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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19 조회 : 1,417




온 사방이 시원스레 탁 트인 논산평야를 구비구비 흐르는 금강 둑 위에 저녁 해가 둘레둘레 사방을 훑어보며 서서히 몸을 눕히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타오르는 노을은 온 하늘을 주홍빛으로 곱다랗게 물들였다.

암청색(暗靑色) 솔잎들이 더부룩하게 우거진 앞산 소나무 숲에는 뙤약볕에 진종일 먹이를 찾던 황새 한 마리가 배가 불러 포만스러운 듯 가지 위에 여유있게 나래를 접고 있었다.

오밀조밀하게 어울린 초목(草木)들의 푸르름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산자락 남쪽으로 우묵하게 내려앉은 계곡이 있었다. 그곳을 동네 사람들 모두는 우묵골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끝 자락에 일본식 건물 적산 가옥 한 채가 들어서 있어 그곳을 가리켜 병막(病幕) 터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강경과 논산 두 읍내는 물론 군내에 있는 모든 면에서 전염병이 돌아 환자가 발생하면 병을 예방를 하기 위해 격리를 하려고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했던 곳이었다. 군내에 역병이 돌면 증세가 심한 환자들 중 사망자가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시체를 매장할 곳이 여의치 않자 관리를 맡은 기관에서 하는 수 없이 병막 터 옆 국유림에 하나둘씩 묻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금의 공동묘지가 생기게 된 단초(端初)가 되었다.

해방이 된 이후 지금까지도 사는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은 시신을 그저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지게로 지고 가 그곳 산에 땅을 파고 묻었다. 그런 연유로 아주 옛적부터 동네 어른들은 동네 아이들이 그곳에 놀러가 행여 몹쓸 병이라도 옮겨 올까 하는 노파심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그곳에서 달걀귀신이 나오고 키가 한 자락 넘게 자란 호밀밭에는 ‘용천배기’들이 숨어 살아 아이들을 몰래 잡아간다고 지나칠 정도로 겁을 주었다.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어린아이들은 겁을 잔뜩 먹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벌건 대낮에도 그곳은커녕 그 근처 호밀밭 앞에도 얼씬거리지 못했다.

그 병막 터에는 정영감 내외 분이 살고 계셨다. 정영감이 청년 시절부터 병막지기를 하시다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으로 감격의 8.15 해방을 맞이했다.

새로이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에서 법적 절차에 따라 병막(病幕)으로 사용하던 터와 앞자락에 있는 민둥산을 정부에서 개인들에게 불하(拂下)를 하였는데 그 병막터와 민둥산을 정영감님이 아주 싼 값에 사들여 소유하게 되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이 소유하였던 읍내 적산 가옥과 땅덩어리 그리고 논밭들을 서로 붙잡을 욕심에 그리 혈안이 되어 머리들을 들이밀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병막 터는 사경을 헤메던 전염병 환자들이 머물던 터라, 온갖 질병이 옮겨 올까 싶은 노파심에 모두들 불하 받기를 꺼려해서 경쟁자가 그리 없었다. 그러던 중 병막지기를 하던 정영감이 아주 허름한 가격에 그간 총각 때부터 알뜰하게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 정부로부터 개인 불하를 받았다.

정영감네가 비록 앞 들녘에 기름진 논 한 마지기 없이 뒷들녘에 겨우 천둥지기 몇 마지기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지만 규모가 꽤 큰 밭을 여러 자락을 가지고 있어 병막 터라는 일반 사람들의 곱지 못한 인식이 있어서 그렇지 내막을 따지고 보면 노른자 땅을 두루 가져 실속을 차리고 사는 알부자였다.

앞 마루에 놓인 나무 통 안에 다람쥐가 빙글빙글 거침새 없이 쳇바퀴를 돌리듯 늘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산중 생활이 어찌보면 조금은 답답해 보였지만 살기가 넉넉하여 남 부러울 것이 없었다.

종구네 산자락과 닿을 듯 말 듯한 맨송맨송한 민둥산을 두 내외분이 오랜 세월을 두고 끈질기게 가꾸셨다.

앞자락 황토밭에는 황기, 작약, 더덕과 옻나무 등의 약초를 재배했다. 그리고 나머지 밭에는 고구마와 콩을 그리도 많이 심었다. 그런 탓에 늦가을 가을걷이에는 양쪽 읍내에서 싸전을 하는 미곡상들이 콩과 팥을 사러 번질나게 들락거려 주위 사람들로부터 온갖 부러움을 샀다.

