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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08 조회 : 1,534




납작납작하게 엎드린 초가지붕 사이로 가죽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우듬지에 뭉게구름이 포실포실하게 피어올라 곱살하게 어른거렸다. 그 위에 드넓게 펼쳐진 연한 남색 하늘이 유난스레 높게만 보였다.

짯짯이 들이비치는 햇살에 거머누릿한 담갈색 가죽나무 잎들이 야물닥지게 들붙어 있었다. 그 가지 사이에 위태롭게 둥지를 튼 까치가 모처럼만에 ‘쿵쿵쿵쿵’ 방앗간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에 꽤나 신경이 쓰이는 듯하게 보였다. 부지런히 꼬리를 들썩이며 좌우를 살펴 둥지 안에 있는 어린 새기들을 자상(仔詳)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앗간을 들락날락하는 종구 아버지의 발 빠른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벼 방아를 찧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병수네 아버지가 동네 밖으로 볼일을 보러 가려는지 고샅길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 즐겨 마시던 술도 이제는 자제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이참에 큰맘먹고 읍내 양복점에서 곤색 양복도 한 벌 마춰 입고 말쑥한 차림에 머리엔 포마드 기름을 발라 햇살에 비친 머리가 번지르르했다. 그리고 골목길을 오가며 마주치는 동네 어른들과 예전과는 사뭇 달리 환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활기차게 보였다. 그렇게 세상 변한 모습의 여파(餘波)가 작은 동네에도 여실하게 느껴졌다. 동네 떠도는 입소문에 의하면 병수 아버지께서 이번에 면의회 의장에 출마를 한다고 했다.

만일 선거에 당선이라도 되면 아주 작은 기초단체의 의회지만 의장 자리에 앉게 되니 일약(一躍) 면내 유지가 됨은 물론, 삼십여 가구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동네에 모처럼 만에 인물 하나가 나오게 되는 것이었다.

그 서슬 퍼렇던 자유당 그늘 아래서 선거 때만 되면 ‘요시찰(要視察)’ 딱지를 달고 온갖 수모를 당하며 살아온 맺힌 한을 이제서야 풀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종구 아버지의 눈에는 병수 아버지의 활기찬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런 터에 딸자식이 동네 기성이 형과 같이 집을 뛰쳐나가 근 반년이 넘도록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으니,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그도 핏붙이라 은연중 걱정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전쟁 통에 온갖 횡포를 그리 부려 남들이사 뭐라 손가락질해도 단 하나뿐인 동생이 ‘반공법’으로 장기수가 되어 기약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니 참으로 가슴이 답답한 일이었다.

더불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가 집을 비운지 겨우 한 해가 지났건만 텅 빈 집이 그리도 적적하였나, 수다스러운 방물장수 할매에게 고래 힘줄 같은 쌀 한 가마니를 주고 부탁한 중매도 영 시원치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의지가지인 아들 자식이 변변치 못한 실력에 중학교 입학도 남들 자식처럼 수월하게 합격도 못하고 겨우 보궐로 입학을 하였으니, 동네 사람 누가 알까 부끄러워 그래저래 낙이라고 붙일 곳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시세보다 엄청 비싸게 사 들인 밭에 기와공장를 짖는 일도 이젠 물 건너갔으니 가뜩이나 많은 농사에 일거리만 늘어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그래도 자기 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머슴살이 하던 용만이가 은근히 아쉬워질 것 같았다.

그렇듯 매사가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자 마음에 치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교회에 나간 후로는 한동안 안 피우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날로 부각되는 병수 아버지 모습을 바라보시기에 영 떨떠름하신지 한차례 헛기침을 크게 하시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아니꼽살스레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렸다. 그리고 발로 우직하게 비벼 끄신 후 병수 아버지와 서로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었는지 서둘러 방앗간 안으로 들어갔다.

밑바닥이 휜히 들여다보일 듯 흐르는 맑은 물결에 물풀들이 나불나불하는 개울가엔 검정 실잠자리가 보일 락 말 락 하는 아주 가는 꼬리를 바르르 떨며 물가 풀 잎사귀에 사르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목덜미에 달린 워낭이 이따금씩 ‘달랑달랑’ 소리를 내었다.

냇가 나무다리에는 광다리에 사는 인삼 장수 아주머니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워 온 외동딸이 동네 종식이 형과 바람이나 처녀 몸으로 아이를 가져 온 사방에 소문이 퍼지자 부끄럽게 집안 망신을 시킨다고 펄쩍 뛰면서 머리를 싸매고 그리도 억세게 반대를 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이른 봄날 새벽녘에 자기 딸이 종식이 형과 함께 새벽 첫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자 한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을 몰라 속앓이를 했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영 다른 환한 모습으로 동네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젠 손주까지 낳아 싫든 좋든 사위가 되버린 종식이 형이 군 생활 중에 휴가를 나와 얼굴을 보려고 오는 것 같았다. 자꾸만 아래로 내려오는 긴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추스려 움켜쥐고 걸어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게 보였다.

