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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97 조회 : 1,357




『성그런 햇살에 듬뿍 물들어져
영롱한 오색을 발하는 채운(彩雲)이
고요를 일깨워 아침의 장을 여니

참한 모습 차분하게 다가서는 산자락에
젖빛 같은 뽀얀 물안개 몽환처럼 피어올라
서운하지 않을 만큼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눅눅하게 배어오는 황토 내음 속에
풋풋하게 묻어나는 짙은 솔향기가
피폐해진 뇌리를 청정하게 해주니

물안개를 헤집는 선연한 햇살에
새벽이슬 듬뿍 받은 생기 찬 산두릅이
연초록 새 순을 소담하게 틔운다.

이른 아침 배고픈 고라니에게
낼름 빼앗길까 두려운 마음에
냉큼 따서 송두리째 입 안에 넣으니

쌉싸름하게 묻어나는 짙은 향내에
잊혀졌던 뭉클한 기억 하나 있어
옛일을 되살리듯 오롯오롯 떠오른다.

천형인 듯 평생도록 말 한마디 못하고
강파른 삶 쌓인 설움 탓도 못하던
심성이 순하디 착하신 순덕이 어머니

산 두릅 가시같이 까칠한 가난 속에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한 서글픈 사연을
뉘 알까 두려워 심속 깊이 감추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단 한 점 남은 혈육
어린 딸 순덕이와 그리라도 살아남으려
산비둘기 꿩 소리 귀에 익은 화전민 딸답게

구름 노니는 앞산 우묵배미 골짜기에
모난 삶처럼 억척스런 가시덩굴을 헤쳐
포만스런 마음으로 산두릅을 가득 따며

시오 리 길 읍내 장이 끝났을까 두려워
마냥 초조하게 서두니 두근대는 마음에
댕댕이 넝쿨 바구니에 넉넉하게 담았다.』


태곳적 형태를 고스란히 지닌 저산은 자연의 순리를 한 치도 거역치 않는 듯했다. 싱그러운 풀과 나무들이 산자락과 바위의 틈새에 자유롭게 뿌릴 내려 싱그러운 햇살에 신록(新綠)으로 짙게 물들어졌다.

마을 앞산은 청초(靑草)한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서 숱한 의미를 던져주었다. 그 의미에 대한 심오한 답을 얻기까지가 비록 어려울지라도 내 스스로 풀게 하여 조금씩 알찬 모습으로 자라나게 했다.
아직은 나이가 어린 탓에 사회생활에 미숙한 탓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저 겉으로는 가볍게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이 그리 많은 것 같아도 진실로 내 속내를 들춰 내놓을만한 친구라고는 내 주변에 겨우 한두 명뿐이었다.

미루어 생각할진데 참된 우정은 티 없이 맑아야 하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끈끈한 정이 가슴 뭉클하게 가득 차올라 굳이 입을 열어 말을 안 해도 눈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참신한 교감이 이루워져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서로가 마음으로 의지하여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든든한 동반자 같은 믿음을 줄 수 있고, 살아가는 동안 같이 아파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지란지교(芝蘭之交) 같은 그런 친구 하나쯤 내 곁에 있어 주길 진실로 원했다.

겨우내 발길이 뚝 끊겨 적막감이 도사렸던 산골에 봄이 되자 산나물을 뜯으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옆 동네에 사는 아낙네들 까지 산으로 오르는 발걸음이 잦아졌다. 산 숲 사이로 드문드문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 서로의 위치를 가늠하려고 ‘어이’하며 부르는 목소리가 산속의 고요를 깨트렸다.

순덕이 어머니께서도 겨우내 기다리셨는지 며칠 전부터 부지런히 산을 오르내리셔 산두룹을 그리 많이 따오셨다 더불어 연한 고사리 새순과 곰취를 헝겊 자루에 가득 차게 따오셨다. 그리고 집안에 찾아드는 온갖 악귀를 몰아내고 좋은 일만 생기게 해주는 상서(祥瑞)로운 나무라며 꺾어 오신 뾰족한 가시가 험상궂게 돋아난 개두릅 엄나무(음나무) 토막을 방문 앞에 매달아 놓으셨다.

이제는 동네 사람들도 순덕이 어머니의 강인한 생활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가 되었다.그렇게라도 해야만 냉혹한 세상에 어린 순덕이와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이미 그 분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았다. 늘상 이른 아침에 남들보다 일찍 산에 오르셔 이슬 흠뻑 맞은 두틉나무 끝에서 봄의 생기 가득한 산두릅을 풍족하게 따오셨다. 남들의 눈에는 비록 보잘 것 없게 보일지라도 그렇게 한푼 한푼씩 모으려는 의지가 참으로 남다르게 보였다.