정영감이 늦동이 외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려서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박박 얽은 남자 아이였다. 나이가 우리들보다는 대엿 살 정도 위였다.
그 집 외아들인 정섭이 형은 학업 성적이 최하위였는지 은진면에 있는 사립 고등공민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그리고 늘 반복을 거듭하는 산골 생활이 답답하여 염증을 느꼈는가? 기술이라도 배워 보겠다며 극구 말리는 두 노인네의 손을 뿌리치고 멀리 대전으로 나가 철공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정영감 내외분은 텃밭에 약초를 키워 밭농사를 지으시고 꿀벌을 쳐 벌통을 돌보시며 욕심 없이 다붓하게 살고 계셨다.

낮 동안 그리 후덥지근하기만 했던 대지가 산마루 턱에서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그 열기가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불그레하게 노을빛 물들어 가는 앞 들녘 논에서 진종일 엎디어 모내기를 하시던 동네 어른들이 일을 마치셨는지 논 가운데에서 한 두분씩 논둑으로 빠져나오셨다.

뉘엿뉘엿 기울어 가는 해가 아직 서편 들녘 너머 읍내 옥녀봉에 머물고 있건만 논자락에 노닐던 황새보다 몸집이 작은 왜가리 서너 마리가 앞 산자락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언제나 그 노을 속엔 늘 가슴안에 떠도는 내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아쉬움이 소리없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애증의 예리한 칼날에 어린 가슴이 베이고 또 베였다. 그런 가운데 늘 생각이 닿는 곳에 머무는 그리움 한 자락이 희끄무레하게 퇴색되는 어둠 끝 자락을 털고 다시금 깨어나려 했다.

전쟁이 참혹하게 앗아간 내 아버지의 두 다리를 가리키며 남들이야 뭐라 뒤쪽에서 비웃었을지라도 나에게 만큼은 소중했던 분이었다. 그런 내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을 적 무엇인가 한 마디쯤은 남겨 실 줄 알았다. 허나 끝내 속 깊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시고 그리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그렇게 내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포한(抱恨)의 짐이 너무 무거워도 종국(終局)에는 한 자락 그리움으로 매듭지어 졌다.

살아온 지난 세월 동안 전혀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시련들이 불쑥 찾아들어 할퀴고 베어 순수하게만 자라나야 할 내 어린 동심에 무수히 많은 아픔의 흔적들을 소리없이 남겨 놓았다.

언덕을 내려서 병막 터 앞을 지나려니 지난해 늦가을 동네 앞 둥구나무 앞에서 생사탕을 달이고 있던, 읍내에서 생사탕 집을 하신다는 입담이 좋은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아저씨가 옛날 일제강점기 때 땅속 깊이 파 놓은 우물터에서 물을 마시려 모자를 벗으니 한쪽 얼굴이 불에 덴 듯 심하게 일그러져 보기에 좀 흉칙스러웠다. 그제서야 늘 그렇게 머리 깊숙하게 중절모 테를 넓게 펼쳐 눌러쓰고 다니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 아저씨의 얼굴에 남은 흉측한 상처도 처절했던 전쟁이 남긴 흔적이었다.

우물터에서 물을 시원스레 마시고 나오시던 아저씨가 학교 건물처럼 생긴 적산 가옥 건물 안 한쪽에 맵씨 있게 쌓아 놓은 장작더미를 바라보시며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영감님은 산이 가까워서 땔나무 걱정일랑은 붙들어 매고 사시건네유.”

그러자 정영감님이 아랫 동네 새터 마을에 모품을 팔러 다녀오셨는지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로 뱀장수 아저씨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모내기를 하시다 종아리를 거머리에게 물려 간지러우신지 울타리 가에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 줄기를 꺾어 부러트리자 잘라진 부위에서 쌀뜨물 같은 하얀 물이 나와 그 물을 거머리에게 물린 상처 부위에 문대시며 말씀하셨다.

“그런 소리 말게나. 여기도 예전 하고는 달라서 아무리 산이 가까우면 뭘 할 건디, 허구 헌날 산지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데, 어디 다 썩은 고주배기 하나 가져가게 하는 줄 아는감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지, 다 알게 모르게 뒷구멍으로 그 뭐시냐 궐연 보루라도 옆구리에 찔러줘야 못 이기는 척하며 슬쩍 딴 곳으로 자릴 옮겨 눈 감아 주닌께. 그럭저럭 땔나무라도 해서 사는 거지 뭐. 그러니 꼴난 그것도 벼슬자리라고 팔에 허연 광목때기로 만든 완장을 두르고 호각(號角)을 삑삑 불어대며 으스대고, 이 산 저 산을 제집 마당 드나들 듯이 설치고 다니는 꼴이라니 참 가관이지. 그래두 어쩌것는가? 엄동설한에 안 얼어 죽으라면 그리라도 혀야지 별 수 있는감?”

