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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32 조회 : 1,190




무지개가 탐스런 빛을 도드라지게 발하며 영롱한 자태로 떠올라 궂은 날씨의 우울함을 달래주는 것 같더니 그도 잠시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한동안 허전했다. 혹여 한번쯤은 다시 나타날까? 하는 기대심에 눈을 모아 바라보아도 단 한 점도 보이질 않았다.
산바람이 가볍게 등을 밀어 내려서는 언덕길을 재촉이나 하는 듯했다. 줄기차게 내리던 장맛비가 멈춘 듯해도 그 여세(餘勢)가 아직은 남아 있어 부연 비안개가 나지막이 깔려 온 산을 자욱하게 휘감았다.

방죽가엔 하얀 오리들이 노란 주둥이를 이저리 돌리며 장맛비에 희뿌옇게 불어난 방죽 물속에 자맥질을 하려나, 나란히 줄을 서 꽥꽥거리다 ‘텀벙텀벙’ 물소리를 남기며 한두 마리씩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헤엄이 서툴은 어린 오리들이 막상 물에 뛰어들려니 겁이 나는지 진흙 둑에서 아등바등댔다. 그리고 온몸을 흔들다 제풀에 미끄러져 물속으로 나동그라져 정신없이 두어 번 허우적거리다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물 위에 떠올라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가볍게 흔들며 걱정스레 바라보는 어미 오리 뒤를 서서히 따라가는 모습이 퍽이나 대견스럽게 보였다.

저렇듯 미물(微物)들도 어미의 온후한 보살핌 속에 어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며 천천히 삶을 터득해 가는데 당연히 따스한 어미 품에서 보호를 받고 자라야 할 어린 기현이의 처지가 더없이 딱하기만 했다.

기현이는 두 해전에 자기 어머니가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군산 앞바다 선창가에서 뱃일하는 사람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다. 그로 인해 눈먼 욕정에 사로잡힌 모정이 송두리째 빼앗아 간 잔인함를 탓도 못했다. 하늘 밑 땅 아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 한 점 혈육인 할아버지의 굽어 야윈 등판을 험난한 세상 버팀목 삼아 버텨 살아가는 모습이 새삼스레 측은키만 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어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 냉혹한 기현이 어머니가 더없이 미워졌다.

그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내 어머니는 비록 남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온몸에서 콜콜한 냄새가 나는 ‘젓갈장수 여편네’라고 손가락질하며 저마다 수군덕거려도 나에게는 단 하나뿐인 혈육이자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외진 산골 열약한 환경 속에서라도 그런 어머니와 함께 궁핍할지라도 오붓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저 하늘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흐리멍텅한 날씨 만큼이나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오후 한줄기 햇살이 두툼한 구름 사이를 힘들게 비집고 나왔다. 해는 채 마르지도 못한 빗방울을 이고 있는 개망초 꽃 머리를 영롱하게 비추었다. 더불어 햇살은 쭈삣쭈삣하게 멋대로 뻗어나 길쭉한 갈잎 위에 동글동글 매달린 물방울과 구슬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곳하게 머릴 숙인 강아지풀 끄트머리에 들붙어 있던 물방울이 찰나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개울가 낙수터에는 가뭄 걱정을 한시름 덜어 느긋해진 경수 아저씨가 논산 읍내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종기형과 함께 냇가에서 반두질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냇가 가장자리에 다복하게 들어찬 풀숲을 듬성듬성 발로 뒤척여 냇바닥에 거무스레하게 들러붙어 있던 미끈미끈한 개흙이 발끝에 흐트러져 물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틈새를 노려 재빨리 반두를 물에 담궈 냇바닥을 휘저었다 물 밖으로 드러냈다. 그러자 그물망 사이로 주루룩 떨어지는 물소리 끝에 그물에 걸린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꽤나 많이 오글거렸다. 그 중에 미끌미끌하게 생긴 미꾸라지가 자발머리없이 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풀숲에서 오붓하게 놀다 그만 재수 없어 걸려들었는지 미끈미끈한 옆구리에 시퍼런 쪽빛을 선연하게 비치는 각시붕어 두 마리가 눈에 보였다. 각시붕어가 바깥세상이 마냥 신기한가 둥그런 눈을 곧게 뜨고 아가미를 들썩이며 온갖 힘을 다해 파닥거려 진흙 내 속에 묻어나는 미끈둥거리는 비릿함이 퍼져 났다. 그런데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잡힌 검은 물방개와 소금장이는 저는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도망을 치려 발발대고 있었다.

