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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05 조회 : 1,437




아침 해가 구름사이 어디론가 깊숙이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찌뿌듯하게 내려앉은 하늘엔 이른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질금질금 내리는 가랑비에 함초롬히 몸 적시는 저 산봉우리가 이내 하늘에 맞닿아 붙을 것만 같았다. 굽은 산릉선(山稜線)에 머뭇거리는 먹구름이 저 산마저 가리려 심술(心術)을 부리나, 퍽이나 둔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떨구지도 못한 가난이 등짝에 억척스레 달라붙은 우리네의 고된 삶처럼 몰려드는 검은 구름이 매몰찬 모습으로 산자락에 끈질기게 철썩 들러붙으려 했다. 그리고 눈에 익숙해진 산자락 구석구석의 탐스런 모습을 한 점 한 점지워가니 그런 모습을 바라보기가 답답했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집안에 우산이라고 겨우 지우산(紙雨傘) 하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늘 나보다 한 걸음 앞서 장삿길에 나서는 어머니가 가랑비를 맞으시며 나서려 하시기에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다.

“엄니 비 맞지 말고 우산 쓰고 가, 난 얼른 뛰어서 가면 되닌께.”

그러자 똬리를 머리에 얹으시던 어머니께서 나를 힐끔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너도 참 그렇다. 내가 한 손으로 옹기 쥐고 또 한 손으로 우산 바칠 수 있냐? 안 그래? 그러닌께 너나 비 맞지 말고 쓰고 가, 공연히 비싼 돈 주고 맞춘 교복 다 젖을라.”

그렇게 내 말문을 서둘러 가로 막고 비를 맞으시며 장사를 나서려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엄니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은 좀 하루쯤 쉬면 좋을 건데.”

그러자 머리에 옹기를 이시던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고 빙긋이 웃으시며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팔자 좋아 늘쩡하게 쉴 수가 있냐? 곧 여름 장마도 들어 닥칠건데, 그나마 날이 이만저만 할 때 바짝 서둘러 벌어야, 보리쌀 두어 가마니 하고 감자라도 몇 자루 챙겨, 우리 네 식구 올여름 굶지 않고 나지 안 그러냐? 에휴.”

어머니께서는 쪽마루에 발을 동동 구르며 같이 가자고 달라붙으려는 순덕이 머리를 쓰다듬으시고 가랑비를 이슬처럼 맞으시며 밭둑을 걸어가시는 어머니의 검은 몸뻬 색깔이 축 가라앉아 무거운 아픔 만큼이나 더욱 검게만 보였다.

내리는 빗줄기 사이를 헤집고 간간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오는 풀 내음이 더없이 상큼해 일년 사계절 계절따라 부는 바람이 주는 느낌이 각기 다른 듯 싶었다. 산자락 밑 초가지붕 사이로 바라보이는 교회 십자가의 모습이 말쑥하게 보였다. 조금은 먼 곳으로 고향을 떠나버린 석란이의 새침스런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무엇이라 딱 꼬집어 표현키 어려운 숱한 감정들로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만 했다.

빗물이 새어들지 말라고 매우 질기고 투명한 닥종이에 두텁게 니스 칠을 한 지우산(紙雨傘)을 챙겨 들고 사립짝을 나섰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질금거리던 비가 멈추려 했다. 그러자 자욱한 물안개가 산등성을 에워싸고 산 밑자락 마을로 서서히 몸을 틀어 내려서고 있었다.

그렇게 비가 내리는 둥 마는 둥 변덕(變德)을 부려 지우산을 들고 가야 할까 ? 어쩔까? 몇 번을 망설였다. 그러다 귀찮은 마음이 앞서 그냥 책가방을 옆에 끼고 밭둑으로 내려섰다.
날씨가 우중충한데도 부지런한 제비들은 날쌘 몸짓으로 하늘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추녀 밑에 반원(半圓)으로 지어 놓은 흙집 안에 노란 부리를 쩍 벌리고 어미를 애태워 기다리는 어린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찾으러 분주히 날고 있었다.

동구 밖 큰길가엔 읍내 장에 가려는 동네 어른들 몇 분의 모습이 보였다. 지게를 걸머지고 지겟작대기를 들고 걸어가시는 경수 아저씨와 민균이 아버지가 장날에 내다 팔려고 망태기 안에 젖을 뗀 돼지 새끼 두어 마리를 담고 가시는 것 같았다. 갑자기 어미 곁을 떠나 온통 불안한지 자꾸만 꿀꿀거리는 소리가 조금 떨어진 밭둑까지 들려왔다.

초여름의 상징처럼 푸른 잎 사이에 하얀 꽃을 다닥다닥 피워 달달한 꽃향기를 사위(四圍)에 은은하게 퍼트릴 아카시아 나무가 우뚝 서 있는 봉긋한 언덕마루에서 불어오는 선드러진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 바람은 훈기가 가득했던 봄바람과는 달리 비릿한 풀 내음이 비에 젖어 물씬 묻어나 코끝에 가득 차 올랐다. 무릇 계절은 봄의 끝 자락을 털고 초여름의 문턱을 서성거리는 듯했다.

