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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04 조회 : 1,530




이른 봄부터 시작된 가뭄을 해갈(解渴)시키려나, 밤사이 촉촉하게 내린 단비에 온 산야(山野)가 푸르게 보였다. 회색빛 운무 속에 모든 산들이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것 같이 보여 금새라도 그 속에 푹 빠져들 것만 같았다.

실비에 젖어 더없이 푸르러 싱그러운 산자락에 하늘을 나는 새들의 날갯짓이 힘차 보였다. 바람에 묻어오는 황토 흙 내음도 한결 친숙하게 느껴졌다. 잔잔한 푸르름이 일렁이는 잔솔밭을 너머 산자락을 휘감아 내려오는 계곡엔 모처럼 만에 흠씬 내린 비로 불어난 물이 시원스럽게 흘러내려 마음속이 확 트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듯 내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자연 속에 적절한 조화를 이루니 그 은혜의 공간 안에 작은 내 몸뚱이도 함께 머물고 있었다.

다북다북한 푸른 소나무 가지 사이를 유유(悠悠)하게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비에 젖은 솔잎들의 잎끝(葉頭)에 매달린 물방울이 더는 힘겨운 듯 ‘툭툭툭툭’ 떨어지는 소나무 밑둥치에 푸른빛 이끼 실눈을 뜨고 있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멍감나무 줄기도 홀로 있기 외로웠나, 갈참나무에 넌지시 손 내밀어 부둥켜안으려는 모습 하나하나가 애틋해 보였다.

굽은 다랭이 밭둑으로 가볍게 내려서니 분홍빛 은은한 돌복숭아 꽃잎에 눈길이 쏠려 잠시인들 마음에 여유로움을 가지려 했다. 새치름하게 바라보이는 둔덕 너머에서 주일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귓전을 스쳐 지나 산골짜기에 두루 울려 퍼져 마음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먼동이 터 오면 부지런히 몸 뒤척여 아침 이슬을 털고 청초(淸楚)한 얼굴로 티 없이 다가서는 오붓한 산골의 그 모두를 다시금 눈 안에 욕심껏 담아 보고 싶었다.

적막(寂寞)한 산골짜기에 가슴 따뜻한 사람들의 발길이 유독스레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어디에선가 한줄기 바람이 몰고 오는 풀 향기가 상큼하기만 했다. 좁은 텃마당 느슨한 빨랫줄 위엔 새끼들을 키우려고 그리 반지런을 떠는지 검은 바탕의 등에 푸른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도는 제비가 앉아 있었다. 둥지 속에 있는 어린 새끼들을 위해 또 한차례 먹이를 구하려 들녘으로 세차게 날으려나, 쉴 새 없이 부리로 몸을 다듬어 그 또한 놓치기 싫은 정겨운 모습 중에 하나였다.

낮게 깔린 구름머리 위로 햇살이 함초롬히 비추었다. 텃밭 길섶엔 손톱 만큼 작은 노란꽃 애기똥풀이 오글오글 작은 무리를 이루고 뒤뜰 장독대 돌 틈새에는 도란도란 자라난 돌나물의 풀빛이 도드라져 보였다.

지난가을의 흔적들이 은은하게 남아 있는 텃밭 가장자리엔 바깥세상 일이 그리도 궁금했는지 강아지풀이 연초록 가녀린 목을 슬며시 내밀기 시작했다. 밭고랑 따라 삐뚤삐뚤하게 돋아난 어린 새싹들의 파릇함이 더없이 선연(嬋姸)하게 보여 눈길을 사로잡았다.

‘때때때때, 때때때때’ 시끄러운 새소리가 고요한 산골짝에 잔잔한 흐름을 깨는 듯 들렸다.

다랭이밭 가장자리 아카시아 나무에서 때까치 한 마리가 요란스레 울어 가까히 다가서 보니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새끼가 둥지에서 땅바닥 풀숲으로 떨어져 바둥대고 있었다.
큰 머리통을 힘들게 들고 노란 부리를 쫙 벌려 뛰뚱거리며 어미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어린 새끼와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어쩔 줄 몰라 날개가 찢어져라 애태우며 바동거리는 어미 새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럽게 보였다.

