을 건너 등교를 했다.
비교적 교통망이 잘 연결된 논산 읍내와 채운면에 사는 학생들은 버스로 통학을 했다. 그러나 교통망이 활달치 못했던 그 시절 변두리 면소재지에 사는 학생들은 금강 둑 위로 자전거를 타고 왔으며, 멀리 강병육성의 요람지인 연무대에서 오는 학생들은 기차로 등교를 했다. 그래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전국에서 몰려오는 면회객들을 위해 점심때쯤에 한편 증설 운행하는 임시 열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5교시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각자 가입한 특별활동부에서 연습과 서로 간에 친목을 이뤘다. 그런데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은 연무대에 사는 통학생들이었다. 오후 5시 40분에 강경역을 출발하는 저녁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허둥지둥 뛰어갔다.
특별활동 부서 중에서 겉으로 보기에 제일 멋있어 보이는 반은 밴드부와 축구부였다. 밴드부는 기악에 어느 정도 흥미와 재능을 갖는 아이들을 음악 선생님이 엄선을 했다. 그리고 축구부는 선발이 더욱 더욱 까다로웠다. 국민학교 때 학교 대표 선수 출신들을 정식 학교 선생님이 안인 축구에 전문성을 갖춘 코치 선생님이 뽑았기에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는 다른 부서보다는 그 문턱이 높기만 했다. 그와 더불어 규율이 엄청 세서 일학년 신입생들은 그런 학교생활이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