정영감님께서 아주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씀을 하시자 옆에 계시던 땅꾼 아저씨가 이내 말을 거드셨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찌된 놈에 세상이 빽 없으면 때 묻은 돈이라두 지니고 있어야 사람대접 받고 사는 꼴이 됐으니 내참. 나사 그리 산을 오르고 내려도 삭쟁이는 커녕 풀 한 포기 다칠 일 없고, 그저 오다가다 뱀 나부랭이나 눈에 띄면 아이구 하늘님 감사합니다. 하구 얼른 잡아 자루 속에 넣고 다니닌께 그런 눈치 볼 일 없어 맘은 편하지만 어르신은 그 나이 어려 귓때기 시퍼런 산지기란 놈 눈치 볼라 맘이 영 편칠 못하시것네유.”

그런 위로의 말에 좀 기분이 좋으신지 씩 웃으시며 마룻바닥에 담배쌈지를 펼쳐 종이 위에 담배 가루를 큼직하게 말아 혀끝으로 돌려가며 침을 발라 입에 무시고 다시 말문을 여셨다.

“기나저나 이번 선거에는 범 없는 골짜기 노루가 왕 노릇 한다구, 하두 여러 사람들이 국회의원 될려구 나와서 누가 누군지 도통 모르것던디. 그놈의 국회의원 자리가 좋기는 좋은 모양이여. 그러니 저리들 죽기 살기로 달려들지. 그리구 그 뭐시냐 먼젓번에 국회의원 하던 그 자유당 출신인 사람은 이참에는 나와 봐야 떨어질 것 같아 아예 기권을 했다고 하던구먼 그려.”

그러자 담배를 야무지게 빨아 연기를 입 밖으로 내뿜으며 담배를 피우시던 땅꾼 아저씨가 거들고 나섰다.

“아! 그 자리가 좋기만 하데유. 그 잘나간다는 군수나 경찰서장이 허리를 잔뜩 굽히고 들어오는 자린데 왜 안 그러것어유? 그나저나 이번에는 다들 눈 똑바로 뜨고 붓 뚜껑 잘 찍어서 좋은 일꾼을 뽑아야 할건디 걱정이네유. 지가 뭐 지난 6.25 전쟁 통에 상처를 입어 얼굴 한쪽 망가져 나라를 위해 일 하다 다쳤다구 생색내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그저 선거 때만 되면 우선 당선되고 보자는 식으로, 손바닥만한 조선 땅덩어리 안에 뭔 놈에 애국자들이 그리 많이 나오려고 하는지, 나라가 어쩌구 백성이 어쩌구 하며 양 껏 떠들어대고 자기가 가장 애국자인 것처럼 흉내를 내려고 하니, 그런 꼴 보기 싫어 두 눈을 꽉 감고 귓구멍을 솜으로 막어 버리고 싶더라구유.”

그렇게 얼심히 말을 마치신 땅꾼 아저씨가 서쪽 머리로 기울려 하는 저녁 해를 힐끔 쳐다보고 뱀이 들어 있는 자루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종일 어지간히 후벼 대고도 양이 않 차는지 닭들이 자꾸만 땅을 파 헤치자 아주머니께서 ‘휘이 휘이’하며 닭들을 쫓으셨다. 그리고 번질반질하게 잘 닳은 바가지에 보리쌀을 한 움큼 퍼 들고 자꾸만 꾸무럭거리는 뱀 자루를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힐끔 쳐다보시며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한참 열을 올려 말을 하시던 땅꾼 아저씨는 뱀이 들어 있는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시고 읍내 집으로 가려고 오솔길로 들어서 타박타박 걸어가셨다.

오솔길을 내려서는 내 작은 몸을 감싸려 다시금 불어오는 산바람에 짙어 푸른 풀 내음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침체된 적막 속에 아늑한 무엇인가? 무척이나 애달프도록 그리워지면 불그레하게 타올라 가마득한 지평선 가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황금빛 노을 속에 잠시인들 나도 따라 푹 젖어들고만 싶었다.

산자락 끝머리 종기 형네 할머니 묘에 아직은 무덤가에 잔디 풀들이 덜 자라 자리를 못 잡았다. 뻘건 황토흙이 얼룩얼룩 바라보여 조금은 스산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남기신 유품들이 불에 태우다 남아 있었다. 깨진 사기그릇과 이부자리 그리고 연기에 검게 그을린 숟가락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뒤에서 종기 형네 할머니가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아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지난 시절 언젠가 교회에서 여전도사님이 치시는 풍금 소리에 맞춰 배운 찬송가가 떠올랐다. 이제는 교회에 아예 나가지도 않으면서도 염치 좋게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나도 몰래 크게 부르며 뛰어갔다. 노을빛을 듬뿍 담고 남쪽으로 달리는 기차의 우렁찬 기적 소리가 은근 슬쩍 겁이 잔뜩 나 움추렸던 마음에 그리 반갑게 들려왔다.

