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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30 조회 : 1,185




가뭄으로 바짝 타들어 가던 대지(大地])를 해갈(解渴)시키려나 장맛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종일토록 비가 내려 조금은 터분하기만 했다. 하루가 어스레하게 기울어 가는 저녁녘이 되자 서서히 찾아드는 허기(虛飢) 때문에 마음은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조급한 마음에 발길을 서둘러 가파른 성황당 언덕배기에 올랐다. 맑게 개인 날에는 성황당 주위를 멤돌며 심심치 않게 우짖어 주던 산제비들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저 당산나무에 걸쳐 놓은 헝겊 조각들이 비에 축축하게 젖어 불어오는 바람에 들썩거려 허줄그레하게 보였다. 더불어 서낭당 고갯마루에 우두커니 서 있는 둥구나무가 궂은 날씨보다 더 을씬년스럽게 보였다.

비에 흠씬 젖어 미끄러운 성황당 내리막길을 걸어 짙은 향이 물씬 배어나는 산초나무가 서 있는 야트막한 둔덕에 발길이 닿았다. 눈앞에 빤히 바라보이는 낮은 초가집의 좁은 쪽마루에는 내 어머니께서 마루 기둥을 손으로 잡으시고 머리를 엇비스듬히 내밀어 밭둑길 따라 집을 향해 걸어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계셨다.

하루 내 그리도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해질녘이 되자 잠시 멈췄다. 구름이 하루내 잔뜩 움켜쥐고 있던 산자락을 놓아줄 듯 수런거리며 슬슬 흩어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또다시 변덕(變德)을 부리나, 굼틀굼틀 몰려와 어김없이 찾아드는 어둠살과 뒤엉켜 버렸다.

침울하게 내려 앉은 먹구름이 제 모습을 찾으려 바둥거리던 산자락을 한 부분씩 서서히 집어삼키려 하더니 이내 산릉선에 올라 산봉우리마저 지워버리려 했다.

신발 바닥에 붉은 황토가 진득진득하게 묻어나는 울퉁불퉁한 밭둑길을 두어 차례 굽이돌아 사립짝 앞에 닿았다. 그때 남쪽 들녘 너머 용꽃 마을 당산나무 우듬지 위에 시퍼런 빛을 섬뜩하게 비치며 찰나에 번개가 스치는 듯하여 멈칫거렸다. 갑작스레 불어오는 드센 바람이 자잘한 나뭇가지들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이윽고 모진 바람이 비를 몰고와 높다란 언덕배기에 하늘 항해 우뚝우뚝 치솟은 굵은 소나무 가지마저 암팡지게 흔들어댔다. '쏴아'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검둥이는 목을 잔뜩 쳐들어 솔바람 소리가 난 산언덕과 번쩍번쩍하며 번갯불이 스쳐 지난 용꽃 마을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나 아랫마을보다 어둠살이 먼저 찾아드는 산골짝 초가집엔 순덕이 어머니가 서둘러 저녁밥을 지으시는 것 같았다. ‘타닥타닥’ 삭정이 타드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살이 도톰하게 오른 제철 만난 병어로 찌개를 끓이시는지 담백한 냄새가 싸리 울타리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어스름한 방 안에서는 한참 말을 배우려 드는 순덕이가 뜻 모를 저만의 말들을 혼자서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문턱이 낮은 만큼이나 크지도 못해 작아 터진 방은 눅눅한 습기가 가득차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곳엔 소록소록 돋아나는 정으로 돌돌 뭉친 그리움이 살아 있었다. 살갑게 다가서는 얼굴들이 켜켜이 쌓여 가는 옹골진 정만큼이나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또렷한 표정으로 늘 내 곁에 머물렀다.
그런 힘이 있었기에 깐작깐작 달라붙은 내 아픔을 한 조각 한 조각씩 떼어낼 수 있었다. 더불어 내 작은 몸둥아리에 들붙어 있던 고뇌스런 번민을 떨쳐 버리고 다시금 도약할 수 있는 단초를 이루어 주는 것 같았다.

소리 없이 찾아드는 어둠살에 외짝 방문 하얀 문풍지가 점점 침침하게 보였다. 느슨하게 목을 축 늘어트린 보리쌀 자루가 놓인 아랫목 방 벽 위로 거무스레 보이는 봉창이 더없이 침울하게만 보였다.

그저 벽면에 삐뚤삐뚤한 문 하나 작달막하게 트여 있으니 말이 좋아 봉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 산골짝으로 이사를 와서 처음 집을 지을 때 가뜩이나 낮은 천장에 진흙으로 쌓아올린 사방 벽에 틈새 하나 없으면 햇볕이 안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좁은 방이 더욱 어두워질 것만 같아 어설프게라도 봉창 하나를 내었다.

