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226 조회 : 1,261




조금 멀리 떨어진 동편(東便) 산마루턱에 현란한 붉은 자태를 드리우며 동이 텄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침 해는 인간사(人間事) 부질없는 시름을 모두 모아 지우려나 듬직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굴곡진 삶의 여로(旅路)에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는 내 아픔의 흔적이며 알알 맺힌 고뇌인 것 같았다. 언제나 작은 기대감이 마음에 가득차 꿈결 같은 허상을 짬이 없이 그려보아도 끝내 이루지도 못하는 아쉬움에 한숨 소리만 허공에 흩뿌렸다.

해는 투명한 만큼이나 머리 위에 쨍쨍하게 내리쬐고 푸르스름한 들녘 너머 부연 흙먼지 이는 신작로 길이 서쪽 읍내로 가지런하게 뻗어나 있었다.

그저 무심코 슬쩍 스쳐가는 줄만 알았던 바람이 후덥지근한 몸에 와 닿아 시원스럽게 느껴져 아쉬운대로 작은 위안이 되었다.

동네 어른들이 앞 들녘 논자락을 두루 돌아 살펴보시고 둥구나무 밑에 모여 온통 타들어 가는 가뭄에 대한 걱정스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햇살이 실팍하게 내리쪼이는 개울가에는 동네 아이들이 가뭄으로 속이 타들어 가는 어른들 마음을 모르는 채 그저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개울가에 듬성듬성 물이 고여 있는 풀숲을 들척거려 송사리와 새웅개며 미꾸라지, 그리고 붕어를 잡으려 했다. 그래서 대소쿠리와 어레미 그리고 함석 물통을 야무지게 손에 쥐고 그리 좋다고 재잘거리며 냇가로 향하고 있었다.

조금 먼발치 벼랑바위 앞에는 등마루에 사는 방물장수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종구네 아버지가 좋은 재혼 자리를 부탁하며 선심을 쓰듯 쌀 한 가마니를 건네주었는데 인연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중매를 섰던 일이 제대로 성사가 되질 않았다. 그런 연유로 받아 쓴 쌀가마니에 부담을 느꼈던지 한동안 통 소식이 없던 방물장수 할머니가 오랜만에 동네를 향해 어무적어무적 걸어오셨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계시던 상수 아버지께서 말을 꺼내셨다.

“아니! 저기 벼랑바위 앞에 걸어오는 게 그 등마루 사는 방물장수 노인네 아닌감? 시한 내 가물치 콧구멍처럼 안 보이더니 무신 일루 오는지 모르것네. 늙으면 귀가 어두워진다고 하는디 용케도 어디서 동섭이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는다는 소문을 주워 들었는가? 아니면 이 궁한 때 또 쌀가마니 생각이 나서 또다시 슬슬 동섭이 속맴을 건들여 볼 요량으로 그러는가? 저리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구먼. 그건 그렇구 가뭄에 넘 애간장 타들어 가는지도 모르구 젠장 저놈의 매미는 아침부터 느작머리 없이 울어대는지 모르것네, 그려.”

그러자 경수 아저시와 술내기 장기를 두시던 준섭이 아버지가 말을 이으셨다.

“아따! 성님두 동섭이 성님이 누군데 그딴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것네. 그 양반 바늘로 찔려두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인디 무신 말을 그리 헌데유? 그때는 혼자 살기 이참 저참 궁하다 보닌께 약아 빠진 고양이 밤눈이 어둡다구 다급해서 뭐가 눈에 쓰여서 그랬나 몰라두, 이번에는 하늘 무너지는 한이 있어두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지.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진 않을 거구만유.”

