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등잔의 심지는 잘 익은 꽈리 알 같은 불꽃을 밤이 이슥토록 거물거물하게 밝혔다. 그리고 날이 새서야 제 할 일을 다한 듯 꺼지고 말았다. 까만 심지 끝머리만 남겨 석유 그을음 냄새가 좁은 방 안에 솔솔 풍겨났다.
뜨락에 내려서니 침울하게 토라진 하늘은 시름 가득한 농부들의 타 들어가는 심정은 아랑곳 없이 그토록 갈구(渴求)하는 단비는 올 생각을 아예 접은 듯했다. 은연중 때를 노리다 늦부지런 떠는 아침 해는 새침을 뚝 떼고 먹구름 사이를 비집어 빠져나오려 능청을 떨고 있었다.
온 누리를 눅눅하게 뒤덮은 희뿌연 물안개가 아침 햇살에 아물아물 피어오르고 햇살이 서서히 안개 자락을 걷어 내어 산릉선이 하나 둘씩 제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그렇듯 높 낮이가 각기 다른 산들은 초자연적인 풍광(風光)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잔뜩 허(虛)한 마음에 떨칠 수 없는 폭넓은 감성의 굴레를 쉼 없이 넘나들어도 무언의 저 산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나지막한 둔덕 풀숲 속에 은은한 순백의 꽃으로 피어 난 들장미가 심성 고운 여인네의 단아한 모습처럼 널따랗게 퍼져 있었다. 하얀 꽃 바탕 위에 암황색(暗黃色)의 작은 점으로 무리져 피어난 꽃잎 위에 쪼그마한 산벌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부엌에서는 순덕이 어머니가 뒤뜰 장독대에 배 불뚝 내민 항아리 속에서 퍼온 수년간 잘 숙성된 간장에 곱게 다진 마늘과 빨간 고추가루를 듬뿍 넣고 텃밭에서 뽑아 온 쪽파를 총총 썰어 넣어 들기름 살짝 두른 열무 생저절이를 버무리고 있었다.
뿌연 쌀뜨물에 된장을 곱게 풀어 넣고 굵은 멸치 몇 마리쯤 넣은 아욱국 또한 미각을 돋구었다. 큼직큼직한 감자가 보리쌀 속에 군데군데 섞인 밥을 넉넉하게 배불리 먹었다.
포만스러운 기분으로 사립짝을 나서 밭둑을 따라 벼랑바위 앞에 닿았다. 빛바랜 오색 헝겊이 바람 따라 나부끼는 오르막 언덕배기 서낭당쪽으로 걸어가니 고요하게 외진 산골짝에 아침을 부르려 일찍부터 산새들이 씨끄럽게 울어댔다. 휘어 도는 좁다란 오솔길을 걸어가는 내 발걸음 소리에 놀란 듯 다복하게 늘어 선 솔밭에서 이름 모를 산새들이 ‘포롱포롱’ 앞 다퉈 날아갔다.
야트막한 둔덕 밑 개울가 둑에 앞 동네 면소재지에 사는 노인 한 분이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염소를 매어 놓으려 줄이 길게 늘어진 쇠 말뚝을 개울에서 주워 온 큼직한 돌맹이로 사정없이 내려쳐 깊숙하게 박고 있었다.
펑퍼짐한 풀밭엔 누런 암소 한 마리가 이른 아침부터 꼬리 끝에 억척스레 들러붙으려는 쇠파리를 쫓으려 좌우로 꼬리를 쉴 새 없이 흔들어 대고 있었다. 면소재지 마을 앞을 갓 빠져나온 듯 모교인 채화 국민학교 6학년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 두 명이 산길을 질러 학교에 가려 어깨에 검정색 헝겊 책 보자기를 야무지게 동여 둘러메고 ‘딸랑딸랑’ 연필통에서 연필이 마구 뒹구는 소리를 내며 서둘러 뛰어오고 있었다. 햇살에 반사된 불그레한 구름이 아이들 머리 위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앞들엔 모내기를 서두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옷을 걸쳐 입은 농부들의 분주한 모습이 들녘 군데군데를 메우고 있었다. 무릇 세상이 뒤바뀐 탓인지? 요즈음 면내 면장은 물론 지서장하고도 격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소리가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심심찮게 들리는 병수 아버지가 논산 읍내에 나가시려나, 잿빛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으시고 여유롭게 걸어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논산 읍내 쪽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려고 발길을 서두시는 병수 아버지 뒤를 바짝 따라 이번에 상을 당한 종기형과 나와의 관계가 아직도 소홀한 내 친구 종구가 책가방을 옆에 끼고 무엇이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개울가 낙수터에는 발걸음 서두는 키 작은 옥순이의 자그마한 모습도 보였다
철로 길 아래 우묵진 미나리꽝에는 미나리가 다보록하게 자라 미나리 끝머리가 햇살에 반질반질하게 보였다. 앞 들녘 논자락에서는 모내기를 시작하여 놀 자리를 잃어버려 화가 잔뜩 난 개구리들이 집단 시위를 하려는 듯 목이 터져라 아침부터 그리도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벼랑바위 앞에 옥순이가 책가방도 무거울 건데 한 손에 두툼한 책을 들고 다가와 자세히 바라보니 월간 ‘여학생’ 잡지책을 들고 있었다.