애시당초 집을 지을 때 흙벽을 쌓아 올리며 문틀을 끼워 넣는 것이 정상이었다. 허나 모두 다 잃어버린 가난으로 가진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반반한 목수를 단 한 사람도 부르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의 측은지심으로 남의 손을 빌려 짓는 집이다 보니 이것저것 따질 정황도 없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단 한 푼 받지도 않고 그리라도 배려해 주시는 분들에게 그저 감지덕지할 처지이다 보니 처분만 바랄 뿐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동네 어른들 중에 그 누구도 목수 발끝에도 가 본 일이 없어 선뜻 나서지도 못했다. 그래도 어른들 중에서 손재주가 좀 있다고 하시는 민균이 아버지가 어림짐작으로 앞산에서 베어 온 둥그런 나무를 자귀로 대충 맨드름하게 깎았다. 그리고 삐뚜룩한 문틀을 벽 틈사이에 끼워 넣어 문틀이 똑바른 모양이 될 리 없었다. 어딘가 어설프게 찌부러진 네모난 창을 그냥 남쪽으로 내어 달았다.
그리고 창틀에 마른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열십자 모양으로 엮었다. 그런 다음 문창호지를 대나무 살에 덧대어 바른 그런 허술한 봉창이었다. 한겨울이 되면 두 손발 끝마디까지 시리다 못해 저려오는 한파에 어김없이 찾아드는 삭풍이 세차게 들이쳐 문풍지가 사시나무 떨리듯 웅웅거렸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허기진 배를 웅크려 억지로 잠을 이뤄야 했다.
얇디얇은 문풍지를 뚫고 방 안으로 거침없이 스며드는 찬 냉기가 코를 얼얼하게 하여 이불을 두툼하게 뒤집어써도 얼굴이 시리도록 와 닿는 냉기로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차가운 이불을 푹 둘러써 온몸을 녹이며 허기진 새앙쥐 구멍 밖을 조심스레 내다보는 것처럼 새까만 두 눈망울을 소리 없이 굴려야 했다.

그토록 겨울 추위 또한 만만치 않아 배고픈 설움 다음으로 추위에 떨며 살아야 하는 아픔을 뼈아프게 겪으며 살았다. 그리고 무척이나 야속한 내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떨구지도 못하는 찌든 가난에 숱한 밤 눈언저리엔 눈물이 질금질금 배어났다.

황토 내음 물큰하게 콧속에 배어나는 방 방바닥에 서툰 솜씨로 황토를 이겨 그럭저럭 바른 탓으로 바닥 면이 평탄하질 못했다. 그런 탓에 방바닥이 비록 우둘투둘했지만 종이 장판이 누렇게 눌어 까맣게 빛바랜 아랫목에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그저 마음 편히 진득하게 누울 수 있는 것이 그도 좋았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의 품에 안겨 이룬 단잠 속에 가물가물하게 꾼 듯한 고운 꿈처럼 그리도 포근하여 좋기만 했다.

그리고 낮은 천장 등잔 그을음 때 묻은 서까래에도 내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정겹기만 했다.

어두룩한 봉창문 밖으로 시퍼런 번갯불이 주위가 환하게 두어 번 번쩍번쩍하는 듯싶더니 빛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렛소리가 산골짝이 터져 나가도록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순덕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어머니 품으로 덜컥 파고들어 숨으려 했다.

비에 젖어 시쿰한 냄새가 배어나는 하복 바지를 쪽마루에 내놓으려 방문을 열고 토방에 나서니 다시금 시계가 잔뜩 흐려진 가운데 엇비슥하게 내리던 비가 점차 올곧게 뿌리기 시작했다.

널따란 파초 이파리에 성긴 빗방울이 후드둑후드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앞뜰 계곡물이 불어나 징검돌이 물밑에 묻혀 물살이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부연 물안개 가득 서린 들주막이 그리 멀지 않은데도 흐릿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모습이 더욱 육중하게만 보이는 둥구나무가 떡 버텨 서 있는 동구 밖에는 저녁 늦도록 밭일을 마치신 동네 어른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시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하려 둥구나무 밑으로 얼른 피해 비갈망을 하고 있었다.
빗속에 냇둑에서 쇠꼴을 베어 지게에 한 짐 가득 지고 가시던 수연이 할아버지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한 손으로 연신 훔치셔 물기 밴 풀 더미가 무척이나 무겁게만 보였다.

