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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99 조회 : 1,417




가난이란 족쇄에 얽매여 실로 암울(暗鬱)하게 살아 온 나날들이었다. 나를 에워싼 크고 작은 시련들이 숱한 고뇌의 늪으로 작은 몸뚱이를 자꾸만 빠트렸다.

뭇사람들 중에 그 누구 하나도 힘들어 하는 내 마음을 그리 속 시원하게 알아주질 못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서로 간에 관계가 번란(煩難)하게 얽혔던 사람들에 대한 미움도 차츰차츰 변해 가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으로 터득하는 가르침도 처해진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 듯했다. 언제나 의연한 모습으로 나를 묵묵히 바라만 보는 저 산이 그런 나에게 영적으로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주 먼 훗날 이 땅에서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라도, 과묵한 저 산은 나를 쉽사리 잊지를 않아 오래도록 기억해줄 것만 같았다. 기구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저 산은 나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다. 그랬기에 아린 마음을 꽉 붙들어준 기억들이 있어 ‘정말 고마웠노라.’ 한마디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진솔한 소리를 무심코 바람이 불어오면 한 번쯤 더 귀를 기울여 달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봄 농사철이 임박했음을 알리나, 탑정 저수지에서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모아 두었던 방대한 저수량을 방출하여 앞 냇가에 물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꾸만 불어났다. 물길 따라 널따란 들녘에 가득하게 담긴 논물들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잔잔한 파문을 물결 위에 이루었다. 이제 곧 일 년 농사를 준비하려고 볍씨를 뿌려 못자리를 하는 농부들의 일손이 바빠질 것만 같았다.

싸리 울타리 너머로 훤하게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노란 산수유 꽃들이 만개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옆자리엔 비록 십일 정도의 짧은 생명력이지만 옅은 분홍색 벚꽃이 우아스런 자태로 하얗게 군락을 이루었다.

작은 만큼 소담스럽기만 한 각시붓꽃이 짙은 청색의 꽃잎을 줄기 끝에 소박하게 매달고 있었다. 그에 뒤질 새라 명자나무도 붉은빛 꽃망울을 터트려 꽃잎들을 탐스럽게 피웠다. 드문드문 피어난 매화꽃이 그리도 참하게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읍내로 장사를 나가신 어머니와 순덕이를 등에 업고 산에 나물을 뜯으러 가신 순덕이 어머니가 집을 비워 허전함이 묻어나는 산기슭 외딴집의 적적함을 그라도 메워주었다.

흙내 풋풋하게 묻어나는 마당에 어미의 울음소리 따라 발걸음을 쫓는 어린 병아리들을 바라보았다. 두껍고 딱딱한 알껍데기를 깨부수고 나온 강인한 생명력에 또 하나의 작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앙증맞은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샛노란 솜털의 보드라운 촉감을 잠시라도 느껴 보고 싶었다.

앞뜰 조그마한 밭 자락에 푸성귀라도 심어 볼 마음으로 추녀 밑 굴뚝 옆에 겨우내 누워 있던 쇠스랑을 들고 땅을 파 뒤집으며 무심코 앞을 바라보니 순아네 누런 암소가 입 언저리에 허연 거품을 내며 구부러진 만큼 긴 밭을 갈고 있었다. 어린 송아지는 마냥 신이 나는지 어미 소 옆을 따라다니며 철딱서니 없이 껑충껑충 뛰어 놀고 산자락 어느 메에서 날아온 한 무리 까마귀 떼가 순아 할아버지와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며 부리 끝으로 갈아 뒤엎어 놓은 황토 흙 사이로 꾸물대는 벌레를 잡고 있었다.

기성이 형 어머니가 금년에는 밭농사를 일찍 서두시나 아침 일직부터 일을 하고 계셨다. 키 작은 뽕나무가 가득 들어찬 밭에 돌을 추려 내어 밭을 일구던 농부는 밭두렁에 앉아 타오르는 목을 탁배기 한 사발로 달래며 밭갈이를 하는 순아네 암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솜뭉치 같은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마을의 모습이 그리도 참하게 보였다. 저녁 반찬거리를 준비하려나, 집 근처 논둑에서 쑥과 씀바귀 그리고 냉이를 캐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했다.

