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햇살이 교실 유리창에 부딪혀 영롱한 빛을 남겼다.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 금강 둑이 높다랗게 보였다. 논산평야에 젖줄이 된 금강은 언제나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뽀얗게 피어오른 뭉게구름을 벗을 삼아 둑 위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염소들과 배부른 누런 황소의 모습이 어름하게 보였다.
읍내로 들어서려 금강 둑길을 따라 소달구지를 여유롭게 몰고 오는 촌로(村老)의 초연한 모습이 파란 하늘빛에 짙게 묻어나 가일층(加一層) 돋보였다.
하루가 다르게 푸릇푸릇하게 휘어져 내리는 능수버들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운 냄새가 비릿한 물 냄새와 뒤섞여 나는 학교 연못가에 성구와 함께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성구가 물이 잘 오른 버들강아지를 한 마디 꺾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접었다 폈다 하는 주머니칼을 꺼내 동그랗게 칼집을 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겉껍질을 돌려 하얀 속가지를 빼내어 호띠기(호드기)를 만들어 입에 물고 불었다.
잔디 풀 끝머리 아지랑이 아롱대는 운동장 농구 코드엔 상급생들이 모여 바스켓 안에 공을 넣고 있었다. 쭉쭉 뻗어난 미루나무가 울타리를 이룬 가장자리 평행봉에는 몸을 폈다 구부리기를 반복하며 유연한 몸짓으로 평행봉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여 활기찬 봄의 생동감을 더해 주었다.
더없이 높다랗게 파아란 저 하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마음 가득 수용하고 싶었다. 멀리 눈앞에 다가서는 광활한 들녘에서 가을의 성숙함을 거둬들이려 봄부터 서두는 순박한 농부들의 분주한 발걸음에서 땅이 인간에게 주는 고마운 가르침을 하나 둘씩 일깨워 가고 싶었다.
경사가 완만한 산 밑을 유연하게 휘어드는 철로 길엔 언제나 가슴 뭉클하게 다가서는 그리움이 도사려 있었다.
강경역사로 진입하는 초입 머리에 외롭게 서 있는 철제 신호기가 바라보였다. 언제나 신호기는 다가서는 열차를 살갑게 맞이하고 뒤로 밀쳐 떠나가는 열차를 서운한 듯 언제나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신호기가 작은 읍내 외곽지대 한 모퉁이를 조촐하게 메워 도심과 알맞을 만큼 조화를 이루니 아담스런 모습이 한 조각 짙은 여운을 남겼다.
열차가 역구내(驛區內)로 진입하려는지 건널목의 신호등이 빨갛게 켜지고 있었다. ‘땡땡땡땡,땡땡땡댕’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려 울리는 날카로운 신호음이 제법 멀리 떨어진 학교 연못가까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귓가에 싫지 않게 들려옴은 그 또한 봄의 잔잔한 여운의 느낌을 고취해 주는 살뜰함이었다.
부자연스런 몸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 살아가려고, 아니 살아남아 아비의 몫을 그리라도 다하려 하는 성구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마음 가득 잔잔한 의미 깊은 파문이 일었다.
햇볕이 잘 깃드는 교실 앞 양지 바른 쪽에는, 햇살에 등 언저리 털 색깔이 더욱 번득거리고 작은 발가락이 선연한 붉은빛으로 눈에 띄는, 잿빛 비둘기 몇 마리가 ‘구구구구구’ 대며 여유롭게 모여 놀고 있었다.
푸른 교정 끝머리쯤 회색빛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예닐곱 개의 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교실 안에 웅장하게 생긴 피아노 한 대가 턱 버티고 있는 음악실이 있었다.