초가집 추녀 끝을 타고 흘러내려 떨어진 빗물에 옴폭옴폭 둥그렇게 땅이 파여 있는 추녀 안쪽 담벼락엔 변함없이 들러붙어 있는 민참의원 선거 벽보가 눈에 띠었다. 봄부터 시작된 오랜 가뭄을 해갈시킨 이번 비에 온몸을 흠뻑 적셔 가며 밭에 고무마 순과 콩을 심어 놓아 한시름을 덜은 동네 어른들이 고샅길을 오가면서 잠시 발길을 멈춰 드문드문 훑어보셨다.

비가 멈추자 그동안 어찌 잘 참고 견뎠나 싶던 매미들이 달갑지도 않게 슬슬 여름 찬가를 울리려 하는 마을 앞 둥구나무 밑에는 욕심 많은 종구네 아버지가 어인 일로 이번에 새집을 지으며 마을에 좋은 일 한번 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그동안 나무 그늘 밑에서 일을 하시며 동네 어른들과 친분이 두터워진 목수 아저씨들이 동내를 위해 무언가 하나 남겨 주려는 고운 마음에 일을 하고 남은 목재의 자투리 여분을 활용하였는지 보기에 제법 그럴듯한 널빤지를 이어 만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널평상이 놓여 있었다.

그 평상 둘레에 동네 어른들이 빙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동네 우물 터가 지난 밤사이 동네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아낙네들의 입소문이 때론 여과없이 부풀려져 번지기 시작하는 곳이었다면 한겨울 추위가 몰아칠 때 군불을 넉넉하게 지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동네 방앗간 사랑방과 날이 더워지는 한여름엔 둥구나무 밑이 동네 남정네들의 입소문이 번져 나가는 매체(媒體)였다.

장맛비가 멈추니 날이 온통 후덥지근하여 동네에 새로 생긴 평상을 구경도 할 겸 쉬고 있는데 고샅길을 나서며 벽보를 보고 오셨는지 해마다 누에를 제법 많이 치시는 영호네 아버지가 산 밑 뽕밭을 바라보시며 말을 하셨다.

“여하튼 그놈의 국회의원 자리가 뭐시라구 너나 할 것 없이 오살나게 많이 나와 번져서 그냥 눈으루 쳐다보기두 어지럽던디 가만히 조목조목 살펴보닌께 지난번까장 국회의원 해 먹었던 그 뭐시냐 읍내 병원에 원장질 허든 사람은 아예 코빼기두 안 보이더라구.”

그러자 앞들 논배미 물자리를 둘러보시고 오신 상수네 아버지가 삽에 단작스럽게 붙어 남아 있는 흙을 손으로 문대시며 말을 받으셨다.

“참! 성님두 세월 가는 것 모르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아! 시방이 어느 땝니까? 세상이 훌라당 뒤바껴번졌는디, 돌맹이에 맞아 이마빡 터질라구 자유당 끄나풀 달구 나올 수 있는감유? 읍내 나가서 도란도란 말허는 것 들어보면 아마 잘 모르기는 혀두 이번 판에는 그 뭐시냐 새로 나온 사람들이 설찮케 당선이 될 듯싶더라구유.”

그렇게 두 분이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미끈미끈하게 쭉 빠진 장죽을 입에 물고 계시던 진식이 할아버지께서 말씀을 하셨다.

