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런 아침 햇살 속에 광활한 들녘이 거무죽죽하게 빛바래져 가는 싸리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였다.
크고 작은 논배미들이 다닥다닥 붙어 실로 방만한 들녘을 이뤘다. 그리고 더러더러 바람결을 타고 흙냄새가 코끝에 물씬물씬 묻어났다. 저마다 주어진 땅덩어리에서 나름대로 하나의 소망을 소중하게 가꾸며 살아가는데 그들과 더불어 어울릴 수 있는 그 기회 마져도 하늘이 무참하게 빼앗아 가고 말았다.잃어버린 땅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온통 답답한 마음에 그저 허전하다는 말밖에 더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저 들녘 한 곳 그쯤에 기역자 모양으로 작달막하게 달라붙은 논 서마지기가 시름처럼 눈앞에 다가섰다. 삶의 근간(根幹)을 이루었던 잃어버린 땅덩어리에 대한 가슴 아려오는 기억들을 되뇌이지 않으려 깊이 숨겨 놓으려 해도 이미 헝클어진 상흔(傷痕)들이 하나둘씩 얄밉게 들춰지고 있었다.
그 모두가 갈구(渴求)하는 내 바람의 기대치(期待値)에 근접도 못하여 느럭느럭 걸음질만하니 그런 마음 조급하게 서둘까 봐 마음 쓰이나, 산은 나지막한 소리로 더 참고 기다리라 타이르고 있는 듯했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여름 더위 열기 속에 쌓인 퇴비의 폭삭 썩는 퀘퀘한 냄새가 몰씬몰씬 풍겨났다. 두엄자리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굼벵이라도 잡으려나, 털색이 각기 다른 크고 작은 닭들이 두 발로 헤집어 온통 분잡(紛雜)을 떨었다.
하얀빛 곱살한 꽃이 주를 이룬 가운데 더러는 드문드문 자주색 꽃을 달고 온 사방으로 덩굴을 튼실하게 뻗어 내린 강낭콩이 가늘고 긴 주머니 안에 콩알들을 도톰하게 담고 있어 이제는 수확을 해야만 될 것 같았다.
텃밭 한쪽에 몇 그루 심어 놓은 토마토가 동글동글 야무지게 살이 차올라 서서히 붉은빛을 띠었다. 텃밭에 어머니가 이른 아침부터 저고리 소매 끝에 이슬을 적시며 잡초를 뽑고 계셨다.
눈앞에 마주 바라보이는 작은 초가집을 벗 삼아 적적한 산골을 지키려 하는 원두막이 서 있는 동근이네 참외 밭에는 노란 꽃을 단 참외가 줄기를 실하게 좌우로 내리뻗고 있었다. 뒤질 새라 수박도 검푸른 줄기에 하얀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작은 수박 덩이를 매달고 있어 무릇 그리도 귀여울 수가 없었다.
퍼져 나는 아침 햇살에 저도 얼굴 간지러운가? 온 산골짜기가 제집인 양 참매미가 서둘러 울어댔다. 뒤따라 쓰름매미도 목청껏 울어대고, 조금 멀리 구릉진 둔덕 밭엔 뽕잎을 따러 오신 영호 어머니께서 머리에 쓰고 계신 하얀 수건이 검푸르게 우거진 뽕나무 숲 사이로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이제 아침 먹이를 찾아 들녘으로 내려서려나, 하얀 왜가리 몇 마리가 부지런을 떠는 듯 청솔가지 숲 사이에 희끗희끗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앞 들녘 군데군데에는 집집마다 제가끔 모내기를 하느라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다. 농번기 방학이 부모님들 일손을 도와드리는 효도 방학이라지만, 땅 한 평 없는 나에게는그런 효도를 흉내 내어 보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작은 한숨 속에 그저 시무룩해지기만 하여 고갈되어 가는 내 감성처럼 땅 가죽이 메마르도록 온 대지가 열기로 가득 달아올랐다.