“허긴 자네 말 들어 보닌께 그 말이 맞을 성싶기는 헌디, 저렇게나 큰 집을 짓는 걸 보면 필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 건디, 동섭이가 워낙 입을 꽉 다물고 있어 동네 사람 아무두 속셈을 모르고 사니 그저 궁금허기만 헌디, 암튼 조만간에 뭔 일이 있기는 있을 거구먼. 그렇치 않고서야 멀쩡한 집 놔두고 뭣 땀시 저 먼디 산자락 밑에 집을 따로 짓겄는가, 안 그려?”

말씀을 마치신 상수네 아버지께서 궁금해 하시는 얼굴로 면소재지 쪽을 바라보시자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우현이 아버지가 말을 거들기 시작하셨다.

“아! 뭣들이 그리덜 궁금혀서 그러는지 모르겄네. 다 무신 속내가 있으닌께 집을 짓는 거겠지. 그러려니 허구 가만히 있어 보면 저마다 눈 달리구 귀 달렸으닌께, 집이 떠내려가지 않는 이상 어련히 알게 될 꺼라구 그리덜 성화를 대는지 모르것네 그려.”

그러자 잠자코 우현이 아버지가 하시는 말을 듣고 계시던 상수네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여셧다.

“허기사 자네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모른다고 동섭이가 터놓구 말하지 않는 이상 그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는 거지 뭐. 그나저나 저리 집을 크게 지을라면 몇 날 며칠 묵어가며 일하는 목수들 뒤치다꺼리 할라, 여기저기서 불러다 쓰는 일꾼들 품삯두 수월찮게 들어갈 건디.”

그렇게 말을 끝마친 상수네 아버지가 말로는 우현이 아버지 말씀에 공감을 하는 척하면서도 눈빛엔 궁금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어른들의 하시는 말씀에 나 자신도 종구네 집에 대하여 은연중에 굼금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종구네 아버지가 새로 집을 짓고 있는 터는 지난번 정부통령 선거 끝에 부푼 꿈을 안고 기와 공장을 세우려는 욕심에 종금이 누나네 밭을 시세보다 턱없이 비싸게 사들였던 곳 이었다. 장마가 오기 전에 서둘러 기둥을 세워 지붕이라도 이으려나,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삯일꾼들을 예법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아주 굵은 밧줄로 동여맨 큰 바윗돌에 장정 여러 명이 달라붙어 며칠동안 들었다 놓았다 하여 딴딴하게 다져 놓은 땅에 도목수(都木手)의 지시에 따라 주춧돌을 놓아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둥구나무 밑에는 목수 두 분이 서까래와 기둥에 끼워 넣을 목재를 다듬어 나무에 구멍을 파려고 끌을 두드리는 쇠망치 소리가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거북살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벽에 찰싹 들러 붙어있는 선거 벽보가 흙먼지에 서서히 색이 바래져 가고 있었다.

검푸르러지는 호박잎들이 뒤덮인 담장 사이로 뻐끔히 바라보이는 좁다란 동네 고샅길에 종구가 자기네 집과 오촌(五寸)이 되는 당숙모(堂叔母)와 함께 새참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그 아주머니가 지난 몇 해 전에 우리가 살았던 동네 우물가에 있던 집을 사들여 멀리 전라도 정읍이라는 곳에서 이사를 오신 분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첫울음을 터트렸고 유아기를 보내며 살았던 그 집에 대한 아픔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으쓱대며 걸어오는 종구와 대면하기가 그렇고 하여 서둘러 발걸음 하여 우현이네 담쪽으로 비켜서고 말았다.

그때 등 뒤에서 ‘팽’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뒤돌아보니 집으로 돌아오시는 우현이 아버지가 남달리 꼼꼼하신 성격에 그때까지도 삼식이 아버지가 하신 말에 기분이 덜 풀리신 듯 보였다. 우현이 아버지께서 냅다 코를 세게 푸시고 담장에 달려 있는 호박잎에 손을 문대시며 마른 기침을 한차례 크게 내셨다.

사립문을 막 들어 서시던 우현이 아버지가 마당에서 대나무를 잘라 물총을 만들고 있는 우현이를 향해 큰소리를 치셨다.