오후 들어 첫 수업시간인 음악시간이었다. 교실 안에는 페인트 냄새가 코끝에 묻어나 산뜻하게 보이는 파란색 신형 칠판이 두 개씩이나 걸려 있어 앞 벽면을 가득하게 채웠다 국민학교 시절 우리 반 교실에 걸려 있던 케케묵어 허름하게 칠 벗겨진 흑백 칠판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좌측 칠판엔 필기를 할 수 있고, 우측에 칠판엔 오선이 그려져 있어, 음악시간에 선생님께서 일일이 오선을 그리지 않고 편하게 쓸 수 있게 만든 칠판이었다.
그런 편리한 칠판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난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우리 담임선생님이 와이셔츠 소매 끝에 분필가루가 묻어나지 않으려고 두 팔을 걷어 올리시고, 커다란 나무잣대로 선을 그으시려 애를 쓰시던 모습이 떠올라, 이런 칠판 하나쯤 우리 모교에도 있었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몇 번은 해보았다.
검정 뿔테 안경을 쓰신 음악 선생님이, 칠판 위에 ‘스와니 강 작사 미상 작곡 미국의 스티븐 포스터’ 라고 큼직하게 쓰셨다.
‘스와니 강은 미국 남동부 플로리다 주에 있는 강으로, 강기슭에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들어서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타닌산으로 물빛이 다갈색을 띄며, 어른 팔뚝보다 더 큰 연어들이 푸덕이는 멀고 긴 강이다. 고향을 떠나 방랑 생활을 하던 수많은 흑인들이 이 노래를 망향의 노래로 불렀으며, 미국의 독립을 부추긴 남북전쟁 때에는, 남군, 북군 모두가 불렀던 서정이 가득 담기고 향수 짙은 노래다. 작사가 미상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일부 사람들의 추정으로는 작사를 흑인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작곡가 포스터 역시 흑인으로 무수히 많은 주옥같은 가곡들을 남겼다. 포스터가 37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 죽은 후에도, 그를 잊지 않고 세월이 흘러 먼 훗날까지 기억하기 위해, 미국달러화 50센트 동전의 앞면에 포스터의 얼굴을 새겨 넣어 그를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있다.’ 라고 써 놓으셨다.
그리고 천천히 한 번 더 설명을 자세하게 해주신 후,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따라 우리들은 음악 교과서의 오선지 위에 인쇄되어 있는 음악의 기초인 기본위치화음(基本位置和音)인 3화음의 본질적 의미도 터득치 못한 채, 그저 쓰여진 가사와 피아노 음률의 높낮이에 맞춰 잘 숙련되어 가는 앵무새처럼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렇게 너나 할 것 없이 저마다 지양하는 푸른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오후의 학교 수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루의 해가 나바위 언덕에 세워진 성당의 종탑 위에 머물려 할 때, 학교 수업을 마치고 성구와 함께 수양버들이 줄을 잇는 읍내로 향하는 비포장도로 위를 걸어갔다.
채운산 너머에 있는 부투골로 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철로 건널목이 보였다. 검정 콜타르칠을 한 자그마한 철도관사 앞에 건널목을 지키는 간수 아저씨 한 분이 앉아 계셔, 어렴풋이 그분이 성구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구 어머니는 성구 아버지가 서대전역에 역무원으로 근무하였을 때, 갑자기 산기를 느껴 옆집에 사시는 어떤 할머니의 도움으로, 성구를 너무 힘들게 거꾸로 난산하시다 실신을 하셨다. 그래서 급히 병원으로 옮겨 도립병원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시다가, 며칠 후에 젖도 떼지 못한 성구를 세상 밖에 홀로 남겨놓고 운명하셨다.
그런 탓에 성구의 뇌리 속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몇 번인가 쓸쓸히 푸념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성구와 두 살 터울인 성구 누나는, 성구 아버지가 철도 사고로 몸을 다치자 가세가 서서히 기울어 위축되어 가는 어려운 가정환경과, 성구 아버지가 일어서실 수 있는 재활 치료가 끝날 때까지 집안 살림을, 그 어린 나이에 도맡아하느라 중학교에 진학을 못했다.