그래서 땅에 떨어져 어미를 향해 우짖는 어린 새끼를 조심스레 손 안에 보듬었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휘청거리는 감나무 가지에 위태(危殆)롭게 기어올라 겨우 둥지 속에 넣어 주고 나무에서 내려섰다. 그런데 둥지로 날아온 어미 새가 반가워하기는커녕 자꾸만 부리로 어린 새끼를 쪼아대고 있어 바라보는 마음이 몹시도 불안하여 어미 새가 화를 풀고 예전처럼 잘 보듬어 주길 바랐다.

잎줄기 더부룩한 보리밭이 부는 바람 따라 푸른 물결 일렁이는 들녘 너머 학교 측백나무 울타리에 같이 웃고 울었던 그리운 친구들의 얼굴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울타리 틈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교실 벽면에 지나간 날들의 추억들이 한 점 한 점 곱게 수놓아져 있었다.

함초롬히 내리쪼이는 햇살에 더욱 검푸르게 보이는 개울가 징검돌이 불어난 물에 묻힐 듯 말 듯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언덕배기에 무수히 떨어진 하얀 벚꽃의 꽃잎들이 바람에 나붓나붓 아쉬운 헤어짐의 몸짓을 하니 봄의 한 부분을 서서히 추스리려 하는 계절의 민감(敏感)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속 깊은 강물이 흔들림 없어 속내를 쉽사리 드러내질 않듯 언제나 동네에서 그리 말이 없으신 우현이 아버지가 못자리에 비료를 뿌리시려는 것 같았다. 방죽가 논둑에 받쳐 놓은 지게 발채에 비료 포대가 올려 있어 질빵과 등판의 볏짚이 닳고 닳아 반질거리는 만큼 삶에 찌든 냄새가 물씬 묻어나는 것 같았다. 우현이 아버지께서 아랫바지 뒤춤에 꽂아 두었던 곰방대를 꺼내 들고 쌈지에서 가루담배를 덜어 꾹꾹 눌러 담아 성냥갑에 성냥 알을 당겨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 계셨다.

마을 앞 나무다리에 올라 개울을 바라보니 꼬리 짧고 빛깔 고운 물총새 한 마리 매끄럽게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넉넉하게 줄을 매어 놓은 종구네 황소가 목이 탔는지 개울에 주둥이를 쭉 내밀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조금 떨어진 미루나무 밑에는 순아네 암소도 송아지 등을 이따금씩 핥아주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까까머리 우현이가 논에 참(站)을 내가는지 막걸리가 담긴 양은 주전자를 들고 좁다란 논둑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겨우내 편철(片鐵)을 쇠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려오던 담뱃대 만드는 금실이 누나네집에선 봄철이 되어 일거리가 뜸한가?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늘 낮게 떠 있는 뭉게구름이 여유롭게 머무는 길 모퉁이 초가집에 수숫대 바작이 둘러진 울타리 너머 마당가 앵두나무 앞에 금실이 누나가 머리를 감고 나와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를 얼레빗으로 빗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난기 많은 하얀 복슬강아지가 금순이 누나 옆에 바짝 달라붙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낮은 흙 담장 너머로 감나무 가지가 뻗어 있는 진식이네 집 사랑채 마루 위에는 상투를 튼 머리에 말총으로 만든 검은 탕건(宕巾)을 쓰신 진식이 할아버지와 마실 오신 기현이 할아버지가 놋쇠 재털이를 가운데 놓고 긴 장죽(長竹)에 연기를 뿜어내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마당 한쪽에는 진식이 아버지가 농사철에 쓸 농기구(農器具)들을 손질하는지 땅에 꽂힌 숫돌에 낫을 갈며 가끔씩 날이 잘 섰나 확인을 하시려 엄지손가락 안쪽 살을 낫날에 조심스레 대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햇살이 동네 안팎을 짯짯이 내려다보고 있는 고샅길 담벼락에 대여섯 살 남짓 되는 철부지 동네 꼬마 아이가 오줌이 그리도 급하게 마려웠는지 오고 가는 동네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고추를 내놓고 볼일을 보고 있어 조금 밉살스러워도 귀엽기만 했다.

그때 물동이를 이고 가시던 상수 어머니가 아이에게 한말씀 하셨다.

“야! 이놈아 동네 사람들 다니는 그기다가 오줌을 싸면 어쩐다냐, 찌린내가 옴팡지게 날 건디, 내가 저놈에 자식 꼬추를 따 버려야 쓰것구먼.”

