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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94 조회 : 1,444




아침나절 내내 은회색 옅은 물안개가 산자락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더니 성급하게 찾아온 눈부신 아침 햇살에 그 자태가 서서히 흐트러져 운치를 거두고 있었다. 언제나 미동(微動)을 하지 않는 저 산은 연둣빛 신록(新綠)으로 눈부시게 너울거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생태계를 이뤘다.
그렇듯 모든 산자락이 또렷한 생동감으로 신비롭게 눈앞에 바짝 다가서 그토록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순숙(純淑)한 자연의 추이(推移)에 따라 변화하는 영롱한 빛깔 때문인 것 같았다.

싸리나무로 엮어 놓은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기현이네 집 울타리엔 샛노란 개나리꽃이 노릇노릇하게 만발하여 봄이 어느새 가깝게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짙게 묻어나는 색감이 주는 착시(錯視)때문인가? 금방이라도 손끝에 닿을 것만 같아 바라보는 눈이 마냥 시렸다.
두엄 가 홍매(紅梅)나무에도 붉은 물이 배어날 것 같은 꽃잎들이 바람에 보드랍고 가볍게 움직여 탐스럽기만 했다. 맛깔스런 고운 목소리로 우짖는 종달새가 그리도 기다렸던 푸른빛 반짝이는 보리밭에 내려앉아 있는 시간보다 하늘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욱 긴 것은 그 푸르름을 오래도록 두고두고 홀로 새기려는 것 같았다.

겉으로만 화사한 척하는 봄의 곧은 속심은 굳이 소화해 내지도 못할 감성을 쉽사리 드러내 놓는 우리네 속성을 꿰뚫어 보는 듯 차분한 발걸음으로 온 누리에 다가왔다.

아침 햇살 올곧게 내리쪼이는 다랭이밭 이랑에는 하얀 비단 실 뭉치 같은 땅김이 흐늘흐늘 피어오르고 있었다. 버들강아지 실눈을 귀엽게 뜬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으려 몸을 구부려 보니 뉘 알게 모르게 밤을 새워 모래톱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유기물을 흡수하던 작은 조개가 수정처럼 맑은 물밑에 착 가라앉아 전혀 움직이질 않아 앙증맞게 보였다. 그리고 푸른 물이끼가 가득 낀 징검돌엔 작아 검츠레한 다슬기들이 듬성듬성 몸을 붙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붕머리에 앉아 지저귀는 텅 빈 원두막 앞을 지나려니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화산리 교회에서 주일 아침 예배를 알리려는지 나무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온 들녘과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 더할나위 없이 온유롭기만 했다.

그런 평온함 속에 내 동생 순덕이는 지난 장날에 어머니께서 장난감 삼아 갖고 놀라고 사 오신 작은 밥숟가락을 손에 꼭 움켜쥐고 이젠 중심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모습에 지난겨울 그리 탈 없이 잘 자라 대견스럽게 보였다.

학과 과목이 많다 보니 선생님들이 내주시는 숙제도 많았다. 그래서 일요일이라도 마음을 턱 놓고 놀 수만은 없었다. 점심때까지 숙제를 마치고 한동안 발걸음이 뜸했던 동네에 가보려고 집을 나서 마을로 향하는 언덕배기에 올랐다.
겨우내 모진 산바람에 우느라 목이 쉬였던 갈참나무 가지 끝에도 푸릇푸릇 새순이 돋아났다. 생동의 활기가 가득 차오르는 흙먼지 푸석하던 좁다란 오솔길도 봄을 찾는 산객을 맞으려 넉넉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읍내를 향해 시원스레 탁 트인 앞 들녘에는 순아네 할아버지가 논에 쟁기질을 하시다 잠시 쉬시는지 좁다란 논둑에 걸터앉아 곰방대를 물고 계셨다. 어린 송아지는 배가 고픈지 풍만한 어미 젖무덤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냇가에 매어 놓은 까만 염소는 무엇을 보았는지 ‘메에에, 메에에’하며 방정맞게 울어댔다.
그리고 물오른 미루나무 겨드랑이에 연초록 잎들이 움튼 방죽가에는 하얀 오리 떼들이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털어내려나, 이따금씩 둔한 날갯짓으로 푸덕거려 묵직하게 아래로 처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텀벙, 텀벙’ 소리를 연이어 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동네 어귀 둥구나무 밑에 닿으니, 지난번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選擧) 때 동네 어른들 앞에서 시국에 관하여 그리도 예리하게 명쾌한 논리를 펴시던 담뱃대 공방을 하시는 노인이 이제는 선거의 승패에 관계없이 생업에 몰두하시는지 ‘탕탕탕탕’ 생철(생鐵)을 다듬는 울림소리가 토담너머로 세차게 들려왔다.

