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메 (들꽃뫼)는 더없이 광활한 금강들녁 한 곳에 툭하니 버려진 듯한 턱없이 작은 촌락이다.
그런 마을을 나지막한 태화산이 늘 제 살점처럼 살갑게 감싸안고 있었다. 그 산자락 아래 밭두덕 어느 쯤엔가에 태반을 묻었다. 그리고 비록 궁핍했을지라도 나름 티없이 자라났다.
뭇사람들은 그런 내 고향 땅을 "들꽃뫼"라 일컬었고 지금껏 일컬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먼 훗날까지 그리 일컬어질 것이라 믿는다."
국토에 중추를 이루는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하나의 산맥이 갈라져 나왔다. 그 산맥이 충청남북도의 중앙부분으로 힘껏 내려 뻗어 틈실하게 등줄기를 이루었다.
이른바 차령산맥이다.
아마도 태고적 부터 산맥의 등줄기가 좌,우 양편으로 나눠졌으리라 나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그 산맥의 동북부지역은 경기도와 인접해 있고, 그리고 남은 절반인 서남부지역은 전라도와 맞닿아 경계를 이룬다.
산맥의 흐름에 따라 금강평야의 젓줄인 금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 금강은 천년의 질곡어린 역사의 숨결들을 가슴 속 깊히 묻고 아직까지도 흐름을 지속하고 있다. 그 끝자락이 서남쪽 서해바다에 인접한 서천들녁에 닿을 때까지 광활한 금강평야를 이루었다.
그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의 신무산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의 산세가 가파른 산악 지역을 가볍게 스치듯 지난다. 이어 충청남도로 들어서 백제의 옛 도읍지인 공주를 거쳐지난 후 곡창지대인 논산 들녘을 지나 강경의 포구에 와닿는다. 금강은 그곳 강경을 지날 때부터,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을 가르는 도계를 확연하게 이루면서 다시금 유유히 흐른다. 그리고 충청남도의 서남쪽 끝머리 서천 갯벌을 거쳐 군산만에 이른다. 그렇게 금강물은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고 널디너른 서해바다로 유유히 흘러 들어간다.
그런 천혜의 터 금강들녘 동북쪽의 입목에 풍요가 넘처나는 들녘 하나가 오붓하게 자릴 잡고 있다. 바로 채운들녁이다. 사계의 구별이 두렸한 그곳에 우리들 모두는 선조대대로 있는 역량을 다해 삶에 근간을 이루며 살았다.
들녘 동쪽 끝머리에 아침해는 언제나 한치의 어김도 없이 듬실하게 떠올랐다.
하늘 높히 떠있는 구름들이 아침 햇살의 회절현상으로 영롱한 빛으로 탐스럽게 물들었다. 그런 장엄한 모습이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래서 옛부터 사람들이 그 곳을 일컬어 채운(彩雲)이라 했다.
여명의 태동으로 떠오른 해는 우리들 모두에게 언제나 신비로움을 가득 자아내게 하였다. 여명은 그런 해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양보의 미덕을 여실히 발휘 하여 우리들 모두가 보고 느껴 배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그와 더불어 아침 해는 늘 장엄한 모습으로 동녘 하늘 밑 대둔산 봉두에서 듬직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찬란한 빛을 온 누리에 광연하게 펼쳐 새로운 아침의 장을 열었다. 더불어 충만한 사랑으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두루 살피려 했다. 그런 마음으로 드넓은 황산벌과 광활한 채운들녘을 꼼꼼하게 챙겨 품안에 한껏 끌어 안았다.
그런 축복어린 삶의 그루터기에 들메마을은 채운들녘의 하늘아래 다소곳하게 발붙임을 했다. 바로 그곳이 내 고향 땅 ‘들꽃뫼'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을 터트려 밭둑에 태반을 묻은 곳이다.
