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남녘으로부터 간들간들 불어오는 춘풍(春風)을 타고 봄은 느긋하게 찾아 들었다. 그런 봄을 혼자서만 찬미하려나, 파릇파릇한 풀들이 곱게 자라난 산자락을 진달래 철쭉꽃들이 겹겹을 이뤘다. 꽃잎마다 애태워 기다렸던 봄의 그리움을 말하려는 듯 붉게 타올라 영롱한 모습으로 눈 시리게 다가서니 가없이 고운 꽃잎 변치 않는 깊은 사랑의 의미로 피어나 한 자락 잔잔한 여운을 가슴 깊이 남겼다. 꽃들이 온통 화사하게 만개(滿開)한 길섶 따라 걷는 발길이 가볍기만 했다. 그리고 피어난 꽃들이 친숙한 자태로 눈앞에 성큼성큼 다가서니 무릇 바라보기에 귀여움만 더했다.
연한 쪽빛 하늘을 등에 지고 버텨 선 산릉선에 한가롭게 쉬어 노는 저 구름이 뿌루퉁한 모습으로 괜스레 시새움만 할 뿐 영롱한 빛 한 점을 지우지도 못하니 불그레하게 타오르는 꽃잎의 색깔은 자연이 주는 고귀한 사랑의 변함없는 징표인 것 같았다.
짙어지는 푸르름이 잎사귀마다 찬연하게 비치는 햇살의 등을 타고 찬미의 손길을 내미는 숲에서 고귀한 생명의 득음처럼 또랑또랑하게 들려오는 산새들의 울음소리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금 가다듬고 싶었다. 굽어진 산골짝마다 흘러내린 물이 한곳으로 모여 유연하게 흐르는 계곡엔 물밑에 깔린 조약돌이 알른알른 보여 이내 서로 부딪쳐 보드등거리고 해맑은 햇살에 부딪쳐 반짝이는 물결이 더없이 투명하게만 보였다.
철쭉꽃이 군락을 이뤄 불그레하게 물들어 가는 앞 산기슭에 잿빛 초가지붕들이 머릴 맞대고 소담스레 모여 있는 면소재지 화산리 지붕 틈사이로 교회의 십자가가 또렷하게 보였다. 조금 높다랗게 보이는 종탑 머리에서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확 트인 푸른 들녘으로 고루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추녀 안 흙벽에 단작스럽게 달라붙어 있는 텅 빈 흙집 둥지에도 이제 곧 제비가 지루한 원행(遠行)을 멈추고 새로운 모습으로 활기차게 나래를 펴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지붕 머리를 한 바퀴 휘돌아 추녀 끝에 반갑게 찾아들 것만 같았다.
네 식구의 생계를 한 몸에 지신 어머니는 남들 다 쉬는 일요일이 있을 리 없어 비릿한 냄새 가득 풍겨 나는 젓갈 동이를 머리에 이고, 둔덕 너머 푸른 소나무 숲 사이로 마음 서운하게 몸을 감추셨다.
순덕이 어머니는 큰 변화를 원치도 않는 것 같았다. 턱없는 욕심을 부릴 리 없어 주어진 환경에 늘 감사하며 어린 순덕이와 뼈아팠던 과거의 흔적들을 하나둘 씩 지우려 과묵한 모습으로 산에 오르셨다.
가파른 산자락에 척박한 삶을 살아온 화전민 자식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눈으로 보고 배워 왔던 그대로 나물을 퍽이나 열심히 뜯어 오셨다. 그 나물들을 삶아 텃밭 바윗돌 위에 펼쳐 널어 네 식구의 어려운 삶에 작게 라도 보탬이 되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그동안 순덕이 어머니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시고 동네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오셨는데 오랜만에 내가 물을 길러 동네에 가려고 사립짝을 나섰다.
풀숲 가에 작은 송사리 떼 오물거리는 도랑가 맑은 물이 나를 부르듯 졸졸거리고 간들간들 불어오는 훈훈한 봄바람이 정겹기만 한 언덕 위에 오르니 봉곳봉곳 부풀어 오른 꽃망울을 터트린 연한 분홍빛 벚꽃들이 벚나무 사이에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리고 파릇파릇 잎들이 자라나는 갈참나무 가지 사이로 새어나오는 눈 시린 아침 햇살에 빛깔 무늬 고운 산새 몇 마리가 밤이슬에 젖은 몸을 분주하게 부리를 돌려 가다듬고 있었다.