울타리 밖의 좁다란 밭고랑 따라 심어 놓은 감자 밭에 흥남이 아저씨 두 내외분이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시며 밭에 돋아난 풀을 뽑고 계셨다.
그런 모습이 마냥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과 한데 어울려 푸른 하늘 아래 그리 평온하게 보였다.

방죽가 흙구덩이 안에 방금 낳은 듯 하얀 오리알 서너 개가 햇살에 더욱 하얗게 보였다. 마치 ‘눈도 코도 없는 것 낳았다.’ 하면서 알려 주려나, 목을 길게 쳐들어 ‘꽤엑꽤엑, 꽤엑꽤엑’ 소리를 거푸 지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수없이 오르내린 열차 바퀴에 잘 닳아 하얗게 반들거리는 레일이 크로버 꽃길 따라 곧게 늘어서 있었다.

철길을 건너 가파른 언덕배기에 멈춰 섰다. 두 어깨가 뻐근해 오는 아픔을 가누려고 물지게를 벗어 놓고 몇 해 전에 베어낸 그루터기에 덥석 걸터앉아 푸르름이 온통 가득 차오르는 너른 앞 들녘을 바라보았다. 물지게를 지고 오느라 잔뜩 구부렸던 몸을 확 펴면서 숨을 크게 내쉬니 속이 시원하게 트이는 것 같았다.

아물아물하게 보이는 서편 하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이젠 눈 앞에 친숙하게 다가서는 읍내 건물들이 그다지 서먹하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리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노라니 다시금 내자신을 뒤돌아 보며 앞으로 전개될 삶에 대한 생각을 해 볼수 있었다.

헌법에 따라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자유민이 공민(公民)이라 하는데 그 근간을 이루는 평등권이 우리 모두에게 균등하게 부여되어 있음을 뒤늦게라도 공민교육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허나 내 앞에 처해진 사회적인 현실은 그런 논리와는 너무도 다르게 동떨어져 있었다.

삶의 형질를 이루는 빈부의 차이가 하늘이 내려준 숙명 내지는 타고난 복이라고 생각하며 거의 체념적으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에 대한 무지함이 억울하기만 했다. 그로 인해 모든 사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새로운 각도에서 구도를 그리며 다시금 조명되기 시작하니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일제 강점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에 가슴 터지도록 설렜던 환희가 온 누리에 퍼지던 그해 늦가을, 나는 산 밑 마을 작은 촌락(村落)에서 두 주먹을 발끈 쥐고 세상 밖으로 첫울음을 터트려 탯줄을 끊었다.

그런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주변 세계열강(世界列强)들의 손익계산에 따라 급변하는 소용돌이 속에 알맹이가 채 여물지도 못한 이념에 따라 민족이 양분되었다. 그로 인해 급기야는 공산주의에 혈안된 북괴의 불법남침으로 민족사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획을 그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국전란이 여름 무더위 기승을 떨던 1950년 6월25일 이른 새벽에 일어났으니, 그때가 내 나이 겨우 4살 때였다.

그저 콧구멍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희멀건한 코를 슬슬 눈치를 살피다 날름 혀로 빨면서 바지에 찌린내나도록 오줌을 싸지 말라고 양쪽 붕알이 닿는 아랫바지 밑부분이 쌍갈래로 트여진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쩌다 몸을 구부리기라도 하면 작달막한 고추가 밖으로 삐져나오는 줄도 모르고 가마솥에서 닥닥 긁어낸 보리밥 누룽지를 한 움큼 손에 쥔 채 남의 집 흙담에 매달린 애호박을 따면서 깔깔 웃으대며 철없이 놀았던 천둥벌거숭이였다.

그렇게 내 어린 뇌리 속에 전쟁의 기억은 아주 희미하게 날 듯 말 듯 깊은 의미를 모른 채 스쳐 지났다.

오히려 그보다 더 기억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멀쩡하던 땅바닥이 살을 태울 듯 이글거리는 태양에 쩍쩍 갈라지는 극심한 봄가뭄에 찾아든 기근(飢饉)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먹거리가 없어 배고픔에 ‘꼬로록’ 소리가 났고 늘 배고픔이 앞서 밥때를 기다리느라 하루 해가 그리도 길게만 느껴졌다. 불그레한 저녁 해 서편 금강 둑 너머로 사라지고 어둑어둑해지면 흙내 물신 풍기는 방 벽에 기대어 한 그릇 나물죽이라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다 보면 콧속에서 비릿한 냄새가 새어 나와 허기를 더욱 부추겼다.