허연 한 자락 그리움이 뭉실뭉실 떠도는 발길 끊긴 산골에 구름만 처연하게 홀로 스쳐 가니 적적하기 더할 나위없었다. 회색 운무(雲霧) 낮게 깔린 계곡엔 조약돌을 어깨동무한 계곡물이 목청을 돋아 온 산의 침묵을 깨트리며 흐르고 있었다.

눈앞에 빤히 바라보이는 둔덕에는 투명한 빗물방울이 풀잎 끝마다 대롱거렸다. 풀숲에 놓인 바윗돌에 착 들러붙은 푸른 이끼가 가슴을 할딱여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느물거리는 달팽이 한 마리 희끄무레한 더듬이를 치켜들어 조심스레 나무 등걸 위로 기어 오르는 모습이 눈에 언뜻 띄었다. 

비를 피하려 갈참나무 숲으로 산까치가 날렵하게 날아들어 위아래로 꼬리를 촐싹거리며 좁다랗게 트여진 오솔길을 똘방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돌 틈사이에 마사토(磨沙土)가 두툼하게 깔린 계곡을 지나 벼랑바위 앞에 닿으니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검정 헝겊 우산을 펼쳐 든 옥순이가 장터에 가는 마을 어른들 틈에 끼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오리 길 논산 읍네 장터를 철로 길 따라 걸어가시려는 민균이 아버지가 곰방대를 뻐끔뻐끔 빨며 말씀을 하셨다.

“아따! 뭔 놈에 날씨가 이런가 모르것네 그려. 비가 올라면 한바탕 시원하게 퍼붓지 않고 감질나게 찔끔찔끔거리다 말어. 꼭 호랭이 장가 드는 것 같구먼 그려, 비라고 내리는 꼬락서니가 새살맞게 요랬다 저랬다 하는 뺑덕에미를 꼭 빼닮았네. 그나저나 어찌저찌 좀 팔아 볼까 하고 돼지새끼를 들고 나왔는디, 날이 요렇게 궂어서 장이나 제대로 설라나 모르건네 그려.”

그러자 옆에 함께 걸어가시던 경수 아저씨가 말을 거드셨다.

“성님! 비가 오락가락해서 좀 그렇긴해도 아무려면 장이사 안 설까유? 오히려 이런 날이 장은 더 크게 서더라고유. 너나 할 것 없이 집에 틀어박혀 있자니 싱숭증은 나고 장바닥이 궁금해서 다들 기웃거리려 나오더라구유. 그건 그렇고 오늘 돼지 금새가 잘 나와야 성님한티 선지국에 탁배기 한 사발이라도 얻어 먹을 건디.”

두 어른들이 말씀을 나누시는데 볏짚 망태기 안에 담긴 돼지 새끼 두 마리가 허연 거품을 망태기 틈사이로 내며 계속 ‘꿀꿀’ 거렸다. 그러자 신경이 쓰이시는지 민균이 아버지께서 망태기를 가볍게 두드리시며 다시 말씀하셨다.

“아! 동생 말대로 돼지 금새만 잘 나오면야 그까짓 거 탁배기 한 사발이 뭐 그리 대단헌거라구 못 사것는가? 그나저나 날씨가 돼지 팔릴 동안은 끝까지 좋아야 할 텐디, 등화동 산날맹이가 실실 벗겨지는 것 보닌께 날이 들기는 할 모양이구먼.”

면소재지 지서 앞 철길 건널목에 올랐다. 동네 어른들은 철로 가장자리 길따라 걸어가시고, 나와 옥순이는 지서 앞을 지나 들주막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 무렵 시대적 상황은 이제 이승만 자유당 정부가 완전히 붕괴(崩壞)되어 허정이 이끄는 과도 정부가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도기(過渡期)였기에 사회 전반에 큰 변화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억눌렸던 민초들의 울분이 구석구석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때론 과격할 정도로 여과되지 않은 욕구를 말과 행동으로 표출하여 어수선하기만 한 시국은 작은 시골 면소재지 지서의 분위기도 크게 위축시켜 놓았다.

며칠 전 동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면소재지 지서에 근무하는 몇 해 동안 그리도 극성스럽게 온 사방을 설쳐대며 악발이라고 소문이났던 지서 차석이 세상이 바뀌어 돌아가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걸렸는지 약삭 빠르게 몸단속을 하려나 서둘러 다른 곳으로 전출 신청을 하여 떠난다고 했다.

그런데 지서 건물 사택 앞에 앞머리가 툭 튀어나온 트럭이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트럭 주변애는 장농짝이며 이불 보따리와 솥단지 그리고 자전거와 석유곤로 등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도 지서 차석이 이사를 하는 듯해 보였다.

