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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20 조회 : 1,387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듬직하게 떠오른 아침 해가 앞들녘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들녘 일을 서두는 마을 사람들이 한해 벼농사에 거는 기대가 퍽이나 큰 것 같았다. 연일 모내기를 하는 앞 들녘 논배미엔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땀흘려 노력한 만큼만 얻으려는 순박한 농부들의 몸놀림이 분주하게 보였다. 하늘은 그 모두를 다정하게 보듬으려는 듯 더할 나위 없이 푸르기만 했다.

클로버를 빼닮은 잎사귀에서 신맛 나는 괭이밥이 싸리 울타리 끄트머리까지?노란꽃을 아기자기하게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분홍빛 분꽃도 밤새도록 달을 바라보며 무수히도 많은 이야기들을 날이 훤하게 밝아오도록 진지하게 속삭이다가 부스스한 얼굴로 꽃봉우리를 오므렸다. 호젓하게 서 있는 해바라기는 아침 이슬에 듬뿍 젖어 얼굴을 가듬고 텃밭 감나무 위에서 앞마당을 기웃거리는 아침 해를 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순태 아저씨가 부지런히 돌리시는 동네 방앗간에서 나는 발동기 소리가 너른 들녘으로 살갑게 퍼져 나갔다. 밑거름을 잘한 동근이네 밭 자락엔 참외와 수박 줄기들이 튼실하게 자라올라 땅에 납작납작 엎디어 줄기를 뻗어 쾌청(快晴)하여 맑기만 한 아침 공기 속에 싱그러움을 더했다.

지붕 볏짚 색깔이 알맞을 만큼 변해 바라보기에 딱 좋을 만큼 운치를 드러내는 원두막을 지나 도랑가에 닿았다. 징검돌 푸른 이끼 위에 달라붙어 있던 작은 물방개 한 마리가 몸 가볍게 물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도랑가 가장자리 풀잎 위에는 가느스름한 꼬리가 기다란 실잠자리 두서너 마리가 짝짓기를 하려나, 자리를 잡으려 분주하게 맴돌고 있었다.

오랜 가뭄 탓인지? 물이 적어 밑바닥이 겨우 들어찬 물 위에 은빛 물살을 타고 곡예를 부리듯 소금쟁이 한 마리가 좌에서 우로 물 위를 신비롭게 기어가는 듯싶더니 이내 몸을 되돌려 우에서 좌로 아주 날렵한 몸짓으로 다시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순덕이 어머니가 어머니 생신날이라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신 듯했다. 부엌에서 고사리 도라지 나물을 볶는 들기름 냄새와 더불어 석쇠 위에 노릇노릇하게 갈치를 굽는 생선 냄새가 방문 틈새로 구수하게 배어났다.

작은 아픔들이 운명에 탈을 쓰고 득달같이 달라붙어도 너무도 어렸기에 매사를 구분조차 할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멍텅구리를 잘 빼닮은 모습의 아무런 능력 없는 내가 어머니의 생신날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넉살맞게 엎드려 절을 한번 올리는 것이 겨우 고작이었다.

어찌 보면 그런 넉살스러움은 그리 무책임하게 삶의 고된 멍에를 어머니에게만 둘러씌워 놓고 말없이 숨을 거두신 무책임한 내 아버지에 대한 애증 속에 묻어나는 한서린 아픔이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 미안함을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에게 갚으려 하는 무언의 약속인 듯싶었다.

그렇게 옆에서 절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순덕이가 마냥 신기한 듯 한참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어머니께서 순덕 얼굴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우리 순덕이도 큰엄마 귀빠진 날이니까 절을 한번 해야지?”

어머니께서 몇 번을 어우르자 순덕이가 그제서야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절을 하다가 옆으로 넘어져 온 식구들이 그런 천진한 모습을 바라보고 웃는 웃음소리가 온 방안에 퍼져났다.

설날과 추석날 그리고 식구들 생일날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던 뜨거운 김이 나는 흰 쌀밥이 밥그릇에 담겨진 채 애써 준비하신 반찬들과 함께 둥그런 접이식 소나무 밥상 위에 놓여 있어 식구들이 둘러앉아 아침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책가방을 챙기려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너도 그동안 읍내를 오고 가면서 눈으로 보아 먹고 싶은 것도 많았을 건데...”

말씀을 끝마치신 어머니께서 약간의 용돈을 하복 아랫바지 호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작은 생일 선물 하나도 못 해드렸는데 너무도 미안스럽기만 했다.

