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227 조회 : 1,332




이른 아침나절부터 우중충한 날씨에 먹구름이 새살맞게 붙었다 흩어졌다를 수차례 반복했다. 아마도 한차례 비라도 흠씬 뿌릴 것만 같았다. 오랜 가뭄에 해갈를 해주려나? 하는 기대 찬 설레임에 마음은 한껏 들떴다.

그러나 오후로 접어들자 변덕 심한 여름 날씨답게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침을 뚝 떼고 허무하게 구름만 둥실거렸다. 애틋한 눈으로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애태워 기다리는 비는 내릴 것 같지 않아 다시금 마음이 서운해졌다.

허탈한 농부들의 근심으로 가득 찬 눈빛은 아랑곳하질 않고 구름은 넉살스레 산마루턱에 걸쳐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머물러 어찌나 얄밉게 보였는지 모른다.

철로 변 기현이네 집에는 까칠해져 수심 가득 찬 얼굴에 애처롭게 주름만 늘어나신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악몽 같던 그날을 되뇌고 계셨다. 대여섯 살 난 어린 손자를 무참히 버리고 떠난 며느리의 매몰찬 뒷모습이 흔적 지워 사라져간 오솔길을 우두커니 바라보셨다.

어린 기현이도 가누기도 힘든 서러움에 깨어진 모정의 기억들을 붙들려 어미가 사라져간 오솔길을 눈 빠져라 바라보았다. 숱한 날 애태우는 그리움에 지친 어린 마음이 그리 안쓰러운가? 쨍쨍 내리쪼이는 한낮 햇살이 호박 넝쿨이 뒤덮인 흙담장을 어물쩍하게 넘어 낮 동안이라도 텃마당에 진득하게 머물러 줄 것만 같았다.

울타리 한구석을 조촐하게 지키던 석류나무의 꽃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꽃에 취해 날아든 얼룩무늬 나비 두어 마리가 나풀나풀 넘놀고 조막만한 텃밭의 노란 오이꽃은 목마름이 지겨워 이내 졸고만 있었다.

언덕 아래 논 가장자리 우묵 파인 둠벙(웅덩이)엔 논병아리들이 여유롭게 자맥질을 하고 하얀 왜가리 서너 마리가 미꾸라지라도 잡으려는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목을 어중간하게 내밀어 좁아터진 논둑을 가느다란 다리로 어정어정 걸으며 뻔질나게 물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끔한 논물이 잘 침전된 논배미에 등 언저리가 보일락 말락 자름자름한 우렁 몇 마리가 들쪼이는 햇볕이 싫어 조금은 물 깊은 곳으로 찾아들려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게 보였다.

풀 내음 마냥 싱그럽기만 한 가파른 언덕의 깎아지를 듯한 벼랑엔 담쟁이덩굴이 억척스레 벽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손끝을 힘껏 뻗어 갈구하는 그 무엇인가를 애타게 붙잡으려 들러붙어 있는 모습이 그리 끈기 있게 보였다.

뜨거운 한낮 햇볕에 열기를 더하는 흥남이 아저씨네 집 두엄자리에서 겨우내 깊숙이 묻혀 썩어 잘 부식된 떡갈나무 잎이 비죽비죽하게 바라보였다.

큼지막하게 기와집을 짓고 있는 종구네 아버지는 곧 닥쳐올 여름 장마에 우선 기와지붕이라도 먼저 얹으려 몸이 달은 것 같았다. 일을 서두느라 집안 앞뒤로 다니며 일꾼들을 독려했다.

읍내에서 온 기와공들과 목재를 다루는 목수들 그리고 잔일을 거두는 삯일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집을 짓는 모습을 구경하러 온 인근 부락 사람들까지 뒤섞여 마치 무슨 잔치를 치루고 있는 집처럼 무척이나 분잡하게 보였다. 서서히 겉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종구네 기와집은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그 시절 어린 눈에 비친 모습으로는 실로 너무도 크다 못해 웅장하기만 했다.

말이 좋아 사람 사는 집이라고들 하지만 잘사는 부잣집 헛간 만도 못한 내 작은 초가집과는그 편차(偏差)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엄청난 차이를 보여 고르지 못한 삶에 대한 소외감을 느꼈다.