순덕이 어머니의 보물창고인 장독대 가장자리엔 오글오글하게 돋아난 푸른 돌나물들이 앞 다퉈 앙증스레 줄기 끝을 뽐내고 있었다. 밤나무 밑에는 돌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찬 담쟁이덩굴이 파릇파릇한 새잎으로 몸치장을 곱살하게 하여 찾아온 봄을 살갑게 맞이하고 있는 듯했다.
싸리 울타리 밑에 머리를 올곧게 치켜든 질경이도 다복하게 짙은 녹색의 잎사귀 모습을 보여 봄의 생기를 더했다. 살랑대는 봄바람에 푸른색 물결 잔잔하게 너울지는 보리밭 두둑(둔덕)엔 샛노랗게 핀 민들레꽃들이 아침 이슬에 수줍은 듯 얼굴을 함초롬히 들고 있었다.

이른 봄부터 볏짚 둥지 안에 알을 품었던 암탉도, 몸집이 작아 더욱 탐스럽기만 한 노란 털색의 병아리 몇 마리를 포근한 깃털 사이에 알뜰하게 모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 햇살 더욱 따스하게 퍼지면 어린 새끼들과 함께 텃밭에 봄나들이를 하려나 눈을 지그시 감아 기다리는 것 같이 보였다. 멋대가리 없이 뻘쭘하게 옆에 서 있는 늙은 장닭(수탉)은 마당가를 어슬렁거리는 검둥이가 영 눈에 거슬리는지 긴 목을 쳐들고 좌우로 갸웃거리며 경계를 하는 것 같았다.

순덕이 어머니가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가셔 집을 비우게 되면 하늘 위를 뱅뱅 돌며 기회를 노리는 솔개란 놈을 피해 얼른 몸을 숨기라는 듯 마당 한 귀퉁이에는 순덕이 어머니가 싸릿대로 엮어 만드신 둥그런 닭둥우리가 놓여 있었다.

겨울 동안 텅 비어 있던 밤나무 높다란 가지 사이에 걸쳐진 까치둥지엔 산속 어디서 날아 왔는지 알 수 없는 두 마리 까치가 저들만의 오붓한 둥지를 새롭게 틀려고 영역을 표시하는 듯 이른 아침부터 연청색 하늘을 바라보며 귀가 따갑게 울어댔다.

묵직한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밭둑길을 내려서자 ‘또르륵, 또르륵’ 마치 옥구슬이 구르는 듯 해맑은 계곡 물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해 여름 장마철에 불어나는 물살로 바지를 바짝 걷어 올려 어렵게 계곡물을 건넜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조금 가파른 언덕배기를 넘어 둔덕에 이르니 임자를 알 수 없는 묘 옆에 희뿌연 가는 줄기에 짙은 자줏빛 할미꽃이 두어 송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듬성듬성 자리를 잡은 제비꽃도 퍽이나 새침하게 보였다.

다복다복 군락을 이뤄 빙 둘러선 소나무들이 솔향기를 듬뿍 풍기는 송화(松花)가루가 봄바람 따라 여행을 떠나려나? 잔뜩 부풀린 몸짓으로 다정스레 반겨주는 것 같았다.

벼랑바위 맞은편 다랭이밭엔 종구네 아버지와 동근이 아버지가 측량이 끝난 밭 자락을 휘돌아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밭 둘레를 돌고 있었다. 종구는 무거운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둔덕길을 내려서 자기 앞으로 다가서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기와 공장을 지을 자리를 보라는 듯이 거들먹거리며 동네 종기 형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멀어 더욱 작게만 보이는 옥순이가 나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보았는지 동네 앞 개울가 낚시터 앞을 지나 바쁜 걸음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키가 반 뼘 정도 작아 보이는 옥순이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종구가 바라보기에 그리도 눈에 거슬렸는지 아니면 전기 학교인 강경읍내 학교로 가는 모습이 매우 아니꼽게 보였던지 우리들 귀에 들려올 정도로 어쭙잖은 모습으로 공연히 어른 흉내를 내듯 어색하게 생기침을 크게 한번 하며 밭둑 아래 논 자락으로 침을 내뱉었다.

어쩌면 가당치도 않은 오만스러움이 자기 아버지를 그리도 빼닮았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아 옥순이 얼굴을 바라보니 옥순이도 역시 비위에 거슬렸는지 그저 씁쓰레 웃고 있었다.

늘 권위적으로 보이는 지서 건물 앞에는 새로 부임을 한 다부지게 생긴 지서장이 정복을 입지 않고 전투복으로 바꿔 입었다. 정문에는 순경 한 분이 역시 전투복차림에 총을 메고 서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말이 많은 지서 차석이 무엇이라 순경들에게 쉴 새 없이 지시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리도 한가하게 보이던 지서 안이 분주하게 움직여 무슨 일이 있는 듯 보여 심상찮은 예감이 들었다.

