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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01 조회 : 1,506




부유스름한 새벽 여명이 두터운 어둠을 걷어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면면한 민족사의 흐름 속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는 1960년 4월 19일 풍운(風雲)의 아침은 그렇게 펼쳐졌다. 아득한 동쪽 끝머리 하늘과 맞닿은 곳에 오밀조밀한 산세가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대둔산(大芚山)이 태고의 신비를 가득 안고 희읍스름하게 윤곽을 드러내 유아한 감흥(感興)을 불러일으켜 시선을 사로잡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 아래 구름에 투시된 투명한 햇살이 영롱한 빛으로 되살아났다.

수은(水銀)같은 아침 이슬이 찬란한 빛을 다북하게 발하는 애솔나무 모습이 온통 마음을 빼앗고 산마루터기에서는 한 줄기 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푸른 이끼 돋아난 미끄러운 돌다리를 조심스레 건넜다. 흘러가는 소리가 귀엽기 그지없는 개울 물속에 손을 담그니 밖으로부터 묻어온 시련의 때를 한 점 빠트리지 않고 말끔하게 씻어 내려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어린 새끼의 먹이를 찾아 날개 짓을 부지런히 하는 어미 새처럼 언제나 나보다 한 시간 여를 앞서 읍내로 나가시는 어머니가 젓갈동이를 이시고 싸리나무 울타리를 끼고 돌아 밭둑길로 걸어가셨다.

부연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냉이를 넣어 먹음직스레 끓인 냉잇국에 양념이 고루 배어난 묵은 김치에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집을 나서려니 순덕이가 혼자 남는 것이 외로웠나? 떨어지지 않으려 울면서 떼를 썼다.

순덕이 어머니께서 어제 성구가 나눠 준 크림빵을 먹지 않고 남겨와 순덕이에게 준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지 도시락을 건네주시던 순덕이 어머니가 잠시 몸을 뒤로 돌리셨다. 그리고 몸뻬 속주머니에서 나물 팔아 모은 돈 중에서 구겨진 10원짜리 지폐 3장을 꺼내셔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뿌리치는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그리고 한 손으로 배를 가리키시며 배고플 때 뭐라도 사먹으라고 어눌한 말소리로 애써 표현을 하셨다. 천형(天刑)이 내린 아픔을 이기고 살아가시는 아주머니의 꾸밈없는 모습과 온후한 마음씨에 눈언저리가 젖어들었다.

봄바람이 발을 멈춰 쉬어 가는 둔덕 풀숲에 진남색 달개비꽃 띄엄띄엄 곱살하게 얼굴 내밀었다. 영롱한 꽃잎의 빛깔에 도취되어 은은한 꽃향기에 취했나? 찔레나무 덩굴 숲에서 봄의 묘미를 만끽하며 노닐던 산새들이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 포롱포롱 힘찬 모습으로 하늘 높이 솟아올라 앞 동네 교회의 종탑 위를 거쳐 산기슭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하늘 향해 희끗희끗한 모습으로 밋밋하게 뻗어난 백양나무가 다보록하게 군락을 이뤄 가지마다 돋아난 푸른 잎들이 파름파름했다. 기묘하게 생긴 거무추레한 바위와 알맞게 균형을 이룬 건너편 산자락에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짓고 있는가? 나무를 야물딱지게 파헤치는 딱따구리 소리가 똘방지게 들려왔다.

나라의 백성을 소중하게 여겨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선정(善政)이고 그 백성을 무시하고 탄압하는 것이 악정(惡政)이며 온 나라 백성을 두루 살리는 것을 대덕(大德)이라 했다. 암울했던 그 시절 민의를 대변하는 우리의 위정자들은 국민의 열망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개인의 권력과 사리탐욕에 시야가 흐려 국민의 소리를 철저히 외면하여 국민으로부터 서서히 신뢰를 잃어 갔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 과도하게 충성하려는 일부 지각없는 하수인들이 행동으로 빚어낸 처절한 아픔과 고통은 고스란히 순박한 국민의 몫으로 되돌려졌다. 그런 탓에 깨어 있는 국민들의 원성이 날로 늘어나 민심은 등을 돌린 채 넘쳐나는 분노를 가누질 못해 타오르는 활화산처럼 표출될 분출구를 찾고 있었다.

강경 읍네 장날과 맞물린 날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미어터질 정도로 꽉 찬 사람들로 숨쉬기조차도 어려웠다. 능청스런 곰 같은 조수 아저씨는 버스 문짝이 쭈그러지라 두드리면서 좁은 자루 속에 물건을 마구 구겨 넣듯 등으로 사람들을 버스 안쪽으로 사정없이 밀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찌든 사람들 냄새로 차 안은 시골 장날답게 온통 혼탁하기만 했다.