잡다한 번민의 굴레에서 벗어나 빈곤할지언정 마음만이라도 홀가분해지려 때론 억지로 피하려 그리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눈만 뜨면 확연하게 바라보이는 잃어버린 들녘 논배미 서마지기가 끈질기게 들러붙은 가난에 대한 회의감 속에 아픔 또한 번차로 몰고왔다.

그런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앞산에 그저 말없이 누워만 계시는 내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뒤섞여 세월이 얼만큼은 지났어도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아픔은 눈덩이처럼 불어 나기만 했다.

그렇게 가난에 대한 도드라진 아픔은 작은 가슴속을 움실움실 헤집어 삐죽삐죽 동요(動搖)가 일기 시작하여 햇볕에 푸석푸석 말라 가는 흙처럼 까맣게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너른 들녘을 향해 느릿 걸음 하는 여름 해와 한낮 동안 짧은 만남이 아쉬운가? 풀잎 위에 다소곳하게 내려앉은 잠자리가 당글당글한 눈망울을 쉴 새 없이 굴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붉은빛이 겨우 들 듯 말 듯 푸르딩딩한 열매가 띄엄띄엄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돌복숭아나무 한 그루 호젓하게 서 있는 개울가가 그리도 적적해 보였다.

물이 적어 물살의 흐름이 꽤 느린 개울 푸른 물이끼 가득 낀 돌덩이에 기어오르려던 등짝이 거무스레한 갈게 한 마리가 발자국 소리에 놀라 서둘러 갈잎 사이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산자락 밑에 오붓하게 자릴 잡아 물이 잘 빠지는 계단식 어레미논 가장자리엔 강아지풀 이파리에 연초록빛 작은 여치 한 마리가 찰싹 올라앉아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런 논을 ‘다랑치논’이라고도 불렀고 이토록 세월이 오래 지난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종일토록 푸른 들녘을 샅샅이 뒤지던 해가 서산머리 금강 둑 위로 늠실늠실 오르려 했다. 봉긋하게 솟은 지붕 머리 위에 작은 굴뚝새 몇 마리가 재잘거리는 원두막을 지나니 사립짝 안마당 빨랫줄엔 내일 학교에 입고 갈 교복이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산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나지막한 초가지붕과 어울려 퍽이나 평온하게 보였다.

줄기를 자르면 노란 유즙이 나와 그 액을 옻 오른 데 바르면 효과가 아주 좋은 까치다리(애기똥풀)의 노란꽃이 봄부터 여름까지 피어나는 둔덕 아래 텃밭에 순덕이 어머니가 저녁 반찬에 나물로 무치시려나, 듬성듬성 아기 고추가 눈인사를 하는 연한 고춧잎을 조심스레 골라 따셨다. 밭둑에서 혼자 놀고 있는 순덕이가 잽싸게 기어 달아나는 땅강아지를 붙들려 게걸음을 하고 있었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구름과 구름에 고루 닿아 오색영롱(五色玲瓏)한 빛으로 널따란 들녘을 온통 물들였다. 높아 한결 푸르기만 한 자애로운 하늘은 낭랑한 모습으로 울룩불룩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을 젖내 몰씬 나던 내 어머니의 온기 서린 젖무덤처럼 푹 감싸안아 보듬고 있었다.

어쩌다 동네 아이들이 말썽을 일으키면 온 동네 사람들 모두들 들으라고 유난스레 고샅길에 나와 떠들어대시는 꼬잘스런 선기네 아버지가 좁다랗게만 보이는 오솔길 아래로 지게에 풋나무를 한짐 지고 내려오셨다.

