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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07 조회 : 1,419




숙연(肅然)한 아침 해가 파름한 동녘 하늘을 가르며 벌그스름한 얼굴로 떠 올랐다. 그 온유한 빛의 힘으로 물안개 가득 서린 산봉우리들이 서서히 제모습을 차분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찬연하게 빛나는 아침 해가 앞산 능선 소릿재 봉우리를 사르르 디디고, 시원스레 탁 트인 들녘을 단숨에 달려 빠른 걸음으로 산골짜기에 성큼 내려섰다.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앞산의 깊고 깊은 심지(心志)에 이끌려, 한 덩이 애틋함이 내 어린 가슴에 의미 깊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무릇 저 산과 나는 일찍부터 하나의 굳은 연(緣)으로 맺어진 듯했다. 그로 인해 내리뻗은 산자락의 초연(超然)한 모습에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장엄한 저 빛에 온몸을 가다듬고, 곰살맞게 애틋한 고향 흙바닥에 이리도 포근하게 발붙임을 할 수 있게 해 준 은혜로운 하늘에, 어제처럼 오늘도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싶었다

너른 들녘 보리밭엔 한동안 희슥하게 떠돌던 아침 안개가, 웅크렸던 똬리를 풀고 서서히 하늘로 오르며 실실히 흐트러졌다. 그렇듯 내 둘레에 펼쳐 있는 온갖 사물들이 한 점 한 점 탐스럽게 돋보였다.

다가오는 계절의 징표인양, 조금은 멀찍하게 떨어진 둔덕마루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얀 아카시아 꽃이 꽤나 담숙하게 보였다.

이마를 서로 맞대고 납작 엎딘 동네 초가지붕 위로 아슴아슴 아침 연기 피오르면, 윤기 반지르르하게 도는 송아지가 어미 꼬리 끝을 따라 냇둑으로 향했다. 그에 뒤질새라 검은 염소들도 뒤를 따라 종종걸음 했다.

그맘때쯤이면 등마루 잔등을 너머선 아침 첫차 햇살 가득 내리쬐는 들녘을 가르며 유유히 남쪽으로 내달렸다.

검은 연기 잔뜩 그을린 좁다란 부엌에선 순덕이 어머니가 아침 밥을 차리느라 분주해 보였다. 언제나 아침밥을 가마솥에 안칠 때는 내 도시락과 재롱둥이 순덕이 밥 때문에, 솥 가운데에 쌀을 한 움큼 조심스레 넣고 밥을 지으셨다.

어쩌다 도시락 안의 밥에 보리밥 알이 묻어 들어가면, 떼어 내시려 신경을 써주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고마우면서도 미안스럽기만 했다. 그렇듯 작은 것 하나라도 자상하게 챙겨주시려는 그 분의 깊은 심덕(心德)에서, 우러나는 정이 달달하게 잘 고아진 조청처럼 끈적끈적하게 묻어났다

삶의 때 잔뜩 찌든 드문드문 칠이 벗겨진 개다리소반 위에,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가, 작은 툭배기 안에 소담스레 담겨 있었다. 오글오글한 보리가 절반도 휠씬 넘게 섞인 뜨거운 밥에, 텃밭에서 갓 솎아 온 동실동실한 여린 배추 이파리와, 순덕이 어머니가 캐 오신 싱싱한 달래를 넣어 고루 섞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노란 밥숟갈에 야박스레 아주 조금 따라 주시는 참기름에, 석석 비벼 밥그릇을 얼른 비웠다.

대추나무 아래 어미 닭들이 파 놓은 흙구덩이에 어린 병아리들이 들락날락하는 마당으로 나서, 무심코 읍내 쪽을 바라보았다.
녹색 긴 천자락을 늘어 놓은 것처럼 클로버가, 띠를 길게 두르고 옹기종기 속삭이는 금강 둑이, 그 끝을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푸른 모습으로 보였다. 둑과 맞닿은 듯하게 보이는 하늘엔 작은 조개구름들이 다정스레 노닐고 있었다. 그런 하늘 아래 언제나 변함없이 젓갈 장사 나가시는 내 어머니가, 구부러진 밭둑길 따라 주막집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하고 계셨다.