장난기 심한 철부지들이 군데군데 뜯어놓은 듯 진식이네 담벼락에 붙어 있던 선거 벽보가 그리도 흉물스럽게 보였다.

골목길 첫들목 우현이네 집에는 지난 초겨울 어미 개가 쥐약을 잘못 먹고 죽어 어미를 잃어버렸던 어린 강아지들이 겨울을 잘 버텨 듬직하게 자라 고샅길을 오고 가는 동네사람들을 향해 제법 앙칼지게 짖었다.

고샅길 안쪽에서 자전거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바라보니 주일 예배를 보러 가려는지 검정 교복에 교모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 오는 종구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웃음이라도 지으려고 했지만 역시나 그럴 짬도 주지 않으려는 듯 머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 비켜갔다. 그래서 또다시 우리 둘 사이에는 서먹함이 냉랭(冷冷)하게 깔리고 말았다.

한겨울 동안 이 집 저 집에서 가마니를 짜는 소리가 고샅길을 메우더니 그 소리도 멈췄다. 이제는 집안이 안정이 되었는지 영택이네 집에서 틀어 놓은 축음기 소리가 고샅길로 울려 나왔지만 등하굣길에 매일매일 귀가 따갑게 들어온 소리인지라 예전처럼 그렇게 신기하지는 않았다.

봄이 오자 동네 연자방앗간 놀이터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구슬치기와 못치기 그리고 땅따먹기를 하며 놀고 있어 조금은 떠들썩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논산 읍내 농공장에 일하러 간 동네 친구 주현이 동생 수영이의 얼굴이 보여 무척이나 반가워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방앗간 대문 옆에 붙어 있던 선거 벽보는 선거가 끝나 발동기를 돌리시는 순태 아저씨가 말끔하게 종이를 떼어내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양지바른 쪽엔 동네 어른들 몇 분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어른들 중에 동네일에 나서길 좋아하시는 순태 아저씨가 맨 먼저 입을 떼셨다.

“아따, 뭔 놈에 축음기는 아침나절부터 지금까장 틀어 놓는가 모르겄네. 영택이 애비가 그 고생을 하더니 이제 일들이 슬슬 풀려 가닌께 세상 살맛이 나는가, 아무튼 집안이 될려면 우환(憂患)이 안 끌어야 하는 법이여.”

아랫바지 주머니에서 답배갑을 꺼내 만지시더니 담배가 떨어지셨는지 옆에 앉아 계시던 경수 아저씨에게 담배를 한 개비 달라 하자,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주시던 경수 아저씨가 슬며시 웃으시면서 말을 했다.

“아따 형님은 혼자 살면서 그 돈 다 모았다 어디다 쓸려고 담배도 안 사 피우고 그래유. 혹시? 영택이 아버지처럼 어디 이쁜 색시라도 맞아들일려고 돈을 모으는감유? 그건 그렇고 말이 나왔으닌께 하는 말인디, 엊그제 뒤뜰 보리밭에 거름을 내고 오면서 영택이네 집을 슬쩍 보닌게, 부엌에서 중례하고 뭐시냐 공주에서 왔다는 그 아줌니하고 도란도란 예기를 주고받고 있어, 이참에 두 집 살림을 아예 합치고 살려는 것 같은디, 그 아줌니 속마음은 어쩔란가 몰라도 곁으로 보기엔 먼저번 여자보다는 풍겨오는 느낌이 영 낫던디, 어쩔란가 나두 잘 모르것네유.”