후끈거리는 한낮 열기를 견뎌내기가 부담스러웠던지 밭자락 땅속 깊이 숨어 있던 두더지가 심술맞게 땅을 파헤쳐 놓은 자국이 두서너 군데에 또렷하게 보였다.
동네 앞 개울가엔 동네 아이들이 짧은 막대에 한발쯤 되는 실을 잘라 실 끝에 암놈 잠자리 꼬리를 묶어 덩치가 큰 수놈 잠자리를 잡으려고 잠자리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내달리고 있었다.
‘애부렁, 애에-부렁’하고 수놈 잠자리를 부르며 기현이가 냇둑을 따라 뛰어가자 좀 힘이 센 녀석이 기현이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입술에 물고 있는 잠자리를 뺏으려고 달려들자 기현이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댁질하며 놀고 있었다.
나무다리 위에는 짓궂은 동네 꼬마 녀석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개구리의 항문에 보릿대를 끼워 입이 잔뜩 부어터지도록 배 안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배가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개구리가 눈을 더욱 크게 껌뻑이며 버둥거리자 무엇이 그리도 좋다고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조금 잔인하게도 보였지만 그토록 놀잇감이 없었던 그 시절엔 그렇게라도 해작대며 놀 수밖에 없었다.
초여름 날씨하고는 괘나 쾌청하기만 하였다. 그런 탓이였는지 마을로 부터 동쪽으로 이십 리나 떨어져 있는 구자곡면에 있는 소릿재가 눈 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 하늘에는 뭉게구름 한 덩이가 고느적하게 떠 있어 퍽이나 한가롭게 보였다.그리고 소릿재 아래에 있는 논산훈련소 사격장에서 훈련병들이 사격 훈련을 하는지 ‘탕탕 따당타다탕’ 총소리가 온 들녘을 가로 질러 고개 몇 개를 너머 마을 앞 들녘까지 여법 커다랗게 들려왔다.
그 무렵 모든 학교들이 거의 동시에 실시되는 농번기 방학이라 통학생들이 열차에 오르질 않았다. 너무 홀가분하여 무척이나 심심한지 통학열차가 객쩍게 소리를 내질러 들녘 채운역을 향해 촐랑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덜컹’ 소리를 내며 진입을 알려주려나, 언제나 뻘쭘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철제탑 시그널이 묵직한 팔을 땅 밑을 향해 내렸다.
앞 들녘 방죽 옆 널따란 이장님댁 논에는 눈에 익은 동네 어른들이 모내기를 하시고 허리를 잔뜩 구부려 모를 내시는 어른들의 힘을 덜어주려나, 이번에 면의회 의장 선거에 출마를 하려 하시는 병수네 아버지가 뒤에서 모쟁이를 하시며 평소에 갈고 닦은 실력을 온통 발휘하시려는 듯 목청을 가다듬으셔 노래를 부르셨다.
삶에 찌든 민초들의 뼈 마디마디에 짙게 배인 애환들을 해학적으로 구성지게 묘사한 노랫가락 진도 아리랑을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시며 아주 구성지게 부르셨다. 그러자 논에서 일을 하시던 어른들도 덩달아 신이 나시는 것 같았다. 팽팽히 당겨진 못줄에 빨갛게 달려 있는 나뱅이 앞에 빠른 손놀림으로 모를 꼽으며 병수 아버지가 부르시는 노랫가락의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박자에 맞춰 추임새를 넣으시며 따라 부르셨다.
새참에 드신 술기운이 도는 듯한 민균이 아버지는 그 급한 짬새에도 흥이 절로 나시는지 양 손에 흙물이 질금질금 흘러내리는 볏모를 들고 잠깐 허리를 펴 어깨 춤을 추고 계셨다. 땀내에 찌들고 흙탕물에 젖은 팔소매로 이마를 쓱 문대시며 비록 잠시일지라도 그 시간 만큼은 맘속 깊이 쌓였던 온갖 시름 접어두고격없이 한데 어울려 삶의 소리를 시원스레 내뱉으며 마음 편히 갖으려 하는 몸놀림인 듯싶었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논 한 자락 없이 사는 마음에 한동안 우울키만 했던 마음이 잠시인들 흥겹게 들렸다. 듣기에 그리 편한 노랫가락에 민초들의 진솔한 소리가 가슴속 깊이 촉촉하게 스며 들었다.
