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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12 조회 : 1,477




초여름이 대지를 달구며 성급하게 찾아들었다. 한낮으로는 시원한 선들바람이 은근히 그리워질만큼 햇살이 예법 따가웠다. 봄내음 속에 미냥 푸르기만 했던 들녘 보리밭엔 영글어가는 이삭들이 점차 누런빛을 띄워 풍요롭게 보였다.

이른 아침 햇살이 소담스럽게 내리쪼이는 밭 자락엔 막 자라나는 어린 열무와 보드라운 상추가 소담스럽게 자릴 메웠다.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인 하늘엔 이제 막 둥지를 벗어난 어린 새들이 파득파득 힘을 들여 날갯짓하는 모습이 작은 생동감으로 다가왔다.

뒤뜨락 울타리엔 한동안 보지 못한 사이 부쩍이나 자란 호박 넝쿨이 두리뭉실한 돌등을 타고 사방으로 연한 줄기를 뻗어내려 노르스름한 꽃망울을 앙증맞게 달고 있었다. 그리고 싱그런 풀잎에 투명한 아침 이슬이 송글게 뭉쳐 구슬처럼 반짝이었다. 좁다란 달개비꽃 이파리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단작맞게 붙어 있었다. 아랫바지 허리춤을 내려 무심코 내려 싸는 노란 오줌 줄기에 놀란 듯 허겁지겁 팔짝 뛰어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개울가 가장자리 풀숲에 무성하게 자란 개망초는 채 피어나지도 못한 파릇파릇한 꽃망울 당글당글하게 매달고 있었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드는 보릿고개에 양식이 부족한 집들은 벌써 보리를 풋바심하여 널따란 보리밭이 조금은 볼성사납게 듬성듬성 비워졌다.

동구 밖에는 앞 들녘 논배미에 써레질하러 가는지 순아네 어미 소가 어무적어무적 나무다리 위를 건너오고 있었다. ‘이려 이려’하며 길을 재촉하시는 순아네 할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가 땡그랑거리는 소 방울 소리와 함께 철길 너머로 들려왔다.

앞산 종기 형네 밭두둑으로 거무숙숙한 골안개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3일 전에 그리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던 종기 형네 할머니께서 운명을 달리 하셨다. 산자락 끝머리 양지바른 쪽 펑퍼짐한 곳엔 통영갓에 하얀 두루마기를 입으신 지관(地官)이라고 하는 노인의 지시에 따라 묏자리를 파는 동네 어른 몇 분의 모습이 보였다. 잔디밭 위에는 동네 어른들이 삶은 돼지고기를 안주로 곁들여 투박한 술 사발에 막걸리를 따라 주고받으셨다.

좁다란 동네 골목길에는 흰색과 붉은색 비단 자락 위에 검은 붓글씨로 기다랗게 쓴 만장(輓章/挽章)깃발이 앞을 선 가운데 울긋불긋 칠을 한 상여 맨 앞에 요령잡이꾼이 요령(搖鈴)을 치며 구슬프게 목소리를 높였다.

‘북망산천(北邙山川) 가는 길이 이리 멀고 험하구나,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홀로 간다.’ 하며 슬프게 선창을 하자 좌우 양쪽으로 상여를 어깨에 둘러맨 상여꾼들이 역시나 구슬프게 ‘어어 어어여 어어 어어’ 하며 발을 맞춰 후창으로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렇게 상여는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달래려는 듯 마지막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집집마다 담 너머로 동네 아낙네들이 마지막으로 동네를 떠나시는 노인의 살아 계셨을 적 모습을 생각하며 퍽이나 섭섭한 얼굴로 상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어 때묻지 않은 시골 인심이 풋풋하게 배어났다.

볏짚이엉을 쓴 나지막한 토담 위에 말없이 피어나는 순수한 호박꽃처럼 동네 사람들 마음은 지순(至純)하기만 했다. 길가를 걸어가다 남의 집 담장 아래로 늘어진 호박 줄기를 보면 자기네 집 호박처럼 스스럼없이 담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그리고 논두렁 길을 걷다 남의 논둑이 터져 물이 새면 흙 한 삽 푹 떠서 두 발로 꾹꾹 밟아 물꼬를 야무지게 막아주는 그런 훈훈한 인심으로 살았다.

두엄가 옆에는 ‘포리똥나무’가 선들거리는 바람에 은색 이파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길쭉스름하게 잘 익은 붉은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선명한 아침 햇살에 더욱 짙게만 보였다.