넓디너른 금강평야의 입문인 채운 들녘 어느 한곳에 삼십여 가구가 모여 사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을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사람들은 너른 들녘과 산이 맞닿은 곳에 들꽃들이 많이 피어난다고 하여 그곳을 일러 들꽃뫼 라고 불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이라고 마을 사람들 모두는 조상 적부터 대물림하여 농사짓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그저 흐르는 세월 속에 묻혀 사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자연의 법궤에서 나름대로 터득한 지혜를 적절히 조화시켜, 주위의 모든 사물들과 공생하는 미덕을 잃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해뜰참부터 노을이 깃들어가는 해질녘까지 끼니를 이어갈 한 톨의 쌀이라도 더 건지려는 마음에 땅을 비옥하게 일구려고 심혈을 기우려 부단한 노력을 기우렸다. 더불어 서로가 서로에게 정을 붙이며 살고 싶어 그리도 살뜰하게 감싸 안으려 온갖 힘을 썼고,마을 사람들 모두는 힘을 모아 자손대대로 모듬살이를 이어가며 살았다.
세월의 년륜이 짙게 배인 색 바랜 초가집들이, 낮은 처마를 서로 맞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마을 앞을 휘어도는 샛강 모래톱에 모여 사는 동글납작한 조가비들 같이 소담스럽게 보였다. 때론 그런 모습들이, 소나기가 한차례 스쳐 지나간 뒤 소곳소곳 돋아나는 둥글넓적한 삿갓버섯 같이 보이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는 대나무소쿠리를 엎어놓은 것과 같이 아늑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 싶다.
그렇듯 야트막한 산 아래 널다랗게 펼쳐진 채운들녘의 품에 크고 작은 초가집들이 포근하게 안겨 있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면소재지 매꽃뫼 마을 뒤에 불쑥 솟아난 매화산이 언제나 자애로운 눈빛으로 우리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면소재지로 이어지는 달구지가 다니는 길이 빤히 바라보이는 동구 밖에는 마치 수호신처럼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떡하니 버텨 서 있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은 경술국치를 겪어 삼십 육년 동안 강제 점령 당했던 일제의 암흑기를 거쳤다. 그래도 마을 어른들은 실로 암울했고 참담했던 지난 날에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터를 지켜 인내심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다.
그토록 잔혹하게 한 민족의 혼을 말살하려 했고 온갖 찬탈과 수탈을 서슴치 않았던 일제가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망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토록 온민족이 염원했던 해방을 맞이했었다. 그 해방의 뜨거운 감격에 힘 입어 더욱 더 열심히 각자의 본연에 충실하며 살려고 노력을 하였다.
풍한의 세월 동안 마을의 느티나무는, 언제나 말없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부락민들의 정신과 마음에 버팀목이 되었다.
해마다 명절이 다가오면 늙으신 노모는 어김없이 느티나무 아래에 서 계셨다. 그리고 저 멀리 매꽃뫼 들주막 앞에 있는 나들목을 눈이 시리도록 뚫어져라 바라보셨다. 늙은 어미 속타는 줄 모르고, 더디 오는 자식을 그리도 애타게 기다리셨다.
면소재지가 있는 마을의 이름을 예전에는 매꽃뫼라고 불렀으나 그후 화산리로 개칭되었다. 면소재지인 화산리 마을 뒤편에는 지금껏 꽃미라고 하는 아주 작은 산이 있다. 그곳에 봄이되면 매화가 많이 핀다고 하여 옛부터 사람들은 매화산이라고도 불렀다. 매화산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를 형제봉이라고 일커렀다. 그리고 면소재지인 매꽃뫼에서 논산과 강경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길 나들목에는 외딴 초가주막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주막을 일컬어 매꽃뫼 들주막이라고 했다.
마을 앞을 지나는 철길은, 대전역에서 남녘 끄트머리 목포역까지 이어진 호남선 선로였다. 그리고 전북 이리역(지금의 익산역)에서 갈라져 여수까지 가는 전라선도 함께 있었다. 그 선로 위에는 하루에 몇 차례 검은 증기기관차가 심심치 않을 정도로 오르내렸다.
이따금씩 기관차는 청잣빛 짙게 물든 하늘을 향해 기적을 세차게 울려 온 들녁에 고루 퍼트렸다. 그리고 전원의 정적을 깨트리며 세차게 솟구치는 흑연을 내뿜어 널다란 들녁으로 실실이 흩트려 놓았다.
철길 앞 방죽가에는 해맑은 바람을 헤집고 포근하게 찾아 든 햇살이 넉넉하리만큼 포개져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개구리밥 사이로 떼를 지어 자맥질하는 논병아리들의 모습이 단아한 시골의 정취를 한껏 자아냈다. 방죽을 에워싸고 있는 논배미에는 황새 한마리가 하얀 나래를 가볍게 접으며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이 드넓게 펼쳐진 금강들녁의 짙은 녹색과, 백옥보다 더 하얗게 보이는 황새의 모습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단아한 시골의 정취를 아낌없이 자아내고 있었다.