넉넉한 동네 인심 만큼이나 멍석을 너부죽하게 펼쳐 놓은 커다란 둥구나무 밑에 기현이 할아버지와 진식이네 할아버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장기를 두고 계셨다. 그리고 담배 공장 노인 분은 옆자리에 너부적하게 앉아 누가 특별히 주문을 한 듯 신주(新註)로 된 장죽 담배 빨부리를 줄톱으로 갈아 번쩍거리게 광을 내시며 곁눈질로 장기 두는 모습을 바라보며 은근슬쩍 훈수를 두려 하셨다.
나무 그늘 한쪽에는 종구네 집일을 하시는 목수 아저씨들이 종구 아버지로부터 품삯을 넉넉하게 받은 것처럼 보였다. 온 사방 들녘에 모내기를 하느라 정신들이 없는데, 벌써 며칠째 종구네 집에서 먹고 자며 들러붙어 일을 하시는 걸로 보아 아마도 여름 첫장마 들기 전에 새로 짓는 집에 기초라도 세우려는 것 같았다.
읍내 우체국에서 외진 동네까지 우체부 아저씨가 먼 길을 잰걸음으로 걸어오시느라 더우신지 연신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치시며 커다란 통신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동네로 들어섰다.
진식이네 집 사랑채 바깥 벽에는 선거법이 개정되어 무소속 출마가 허용된 탓인지 후보자들이 난립(亂立)을 하여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이 보일 정도로 혼란스럽게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지난 정부통령 선거 때보다 벽보의 길이가 두 배쯤은 더 길게 붙어 있어도 바쁜 농사일 탓인지 동네 사람들이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푸석한 고샅길엔 잘 빻은 인절미 콩가루보다 더 고운 흙먼지가 간혈적으로 부는 소슬바람에 가볍게 머리를 들어 이는 듯 바람이 찰나에 스쳐 지나자 도로 제자리에 스르르 힘없이 내려앉았다.
철딱서니 없는 동네 꼬마 아이들이 성급하게 덜 익은 옥수수대를 꺾어 껍질을 벗겨 달짝지근할 줄 알고 입 안에 넣어 씹었는데 덜 익어 비릿하기만 한 것이 별로 맛이 없어 너저분하게 뱉어 놓은 자리에 거무튀튀한 왕파리들이 부글거렸다. 앞으로 다가서자 윙윙 날갯소리를 내며 온 사방으로 흩어지고 이제 겨우 젖을 뗀 듯한 복슬강아지 한 마리가 달랑달랑 방울 소리를 내며 고샅길을 가로질러 제 집을 찾아 뛰어가고 있었다.
색 바랜 볏짚 이엉이 좁다랗게 둘러진 담장엔 제법 자란 호박들이 반진반질 햇살에 등을 태우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대전 가는 쪽에 있는 연산이라는 곳에서 동네로 시집을 오셔 동네 사람들이 연산댁이라고 부르는 용구 어머니께서 비록 사는 형편이 어렵지만 꼿꼿한 성품 만큼이나 검어 멀쑥하게 그을린 얼굴에 맵시 좋게 묶은 마늘 꾸러미를 손으로 들고 한번쯤 만족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꾸러미 좌우로 뻗어난 마늘 이파리를 잘 드는 가위로 매끈하게 자르고 있었다.
우현이네 집에선 아주머니가 들녘 모내기 일을 마치고 돌아오실 우현이 아버지에게 드릴 시원한 콩국을 하시려는지 마루에 앉아 숟가락으로 물에 불린 콩을 떠 넣으며 멧돌을 돌리셨다.