부엌 앞에서는 순덕이 어머니가 아침 찬거리를 준비하려는지 작년 가을에 잘게 썰어 말린 무말랭이를 물로 씻고 계셨다.

어머니께서 시원한 물김치를 담그시려나, 텃밭에서 순덕이를 등에 업고 허리를 굽혀 조금은 덜 자란 연한 열무를 솎음질 하고 있었다.

멀리서 들어도 애간장을 끓게 하는 구슬픈 상여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동네 앞을 바라보았다. 상여는 느릿느릿하게 붉은색 찔레꽃들이 수없이 피어난 동네 끝머리 상수네 집 앞을 돌아 나오고 있었다.

섧디섧게 들려오는 상여 소리에 밭에 계시던 어머니가 허리를 펴시며 말씀하셨다.

“에이구 기여 저리도 허망하게 떠나시는구먼. 너나 할 것 없이 언젠가는 한번 가야 할 길이지만, 마지막 가는 모습 볼려닌게 그새 중간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정이 들었다고, 내가 눈물이 다 나올려구 하네.”

어머니께서 감정을 누르시려는 듯 ‘흠!’ 하고 소리를 내시며 가볍게 한숨를 내쉬었다.

골목길을 벗어난 상여가 동네 어귀 둥구나무 앞에 이르자 떠나시는 노인 분이 살아 생전에 정이 들었던 그 곳을 한 번 더 보고 가시라고 하는지 상여가 주춤거렸다. 상여 뒤에는 누런 삼베 상복에 굴건(屈巾)을 쓴 종기 형이 자기 할머니의 영정(影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여름 하늘 아래 늘 조용하기만 하던 산골짝에 묏자리를 파는 동네 어른들이 주고받으시는 걸죽한 목소리로 적적함이 조금 메워졌다.

어머니께서 상여를 보고 오신 후 얼굴 표정이 더욱 무겁게만 보였다. 일요일 날인데도 읍내 장터로 나가시려고 서둘러 아침밥을 드신 후 방문을 나서려할 때였다. 철모르는 순덕이가 어머니를 따라나서려는 듯 먼저 앞을 서 칠이 벗겨진 꽃고무신을 앙증맞게 작은 두 손으로 움켜쥐고 토방(土房) 위에서 맨발로 깡충대고 있었다.

잠시 주춤하던 상여가 동네 개울 나무다리를 건너 큰길로 들어서는 처연한 모습에 그날 따라 그 길이 너무도 쓸쓸하게 보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부터 들녘 한모퉁이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길이 트여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면소재지로 향하는 동네 앞 큰길이 세월이 흐른 만큼 닳고 닳아 굳게 다져져 있었다.

그 흙길 위에 때로는 기뻐서 웃었고 슬퍼서 가슴 쥐어 뜯었던 실로 숱한 사연들이 무수히 얼룩져 있었다. 구슬픈 상엿소리 속에 허전한 마음으로 지난날들에 있었던 기억들을 잠시인들 되돌려 보았다.

무엇보다 맨 먼저 커다랗게 떠오르는 기억 하나 있어 가슴이 울컥해졌다.

내 아버지는 전쟁의 참화(慘禍)로 잃어버린 다리를 칠이 벗겨진 의족에 의지하셨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한낮에도 어둡고 비좁은 방 안에 홀로 남아 계셨다. 그러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답답하다고 하시며 면소재지에 바람을 쐬러 가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그렇게 남들 보기 안 좋게 다리를 절름거리며 걸어가시는 모습이 그리도 싫었다.
그해 여름 물난리 때, 어두운 저녁 술에 만취되어 샛강 돌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져 너무도 허무하게 숨을 거두셨다. 볏짚 가마니에 온몸이 덮인 채 순아네 소달구지에 실려 그 길로 덜컹거리며 오셔 어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한을 남겼다.

그리고 그 달구지 길은 아직까지도 서로의 관계가 소월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내 고향 친구임에는 틀림없는 종구 어머니가 병원에서 숨을 거둬 허연 광목천에 덮여 종구네 소달구지에 실려 오신 바로 그 길이었다.