“야, 옥순아! 너도 이제는 무지하게 세련되었네. 그런 책도 다 들고 다니고.”
그러자 옥순이가 뾰로통한 얼굴에 가느스름한 눈으로 가볍게 흘기며 말을 했다.
“야! 너는 내가 뭐가 세련되었다고 그러냐? 이 책 이거 내 것 아니거든, 엊그제 영선이한테서 빌려 온 거야. 그러닌께 뭘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제발 가만히 있으면 2등은 하닌께.” “야, 내가 몰라서 그런 걸 가지고 아침부터 낫박쌀을 주고 난리냐? 니가 자꾸만 그렇게 하면 내가 무안해서 어쩌냐? 그려 내가 미안하게 했으닌께 이쯤에서 그만두자.”
조금은 씁쓸한 기분에 가파른 언덕배기 건널목에 올라서니 철로 길 옆 덜 자란 옥수수가 줄을 이뤄 서 있는 밭자락 어디선가 코맹맹이 소리로 익살스럽게 울어대는 맹꽁이 소리가 들려왔다.
면소재지 큰길 모퉁이 약방 안에는 아저씨 한 분이 철로 변 논에서 모내기 일을 하시다 객차 안에서 창밖으로 함부로 버린 깨진 병 조각에 발을 크게 다치신 듯 발등 위까지 빨간 머큐로크롬이 배어난 하얀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싸이렌 소리가 멈춘지 오래된 세월 따라 눈비와 바람에 색이 보기 싫게 변한 나무 망대가 뻘쭘하게 한구텅이에 서 있는 지서 안은 예전보다 퍽이나 조용해 보였고 기와지붕 위에는 참새 몇 마리가 꼬리를 앙증맞게 흔들어 촐싹거리고 있었다.
붉고 파란색이 조화를 이뤄 넝쿨진 나팔꽃이 가녀린 모습으로 피어난 이끼 가득 낀 지서 돌담장을 지나 주막집 정류장에 와 닿으니 며칠 전에 새로 운행을 시작한 새로운 버스가 눈에 띄었다.
버스의 앞머리가 차체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매끈하게 페인트칠을 하여 다른 버스보다 좌석 수도 휠씬 많은 논산 읍내로 가는 신형(新型) 버스가 도착했다.
읍내로 나가시려는 병수 아버지와 논산으로 통학을 하는 남녀 학생들이 차에 올라타고 있는데 버스 안에 자리를 잡은 종구가 아직도 서로가 풀지 못한 지난날에 있었던 감정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듯 나를 안 쳐다보는 듯하면서 슬금슬금 눈치를 살펴가며 바라보아 나도 멋쩍은 기분에 어색한 모습으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 봄 비석골에서 버어진 싸움으로 종구 몸에 남겨진 놓은 상처의 여파(餘波)와 빈부의 격차에서 벌어진 그 모든 일들이 어찌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은 상처의 아픔이 비슷비슷하였지만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눈꼽을 떼고 앞산 능선을 같이 바라보며 자라난 같은 향리(鄕里)의 친구로서 언젠가는 꼭 풀어야 할 일이건만 해를 거듭할수록 주위 환경적 영향은 서로의 거리감을 좀처럼 좁히질 못하고 자꾸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버스가 읍내에 다 도착할 때까지 그런 생각에 몰두하여 마음은 영 갑갑하기만 했다.
사상이 무엇이고 그 잘난 이념 자체가 무엇인지? 어린 우리들에게는 전혀 관심밖에 일이라 그 뜻을 알리 만무했다.