조금은 무서운 마음에 그리도 길게만 느껴지던 오솔길을 다 내려서 집 싸리 울타리에 가까이 닿았다.

읍내에서 돌아오시던 옥순이 어머니께서 둔덕 너머 종구네 밭 자락을 무슨 일인지 둘러 보고 계셨다. 그래서 조금은 이상한 마음에 왜 그러실까? 하는 가벼운 생각 정도에서 머물고 말았다.

어둠살이 찾아드는 마당에 한참 한 단어 정도의 말을 익히려 애를 쓰는 순덕이가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빠빠’ 하고 불렀다.

내가 반가운 마음에 순덕이를 끌어안으며 말을 했다.

“너는 어찌된 애가 엄마도 ‘빠빠’ 큰 엄마도 ‘빠빠’ 그리고 나보고도 ‘빠빠’. 입에 넣는 밥도 ‘빠빠’라고 하니? 너는 세상 모든 게 다 빠빠구나?”

그런 순덕이가 너무 귀여워 동그란 막대 사탕을 손에 들려 주니 입이 헤벌여져 다물 줄을 몰랐다. 그리고 순덕이 어머니에게 풍선껌을 드리니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띄우셨다. 문득 꽈리가 생각 나 울 밑에 꽈리를 들여다보았다. 순덕이가 어서 자라 조그마한 입을 오무락오무락 입 안에 꽈리를 물고 이리저리 굴려 예쁘게 소리를 내어 부는 모습으로 얼른 자라나 주길 바랐다.

하루 종일 느슨해졌던 마음의 끈을 졸라매야만 했다. 방 벽에 붙어 있는 수업 시간표를 보고 책가방에 책을 챙겨 넣고 읍내에서 돌아오실 어머니 마중을 나가려 사립짝을 나섰다.

그런데 잽싸게 나보다 앞을 서 달려가는 검둥이 뒤를 따라 벼랑바위로 뛰어가 들 주막 정류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벌써 차에서 내리신 듯 밭둑길로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지친 모습이 희묽게 바라보여 가슴이 저려왔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얼른 지우고 싶어 얼른 어머니에게 뛰어가 머리에 이고 계신 동이를 받아 들었다. 어머니가 한 손에 들고 계시던 볏짚으로 잘 묶은 소금을 뿌려 간을 한 갈치 두 마리를 나에게 건네주셨다.

그 당시에는 아주 귀한 손님이 오면 손님상에 오릴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내놓는다는 귀한 갈치였기에 자못 궁금하기만 했다.

“엄니! 낼이 무신 날이여? 이런 비싼 갈치를 다 사 오게.”

그러자 뒤에서 걸어오시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이구 너는 언제나 철들래? 그래 지 에미 생일두 모르고 살게. 허기사 내가 이런 말하면 뭣허것냐? 본디 서방 복 없는 년이 자식 복인들 있을라구.”

어머니께서 무척이나 서운해 하시여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다음날이 어머니 생신이기에 어머니에게 무척이나 미안스럽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순덕이 어머니가 부엌 흐린 등잔불 밑에서 서둘러 차려 오신 밥상에 둘러앉았다. 삶은 연한 원추리 잎을 쌀뜨물에 풀어 끓인 된장국에 해묵은 신 김치를 쭉 찢어 밥숟가락에 걸친 후 밥을 먹으면서 아까 종구네 밭에서 보았던 옥순이 어머니 모습이 자꾸만 이상하게 느껴져 어머니에게 여쭤보았다.

“엄니 아까참에 보닌께 옥순이 엄니가 읍내 장에서 동네로 걸어오다가 하필이면 종구네 밭 앞에서 한참을 서서 밭두럭을 살펴보던디 왜 그런지 모르것네.”

그러자 흐린 등잔 불 밑에 앉아 계신 어머니께서 얼굴이 조금은 굳어지신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옥순이 에미가 종구네 밭 자락를 둘러보데? 길 가다 힘드닌께 잠시 쉬느라고 그랬나 보구나. 쓰잘데기 없는 디 신경쓰지 말구 허라는 공부나 열심히 혀.”

그렇게 말씀을 마치신 어머니게서 눈을 가볍게 흘기셔 내 짧은 소견에 공연한 궁상이라도 떨었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말았다.

뒷산 후박나무 숲에서 서둘러 밤을 부르는 접동새 울음소리가 애잔하게 들렸다. 이제 겨우 알이 들어 차려고 하는 뜰 앞 옥수수가 실하게 영글어가길 재촉하는 듯 앞 들녘 논배미에서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금강 둑 너머 읍내에선 희끗희끗한 지평선 따라 하나둘씩 전깃불을 밝히고 낫가락처럼 양쪽 끝머리가 휘어진 달이 거무스름한 밤하늘 산등성이에 쇠잔한 모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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