야트막한 동네 흙 담장엔 발롱발롱한 노란 개나리꽃과 산수유가 덕지덕지 피어나 담장과 담장 사이를 노란색 띠를 둘러 보드라운 노란색 비단결 같아 바라보는 눈이 시리도록 장관을 이뤘다.
실버들이 똘망똘망하게 눈망울을 뜬 냇둑에는 줄을 매어 놓은 까만 숫염소들이 서로 기 싸움을 하는지?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머리를 사정없이 들이박고 동네 앞 냇가 빨래터에는 겨우내 밀렸던 빨래를 하는가? 아낙네들의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흰 오리들이 물가에 머무적거리는 방죽 앞까지 둔탁하게 들려왔다.
아직은 보리밭을 돌보고 논을 갈아엎는 일 말고는 그다지 바쁜 일이 없어 그런지 동네 안팎이 더없이 평온키만 했다. 늦가을까지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였던 동네 앞 논 자락을 쟁기로 갈아엎어 갑자기 놀이터를 잃어버린 동네 꼬맹이들이 연자방앗간 놀이터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농경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낙후된 삶 속에 동네의 어느 집 하나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 하나도 없는 답답하리만큼 어둡게 살던 그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시국이 어수선하게 돌아가는 것을 몇 사람 입을 거쳐 귀동냥하여 어렴풋이 알았는지? 그리도 포만한 발걸음으로 뒷짐을 지고 거들먹거리며 매일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기와공장 터로 잡아 놓은 밭둑을 빙빙 돌던 종구 아버지가 마음이 심란하신지 주일날인데도 교회에 가질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종구네 집 마루에서 동근이 아버지와 머릴 맞대고 앉아 동네 이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신중하게 듣고 계셨다.
그렇게 나라 안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오랜 세월을 두고 목메게 기다렸던 기와공장 허가가 공염불(空念佛)이 되나 싶어 종구 아버지가 좌불안석(坐不安席)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욕심 많은 주인 양반 깊은 속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마당가에 어슬렁거리던 두 마리 거위는 기다란 목을 내밀어 멋대가리 없이 그저 울고만 있었다.
푸르스름한 들녘 저 멀리 오목하게 바라보이는 채운역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면회객을 싣고 훈련소에 가려고 객차 몇 칸을 꼬리 끝에 짤막하게 이어 달은 연무대행 기차가 선로를 바꾸려고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내 친구 성구는 하루해가 금강 둑 너머로 기울려 하는 저녁나절엔 언제나 변함없이 노을빛 등지고 강경역 구내에 멈춰 설 텅 빈 객차의 밑바닥을 훑어 빈 병들을 모았다. 그렇게 주워 모은 빈병들을 볏짚 망태기에 담아 집으로 걸어가겠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더불어 시큼한 짠 냄새 가득하게 나는 간장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성구 누나와 그리고 철길 건널목에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마음 아프신 만큼 먼 철로 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계실 성구 아버지의 힘을 잃은 모습이 떠올라 마음속이 아려 왔다. 그와 더불어 언제쯤 우리들 모두 이런 지긋지긋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나려나? 하는 생각에 잠시 잠겨 보았다.