그리고 어쩌다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 지난날에 대한 상처로 이따금씩 격한 다툼질이 일어나면 그 이유가 어렴풋이 알 듯 모를 듯 그저 숨 죽이고 먼발치에서 등 너머로 구경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듯 전쟁이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 어린 세대에 남겨준 상처는 너무도 컸기에 그 한 예로 우리 반에서만 전쟁통에 부모를 잃어버린 결손 가정이 무려 열 명 정도가 되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들은 엇비슷한 시기에 며칠의 간격을 두고 부모님 제사를 연달아 지내기도 했다
청초(靑草)의 싱그런 내음이 흠뻑 묻어나는 입하(立夏)에서부터 입추(立秋) 전까지의 기간(期間)인 여름, 그해 6월은 유난하게 일찍 찾아온 이른 더위로 한낮 동안은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지열(地熱)로 온통 달아올라 후덥지근했다.
교문 양쪽 옆에 있는 연못에는 물밑을 배회하던 물고기들이 산소가 부족한 듯 푸다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따금씩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가 이내 물밑으로 몸을 숨겼다.
오고 가는 차량들이 내뿜는 매연과 흙먼지가 바람에 날려 교정 안까지 밀려와 가끔 얼굴에 닿을 때마다 짜증스럽기도 했다.
교실 안 가운데 자리에 위치한 성구는 열차 선로 보수반 아저씨들이 객차의 의자를 갈아 끼우며 빼낸 널따란 스펀지를 한 장 얻어 와 성구가 집에서 가지고 온 가위로 스펀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잉크가 옷과 노트에 묻어나지 않게 직사각형 모양의 잉크병 안에 넣고 있는데 지금껏 우리들 모두가 잉크병에 목화솜을 넣고 사용해 병 안에 담긴 잉크의 양이 쉽게 줄어들었고 동그렇게 깎아 만든 나무 재질의 펜대 끝에 펜촉을 꽂아 썼기에 잉크를 찍으려 하면 펜촉 끝 갈라지는 부분에 솜털이 묻어나 손끝으로 떼어내려면 여간 거북스럽지 않았는데 그 시절 스펀지 제품이 보급되질 않아 구할 방법도 없었고 구하기 아주 어려운 그런 스펀지의 등장은 우리 모두에게 실로 큰 관심과 흥미를 끄는 일이었다.
어쩌다 실수로 잉크를 엎질러 옷과 노트 그리고 교과서에 잔뜩 묻어난 경험을 한두 번 해본 우리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필요성을 느껴 앞 다퉈 달라고 조르자 늘 시크름한 냄새 나는 단무지를 도시락 반찬으로 들고 와 점심시간에는 왠지 기가 죽어 얼굴이 어두워 보였던 성구가평상시 마음이 많이 갔던 친구들부터 선심(善心)을 쓰듯 한 조각씩 나눠줬다.
그리고 거리감을 두고 지냈던 생활 형편이 비교적 윤택한 아이들 마저도 달라고 부탁을 하자 급우들 앞에서 으스대며 나눠주고 있어 모처럼 교실 안에서 주도권을 잡아 밝고 명랑하게 웃는 모습이 친구로서 바라보기 좋아 마음이 흡족했다.
어쩜! 도장에 나가 당수를 배우고 있는 것도 운동에 열중하는 만큼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려다 그만 숨을 거두신 어머니에 대한 부담감 내지는 열차 사고로 불구의 몸이 되신 아버지에 대한 아픔과 열약한 경제적 여건 속에 성구를 가르치기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되려고 간장 공장에 다니는 성자 누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뒤엉켜그런 가난으로부터 오는 서러움을 그 순간 만이라도 잊어버리려는 것같이 보였다.
비록 내 생각이 틀려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같은 맥락(脈絡)이 아닐까 하고 몇 번쯤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작아 보이는 스펀지 한 조각이지만 그 위력은 바로 점심시간에 ‘깨곰보’란 별명의 성구 앞에 도시락을 들고 모여드는 아이들의 행동에서 확연하게 나타나 그날 있었던 자연스런 일을 계기로 나무 펜대를 손에 거머쥐고 펜글씨를 썼던 우리들 모두는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 둘째 마디에 점차 굳어져 가는 굳은살처럼 티 하나 없는 순박한 얼굴에 보송보송 돋아나는 솜털처럼 싹트는 우정이 서서히 자라났다.
학교 울타리 너머로 철조망 사이로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몰래 사 먹는 꿀맛 같은 꽈배기와 찐빵이 우리들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
입 언저리에 하얀 설탕가루 묻은 얼굴을 서로 마주 바라보고 그리도 좋다고 격 없이 소리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