물결이 잘랑잘랑하는 넓은 들녘 논배미에는 겨우내 흙 속에 몸을 숨겼던 우렁이 논둑 가에 알을 낳으려 논 밖으로 어슬렁거리며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네 아이들이 아랫도리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물속의 우렁이를 잡아 노란 양은 세숫대야에 담고 있었다.

연초록 푸른색 옷을 갈아입은 둥구나무 앞에는 얼마 전까지 방앗간 앞에서 동네 여러 어른들에게 열변을 토하시던 병수네 아버지가 읍내에 가시려나? 잰걸음으로 동구 밖을 나서고 있었다.

목도 아프지 않은가? 뒷산에서 종일토록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가 한껏 처연하게 들려왔다. 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오솔길에 흰 무명 저고리에 검정 몸뻬를 입은 순덕이 어머니가 머리에 나물 보따리를 이고 오시는 모습이 조금은 멀리 바라보였다.
‘말 못하는 미물인 짐승도 제 밥 주는 사람은 알아본다.’고 요즘 부쩍부쩍 순덕이 어머니를 더 따르는 듯 검둥이가 한낮 햇볕이 무료한가?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더니 갑자기 일어서 목덜미를 흔들어 몸을 한차례 털고 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순덕이 어머니가 내려오시는 가파른 산길로 냉큼 달려갔다.

갑작스런 검둥이의 몸놀림에 놀란 듯 등 털이 조금 벗겨진 장닭이 겁도 없이 푸덕이며 검둥이에게 달려들었다.

인간의 정은 그 느낌에 따라 다양하게 피부에 와 닿겠지만 불과 한나절 떨어져 있던 순덕이가 눈에 자꾸만 아른거리니 무릇 진정한 끌림은 호들갑스럽게 서두르지 않는 끈끈한 교감 속에 서서히 두터워지는 것 같았다.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서는 순덕이와 순덕이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 더디게만 보여졌고, 더딘 만큼 마음은 벌써 어린 내 동생 순덕이 옆에 가 있었다.

순덕이 어머니가 홍매화 방긋방긋 웃고 있는 울타리 모퉁이를 벗어나 사립짝 앞에 다가서자 향긋한 더덕 냄새가 머리에 인 짐 보따리에서 은은하게 퍼져났다. 남들은 좀처럼 눈에 띄질 않는다는 해묵은 더덕을 그 푸른 숲 꽉 차게 우거진 가시덤불 사이에서 어찌 그리 눈이 밝으셔 용케도 찾아내어 캐 오셨는지 꺼무튀튀한 흙이 잔뜩 묻어난 더덕 뿌리가 제법 굵직하게 보였다. 숱한 해를 산자락에서 살았어도 처음 보는 이름 모를 산나물도 더러더러 보였다.

머리에 이신 보퉁이를 쪽마루에 내려놓으시며 산길을 걸어오시느라 숨이 가쁘셨던지 한 자락 숨을 길게 내쉰 후 순덕이를 땅바닥에 내려놓으셨다.

하얀 바탕에 노란색과 붉은색의 꽃무늬가 있는 코끝이 뾰족한 꽃고무신을 신은 순덕이가 마당에 놀고 있는 노란 병아리가 신기해 보였는지 병아리 옆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러자 어미 닭이 얼른 머리를 쳐들고 노려보며 날개를 푸덕여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순덕이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손바닥만 한 작은 터에 홀로 서 있는 초라한 초가집일지라도 그런 모습들 하나하나가 곱게 새겨져 마음이 뿌듯해졌다.

부엌 두멍에서 물 한 사발을 떠서 목을 축이신 순덕이 어머니가 점심이 조금 지난 터이라 손으로 배를 가리키시며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물으셔 머리를 끄덕이니 서둘러 밥을 차려 오셨다. 쪽마루에 앉아 밥을 먹으려는데 순덕이가 손에 밥숟갈을 들고 맨 먼저 상 앞에 다가서 지난겨울 동안 많이 컸구나! 하는 생각에 대견스러워 볼을 한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부지런하신 순덕이 어머니 덕분에 양념냄새 가득 풍기는 산나물 무침과 넓적한 산나물 잎사귀에 밥을 한술 떠 얹고 막장 푹 떠서 바른 후 입에 넣으니 향긋한 냄새가 입 안에 가득차고 쌉싸래한 뒷맛이 미각을 돋워 이런 여유로움을 준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다.