생일날이라 어머니는 정말 오랜만에 읍내 장사를 접으시고 하루 쉬시려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 읍내 젓갈 도매상을 하는 재숙이네 집에서 씨앗을 얻어다 심어 놓은 수세미가 줄기를 힘차게 뻗어내려 사방으로 번져났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물총을 만들려고 주현네 집에서 얻어다 놓은 대나무를 길게 자르셨다. 그리고 땅에 군데군데 꼽아 거치대를 세워 그 위에 수세미 줄기들을 올려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맨드라미가 붉게 피어나는 장독대에서 몇 개 안되는 크고 작은 단지들의 뚜껑 위에 내려앉은 흙먼지를 일일이 터시며 앞으로 둥그렇게 뿔뚝 배를 내어 밀고 있는 항아리들을 물걸레로 그리도 소중하게 닦으셨다. 그리고 그동안 자세히 돌보지 못했던 푸성귀들을 살피려 텃밭으로 나가셨다.

책가방을 들고 집 울타리를 돌아 밭둑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산을 향해 봉곳하게 솟아 오른 둔덕을 넘어 우묵진 계곡에 닿았다. 한동안 그리도 곱살하게 피어난 하얀 찔레꽃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건만 시든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나니 허전키만 했다. 그러나 계곡 가에 무수히 피어나는 개망초의 하얀 꽃들이 그 틈새를 메우고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춤을 휘청휘청 흔드는 실버들 가지 끝이 물에 닿을 듯 말 듯했다. 넓적스름한 바위 밑에는 등색이 검츠레한 열목어 몇 마리가 오글오글 몰려들었다. 그때 가까이 다가서는 인기척에 놀랐는지? 굽어진 좁다란 계곡을 물길 따라 물새 한 마리가 요리조리 몸을 틀며 앞마을 냇가쪽으로 세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자그락자그락’ 발밑에 밟히는 자갈들의 부딪는 소리를 내며 계곡 가를 걸어 내려오시던 화산리에 사는 듯싶은 낯이 설은 아저씨 한 분이 들녘 논에 일하러 나가기 전 서둘러 쇠꼴을 한짐 베어 바지게 위에 지고 찰방찰방 계곡물을 건너고 있었다.

언덕배기 서낭당 고개 밑 밭 자락에는 철을 놓친 지칭개의 짙은 자주색 꽃이 실하게 피어 있었다. 금새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이 늘 푸른 산자락을 등에 지고 봉긋하게 솟은 언덕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았다.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널따란 보리밭 자락에 추수가 끝나 텅 비어진 모습이 허전하기만 했다.

밭 자락에 떨어진 보리 낱알을 주워 먹으려 산에서 온 식구가 내려왔는지? 목덜미에 흰 줄이 둘러진 수꿩 장끼가 고개를 처들어 망을 보다가 내가 그 앞에 다가서자 세차게 울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암꿩의 뒤를 따라 작은 까투리 대여섯 마리가 잔달음질로 솔솔 기어 싸리나무 숲으로 냉큼 숨어버렸다.

보리밭 자락 길가엔 동네 개구쟁이 꼬맹이들이 모여 보리 서리를 하다 어른들의 눈에 띄어 혼쭐이 나 그만 급하게 도망을 쳤는지, 불에 그을리다 멈춘 보리 이삭들이 타다 남은 보릿짚 잿더미 사이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산초나무가 빙 둘러진 서낭당 고갯마루를 내려서 종구네 밭 자락으로 내려가는데 풍한 세월 비바람에 깎아내린 듯 닳을대로 닳은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다. 비문의 글씨가 겨우 몇 자 보일 락 말 락한 비석을 짓궂은 동네 아이들이 올라타고 마구 흔들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채 초라하게 서 있었다.

마을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진식이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그 비석은 아주 오랜 옛날 조선 말기 때 이 고을 출신으로 그리 높지 않은 벼슬인 역참일을 돌보는 순찰 벼슬에 있던 이름을 기억 할 수 없는 분이 그해 그리도 극심한 기근으로 고을 사람들이 온통 굶주리자 자기의 사재(私財)를 털어 궁휼미로 고을 사람들을 구하여 그 덕을 후세 사람들이 기리고자 면내 여러 부락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세운 기념비라 했다.

바로 그 자리에 어제 늦저녁 읍내 장에서 돌아오던 옥순이 어머니가 종구네 밭자락을 얼마 동안을 그리 유심히 둘러보셔 다시금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한번쯤 나도 덩달아 휙 둘러보았다.