면소재지로 이어진 오르막 비탈길엔, 아침 햇살 등 뒤에 듬뿍 받고 소달구지 몰고 가는 촌로(村老)의 손끝에 여유로움이 넉넉히 묻어났다.

흙먼지 푸석이는 텃마루 댓돌 위엔, 닳아 해진 고무신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겨우 솜털을 벗어나 천지 분간을 못하는 어린 병아리들의 배설물이, 신발 군데군데에 묻어나 있었다.

아침이면 햇살은 재 너머 함박골로부터 머릴 치켜들어 이슬 흠뻑 젖은 능선에 부딪쳤다. 그 반사된 빛으로 산자락에 곱살스런 퍼즐로 남겼다. 그리고 단숨에 산을 내려선 해는 온종일 들녘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느긋하게 머물다가, 해걸음녘엔 읍내로 느릿 걸음 했다.

언제나 정겹게 한눈에 바라보이는 작은 마을 들메, 한가로운 일요일답게 좁다란 골목길에서 노는 동네 꼬마 아이들의 모습이 조금은 부산스레 보였다. 세월이 삼켜버린 내 어렸을 적 코흘리개 시절, 오롯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해진 옷소매 끝의 때처럼 가슴속 깊이 반질반질 묻어났다. 그런 티없는 기억들을 저 하늘도 한번쯤 기억해주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동네 우물가에 물을 길러 물지게를 지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봄철에 눈길을 놓친 고사리들이 넓적한 이파리를 달고 있는 언덕배기에 올랐다. 제법 따가워진 오월의 햇살이 영롱한 모습으로 나뭇잎 사이를 비집었다. 그와 더불어 선들거리게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오는 아카시아 꽃향기가 잠시일지라도 발길을 붙들었다.

언덕 아래 다랑논에 키가 허리춤 정도로 자란 보리밭엔, 알이 덜 영근 풋보리가 머리를 하늘로 곧게 뻗어 바람결에 연초록 물결을 잔잔하게 이루었다.

방죽가 앞 큰길가에는, 때 묻어 낡은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쓰고, 행색(行色)이 남루하기 그지없는 나이 드신 걸인 한 분의 모습이 보였다. 축 처진 어깨에 행낭(行囊)을 걸머지시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구걸을 하려고, 동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둥구나무 밑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놀던 철부지 꼬맹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야! 저기 으덩박씨 온다.”

그러면서 그분 앞으로 우루루 몰려왔다. 그리고 저마다 손가락질을 하며 키득거렸다. 그런 모습이 보기에 언짢아, 아이들을 향해 큰소리를 쳐서 억지로 동네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그분께서 수심 가득 차 부시시한 얼굴에, 가볍게 웃음을 띄우시며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저 당연히 할일을 한 것뿐인데 하는 생각에, 나이 많으신 분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퍽이나 부담스러웠다.

세상살이 그리도 부담스럽고 처절했는지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은신 듯, 가볍게 흔들거리는 지팡이를 손안에 꼭 움켜쥐신 손톱에 낀 검은 때가, 골 패인 얼굴의 주름살 만큼이나 안쓰럽게 보였다.

허나 섣불리 그분의 삶에 대하여 섣부른 동정을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것 같았다. 아무런 힘이 없어 제대로 돕지도 못하는 내 자신의, 불필요한 우월감처럼 보일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더 이상 깊이 그분의 삶에 대하여 헝클어진 속알맹이들을 어렴풋하게라도 상상해 보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그 것은, 내 어렸을 적 동네 형들에게 당했던 수모와, 내 동생 순덕이의 기억하기 싫은 뼈 아픈 지난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더 이상은 그 노인에게 눈길을 모으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그렇게 하는 것 만이 힘없는 내 자신dml 마음이 훨씬 편해질 것만 같았다.

골목길 입구 상수네 텃밭에는, 예쁘게 줄을 맞춰 마늘들이 푸른 잎을 삐죽삐죽 내밀고, 밭을 째어 두 자락 심어 놓은 감자 밭엔, 오골오골한 꽃망울이 곧 피어날 것처럼 보였다.