그리고 어려운 살림에 작은 보탬이라도 해보려, 집 앞에 있는 단무지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성구의 말에 의하면 성구네 집 세 식구가 살고 있는 작은 관사의 일본식 다다미방(tatami[疊房]) 구조도, 일제 강제 점령기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했다.
관사를 빙 둘러 사철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울타리 밑에, 용암처럼 녹아내린 석탄재 덩어리가, 수많은 구멍이 뚫린 채 더북더북하게 쓰레기더미 속에 섞여 버려져 있었다.
남쪽으로 향한 네모난 창틈에 여러 조각으로 끼워진 유리창엔, 군데군데 금이 간 부분에 성구네 누나가 문종이를 곱게 오려 바른 문종이 속에, 여름 햇볕에 잘 말린 꽃잎들이 곱단하게 끼워져 있었다.
철로 건널목을 지키는 간수 한 사람이 겨우 기거할 수 있는 방 하나가 딸린 철도관사는, 밖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부엌 겸 현관으로 이어지는 비좁은 구조였다.
색 바랜 현관문 나무 문짝 밑 부분에는 얄미운 쥐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얼마나 긁어 놓았는지,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또렷하게 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보기에 무척이나 흉물스러웠다.
철제 시그널을 바라보시며 나무 의자에 말없이 앉아 계시는 성구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자, 의자 옆에 걸쳐 놓았던 목발을 짚고 일어서려 뒤뚱거리시는 모습이 너무도 애잔스러웠다.
지난날 내 아버지의 처절했던 모습과 성구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겹쳐, 한 덩이 묵직하고 커다란 아픔이 가슴을 차고 올라와 목덜미에 탁 걸려, 내뱉을 수도 되삼킬 수도 없는 참기 어려운 통증을 느꼈다.
하루 일을 끝마쳤는지 성구네 누나가, 여러 사람들 속에 간장 공장 정문을 나서 성구네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갔던 성구 누나가 잡곡이 가득 섞인 바가지를 들고 나오며, 성구에게 풍로 화덕에 석탄불을 붙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구와 나는 헌 철로 침목 쪼가리 불쏘시개로 불을 붙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입으로 힘껏 불었다. 그러자 연기에 눈이 따가워 눈물을 흘리며 가까스로 불을 붙였다.
성구 누나는 석탄불에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자 부젓가락으로 석탄을 들춰내고, 고구마 몇 개를 묻어 우리들에게 구워 주려 했다.
얼마 후 고구마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틈 사이로 구수한 냄새를 풍겨 속살이 노랗게 구워졌다. 그런 먹음직스런 고구마를 우리 세 사람은 비좁은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부끄럼 하나 없이, 입 가장자리에 검정을 묻혀 가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웃으면서, 뜨거운 고구마를 들고 껍질을 까 입에 물고 먹었다.
그렇게 석탄 타는 냄새 가득한 작은 관사의 비좁은 부엌에서, 성구 누나와 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유리창 밖으로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오자, 성구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벽에 걸려 있던 볏짚으로 엮은 망태기를 둘러메고 밖으로 나섰다.
나도 집으로 갈려고 성구 누나에게 눈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나오자, 연무대에서 훈련이 끝나 각자 부대로 배치되는 군인들을 싣고 오는 군용열차가 역사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군인들이 배치를 받은 부대가 있는 행선지에 따라 다른 열차로 갈아타려고, 오와 열을 맞춰 플랫폼에 앉아 인솔하는 상급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연무대에서 온 군용열차 안이 텅 비워지면, 성구는 열차의 객실을 돌아다니면서 의자 밑을 두루 살펴 빈병들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빈병들을 고물상에 팔아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약간의 돈을 조금씩 알뜰하게 모으고 있었다.
전국 각 부대로 배출되는 신병들이 불러대는 우렁찬 군가 소리가, 불그레한 선홍빛으로 기우러가는 노을 속에 묻히 듯, 작달막한 내 친구 성구의 뒷모습도 그 노을자락 속으로, 내 마음에 한 자락 싸늘한 여운을 남기며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