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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02 조회 : 1,484




언제나 마음 편히 다가서는 앞산 마루턱에 먹구름이 몰려와 짓궂게 심술을 부렸다. 온통 검뿌옇게 바라보이는 하늘은 칙칙하다 못해 음울(陰鬱)하기만 했다.
읍내 서쪽으로부터 밀려오는 햇무리구름이 화가 잔뜩 난 듯 보였다. 구름에 온통 가려진 희끄무레한 해는 성이 덜 찬듯 앵돌아져 있었다. 그리고 쌓인 추억을 되뇌이 듯 한차례 보슬비가 감질나게 흩뿌리 듯 내렸다. 산자락에 풀과 나무들의 선연(鮮姸)한 푸르름이 눈앞에 한 발 성큼 다가서 두드러지게 돋보여 생기롭기만 했다.

산 밑 옹기 가마터에서 옹기를 구우려 오랜만에 가마에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봄의 푸르름이 연연하게 피어오르는 둔덕 너머 보리밭 이랑 위에 나지막하게 깔려 아물아물하게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께서 호미를 들고 싸리 울타리와 텃밭을 두루 돌으시며 싸리나무로 얽어 놓은 울타리 밑에는 해바라기와 호박씨를 텃밭 가장자리엔 옥수수 알갱이를 정성 들여 심고 계셨다.

낮은 지붕 밑에 진흙으로 쌓아 올린 굴뚝이 삶의 무게만큼 시커멓게 잔뜩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흙벽 기둥에 걸려 있는 누렇게 말라 오그러 든 무시래기가 세월의 흐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실실이 내리는 붐비에 몸 적시기 싫었나, ‘꼭꼭꼭꼭’ 어미 닭이 몇 차례 병아리들을 불러 모으려 했다. 그러나 벽쪽에 몸을 기대어 잔뜩 움크리고 있는 병아리들이 지긋이 눈을 감아 조는 것처럼 보였다.

볏짚 거적때기 바짝 걷어 말아 올린 부엌에서는 아침밥을 지으시는 순덕이 어머니가 날씨가 음습(陰濕)하여 굴뚝으로 연기가 힘차게 빠져나가지 못해 아궁이에 불길이 잘 타오르질 않는가? 무쇠로 만든 둥그런 쇠바퀴에 고무줄이 감긴 풀무를 돌려 열심히 불을 피우고 계셨다.

자그마한 텃밭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자세히 바라보니 푸석한 흙덩이 사이로 좁은 골 따라 돋아나는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듬성듬성 보여 윤회(輪廻)하는 계절의 변화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겨우 이십 여평 남짓 되는 비탈밭을 바라보면 늘 머릿속에 맴도는 가슴 아픈 기억이 또 하나 있었다.

그 밭은 남에 빗에 쪼들리다 못해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하여 새벽에 고향을 말없이 떠난 남순이 어머니께서 국유림에 산림계 직원의 눈을 피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척박한 땅을 야금야금 일궈 놓은 밭이었다.

산골 외딴 초가집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동네 연자방앗간 옆에 살았던 남순이네 집은 조상님이 그라도 남겨 주었던 앞들 기름진 논 열두 마지기를 일구며 큰 걱정 없이 살았다.

그러나 남순이 아버지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호탕한 성격에 방랑기(放浪氣)가 많아 농사일에는 별다른 흥미를 못 느꼈다. 그러던 중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투전(投錢)판에 빠져 노름으로 허송세월(虛送歲月)을 보내고 말았다.
그로 인해 곶감 빼먹듯 논을 한두 마지기씩 남의 손에 팔아넘기며 그도 모자라 논을 핑계로 동네 이집 저집에서 크고 작은 돈을 빌려 미친 듯이 노름을 하여 가산이 탕진되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살고 있던 집문서마저 종구네 아버지에게 잡히고 장리변(長利邊)을 내었다. 그리 울고불고하며 애원하듯 매달리는 남순이 어머니를 발길로 걷어차고 읍내 투전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불과 하룻밤만에 그 돈을 몽땅 날려버렸다. 추위가 살을 베듯 그리도 매서웠던 그해 겨울밤, 허탈(虛脫)한 마음에 술에 만취(漫醉)가 되어, 읍내에서 동네까지 십 리 정도 거리인 철길 따라 걸어오다 숨이 찼던지 철로 레일 위에 잠시 쉬어 가려고 걸터앉았다. 그런데 그만 올라오는 술기운에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칠흑(漆黑) 같이 어두웠던 밤 거침새없이 내달리는 화물열차(貨物列車)에 치어 처참한 모습으로 철로 둑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이튿날 아침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지서에 신고가 되었다. 연락을 받고 동네 어른들이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누가 덮어줬는지 뜯어진 헌 가마니 한 장이 시신 위에 덮혀 있었다. 그런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시신을 수습하여 동네 사람들이 나서 뒷산에 묻어 주었으니 그때 내 나이 겨우 여덟 살 나던 해 국민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그 후 세상 홀로된 과부 심정 과부가 안다고, 그런 엄청난 충격을 겪은 남순이 어머니가 늘 힘들고 마음이 상할 때나 그리고 심심찮게 종구네 아버지에게 빚 독촉을 당하고 나면 밤낮을 안 가리고 꼭 우리 집에 찾아와 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찌 보면 그 당시 들녘 논 서마지기를 아버지의 약값을 하려고 종구네 아버지에게 잡힌 우리 집 사정이나 남순네 사정이 거의 다를 바 없었다. 남순이 아버지가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세상을 등지자 더욱 바짝 졸라대는 종구 아버지에게 당장 집을 비워 줘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처해진 형편이 그렇다보니 두 분이 동변상련(同病相憐)에서 우러나오는 서로 간에 느끼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동네 어느 누구와의 사이보다도 더 가깝게 지내신 것 같았다.