그러자 그중 나이가 제일 많으신 민균이 아버지께서 한차례 헛기침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아래께 논산 장날에 싸전에서 영택이 애비를 만났는디, 중례는 양쪽집에 사주단자가 오고가서 금명간(今明間)에 길일을 택해서 혼사 날짜를 잡을 모양이고, 그 공주에 산다는 아주머니하고는 중례 혼사 치루기 전에 두 집 살림을 합칠 거라고 허던구먼. 암튼 잘된 일이지 뭔지는 잘 몰라두 급히 먹는 밥에 체한다고, 지난번 여자 하나 잘못 들어와서 그 망신살에 마음고생 좀 많이 했는감? 그 여편네 찾으러 다닌다고 길바닥에 뿌리고 다닌 돈만해도 수월찮을 것이구먼, 그건 그렇고 이번 중례 시집보낼려면 영택이 애비가 손이 커서, 혼수도 나소 장만할 거고 잔치도 크게 벌릴 건디, 그 많은 놈에 돈 장만하려면 벼 방아를 찧어야 하닌께, 순태 자네는 신바람 나게 발동기 돌리면 되것네 그려. 글구 항시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이지만 기성이하고 정희는 어디서 잘 살고나 있는지 모르것네. 뱃속에 들어 있는 애도 설찬하게 컸을 꺼구먼, 에휴.”

그러자 옆에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고추 농사를 많이 지으시는 준섭이 아버지가 혹시나 종구네 아버지가 들을까 봐 걱정이 되는지 자리에서 일어서 허리를 펴고 턱을 들어 종구네 담 너머로 슬쩍 바라보면서 말씀하셨다.

“그나저나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이 다가왔는디, 동섭이 성님은 장가를 가는 건지 마는 건지 한동안 그 뭐시냐 등화동 사는 방물장수 노인네가 뻔질나게 들락거리더니, 요새는 영 콧구멍도 안 보이니 뭐 혼삿말이 물 건너갔는가? 이타저타 통 소식이 없네.”

그때 경수 아저씨가 얼른 말을 이으셨다.

“아래께 투표하기 전날 동근이 아버지가 선거운동 때문에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넌지시 들었는디, 종구란 놈 입학식 하던 날 방물장수 노인네가 중매를 해서 논산 읍네 중국집에서 맞선을 한번 본 모양이더라구. 그런디 동섭이 성님 눈이 높은 건지? 상대방 여자가 아예 얼굴이 못 생겨 맘에 안들었는지? 그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했는디, 동섭이 성님이 일부러 안 나가서 빵구를 내버린 모양이더라구유. 그건 그렇타치고 어찌 되었던 간에 자기네들이 운동했던 자유당이 이번 선거에 이겨버려서, 하다 못해 떡고물이라도 떨어질 것이닌께,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기와공장 허가증 내는 건 식은 죽 먹길 거고, 암튼 그 양반도 새로 장가 들라 기와공장 차릴라 양쪽으로 꽤나 바쁠 것 같구먼유. 그나저나 배꼽시계가 밥 먹을 시간 되었다고 하는디, 다들 점심 밥 먹으러 안 가실라남유?”

한동안 길게 말을 마친 경수 아저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리에 앉아 계시던 어른들도 모두 점심 식사를 하시려 각자 집으로 돌아가셨다.

한나절 봄 햇살처럼 다스하기만 한 평온한 작은 마을 들메 부락, 그 중에서 지붕이 제일 높게 우뚝 솟은 방앗간의 불그레하게 녹슨 양철 지붕너머로 가죽나무 두 그루가 서로 의지가지하며 버텨 서 있었다. 두 그루 가죽나무는 지난 긴 겨울날 오순도순 주고받은 밀어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서로 머릴 마주하고 있었다.
텅 비워 놓은 둥지를 새로운 삶의 터로 삼으려는지 앞가슴이 하얀 까치 한 마리 여유롭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날개를 접어 둥지 속을 뒤척이며 둥지 아래 내려다보이는 들메마을이 눈에 익은 듯 자꾸만 머리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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