그러자 아이가 놀란 토끼 눈으로 급한 마음에 괴춤도 못 올리고 어기적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상수네 어머니와 함께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동네 골목길 중간 쯤에 방앗간에서 발동기를 돌리시는 순태 아저씨네 집이 보였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사립짝 옆에 서 있는 살구나무 가지마다 꽃잎들이 허옇게 피어나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었다.
순태 아저씨가 집을 비워 동네에 마실을 가셨는가? 텅 빈 집 쪽마루 한쪽에 철사 줄로 동여매 흙을 담아 놓은 깨어진 질그릇이 보였다. 그 안에 곧게 서 있는 손바닥처럼 납작하게 생긴 백년초(선인장)가 외롭게 보였다. 그리고 마루에 몸을 오그려 졸고 있던 고양이가 선잠이 깬 듯 구부렸던 허리를 쭉 펴고 ‘야옹야옹’ 소리를 내며 마당으로 덥썩 뛰어내려 어디론가 줄달음쳤다.

누렇게 녹이 슨 방앗간 지붕 너머 높다란 가죽나무 둥지에는 어미 까치가 입에 먹이를 물고 날아와 옆에 있는 다른 가죽나무 가지에 잠시 내려앉아 주위를 살피려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성급한 어린 새끼들이 서로 먹이를 달라고 뒤척이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연자방앗간 공터에는 긴 겨울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 처음으로 동네를 찾아온 박하 엿장수 아저씨가 ‘철컥철컥’ 가위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어 엿 목판이 올려진 지게를 에워쌌다.

검정 기와집 종구네 마당에는 종구네 아버지가 이번 선거에 기대를 그리도 크게 걸었던 기와 공장 허가가 무산(霧散)되어 마음이 상했는지 주일날인데도 교회에 가지 않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하던 얼굴이 까슬까슬한 모습으로 변한 듯 보였다.

그런 와중에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종금이 누나네 밭을 사드린 것이었다. 그제 얼른 기와 공장을 지을 욕심에 제법 시세보다 비싸게 돈을 주고 사 놓은 밭 자락이 용도(用途)에 빗나가 우선은 별 쓸모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머슴살이를 하던 용만이가 자기 그늘을 벗어나 떠나고 말았으니 그 수많은 논밭도 주체하기 힘든데 또 하나 답갑지 않게 되어 버린 밭뙈기가 거추장스러운 혹처럼 붙고 말았다. 그로 인해 농사일만 늘어나게 되어 답답할 뿐이었다.

좁은 동네가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으로 서로 갈려 눈에 보이지 않게 다툼질을 하면서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가 끝났다. 종구 아버지가 밀었던 자유당이 힘들게 승리를 하여 감나무 밑에 돗자리 깔아 놓고 잘 익은 홍시감 떨어지길 바라고 있었는데 4.19 학생 의거(義擧)가 일어나 부풀었던 기대가 부질없는 한낱 춘몽(春夢)으로 끝이 나고 말았으니 종구 아버지의 마음이 허무하기 더할 나위 없는 터였다. 더욱이 자기 앞에 눈치나 슬슬 보던 동네 사람들이 이제는 세상이 뒤바뀐 듯 드문드문 빈정거리는 소리를 알게 모르게 하기 시작하니 그것 또한 강한 자존심(自尊心)에 받아들이기가 거북스러웠다.

그리고 동네에서 서로 부자라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홀아비 신세인 영택이 아버지는 운이 좋았던지? 중매(仲媒)가 잘 이루어져 새 살림에 깨가 쏟아지나 벌건 대낮부터 축음기를 크게 틀어놓고 즐겨 그것도 영 비위(脾胃)에 거슬리렸다.

중매를 서 준다고 온 동네를 그리도 설쳐 대며 난리를 떨던 방물장수 할머니는 종구 아버지에게 쌀 한 가마니만 뚝 따먹고 중매가 영 시원치 않아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온통 마음이 불편한데 주인 속 타는 줄 모르고 마당가 돼지 우리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꿰에엑 꽥에엑’ 소리를 지르며 보채는 돼지가 얄미웠던지 텅 빈 구유 속에 구정물 한 바가지를 쏟아 부으며 돼지 등짝을 우악스럽게 생긴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냅다 세게 후려치니 어떨결에 등짝을 얻어 맞은 돼지가 죽는다고 온 골목이 떠내려 갈 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대문 앞에 어설프게 보초를 서듯 어슬렁거리던 거위가 뒤뚱거리며 외양간 쪽으로 얼른 도망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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