면소재지 채운면 나들목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십리 정도 떨어진 곳에. 군청소재지인 논산 읍내가 자릴 잡고,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대략 시오리 정도 떨어진 곳에 강경 읍내가 있다.
아침마다 찬연하게 해가 떠오르는 대둔산자락 아래 동남쪽에는 그 옛날 백제의 혼이 가득 서려있는 황산벌이 넓디넓게 펼쳐있어 그곳 한자락에 강병 육성의 요람지인 논산 훈련소가 자리잡고 있는 연무대가 존립해 있다. 군청소재지 논산과 강경을 잇는 도로는 일제강점기 때 드넓은 금강들녁에서 수확하는 기름진 쌀을 찬탈하려는 목적으로 온 지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역을 시켜 만들어 도로 폭이 그리 넓지 않은 도로였다. 그저 맨 땅을 펑퍼짐하게 골라 그 위에 자갈을 덥수룩하게 깔아놓은 수준의 비포장 도로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는 일제 때 새로 닦아 놓은 새로운 길이라 하여 신작로라고 불렀다. 그리고 들메 마을 뒤로 흘러 금강 개어귀로 들어가는 논산천 지류인 샛강을 건너기 위해 새로 세워 놓은 다리를 ‘신다리’라고 불렀다.
교통사정이 아주 열약했던 그 시절 그리 마땅한 운송 수단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대다수는 높다랗게 키 큰 미루나무가 길 양 옆으로 예법 가지런하게 서 있는 신작로를 걸어서 양쪽읍내로 볼일을 보러 다녔다.
그렇게 길을 걷다보면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드문드문 오가는 자동차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럴적마다 자동차가 일으키는 흙먼지로 코가 맵고, 눈이 쓰라려 여간 곤혹이 아니었다.
강경은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이북의 평양과 약령시장으로 널리 알려진 대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시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여 그 명성을 전국에 떨쳤었다.
그러나 호남선 철도에 이어 군산선까지 개통이 되고 사면팔방으로 도로가 나 교통이 활달해졌다. 그러자 상권이 각 지역으로 분산되었고, 그런 이유로 점차 쇠잔해져 끝내는 상업도시의 빛을 잃고 말았다. 지금은 젓갈시장의 명맥을 그런대로 유지하여 비록 소읍일지라도 거듭나려 저마다 힘을 모으고 있다.
마을 앞 동쪽에는 멀리 은진면 상평리에 있는 탑정 저수지로부터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자그마한 개울을 이뤄 금강 개어귀와 맞닿았다.
개울둑에는 철마다 숱한 이름 모를 꽃들이 보기 좋을 만큼이나 무수히 피어났다. 나즈막한 나뭇가지들은 물기를 듬뿍 받아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리고 눈망울이 또렷해진 버들강아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봄이 왔음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
따끔따끔한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초여름 날에는 냇가에 개망초 하얀 꽃이 수두룩하게 피어 보기 좋을만큼이나 군락을 이루었다. 넉넉한 마을 인심처럼 늘어뜨린 줄 끝에 매어 있는 검은 염소는 배가 부른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하며 오수를 즐겼다. 그런 어미의 속도 모르고 아기 염소는 선홍빛 젖꼭지를 입안 가득 암팡지게 물아 넣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으려 욕심을 잔뜩 부렸다. 머리를 들어 턱을 옴팡지게 뒤로 제치며 세차게 빨고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 서남쪽으로 시오리쯤 떨어진 곳에 읍내 강경이 자릴 잡고 있다.
해맑은 날에는, 뒤펀데기 푸른 들녘 지평선과 맞닿은 읍내 전경이 그리도 또렷하게 보였고, 더러는 해끄름하게 바라보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강경상업고등학교의 언덕 위에 서 있는 아름드리 팽나무였다.
더불어 북쪽으로는 옥녀봉의 높다란 언덕 위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 세 그루의 느티나무 중에서 두 그루의 수령이 이백여 년을 훨씬 넘는다고 동네 어른들이 늘 말씀하셨다.