그와 더불어 마루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진 두 짝의 목발을 힘겹게 딛고 걷는 내 아버지의 잃어버린 두 다리를 앗아간 전쟁의 아픔만이 내 온몸에 다닥다닥 들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어른들 말씀처럼 이제 겨우 식견이 들 듯 말 듯한 나이 14살에 민주화로 향하는 태눈을 뜨게 하고 역사의 전환점이 된 4.19 학생 의거를 겪었다.
그렇듯 우리 세대가 겪은 역사의 혼돈이 극히 심했다. 그와 더불어 떨치지 못한 가난 속에 질곡(桎梏)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다

침울했던 역사의 잠에서 깨어나 혼돈스러웠던 그 시절, 우리들의 위정자들은 시대적 사명감에 충실치 못하고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신성한 귄리와 의무 중에서 국민의 권리를 존중하기에 앞서 의무만을 가혹하리만큼 부과시켰다.

또한 낙후된 문명 속에 궁핍을 면치 못하는 암울한 농촌의 실생활과 몰지각한 집권자들과 일부 기득권층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텃마당이 되어 버린 도시로 양분(兩分)되었을 뿐, 사회의 중추적 핵심을 이루는 중산층이 넓게 형성되질 못했다.

그나마 겨우 뿌리를 내리려던 극소수(極少數)의 중산층마저 외국 원조에 의존하여 살아오던 국내 경기의 원조가 극심하게 줄어들어 경제가 나빠지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듯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지향점을 찾을 수 있는 계몽적인 교육을 공민교육을 가르치시는 우리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교육적 영향이 극히 지대했다.

지난 ‘적십자의 날’ 기념 교내 웅변대회(雄辯大會)때였다. 봉창문이 훤하게 밝아 오도록 있는 머리를 다 쥐어짜 썼다 지웠다를 수없이 반복하여 어설프지만 내 나름대로 원고를 작성했다. 그 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교정된 원고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적십자의 숭고한 이념은 대포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에서 싹텄고
처참한 전장에서 인류애가 발휘되었다.크리미아전쟁에서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명성같이 빛났다.

서기 1859년 쏠페리노 언덕의 전투 지역을 지나던 스위스의 상인 앙리듀낭이, 부상당한 병사들이 아무런 구호를 받지도 못하고 힘없이 쓰러져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인근 마을을 돌며 사람들에게 눈물 어린 호소를 하여 병사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런 참다운 인간애에 감동한 적군과 아군들이 서로 전쟁을 멈추고, 기립하여 박수를 보내 인류애는 고조되었다.

그후 전 세계 인류에게 전쟁의 처참함을 널리 알려, 전쟁의 참화를 인류애로 막고 고귀한 인간의 생명과 존엄한 권리를 보호하자는 목적으로, 범세계적(汎世界的)으로 적십자라는 커다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우리들 모두도 적십자의 정신으로 굳게 뭉쳐, 내 주위에 있는 이웃들과 나라 안에 함께 기거하는 국민들의 아픔을 서로 부둥켜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결연한 마음의 의지와 박애 정신으로 일로 매진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웅변의 기초도 모르던 나를 데리고 방과 후 빈 교실에서 소리의 높낮이과 제스처(gesture)를 가르쳐 주셔서 힘들게라도 입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의 고된 일을 마치시고 부르튼 발가락 사이에 동동구리무를 바르시던 어머니께서 흐릿한 석유 등잔불 아래 학교 교장 선생님이 수여하신 상장을 들여다보시고 눈언저리를 붉히셨다.

그런 가슴 부듯한 감격을 가질 수 있게 가르쳐 주신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라 다시금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렇게 수많은 학우들이 모여 있는 강당에서 연단(演壇)에 처음 섰을 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준비를 하여 손에 들고 갔던 옷핀의 예리한 끝으로 허벅지를 찔러 정신을 되찾아 주어진 7분 간의 웅변을 마치고 학우들의 박수를 받으며 연단을 내려섰다.

암울했던 지난 세월 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게 받아 온 시련들을 다시금 하나 둘 파헤쳐 삶의 밑거름이 될 일들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워야할 부분은 냉철하게 버릴 수 있는 긍지를 기르려 했다

그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언제 내 곁에 다가왔는지 검둥이가 살갑게 꼬리를 흔들며 주위를 맴돌아 가볍게 머릴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은 이 세상 떠나신 노루목에 살았던 무당 할머니가 당나무 밑둥치에 얼기설기 둘러 놓았던 울긋불긋한 헝겊 조각들은 비바람에 날려 할머니 뒤를 따라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길 가는 사람들이 오가며 시나브로 올려놓은 돌멩이들이 다북하게 쌓인 언덕마루 서낭당이 그저 쓸쓸하게만 보였다.

성큼하게 키가 자란 밀밭 너머 계곡물에서 동네 아이들이 들썩들썩 돌들을 들춰 가재를 잡고 놀다 동네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발맞추어 나가자 앞으로 가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가자

우리들은 씩씩한 어린이라네
금수강산 이어받을 새싹이라네.”

동네 동생들이 합창으로 부르는 정감(精感)어린 노랫소리가 아카시아 꽃향기를 가득 담은 초여름 바람 따라 훗훗하게 들려왔다.
그로 인해 고적하기만 하던 산골짝이 조금은 덜 외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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