세월 좋아 서슬이 퍼럴 때는 오지 말라고 말려도 사람들이 차석에게 잘 보이려고 달려들어 이삿짐을 옮겨 주었을 건데 그동안 한두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어 누구 한 사람 들여다보질 않았다.
그저 미우나 고우나 옆집에 살았다는 남은 정으로 겨우 약방집 아저씨 한 분만 거들고 있어 바라보기에 무엇인가 허무하기도 했다.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지서 주임으로 근무했던 석란이 아버지도 진급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 차석 못지않게 냉정하게 굴었다. 그분 역시도 인심을 잃어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는데, 내 친구 새침떼기 석란이가 연관되어 조금은 조심스레 걱정이 되었다.

뾰족뾰족하게 뻗어난 가시에 파란 잎들이 싱그럽게 보이는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로 들주막 이 보였다. 그리고 가게 유리창 칸마다 ‘막걸이, 소주, 담배, 풍년초’라고 주인 아저씨가 서툰 글 솜씨로 써 놓은 듯한 종이 조각이 붙어 있었다.

주막집 정류장엔 땅에 닿을 듯 쭉쭉 늘어진 버드나무 잎사귀에 내려앉아 쌓였던 흙먼지가 빗물에 씻겨 내려 푸르름을 되찾아 한층 돋보였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버드나무 가지를 살며시 흔들고 있었다.

강경 읍내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우리나라 3대 상권의 중심지였던 영향의 탓인지 작은 일본식 목조 다다미식 건물이 읍내 곳곳에 유난스럽게 많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분주하게 각자의 학교로 가는 기다랗게 늘어선 자전거의 행렬이 그리 활기차게 보였다. 그리고 달구지를 몰고 가는 두툼하게 살이 오른 소 엉덩이에 쇠똥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조금은 우습게도 보였다.

읍내 중심부 시내 분위기는 외형상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는 듯해 보였다. 장날 대목을 보려나 이른 아침부터 역 앞 공터에 들어온 ‘써커스단’의 요란한 밴드 소리가 읍내 하늘 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 친구 성구란 놈은 자기 누나인 성자와 함께 밤에 써커스 구경을 가서 이것저것 신바람 나고 아슬아슬한 묘기들을 재미있게 보았다고 한참 동안 너스레를 떨며 자랑을 늘어 놓았다.

지난 국민학교 시절 같은 반 개구쟁이 응선이가 써커스단 구경을 가서 눈으로 직접 보았다며 교실 안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원숭이 똥구멍은 진짜로 빨갛다.’고 자랑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 역시 가득 차 오는 호기심에 꼭 한 번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낮 시간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느라 못 가고 밤에는 아예 꿈도 못 꾸니 그저 아쉬움 속에 작은 욕심 하나 마저 접어야 했다. 그로 인해 또 한 번 낙후된 시골살이를 절감(切感)할 수밖에 없었다.

황산동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섰다. 성구네 집에 가려고 곧장 나와 사거리를 지나 역전쪽으로 가려는데 길모퉁이 정육점 앞에 사람들이 가득하게 몰려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얼굴이 조금 우직하게 생긴 정육점 아저씨와 한쪽 다리가 절반쯤 잘려 팔 겨드랑이 양쪽에 노란 칠을 한 의족을 딛고 서 있는 아저씨와 또 다른 한 분은 한쪽 팔이 잘려 나간 끝에 쇠 갈쿠리를 한 상이용사(傷痍勇士)라고 하는 두 분이 다투고 있었다. 먹고살려고 하니 도와달라며 손에 들고 있는 양초갑을 사 달라고 사정을 하자 하루에도 그런 투로 장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며 냉정하게 거절하는 정육점 아저씨와 심한 욕설이 오가며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사이 누가 신고를 하였는지 역전 파출소에서 순경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러나 달려 온 순경이 그저 양쪽 눈치만 슬슬 살필 뿐 예전처럼 힘차게 제압(制壓)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 상이용사 아저씨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전란(戰亂)으로 돌아가신 내 아버지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숙달(熟達)되어 가는 아픔 만큼이나 번뜩거리는 쇠 갈쿠리를 달고 그리라도 살아 보려고 발버둥 치는 그분들의 입장이나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 정육점 아저씨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같은 쇠 갈쿠리면서도 정육점에 피둥피둥한 살코기가 덩어리째 매달린 갈쿠리는 그 여유로움에 왠지 모르게 작은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 모습을 구경거리 삼아 그저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그런 사태를 겉으로만 좋게 하라고 말을 하며 은근히 몸을 사리는 순경 모습 모두가 다 답답하기만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제는 같은 반 급우 오십여 명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교실 안에 모여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하루 일과 중 첫 번째 교무실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아침 조회 시간이 되자 담임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훈련을 받았던 학도호국단 교련이 정부의 방침에 따라 완전 폐지되었다. 그리고 학도호국단 의 명칭을 학생회로 개칭(改稱)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지긋지긋하던 고된 훈련속에 어쩌다 오와 열이 틀려 받아야 하는 호된 기합(氣合)에서 벗어난다는 자유로움에 모두 큰소리를 내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정부는 학생들이 요구하는 학생자치활동에 요구를 받아들여 1960년 5월10일을 기해 대통령령으로 학도호국단 제도를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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