어디에선가 보릿짚을 태우고 있는 매캐한 냄새가 풍겨 앞을 바라보았다. 우물가 집에 사는 인식이가 나에게 강아지풀 줄기에 아가미를 꿰어 매달은 가재 꾸러미를 자랑이나 하려는 듯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하얀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도랑가에, 동네 동생들 두서너 명이 햇볕에 잘 마른 보릿짚에 불을 놓아 가재의 등더리와 집게발이 불그레해질 때까지 굽고 있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살이 잘 오른 개구리 뒷다리를 가는 철사에 끼워 비교적 물의 흐름이 잔잔하며 틈이 벌어진 바윗돌 앞에 대고 살살 흔들었다. 그러면 돌 틈 사이에서 먹이를 노리던 가재란 놈이 덥썩 물면 철사 줄을 얼른 꺼내 가재를 잡았다. 그러나 가뭄에 도랑물이 바짝 마르면 너나할 것없이 돌팍(돌멩이)을 들춰 심심찮게 솔솔 기어 나오는 가재를 잡고 놀았다.

하루 해가 서쪽 들녘 끝머리에 허리춤을 추스리는 초저녁이 되면 산 밑 밭 자락에 하루 내 드문드문 보이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무거운 정적(靜寂)을 몰고 오는 어둠살이 산마루부터 야금야금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냇둑에 매어 놓은 염소들이 짐에 돌아가고 싶은가? ‘메애에, 메애에’ 하며 채근대듯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새끼 노란 주둥이 안에 넣어 줄 먹이를 구하려, 종일토록 분주하게 날던 제비들도 이제는 둥지에 들려나, 앞마당 빨랫줄에 부리로 몸을 가다듬어 꼬리를 들축거렸다.

노을빛 짙어갈 무렵, 서낭당 마루턱에서 읍내로 장사를 하러 가셨던 어머니를 만나 함께 집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종구네 새집 지붕 위에 수키와와 암키와가 균형을 맞춰 올려진 기와을 바라보시던 어머니께서 꽤나 부러우신 듯 말씀하셨다.

“아따 벌써 지붕이 저만치나 올라가고 있네 그려. 참 돈이 좋기는 좋구나. 잘살아 가진 것이 넘쳐나니 대수롭지 않게 저리 집을 큼직막허게 짓지, 뭐시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네들이야 어디 꿈두 못 꿔 볼 일이지, 하여튼간 남의 집일망정 쳐다보기에 좋기는 좋구나. 에휴, 나는 언제 우리 아들이 커서 돈 몽땅 벌어가지구, 저런 집 한번 져 줄란가 모르것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무척이나 부러우신 눈빛으로 종구네 새집을 바라보고 계셨다. 두서너 해 전 까지만해도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거침새 없이 앞에 나서 ‘엄마! 내가 꼭 소원 풀어 줄 틴께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 놓구 기둘려.’라고 그리 쉽게도 말을 하였지만 이젠 냉엄한 현실 속에 처해진 어린 내 능력의 한계를 알기에 그저 묵묵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시야가 열네 살 나이 만큼은 서서히 밝아져 가고 가능과 불가능을 가늠할 수 있는 지각(知覺)이 뒤따르니 어찌 보면 처해진 삶에 잘 길들어져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개구리 울음소리 따라 알이 점점 영글어 가는 옥수수가 줄지어 서 밤을 지키려 하니 마당 한가운데 보릿짚 멍석을 깔고 흐린 달빛을 벗 삼아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 것도 나름대로 산골의 정취를 돋우는 듯했다.

스치는 바람이 조금은 서늘하여 머릴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 몸 숨기는 초승달 애처롭게 오늘도 그쯤에 떠 있었다. 그토록 숱한 밤 지새워 누구를 기다리나, 잿빛으로 색 바랜 뒷간 지붕 위에 낮 동안 널따란 잎사귀에 숨어 있던 하얀 박꽃이 흐린 달빛에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울타리에 서 있는 아주까리 잎사귀가 너울거리는 남포등 불빛에 일렁이듯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별무리 속에서 한 덩이 유성이 하얀 선을 어둑어둑한 밤하늘에 선명하게 남겼다. 그리고 이내 흔적 없이 사라져 가니 덧없이 가는 우리네 삶 모두가 그럴 것만 같았다.

그런저런 생각에 등돌려 잠자리에 누우니 봉창 밖으로 새치름한 달빛이 새어 들었다.

후덥지근한 밤의 열기에 쪽마루 앞 토방(土房)에 자리를 잡은 검둥이가 자꾸만 몸을 들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여름밤을 더 길게 새우려 했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