그때 ‘찌르릉찌르릉’ 방울을 울리며 가죽 안장 위에 엉덩이를 조금 치켜들어 자전거를 몰고 오는 종구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한마디 말없이 냉정하게 스쳐 지나 마음으로 느껴 오는 거리감이 퍽이나 컸었다.

연자방앗간 공터엔 동네 어른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한동안 병역기피를 하여 전국을 떠돌다, 지난 늦가을 어느 날 자수를 하여 군에 재입대를 한 종식이 형이 첫 휴가를 나온 듯, 이등병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고 있었다.

어린 자식이 그리 보고 싶었던지 품 안에 바짝 끌어안고, 동네 어른들께 고루 인사를 드리고 어른들은 반가운 모습으로 인사를 받으셨다. 나 또한 너무도 오랫만에 보는 만가운 얼굴이라 가까이 다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검게 그을린 믿음직스런 종식이 형의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부듯해졌다.

기성이 형 어머니께서는 종식이 형의 그런 의젓한 모습이 몹시도 부러우신 것처럼 보였다.집을 나가 멀리 떠나버린 기성이 형이 그리우셨는지, 사립짝 앞에 나오셔 소달구지 길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리고 옆 사람들의 귀에 들릴 정도로 한숨을 크게 내쉬며 헛간으로 들어가셔 애꿎게 벽에 걸린 호미를 꺼내 드셨다. 그리고 덜 익은 매실이 탱글탱글 푸룻하게 매달린 매실나무 앞을 지나, 이제 겨우 꼬투리에 알이 자리를 잡으려 하는 뜰 앞 완두콩 밭으로 향하셨다.

기와집 종구네 마당에는, 종구네 아버지가 담 너머로 휴가 나온 종식이 형을 힐끔힐끔 바라보시며 펌프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눌러 물을 품고 계셨다. 아마도 동네 우물보다 몇 배 깊은 땅속에서 올라오는 물이라 더 시원할 것 같았다.

등 굽은 푸른 향나무 두 그루가 반갑게 눈인사를 하는 동네 우물가에 닿았다. 아주머니 두 분이 채소거리를 씻으며 이야기를 나누셨다. 파란 미나리 줄기와 왕골들이 제법 무성한 미나리꽝엔 인식이네 오리 두 마리가 진흙 속을 헤집어 지렁이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오리들의몸뚱아리 군데군데에 진흙이 묻어난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동네 우물가 맞은편 종기형네 집 담 너머 앵두나무에는, 아직은 덜 익어 잎인지 열매인지 잘 구별키 어려운 탱글탱글한 앵두 알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옥순이네 집 벌겋게 녹슨 함석 대문 옆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감나무 가지마다 감꽃이 연노랗게 피어났다.

기억의 실타래가 풀리듯 지난날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옥순이 어머니가 읍네 장터에 가셔 집을 비우게 되면, 옥순이와 나는 하얀 무명실을 뚝 잘라 그 실의 끝에서 끝까지 튀밥처럼 생긴 옅은 노란 감꽃을 정성스레 끼워 목걸이와 반지 그리고 팔찌도 만들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 감나무 아래 가마니를 깔아 놓았다. 고운 흙가루로 밥을 하고 풀을 뜯어 나물을 만들어 조개껍데기 몇 개 주워다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과 부끄럼 없이 나는 신랑을 하고 옥순이는 각시가 되었다.

언젠가 동네 잔칫날에 눈여겨보았던 혼례식을 서툴게 흉내 내었다. 두 손을 이마에 모아 서로 바라보며 맞절을 한답시고 구부리다가 벌러덩 뒹굴어 깔깔대고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놀았다.

어쩜 그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스럼없이 그런 놀이도 곧잘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도저히 그런 짓을 할 용기가 손톱만큼도 나질 않았다.

며칠 전 읍내 역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석란이의 얼굴을 보고, 마냥 설레였던 마음처럼 왠지 모를 부자연스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듯이 복잡한 의미가 담긴 부끄러움이 자꾸 앞서기만 하니, 우리 모두가 조금씩 성숙되어 가는 과정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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