한여름 뙤약볕이 기울려 하면 한낮 동안 그리도 온 산골짜기가 떠내려가라 울어대던 매미 소리 잦아들었다. 그쯤이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읍내 장터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애태워 기다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나처럼 해바라기하던 해바라기도 종일토록 긴 목을 빼어 들고 함께 서 있었다.
반쯤 기울어진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지평선에 노을이 짙어지면 주막집 앞에 멈춰서는 버스마다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던 길이었다. 내 어머니께서도 텅 빈 집에 눈 멀뚱히 뜨고 울타리 밑에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애태워 기다리고 있을 어린 자식을 위해 지친 몸 발걸음을 서둘러 오셨으니 설움설움 맺힌 한이 그리도 많았던 길이었다.

마을을 떠나 타지로 이사를 간 기순이 누나네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 쪼가리가 하나도 없는 탓에 가난은 처절하기만 했다. 해를 거듭한 가뭄 속에 기근이 닥쳐 그리라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던 중 군산 비행장 옆에 있는 미군 클럽에서 만난 미군과 동거를 하여 ‘양갈보’라고 동네 사람들의 온갖 손가락질과 수근거림을 받으며 살아오다가 더는 못 참겠던지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고향을 버리고 울며 떠나야 했던 기순이 누나네의 지울 수 없는 아픔이 서린 길이었다.

전란 통에 아버지를 잃고 홀로 남은 어머니와 함께 의지하며 살려 했던 겨우 네 살 난 기현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았던 길이었다.

서슬 퍼렇던 자유당 시절,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도 힘없어 하늘에 대고 한풀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병수네 아버지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려고 하고많은 나날 술에 취해 ‘한 오백년’을 넋두리처럼 부르며 걸었던 길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전란 속에 어른들이그놈의 이념과 사상이 뭔지 뜻도 모르고 저질러 놓은 상처의 후유(後遺)로 서로 갈등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런 탓에 끈길진 부모들의 반대로 사랑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삼라만상이 고이 잠든 깊은 새벽에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해 마을을 떠나 살 수밖에 없어 기성이 형과 정희 누나가 함께 걸어가 걸음마다 한도 서렸던 길이었다.

중학교 합격자 발표를 보고 기쁨에 겨워 어머니 손을 꼭 붙잡고 힘차게 걸어왔던 그날이 있어 마음이 부듯해졌던 길이었다.

그리고 고향 밭 자락에 태를 같이 묻고 태어나 철없이 코흘리며 자라 국민학교 지난 6년 동안을 같이 다녔고 읍내 중학교에 함께 입학을 하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친구 옥순이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그렇듯 동네 앞 큰길이 나에게 묵시(默示)적으로 주는 의미가 자못 클 수밖에 없었다.

잔솔가지가 다보록하게 우거진 비탈진 둔덕을 넘어선 상여가 종기 형네 밭 자락에 내려졌다. 상여의 틀을 들어내 바닥에 놓힌 시신이 들어 있는 목관을 몇 분이 들고 아침나절부터 그리도 열심히 파놓은 묏자리로 옮기고 있었다.

추녀 밑 둥지에서는 암탉이 알을 낳고 나오는지 ‘꼬꼬댁꼬꼬 꼬꼬댁 꼬꼬’ 소리를 수다스럽게 내지르며 마당가로 걸어가고 순덕이 어머니는 둥우리에서 하얀 알을 꺼내 들고 빙그레 웃으시며 바라보라는 듯이 나를 향해 들쳐 보이셨다.

엊저녁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순이가 나에게 말을 했다. 자기 어머니가 쑥버무리와 보리 개떡에 달달한 ‘사카린’을 넣고 쪄 주신다고 먹으러 오라고 하여 동네로 향했다.

철길을 건너 기현네 집 마당 앞을 지나려니 늘 부지런하신 기현이 할아버지가 양식이 귀해 봄보리를 일찍 베어 홀태로 훑고 계셨다. 그런데 옷 속으로 딸려 들어간 보리 까끄라기가 몸에 닿아 가려우신지 웃옷을 벗어 들고 훌훌 털며 저고리 속에 들러붙은 까끄라기를 떼어 내고 계셨다. 기현이는 하얀 찔레꽃 나무 끝 부분의 연한 줄기를 꺾어 겉껍질을 벗긴 후 입에 넣어 먹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집 흥남이 아저씨는 남다른 손재주로 올여름에도 왕골 돗자리를 곱게 짜 읍내 장에 내다 팔려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오르는 왕골밭을 한바퀴 둘러보고 계셨다.

어찌 보면 마을 사람들은 큰 변화를 원치 않아 아둔하리만큼 바깥 세상일에 무관심했다. 그런 탓에 마을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찬란한 해는 하늘 아래 펼쳐진 그 모두를 다독거리며 서두름 없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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