지서 앞 길모퉁이 약방 앞을 지나는데 화산리에 사는 어른들이 길 앞에 모여 수군덕거리고 있어 가까이 다가서 귀를 기울여보니 어른들이 나누시는 말씀에 어제 경남 마산에서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다시 크게 일어나 순경들이 비상근무 태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군중들의 시위에 대한 상세한 이유와 사태의 경과를 전혀 알 수 없었기에 별다른 체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속내야 어찌되었던 겉으로 보기에는 면소재지 분위기가 더없이 평온키만 하여 솔직히 마음에 와 닿는 색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입학을 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새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너나 힐 것 없이 어색하게만 보였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어색한 티를 벗고 균형을 이루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이 제법 의젓하게 보였다.

온 동네 집집마다 샛노란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등화동 내리막길로 노란 꽃 속을 헤쳐 달려오는 듯 버스의 불쑥 내민 앞모습이 보였다. 오고 가는 차량들이 일으켜 남긴 흙먼지가 등피와 잎사귀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수양버들나무 앞에 한 자락 흙먼지를 가볍게 일으키며 버스가 다가섰다

널따란 들녘 벌판을 가득 메운 알록달록한 자운영들이 연청색 하늘 아래 커다랗게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보리밭 자락에 김을 매는 아낙네들의 하얀 저고리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찬란하게 눈부신 아침 해가 중천에 우뚝 자릴 잡고 들녘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버스가 읍내 경찰서 앞 로터리를 지나려 하자 정문 앞 초소에 전투복을 입은 순경 두 명이 어깨에 총을 메고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푸른 색 전투복을 입고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는 순경들의 발걸음이 분주해 보였다. 그와 더불어 늘 귓가에 들려오던 무전기의 송수신 소리가 더욱 가쁘게 들려오는 듯했다.

강경역과 맞바라보이는 황산동 로타리에는 ‘임시검문 중 제차 서행’ 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경찰관 서너 명이 오고 가는 차량과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경상남도 마산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군중들의 사태가 심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황산동 정류장에 내리자 시발택시 차고 앞에 운전수 아저씨들과 주변 상인들이 모여 검문 중인 로터리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 턱밑에 검은 수염을 길게 길러 모든 사람들이 털보 아저씨라고 부르는 택시 기사 아저씨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지금 여기서는 우리들이 아무것두 모르고 있다닌께유.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어제 저녁나절 역전에서 성동으로 가는 손님 한 분을 태우고 가는디 그 양반이 원래 고향은 성동인데 처갓집이 있는 마산으로 이사를 해서 오동동 시장에서 어물 장사를 하고 있는디, 시방 마산은 경찰들이 고등학생 눈에다가 최루탄을 쏘아서 학생 한명이 죽었다고 하더라구유, 근디 그 학생 몸뚱가리에 커다란 돌을 철사로 칭칭 감어 매달아 바닷물에 빠트렸는데, 아! 글쎄. 그 시체가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가 27일 만에 물 위에 떠올랐다는구먼유. 그 처참한 죽음을 보고 흥분한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이 엄청나게 길로 쏟아져 나와서 ‘이승만 정부 물러나라!’고 외쳐대며 마산시청과 경찰서로 떼를 지어 몰려가자 놀랜 경찰들이 총을 쏘아대고 난리가 나서 엉망진창이라고 하던디, 그것 땜시로 여기도 순경들이 갑자기 벌건 대낮에 눈에 쌍심지 켜고 저러는구먼 그려.”

그러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어른 한 분이 불쑥 나서 말을 이으셨다.

“암튼 천하에 처죽일 놈들이지 그 어린 학생이 뭔 놈에 죄가 있다고 총으로 쏴 죽인 것도 못할 짓인디, 죽은 시체를 아예 영원히 감추려고 시체에 무지막지허게 돌을 매달아 바닷물에 빠트렸으니, 딱 하는 짓거리가 지난 인공난리 때 그 무지막지한 빨갱이 놈들이 죄 없는 사람들 죽이는데 총알이 아깝다고 철사줄로 묶어 우물에 빠뜨려 죽인 것처럼 했구먼 그려. 에이! 벌건 대낮에 날벼락을 맞아 죽을 놈들.”

그리 험하게 말씀을 끝마치시고도 분이 끓어오르시는 듯 숨결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셨다.

그렇듯 숨죽여 살아오던 이 땅의 민초들 사이에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국민적인 저항의 함성이 마산사태를 필두로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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