햇살 고르게 내리쬐는 양지바른 방앗간 대문 앞에는 지난 선거철에 진식이네 담벽 앞에서 민주당 선거운동을 하시며 자신의 소신을 다부지게 피력(披瀝)하시며, ‘한 오백년’을 그리 즐겨 부르시던 병수 아버지가 마을 어른들께 혼미한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계셨다. 이야기를 듣고 계신 동네 어른들이 대화의 내용에 공감을 하시는지 가끔씩 머리를 끄덕이면서 진지한 모습으로 병수 아버지가 하시는 말을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다. 동네 어른들이 자유롭게 주고받으시는 대화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라 잔뜩 침체된 듯 조용한 종구네 집 분위기와는 아주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겨우내 침묵하였던 뿌리들이 저마다 앞을 다퉈 몸차림을 하니 생동하는 무언의 소리가 온 산야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봄이 주는 환희의 열기로 곰실곰실하게 일렁이는 아지랑이의 현기증처럼 온통 들떠 있던 1960년 그해 봄, 4월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짙어 가는 신록의 활기만큼이나 나라 안은 실로 긴박한 변화의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그 변화의 핵심은 성난 민초들의 피맺힌 울부짖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나라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이자 거대 여당의 당수로써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적인 권력을 만천하(滿天下)에 휘둘렀던 87세의 노정객 이승만과 지리산 산자락 흙 속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회적인 힘이 없는 17세의 어린 학생 김주열의 운명적인 연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녘 호남의 동맥인 지리산 자락 예향(藝鄕)의 고을인 전라북도 남원(南原), 그곳에서도 구불구불한 도로 길로 한참을 더 들어가는 곳이 바로 어린 소년 김주열의 고향이었다. 마을 앞으로 따스한 햇살을 가득 담은 요천 수로가 흐르고, 들녘 한복판에 우뚝 솟아오른 고리봉을 바라보며 흙의 정연한 진리 속에 묻혀 사는 평온한 시골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주열은 조상 대대로 대물림하여 내려온 뿌리 깊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청운의 부푼 꿈을 가득 품고 진달래 철쭉꽃 심산계곡 산자락 따라 곱게 피어난 높다란 바래봉을 넘었다. 그리고 산세가 수려한 경남 산청을 지나 산 설고 물 설은 낯선 땅 그 먼 곳 경남 마산의 상업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래서 자기 형과 함께 합격증을 들고 기쁜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그런데 바로 한 달 전인 1960년 3월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온갖 불법과 폭력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부정선거와 당선무효’를 외치며 항거해 일어난 마산시민들의 울분에 가득 찬 모습을 보고 교문을 나서던 어린 소년 김주열 군은 불의에 분개한 마음에 성난 군중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시위를 하던 중 치안을 유지하던 경찰들이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오는 군중들을 해산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폭력적인 방법으로 총을 쏘며 진압을 했다. 그리고 그 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 학생은 그날 이후로 아무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로부터 27일이 지난 4월11일 오후, 행방이 묘연하기만 했던 김주열 학생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인간이라면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창동 앞바다 부둣가에 온몸이 철사 줄에 감긴 싸늘한 시체로 떠올랐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MBC 부산 방송기자의 눈에 띄었다. 그 잔혹함이 전파를 타고 일파만파(一波萬波)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이승만 정권의 처참한 만행을 직접 목격한 모든 마산 시민과 남녀 학생들 모두는 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을 해치고 국민의 눈을 두려워 않은 채 한 인간의 존엄한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위정자(爲政者)들의 만행(蠻行)에 울분이 가득 찬 절규의 항쟁(抗爭)을 전시민적으로 전개했다.
그런 위급한 혼란 속에서도 국민의 눈이 두려워 사태를 축소하려고 마산도립병원에 안치되어 있던 김주열의 싸늘한 시신을 4월13일 밤 경찰 당국이 극비리에 빼돌렸다. 그런 후 남원 김주열의 고향으로 향하여 다음날 김주열의 시신이 남원 고향 마을인 금지면 고향 집에 도착했다.
그런 처참한 분위기 속에 부모는 물론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온 동네 사람들이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그러나 그런 아픔도 힘없는 민초의 울부짖음으로 허공(虛空)에 메아리쳤을 뿐 결국 김주열의 시신은 너무도 허무하게 고향 금지 땅 산자락 한 귀퉁이를 쓸쓸하게 메우고 말았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그의 죽음을 헛되이 버리질 않았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전 국민적인 항거로 끝난 4.19 의거의 기폭제(起爆劑)가 되었다. 그로 인해 실로 이 땅에 새로운 민주주의가 정립될 수 있는 커다란 밑거름이 됐다. 훗날 역사는 그의 숭고한 죽음을 높이 기리는 전 국민의 마음을 담아 민주 열사로 기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