동네 끝머리 집 영호네 뽕나무 나지막한 밑자락엔 동네 꼬마들이 온통 다 따먹어 오디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나무 윗부분 높다란 곳에 남아 있는 오디가 불그레하다 못해 검게 색이 변해 농익어 있었다.
잎줄기 모양새가 해바리기처럼 생긴 돼지감자가 수북하게 자라난 상수네 밭 두덕 상수리 나무 둥지에선 때까치 두 마리가 온 고샅길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햇살 다북다북 내리쬐는 마루에서 라디오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오는 종구네 집 부엌에선 목수 일꾼들의 점심밥을 준비하시는지 쌀밥 익는 냄새가 고소하게 풍겨 나왔다.
노란 오이꽃이 곱살스럽게 피어난 경수 아저씨네 집 마당 안 텃밭엔 오이 줄기가 대나무로 지지대(支持臺)를 세워 놓은 곳에 몸을 기대 서 있고 하얀 꽃을 듬뿍 매단 고춧대도 마늘이 떠나 빈 밭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복실 강아지 한 마리가 두 내외가 모두 들녘으로 일 나가 텅 빈 집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우물가에는 이장댁 아주머니가 점심 못밥을 준비하시려나, 감자 껍질을 끝이 잘 닳은 달챙이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 물에 씻으시고 고등어찌개를 푸짐하게 장만하시려나 고등어 배를 갈라 내장을 칼끝으로 긁어내셨다.
동네에서 고추 농사를 풍성하게 지시는 준섭이 어머니가 논에 못밥을 내가시는 듯 밥과 반찬이 가득 들어 있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시고 들녘으로 발길을 옮기고 계셨다.
그 옆에는 어른들 눈을 피해 얼렁뚱땅 따서 두어 번 베어 먹은 듯 하얀 속살이 누렇게 변한 손가락 굵기만한 가지를 손에 움켜 쥔 작은 아들이, 종종 걸음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큰 아들 준섭이는 손에 술 주전자를 들고 무엇이 비위에 거슬렀는지 칭얼거리며 아주머니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고샅길 안쪽 옥순이네집 감나무에선 매미가 점점 세차게 내리쪼이는 여름 뙤약볕이 지겨워서 그저 울어대는 것이 아니였다. 아예 우물터가 떠내려가도록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가 오히려 지긋한 여름 더위를 더욱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보리를 볶은 냄새가 은은히 배어드는 널따란 안마당에는 찾아온 뭉게구름을 반갑게 맞이하려나, 덜 자란 단수숫대가 작은 목을 더욱 빼 내밀고 있었다. 잿빛 잠자리 틈사이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한두 마리 섞여 훨훨 날아 구름을 타고 싶나, 하늘을 휘저어 한가로이 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늘진 마루 위에는 옥순이 어머니가 미숫가루를 만드시려는지 멧돌에 잘 볶은 보리를 넣고 곱게 빻으신 듯한 타박타박한 보릿가루를 손으로 비벼보신 후 조금은 덜 빻아졌는지 멧돌질을 계속하셨다.
나보다 하루 먼저 농번기 방학을 한 옥순이가 어제 들녘 논에서 모내기를 하였다.그런데 다들 집집마다 농사철이아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마음에 모쟁이를 했는지 거머리에게 물려 근질거리는 다리를 마구 긁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서로 마주치자 무르팍 위까지 바짝 걷어 올려 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다 보이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던지 얼른 치마를 아래로 내려트렸다.그리고 무안한 얼굴에 그런 분위기를 얼릉뚱땅 넘기려고 싱겁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바로 마루 한쪽에 놓여 있는 군데군데 피가 묻은 홑이불을 한아름 가슴에 잔뜩 끌어 안고 급하게 토방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고무신을 짝이 맞지도 않게 서둘러 신고 급한 걸음 하여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래서?무슨 빨래를 하는데 저렇게 까지 정신을 못차리게 서두는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을 해보며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