장날이라 오고 가는 사람들로 들끓는 황산동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자 어차피 학교 가는 길목에 있는 성구네 집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역전 쪽으로 걸어가는데 길가 중국집에서 자장을 볶는 기름 냄새가 은근히 입맛을 당기게 했다. 중국집 앞마당에는 내 동생 순덕이 신발보다 그리 크지도 않은 가죽신을 신은 여자 주인이 중국집 남자 주인이 시장을 보아 온 짐 꾸러미를 들고 아장아장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구부러진 좁다란 골목길엔 어제 막차를 놓친 여행객이 낯선 곳에서 하룻밤 유숙을 하였는지 허름한 여인숙 문 앞을 부스스한 얼굴로 나서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삽살개 한 마리가 손님의 뒤를 빠짝 따라가고 있었다.

긴 하품을 토하며 넉넉하리만큼 서 있던 기차가 빠져나간 텅 빈 역 구내의 측백나무 울타리에 우르르 몰려온 참새 떼가 자리를 잡느라 시끄럽게 재잘댔다. 그리고 역사 화물 집하장(集荷場)에서는 흰 무명 수건을 목에 두른 하역반 아저씨들이 널따랗게 걸쳐 놓은 나무 발판을 딛고 낡은 트럭 짐칸에 화물차 곳간에서 비료 포대를 옮겨 싣고 있었다.

이른 아침나절 머리끝이 희끗희끗한 엿장수 아저씨가 대합실 입구와 마주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쪽에 지게를 세워 작대기로 받쳐 놓고 엿을 사러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듯했다. 목판 위에는 양쪽 끝에 검은 참깨를 듬뿍 바른 길쭉한 가락엿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열차에 오르고 내리는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아 찾아드는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자, 지게 주위를 맴돌며 손님 한 사람이라도 부르려는 듯 가위질을 하여 쩔겅쩔겅하는 소리가 빈 마당에 맴돌았다.

역전 건물 앞에는 작달막한 둥그런 화단이 있었고 그 화단 한가운데에는 온몸에 검정 콜타르를 가득하게 칠한 나무 전봇대가 외롭게 홀로 서 있었다. 역 구내 시커먼 석탄 집하장 좁은 골목길은 흘러내린 석탄가루로 길바닥이 흙인지 석탄가루인지 구별키 어려울 정도로 거무튀튀했다. 일본식으로 지은 철도 관사 건물들이 들어선 길 옆 미나리꽝에는 파릇하게 자란 미나리 줄기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조각조각 색종이를 곱살하게 오려 붙인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니 책가방을 챙기던 성구가 창문 너머로 나를 내려다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성구 누나 성자는 집 앞에 있는 간장 공장에 출근을 하려 문을 열며 나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철로 건널목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과묵하신 성구 아버지는 아랫바지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자주 꺼내 보시며 열차의 진입 시간을 재고 계신 듯해 보였다.

황산동 자전거포 앞으로 향하는 길가 양옆으로 포플러나무가 작은 손바닥을 앙증맞게 내보이며 생긋거렸다. 도로 위를 걸어가는 우리들 뒤로 요란스레 벨을 울리며 내달려온 자전거들이 길게 줄을 지어 달려가는 모습이 그리도 활기차게 보였다.

그때 갑자기 ‘덜커덩’ 하는 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역사 외곽지역에 서 있는 철제 시그널의 강판이 아래로 숙여지고 있었다. 조금 멀리 이리역을 출발하여 용안역을 통과하여 강경 역사로 들어서려는 열차가 지나는 건널목에는 성구 아버지가 호루라기를 불며 오고 가는 사람들을 가로막고 빨간 깃발을 흔들고 계셨다.

나른한 봄날이라 그런지 저마다 졸음이 그리도 쏟아졌다. 수학 선생님 눈을 피해 가며 적당히 조느라 곤욕(困辱)을 치렀던 4교시가 끝났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자 교실 안에 있던 우리들 모두는 앞을 다퉈 도시락 뚜껑을 여는 소음을 남겼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교정의 나무 벤치와 양지바른 쪽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쉬고 있는데 반드럽고 고운 회색빛 화강암으로 지은 본관 건물 앞에 평상시와는 달리 교장, 교감 선생님과 학생과장인 훈육 선생님 그리고 교련 선생님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왜 그럴까? 하는 마음에 우리들 모두는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했다

그렇게 의심스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그리도 극성스럽게 몰아붙이던 교련시간이 줄어들었고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선생님들이 시내로 나오셔 저녁 늦게까지 귀가를 독려하시며 우리들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이었다.

그런 우리들의 예상이 맞았구나 하고 느끼게 된 것은 학교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장날이라 가뜩이나 번잡스런 시내로 들어서자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난리가 난 것처럼 웅성거리며 나누는 대화 속에 다소의 편차는 있었지만 서울에서 중고교 학생들과 대학생들 그리고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데모를 하던 중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읍내 중심부 사람들이 많이 왕래를 하는 시가지와 역전 그리고 버스 주차장에는 전투복 차림의 경찰들과 사복차림의 형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겨우 눈에 띄었던 경찰서에 단 한 대 뿐이라는 경찰 백차가 시내를 분주하게 돌아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작은 소읍의 분위기가 흉흉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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