햇살 가득 깃드는 쪽마루에 앉아 산나물을 구별하신 순덕이 어머니가 검정 가마솥에 산나물을 삶으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는가? ‘딱딱딱딱’ 무릎으로 삭정이의 억센 가지를 부러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물을 삶고 있던 순덕이 어머니께서 밖으로 나와 텃밭 바윗돌 위에 널따랗게 펼쳐 널은 나물들을 한차례 뒤집은 후 흙 묻은 더덕을 담은 함지박을 들고 도랑가로 가셨다.

매화나무 밑에서 어미 닭이 두엄가의 거름을 두 발로 파헤쳐 슬슬 기어 나오는 지렁이를 잡아 저는 하나도 먹으려 하질 않고 부리로 마구 쪼아 먹기 좋을 만큼 짧게 토막을 내어 구구대며 어린 병아리들을 불러 모으는 모습을 바라보니 무릇! 미물인 짐승도 저렇듯 모성애로 제 새끼를 보듬고 살려 하는가 싶어 참으로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들 중에 미물인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내 근처에 가까이 있었다. 바로 철길 건너 외딴집에 사는 기현이 어머니가 그 대표적인 분이였다.

남녀가 서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칠 벗겨진 개다리소반 위에 잘 익은 배추김치를 입에 넣어 쪽쪽 빨은 손가락으로 쭉쭉 찢어 한술 뜬 남편의 밥 수저에 올려주면 그리도 정겨워 격 없이 얼굴을 마주보며 웃고 살았다. 그리고 머리 기름때 냄새 배어나는 베갯잇에 머릴 맞대고 길어 짧게만 느껴지는 숱한 밤을 누구 알까 싶어 둘만의 밀어로 수를 놓았다.
하늘 아래 땅 위에 단 하나뿐이었던 그런 사람이 전쟁의 화마가 붉은 혓바닥으로 삼켜 한줌 재로 돌아오자 한 며칠 동안은 효부가 따로 없는 듯 온 동네 사람들 눈시울을 적시며 처절하게 울어대더니 그 울먹임이 채 한 해도 못 넘겨 뱃사람과 눈이 맞아 두 눈 멀뚱하게 뜬 어린 자식 늙으신 시아버지 손에 떠넘기고 매몰차게 떠난 기현이 어머니가 문득 떠올랐다.

울며불며 매달리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울타리 모퉁이를 돌아선 후 몇 해가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안쓰러운 기현이 얼굴이 떠올라 울타리 너머 노란 개나리꽃 아롱대는 기현이네 집을 바라보니 기현이 할아버지와 기현이가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텃마당 마늘 밭을 매고 있어 그리워하는 고통보다 지워가며 사는 아픔을 선택한 어린 기현이의 마음에 그저 안쓰러움만 가득할 뿐이었다.

도랑가에 다녀오신 순덕이 어머니가 부엌에서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부치시는가? 들기름 냄새가 마당 밖으로 구수하게 흘러나왔다.

잎 푸른 가로수 줄을 이어 서 있는 읍내로 가는 신작로에 두서너 대 오가는 차량들이 내는 경적(警笛)소리가 조금은 날카롭게 들려왔다. 달리는 차창 유리에 부딪친 햇살이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매우 아름답게 보였고, 뿌옇게 일으키는 흙먼지가 높이 위로 솟아올라 파란 하늘 한 귀퉁이를 흐려놓았다.

지난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選擧)철에는 짐자전거가 힘에 부치는 듯 커다란 술통을 가득 실고 콧노래를 부르며 내달려가던 주조장 배달부 아저씨가 이제는 겨우 술통 하나를 짐받이에 삐딱하게 걸치고 느릿느릿 페달을 밟아 동네로 들어서고 있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중례누나 결혼식에 쓰려고 벼 방아를 찧는가? ‘쿵쿵쿵쿵쿵쿵’ 대는 발동기가 방앗간 일을 하시는 몸짓 가벼운 순태 아저씨 모습처럼 촐랑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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