강경읍내로 이어지는 들메마을 남쪽 끄트머리 나들목에는 마을의 상징처럼 미내다리가 아주 먼 옛날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시절 기예가 특출한 석공들이 온갖 정성을 들여 화강암을 정교하게 갈고 다듬어 조적해 놓은 다리였다. 세월따라 인적마져 끊긴 그 돌다리가 풍운한설의 연륜이 그대로 쌓이고 쌓인 흔적인양 거무튀튀하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마을 뒤로 흐르는 논산천의 지류인 샛강을 벗 삼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숱한 옛일들을 다시금 되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미내다리 옆 왼쪽에는 호남선 철길이 샛강을 건너기 위해 세워놓은 철교가 있다.
그리고 바른쪽에는 상평저수지를 출발한 농업용수가 채운들녘의 서남부 쪽에 있는 논배미들로 유입되었다. 그런 과정에 농업용수가 샛강을 건너기 위해 세운 철근 콘크리트의 다리가 놓여 있다.
그렇게 세 개의 다리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세월의 흐름을 묵묵하게 지켜 보는 것 같다.
그중에서 미내다리는 옛날 전라도 지방에 사는 선비들이 저마다 장원급제의 부푼 꿈을 가득 안고 천 리 길 한양 땅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꼭 건너야만 했던 다리였다. 더불어 충청도와 전라도를 오가며 상거래를 했던 보부상들도 지친 발걸음을 멈춰 다리 쉼을 하며 목을 추기던 곳이였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온 과객들과 보부상들이 실버들 나무 아래에 있던 주막집에서 탁배기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잠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 지금의 논산은진과 상월을 지나 공주 탄천을 거쳐 그 먼 길 한양 땅에 닿을 수 있었다고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그때 있었다는 주막집은 오간 곳이 없다. 물론 수양버드나무까지도 눈에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이젠 그 흔적마저도 아예 찾아볼 수 없어 흘러간 세월이 무상할 뿐이다.
원목다리에도 세월의 흔적처럼 검츠레하게 마른 이끼들이 듬성듬성 들붙어 있다.
그 원목다리 밑으로 금강 개어귀를 향해 흐르는 샛강이 있다. 바로 그 샛강엔 불어오는 강바람에 서로 몸을 비벼 아픔의 신음인양 소리를 내는 갈대가 빼곡하게 들어 차 울창하게 숲을 이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갈대밭 어딘가에서 짝을 찾아 바둥대는 물때새의 애닯픈 울음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미내다리 옆 강경천 개울둑까지 초록빛으로 펼쳐 있는 채운들녘이 평면적인 광활함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읍내 가장자리 옥녀봉 언덕 위에 서 있는 커다란 세 그루 팽나무의 모습들이 퍽이나 듬직하게 보였다.
바지런한 해는 종일토록 드넓은 들녘의 구석구석을 세세히 훑어 헤집었다. 그러다 늦저녘 무렵이되면 옥녀봉을 노을빛으로 온통 불그레 물들여 놓았다. 그리고 어둠살이 슬며시 찾아들면 금강 둑 너머로 차분하게 몸을 숨기려 했다.
늘 그맘때쯤이면, 마을 앞 동구 밖에는 읍내 장터에 다녀오는 순아네 소달구지가 보였다. 불그레한 노을빛을 듬뿍 받으며 마을로 돌아오는 모습이 퍽이나 정겹게 보였다. 더불어 마을 초가지붕 위에는 아슴아슴 저녁연기 피어올랐다.
들메 마을 사람들 모두는 살아가는 동안 순리를 좀처럼 거역하지 않으려 했다. 더불어 모든 사물들과 적절한 조화를 이뤄 삶을 영위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노력하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민초들이었다. 그토록 맑은 삶의 숨소리가 살아 있어 평화롭기 그지없는 들메마을이었다. 그곳은 하늘이 밝은 빛과 끝 없는 사랑으로 축복을 내려주는 천혜의 터였다.
들메마을의 넓디너른 들녘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야생화들이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어났다. 변모하는 초자연적인 풍광과 마을의 정취가 한데 어울려 수려함이 듬뿍 서려 있는 그곳 들메는 영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으로 살아 숨 쉬는 동안 나의 뇌리와 가슴 깊은 곳에 오롯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