“야, 이놈아! 니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딴 짓거리 하구 놀라구만 허냐? 너두 내년에는 넘들 다 들어가는 중핵교에 들어가야 헐 껀디, 맨날 그리 노는 것에만 미쳐 날뛰니 너두 싹수는 노랗다.”

우현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으로 자르다 멈춘 대나무 토막을 들고 얼른 뒤꼍으로 돌아가자 마루에 앉아 완두콩을 까시던 우현이 어머니가 슬슬 우현이 아버지의 얼굴빛을 살피며 말씀하셨다.

“아! 당신은 학교에서 내준 숙제 다해 놓구서 잘 놀고 있는 애를 뭣땀시 그리 세게 나무래킨데유? 이 양반이 아무래두 오늘 밖에서 무신 언짢은 일이라두 있었던 모양이구먼. 그렇치 않구는 저리 심허게 혼내키지 않을 건디.”

“임자는 다 좋은디 그게 탈이란 말여. 그저 자식새끼 싸고돌기만 하면 되는 줄 알구, 내 원 참.”

그리고 모를 낸 논배미를 둘러보시려는지 헛간에서 삽을 꺼내 들고 다시 집 밖으로 나가셨다.

모두들 마른 가뭄에 바짝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지 이상하리만큼 선거 벽보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지난 정부통령 선거 때와는 다르게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닌 말로 불운으로 가뭄이라도 들면 조상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다랑논 천둥지기(天水畓)를 붙들고 사는 몇몇 집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저 거북이 등판 모양으로 갈라지는 논바닥을 멀거니 쳐다보며 하늘 무너져라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 논바닥이 더는 바라보기 싫어 후딱 갈아엎고 싶은 마음이 천만번(千萬番)이나 들었다. 하지만 내남없이 씨앗이 없으니 그리도 못하고 마땅한 후작이 있을 리 없어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 굶주림에 허덕이며 살았던 참혹한 시대였으며 농사를 짓는 방법도 달에 기준을 둔 음력의 절기를 손가락 꼽아가며 맞추는 좀 비과학적인 영농법이었다.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더 많은 진식이네 집 두엄자리에는 모래로 둥그렇게 둘러놓은 자리에 고구마 순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막연하게 하늘만 바라보며 단비만 기다리고 있어 답답한 마음만 들었다.

동네 길가 승연네 집에는 가죽나무 한 그루가 뻘쭘하게 서 있었다. 승연이 아버지는 멀리 전라남도 바닷가 어디에선가 살다가 자기 어머니와 함께 미역과 김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동네에 장사를 하러 왔었다. 그때 동네 처녀였던 승연네 어머니와 서로 눈이 맞아 눌러앉아 살게 된 것이었다.

승연이 아버지가 읍내에 나가 발품을 부지런히 팔아 운 좋게 구해 오셨는지 칠이 잔뜩 벗겨져 닳고 닳은 미군이 쓰다 버린 화이버로 인분(人糞)을 푸는 똥바가지를 만들고 계셨다. 잘 마른 참나무로 똥바가지 자루를 하려고 화이버에 불에 달궈진 가는 송곳으로 구멍을 뚫었다.

하지를 지나 담장 위에 호박들이 성글게 등을 내밀고 여름 더위가 시작된다는 소서(小暑)가 코앞인데도 하늘이 비 한 방울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타들어 가는 것이 속마음이고 늘어나는 것이 근심뿐이었다. 속 모르는 매미는 가죽나무 위에서 속없이 울어만 대니 승연이 아버지가 무척이나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씀을 하셨다.

“아따 저놈의 매미까장 속창아리 없이 ‘지랄 발광 네곱질’을 하며 울고 있네 그려.”

전후(前後) 모든 물자가 무척이나 부족하여 귀했던 그 시절, 미제 물건은 사람들에게 참 인기가 좋아았다. 국민학교 시절 어쩌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우유 가루가 그리도 맛있었다. 그리고 성조기가 그려진 바탕에 서로 손을 잡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쇄된 밀가루가 단연 인기 최고였다.