연자방앗간 옆집에 사셨던 남순이 어머니가 빚에 견디다 못해 결국 집을 비워주고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고보니 이를 딱하게 여긴 동네 어른들이 이장님을 주축으로 하여 등메산 산기슭에 비어 있는 허름한 집에 우선 기거를 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그 오두막 집은 아주 오래 전부터 노인 한 분이 홀로 사셨다. 산에서 산나물을 뜯고 땔나무를 해서 읍내에 내다 팔고 사시다 전쟁이 맘춰 휴전이되던 그 이듬 해에 어디론가 지척없이 떠나셔 텅 비어 흉가가 된 집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오두막 집 앞에 있는 보리밭에 용천배기가 숨어 산다고 했다. 그래서 용천배기가 아이들을 붙잡아 간다고 하여 대낮에도 그 앞을 지나길 꺼려 했다.

그리고 그 오두막 집은 국유림 끝자락에서 불법으로 지은 집이었다. 그래서 면사무소 토지대장(土地臺帳)에 기록 한 줄이 없는 방 한 칸과 비좁은 부엌 하나 겨우 딸린 초가집이었다.

그렇듯 한 서린 삶을 살던 남순이 어머니가 동네 이집 저집에서 빚 받으러 찾아오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피는 달랐지만 친언니처럼 따랐던 어머니에게는 속을 드러내 놓고 솔직히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했다. 그래서 재산이라고 할 것도 없는 오두막 집과 땀으로 얼룩졌던 쪼가리 밭을 어머니에게 맡겼다.
세월이 지나 먼 훗날 억척스레 돈을 모으면 그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사람들에게 지은 빚 다 갚고 살겠노라며 새벽 찬 이슬을 맞고 동네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텅 비워 놓고 떠나버린 오두막 집에 우리가 그 뒤를 이어 살게 되었다.

감질(疳疾)나게 내리던 보슬비가 흙먼지 푸석이는 땅을 겨우 축이고 멈췄다. 길게 굽어진 다랭이밭 원두막 앞에는 동근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단단히 서두르신 듯 좁다란 밭길가에 세워놓은 지게 위에 겉옷을 벗어 놓으시고 며칠 전 순아네 소가 쟁기로 갈아 놓은 푸석푸석한 다랭이밭에 조금은 늦은 듯싶게 봄 씨앗을 뿌리셨다.

유달리 키가 작달막한 동근이 아버지도 긴박하게 변해가는 나라 사정을 이제는 절감(疳疾)하는 듯 싶었다. 그리 미련을 못 버리고 종구 아버지와 함께 매달렸던 기와공장에 대한 꿈을 버리신 것 같았다.

산 밑 자락 두릅나무 끝에는 새벽비에 몸이 간지러웠나? 나뭇가지 사이에 연녹색 어린 잎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오르막 언덕배기엔 불과 이삼 일전까지도 그리도 곱게 피었던 새하얀 벚꽃잎이 비에 조금씩 떨어져 흐트려졌다.

산 계곡 맑은 물 잘름거리는 도랑가에 닿으니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 도랑가 풀숲에서 작은 개구리 두서너 마리가 ‘탐방탐방’ 소리를 내며 성급하게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돌 틈새에 초록 이끼가 가득 낀 징검다리 돌에 속 알맹이가 여물지 않아 앙증스럽게 작은 고동들이 오글오글 달라붙어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허전하게만 바라보이는 원두막을 지나 꿉꿉한 땅에서 배어나는 황토 흙냄새가 콧속을 파고드는 사립짝을 들어섰다. 쪽마루 앞에 닿으니 언제나 일찍 읍네에 나가시려 차비를 서두시던 어머니께서 손에 밥사발을 들고 나를 보고 마시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릇 안을 들여다보니 짙은 푸른 물이 보여 조금 꺼림칙한 생각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순덕이 어머니게서 나를 생각하셔 뜯어 온 ‘어성초(魚腥草)’를 확돌에 넣고 찧어 삼베로 거른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몸에 좋은 것이니 꾹 참고 마시라며 재촉을 하셨다.

겨우 한 모금 마셔 비릿한 냄새가 역겨워 주춤거리는데 부엌문 앞에 서 있던 순덕이 어머니가 손을 입에 대고 자꾸만 마시라고 어눌하게 소릴 내며 손짓을 하셨다. 그리고 몸에 제일 좋다는 표현으로 엄지 손가락을 펼쳐 세우시기에 눈을 딱 감고 마셨는데 자꾸만 비위가 상해 속이 울렁거렸다.