벼랑바위 앞에서 옥순이를 만났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하게 묻어나는지 곱게 접은 옥광목 손수건으로 땀을 연신 훔쳐내는 옥순이와 함께 가파른 건널목 위에 올라섰다.

눈앞에 바짝 다가서는 앞산 자락 ‘물레치기’ 양지바른 곳에 참나리꽃 서너 송이 소담하게 피어난 내 아버지 영면하신 터가 푸른 솔 숲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로 인해 다시금 젖어드는 서글픔에 마음 자꾸 애잔스러워 외면 하듯 고개를 돌려?앞들녘을 바라보니 불어오는 들녘 바람이 그도 싫은가? 재두루미 한 마리가 날개를 펴 훨훨 날고 있었다.

지서 건물 앞에 석란이 어머니와 석란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어제 일요일날 주일 예배를 마치고 한동안 소홀했던 주변 사람들과 해후하고 교회 안에 있는 여 전도사님 사택에서 하룻밤을 유숙한 듯했다.

지서 앞에서 석란이를 만났다.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웃음을 띄워 나도 무엇이라 몇 마디쯤은 말을 하고 싶었는데 옆에 석란이 어머니가 계신 탓도 있었지만 갑작스레 바보가 된 듯 하고 싶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입 안에서만 우물거려 그저 멍하니 멀찍이서 바라만 보고 말았다.

그런데 종구는 그동안 석란이네 집 지서 관사에 몇 차례 놀러를 가서 석란이 어머니와 미리얼굴을 익혀 놓은 듯 스스럼없이 인사를 드리며 석란이와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어정쩡한 기분으로 들주막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타고도 주위의 눈치를 살피느라 더욱 말을 나눌 수 없었다. 버스가 읍내에 닿을 때까지 그저 사람들 틈새로 석란이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황산동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강경 역 앞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자 내 눈에 집 모퉁이에 아주까리 몇 그루가 외롭게 햇볕을 받고 있는 석탄 냄새 물씬 풍겨오는 철도관사 가 맞바라보였다. 추녀 끝이 너무 길게 앞으로 내밀어 종일토록 쉽사리 햇볕이 잘 들지 못하는 검정 칠을 듬뿍한 적산가옥이었다.

일제 강접기 때, 그들의 민족성처럼 얍삽하게 지어놓은 단출한 일본식 건물이 어찌 보면 굴욕의 역사에 흔적들이 도사려 있는 듯싶어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나무판자가 잘 말라 매끄럽게 질이 난 마루에 올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그덕,삐그덕’ 하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내 친구 성구네 집, 방 안 한쪽에 놓여 있는 도복에 허리 띠 색깔이 흰색이 아닌 청색으로 바뀌어 보고 있는데 성구가 거울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려 앞으로 몇 달만 더 열심히 하면 3급으로 승급하는 빨간 띠를 딸 수 있다고 그리 자랑을 정신 없이 늘어놓았다.

책상 머리 위 때 묻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하얀 종이를 깔아 놓은 바탕 위에 지난 시절 성구 아버지가 서대전 역에 역무원으로 근무 하셨을 때, 성자 누나와 성구를 앞에 세우고 찍으신 듯한 사진이 한장 들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 들여다보니 빡빡머리 얼굴에 심술이 닥지닥지 달라 붙은 성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액자 안 한쪽엔 성구 어머니께서 성자 누나가 어렸을 적에 품에 안고 찍은 사진이 누렇게 색 바랜 채 꽂아 있었다.

성구와 함게 학교에 가려고 성구 집을 나서려는데 조용한 역 구내의 정적을 깨트리듯 역사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상행 1642열차 용안역 발차, 하행 1345열차 논산역 발차.”

그 당시 호남선 선로가 단선 철로인 관계로 두 열차가 아마도 이곳 강경역에서 서로 비켜가며 교환하기 위해 역 플랫트 홈에 잠시 정차를 하려는 듯했다.

안내 방송 소리가 들리자마자 성구 아버지는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셔서 깃발을 들고 건널목 정리를 하시려는 듯했다.

계절이 여름임을 다시금 각인시키려는 듯 엄청스레 무겁게 보이는 네모난 빙과 나무 통을 짐 자전거 뒤에 실고 챙이 널따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목에 광목 수건을 감으신 아저씨가 소리를 크게 지르셨다.

“아이스케키 얼음과자, 달고 시원한 아이스케키.”

아마도 인근 변두리에 있는 마을로 장사를 나가시려나 선연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의 페달를 밟아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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