물안개 자욱하게 서려 있는 냇가엔 다복다복하게 들어찬 하얀 개망초 꽃이 긴 목을 곧추세워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둑 너머 앞산 마루엔 희끄무레하게 끝 자락이 겨우 보이는 송전탑이 무척 외롭게 보였다.

동네 초가집 마당에는 이른 아침 밭으로 나서느라 뒤로 미뤄 놓았던 비설거지를 대충이라도 하려나, 퍽이나 부산스럽게 보였다. 아낙네들은 늦은 저녁밥을 서둘러 안치느라 집집마다 굴뚝에서 희뿌연 저녁 연기가 날씨가 눅눅하여 제대로 솟아오르지도 못해 초가지붕 머리에 나지막하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논밭뙈기 단 한 평도 없이 보릿짚 한 단 땔감조차도 돈을 주고 사야만 될 형편이니 이리저리 생활이 어렵기만 했다. 그런 어려운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그 새중간 매주 일요일마다 동네 우물터에서 물을 길어 부엌 두멍에 물을 채웠고 짬짬이 앞산에 지게를 지고 올라 산 임자의 눈치를 살피며 풋나무를 했다.

그리고 순덕이 어머니도 틈나시는대로 해묵은 삭정이와 솔가리를 부지런히 주워 모았다. 그래서 다행히도 장마를 넘기기에는 그리 부족하지 않을 듯싶었지만 네 식구 먹고 살 양식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 얼굴만 미안스럽게 쳐다보고 살 수밖에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가끔씩 어머니가 속으로는 마음 아파하시면서도 먹을 양식을 줄여 보시려 만만찮게 먹어치우는 검둥이를 여유가 있는 집에 돈을 받고 팔까 하는 말씀을 드문드문 하셨다. 그럴 때엔 겉으로는 펄쩍 뛰며 극구 반대했지만 이내 어머니의 말씀에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검둥이만큼은 꼭 지키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에게 늘 이렇게 말을 했다.

“엄니! 내가 차라리 오늘부터 밥을 반절루 딱 줄여 버릴틴께 절대루 검둥이 판다는 소리는 두 번 다시 하지 말어야 혀, 알았지?”

애원하는 눈빛으로 책임도 지지 못할 말을 그리도 쉽게 했다. 그 시절 나에게 산은 무언의 큰 버팀목이었다. 더불어 검둥이는 내 눈빛만 보아도 내 감정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는 듬직한 반려동물(伴侶動物)이었다.

말이 먹고 남는 찌꺼기 밥을 검둥이에게 준다고 하지만 밥을 먹고 나서 동네를 쓱 한바퀴 돌고 나면 금새 배가 다시 고파오는 내가 찌꺼기 밥을 남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순덕이 어머니가 밥을 지으실 때 검둥이 몫으로 감자를 넉넉하게 넣으셨다.
검둥이는 어머니가 드시다 일부러 남기시는 밥 몇 숟갈과 순덕이 어머니가 남기시는 밥 몇 술을 된장 국물에 부어 주어도 허겁지겁 그리도 잘 먹어 하루 두 끼 주는 밥이 때론 적은 듯싶었다.

순덕이 어머니가 맨 처음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처음엔 낯이 설어 툭하면 으르릉거리더니 이제는 집안 식구 중 어느 누구보다 더 순덕이 어머니를 따라 산에 오르실 때나 동네 우물에 물 길러 가실 때에도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정이 퍽 깊게 든 듯했다.

그렇게 한 해 두 차례 겨울 혹한기와 여름 장마철에는 간고(艱苦)한 생활의 쪼들림이 뚜렷하게 눈에 나타났다. 며칠 전부터 생물 선생님이 수업 시간마다 성화를 하시는 개구리 해부를 하는 학습용 도구 준비물을 사고 싶었지만 쪽마루에 앉아 동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시며 ‘이번참엔 누구네 집에다 대고 보리쌀 한두 말이라두 꾸어 달라고 통사정을 혀볼까?’ 하시며 깊은 한숨을 내쉬시는 어머니 모습에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학교에 가면 생물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큰소리로 다그치셨다. 그러면 쥐 죽은 듯이 입을 꽉 다물고 머리를 한없이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처럼 그런 처지에 놓인 급우들이 절반을 훨씬 넘었다. 그 시절 힘든 삶의 형태를 간과하신 선생님도 퍽이나 답답하신 듯 마냥 유리 창밖을 내다보시며 긴 한숨만 내쉴 뿐 더 이상 크게 추긍은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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