산마루를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던 구름들이 하늘가 한쪽으로 물러서고 탁 트인 파란 하늘에 아침 햇살이 찬연한 빛으로 온 주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둔덕길 내려서 계곡물 건너니 키 작은 자작나무가 뒤엉킨 숲 사이로 모양새 좋은 반석 하나가 듬직하게 자릴 하고 있었다. 그 바위 위에 등줄기에 검은 줄무늬가 또렷한 다람쥐 한 마리가 뽀르르 반석 위에 올라 귀엽게 두 손을 부지런히 비비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희고 파란 꽃을 줄기에 애잔하게 매달 것 같은, 잎 모양이 가늘고 좁다란 부추처럼 생긴 맥문동(麥門冬)이 기다란 잎을 치렁치렁 늘어트리고 있었다.
다북하게 줄 늘어선 벼랑바위 앞엔 옥순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도 이제는 균형 있게 보이고 찹쌀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 새하얀 칼라가 투명한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희다 못해 파름하게 보였다. 그렇게 곤색 교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서 있는 옥순이의 모습이 퍽이나 귀엽게 보였다.

마른 먼지가 그리도 푸석이던 큰길가에 한 차례 내렸던 비로 걷기에 알맞을 만큼 땅이 젖어 배어나는 흙냄새가 상큼하기만했다.

덜컹대며 달리는 차창 밖으로 주홍색 아침 햇살이 올곧게 비췄다. 서쪽으로 기다랗게 뻗어난 신작로 양쪽 가장자리에 꽃잎이 시들어 가는 개나리꽃 넝쿨 너머로 들녘 장화리 동네의 작달막한 초가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와 더불어 푸른 가로수 따라 논가에 줄을 이어 서 있는 전신주에 전선들이 나른한 봄날씨 만큼이나 늘어져 있었다.

읍내 경찰서 앞에는 여느 날과는 달리 전투복에 총을 들고 경찰서 측백나무 울타리를 빙 돌아 에워싸고 있는 순경 여러 명이 보였다. 그 중 지휘관인 듯한 한 사람이 분주하게 손짓으로 지시를 하고 있어 무척이나 삼엄하게만 보였다.

읍내 버스 주차장에서 내려 역전쪽으로 걸어가는데 큰길가 뒷골목 제재소에서 들려오는 나무를 켜는 톱날 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들려와 소도시다운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두꺼운 강판으로 둘러싸인 높다란 역전 화물 창고 건물 위로 바라보이는 역 구내엔 연무대에서 들어온 기차에서 내뿜는 수증기 속에 석탄 냄새와 미세한 가루가 뒤섞여, 뭉글뭉글 부옇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침 통학 열차에서 내리는 남녀 중고교 학생들이, 좁다란 집찰구(集札口)를 통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로 인해 다소 활기가 도는 듯한 역 앞에는 하얀 긴 수염이 알맞게 자란 엿장수 할아버지의 엿목판이 보였다. 상하행선 열차에서 내리는 승객을 기다리는 시발택시 기사가 손님을 부르려고 목청껏 지르는 소리가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검은 콜타르칠을 한 루핑지붕이 바람에 날리지 마라고 넓적한 돌맹이를 얹어 놓고 사방 벽체를 합판 몇 장으로 덧대어 만든 가게가 허술한 모습으로 눈에 띠었다. 헌 구두를 수선하느라 알이 두툼하고 도수(度數)가 높은 안경을 콧잔등 위로 바짝 올려 쓰신 아저씨의 모습이 삶의 깊이 만큼이나 시름차게 보였다.

역 구내 하역장엔 일하시는 인부 몇 사람이 모여 진지한 표정으로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하게 보였다. 젓갈 시장으로 들어서는 황산동 길모퉁이에도 어른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어제 있었던 학생들의 데모와 유혈 사태에 대하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달랑달랑’ 방울 소리를 울리며 새우젓 동이을 가득 싣고 나오는 소달구지에서 비릿한 새우젓 냄새가 싫지 않을 만큼 사방으로 퍼져 났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도 이집 저집을 떠돌며 새우젓,조개젓을 팔러 다니시는 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무겁게 시려 왔다.
그 언젠가는 기필코 찰거머리 같이 달라붙은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꼭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날 4월 20일 나라 안 사정은 송요찬(宋堯讚) 계엄사령관이 내외신(內外信) 기자회견(記者會見)을 했다. 공권력(公權力)을 가진 모든 기관에 학생들에 대한 보복 행위를 일체 금지시켰다. 그런 다름 오후부터 KBS는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했다.

그리고 오후 7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의 안정을 하루 속히 되찾자는 요지의 특별(特別) 담화(談話)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등을 돌려 멀리 떠나버린 민심은 그리 쉽게 되돌아올 리 없어 그 말을 믿으려 하질 않았다. 온통 혼란스러운 나라 사정은 그리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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