그리고 아주 구하기 힘들었던 향긋한 냄새가 입안 가득 도는 껌은 어쩌다 운 좋게 군용열차를 타고 가는 얼굴이 온통 새까만 미군들을 만나 두 손을 힘차게 흔들며 ‘헬로헬로’로 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면 허연 이빨을 들어내어 씩 웃으며 던져 주는 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껌이 그리도 귀해 단물이 다 빠져 입 안이 아리도록 진종일 씹다가 밤에 잘 때는 방벽에 붙여 놓았다 다음날 다시 떼어 입에 물고 놀았다.

설탕은 맛보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리고 좀약 냄새가 물씬 나는 미제 군복 아랫바지는 무척이나 질기고 엄청 커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군복 바짓가랑이 속에 쌀 너댓 말은 들어간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덩치 큰 모과나무가 있는 성천이네 집에는 성천이 아버지가 가뭄에 마음이 답답하셔 절기를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한 장의 종이에 12개월이 모두 들어 있는 달력에 인쇄된 아라비아 숫자 위에 있는 작은 한자 글씨가 안 보이는지 마당에 놀고 있는 성천이를 불러 한번 읽어 보라고 하셨다.

이제 겨우 국민학교 4학년인 아들이 한자를 알 리 없어 우물거리자 성천이 얼굴을 빤히 바라보시며 한말씀 하셨다.

“나이도 어린 놈이 벌써부터 눈이 그리 나뻐서 어디다 쓸 거냐? 나사 다 알고 읽을 줄 알지만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서 못 읽는 거지.”

그래도 못배운 티는 내지 않으려 시침을 뚝 떼고 부모된 체면은 세우려고 하니 부엌으로 가시던 성천이 어머니는 자기 남편의 공부 끝다리를 아는지라 그저 어이없어 남편 몰래 가만히 웃기만 하셨다.

비좁은 동네 고샅길에 늘 심심찮게 들려오던 영택이네 축음기는 가뭄에 애태우는 동네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그러는지 아니면 종구네 라디오에 기세가 눌렸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경수 아저씨는 이 근심 저 근심 잊으시려 논두렁에 통발을 놓아 깻묵이나 쇠똥을 넣고 미꾸라지라도 잡아 끓여서 막걸리라도 한잔 하실려나, 통발을 들고 사립짝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완두콩을 넣은 보리개떡을 손에 쥔 큰아들이 따라나서려 하니 큰소리를 치시자 큰아들이 노여운 듯 커다랗게 울고 있었다.

동네에 내려온 참에 내 친구 옥순이 네 집에도 들러 보고 싶었지만 ‘싸리 잎 퍼렇게 자라날 때는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지 말라.’는 어른들 말씀처럼, 아무리 부모들끼리 다정한 친구 사이라고 해도 넘 자주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그것보다는 지난번에 있었던 ‘몸엣것’ 때문에 자꾸만 나를 피하려 하는 옥순이가 조금씩 부담스러워 그냥 빌길을 돌려 집으로 오고 말았다.

방죽가 기현이 네 집을 지나려니 기현이 할아버지가 밤나무 밑에 단지를 묻고 계셨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지네를 잡으시려고 단지 안에 닭뼈를 넣고 계셨다. 그저 굼벵이만 잡아 파시는 줄 알았는데 지네도 잡으셔 실로 매달아 잘 마린 다음 읍내 한약방에 내다 파시는 것 같았다.

후덥지근하기만 한 날씨에 달달하게 불어오는 선들바람이 반갑기만 한 언덕에 올랐다. 읍내로 향하는 버스가 쟁글쟁글 내리비치는 한낮 햇볕을 잔등과 창문에 넉넉하게 받아 번쩍거리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르고 있었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