“암튼 이참에 볼만하것드라구. 지 아무리 수두룩 뻑쩍허게 나왔어두 내가 볼 때는 다 소용없는 짓거리구. 그 뭐시냐 자네들 어렸을 적 일이라 잘들 모르것지만 원래 우리 동네서 떡 벌어지게 살았던 그 신참봉댁 후실의 몸에서 태어나 남달리 어려서부터 영특해 하늘에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고등고시에 떡 허니 합격해서 시방은 강경 읍내서 변호사질을 하는 신참봉 아들허구 물려받은 재산 없어 어렵게 살어서 그렇지 사람 똑똑허기는 나무랄데 없는 논산 읍내에 사는 무소속으로 나온 윤 뭐시하고 두 사람 싸움인 것 같은디, 암튼 사람들 인물두 그렇지만 두 읍내 사람덜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라 그 어느 선거 때보다 더 경쟁이 엄청나게 심헐 것 같구먼 그려.”

자리에 앉아 계시는 동네 어른들에게 기억에 아물아물한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듯 장황하게 말씀을 마치셨다.

그러자 ‘배고픈 참새 방앗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고 방앗간 일 하시는 순태 아저씨가 약방의 감초처럼 불쑥 튀어나와 말을 거들었다.

“근디 말이 나와서 망정이지 가만히 보면 본처에서 난 자식보다 후처의 몸에서 난 자식들이 더 똑똑허구 똘방지더라구유.”

그때 늘 입바른 소리를 잘하시는 우현이 아버지가 순태 아저씨에게 핀잔을 주시듯 말을 하셨다.

“야, 이 사람아! 그기사 어쩌다 그런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거지. 세상 사람이 다들 그렇던감, 안 그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있는 조강지처 놔두구 새 계집 얻어 사는 놈덜 치구 그 끝마리가 잘되는 것 아직까장 하나두 못 봤네 그려. 하늘이 노여워 벌을 내려서 그런 건지 이상허게두 타고난 지명대루 못 살구 단명에 세상을 뜨던지 안 그러면 내둥 멀쩡허다가 벌건 대낮에 날벼락처럼 비명횡사를 하더라구.”

그러자 매년 고추 농사루 그런대로 재미를 보시는 준섭이 아버지께서 말을 이으셨다.

“성님 간만에 말 한번 시원시원허게 잘했네유. 나이 들어 같이 늙어 가는지두 모르구, 밤마다 팔베개하며 자던 여편네를 어느 날 갑자기 헌 고무신짝 버리듯 내팽개쳐 버리구 마누라 애간장 태워 눈에 피눈물나게 혀 놓구 낯바대기 뜨거운 줄 모르나, 어디 읍내 저잣거리에 나뒹굴던 작부(酌婦) 나부래기를 동네 안으로 끌어들여 포동포동 미끄런 새살 지분 냄새에 푹 빠져 아랫목에 궁뎅이 디어 벗겨지는 줄두 모르구 끼고 자빠져 희희낙낙대며 사는 것들 보면 내 눈엔 영 사람같이 안 보이더라구유.”

그러면서 은근히 영택이네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비석골 마른 바탕 천수답 논 서너 마지기를 지으며 다른 집들에 비해 어렵게 사셔서 그런지 타고난 입담에 뚝심이 있어 장날마다 이른 새벽부터 읍내 장터에 나가 소전거리에서 거간(居間)꾼들 뒷일을 봐주고 용돈이나 벌어 쓰시는 용철이 아버지가 말을 했다.

“근디 시방 성님들 허구 있는 소리를 들어 볼랑께 마치 동네 누구 들으라구 허는 것처럼 느껴지는디, 그 성님이사 형수가 죽은지두 수 해가 지났구 지난번에 소리 소문두 없이 훌쩍 집 나간 읍내 여자 때문에 벌어진 일인디 그거하구는 경우가 조금 다르지 않는감유?”

그렇게 용섭이 아버지께서 준섭이 아버지 말끝에 나이가 아래인 사람이 따지듯 토를 달자 준섭이 아버지가 조금은 불쾌하신 듯 말을 받으셨다.

“그러구 보닌께 이 사람이 영택이 애비헌티 잘 보여서 그 그늘 밑에서 장리 빚이라두 얻어 쓰구 살어서 그런지 은근슬쩍 편을 드네 그려. 그리구 드문드문 귓구멍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허니 자네두 장날에 나가기만 허면 읍내 저잣거리에서 술 꽤나 마시구 들어오는 모양이던디 이참에 자네두 그 운주댁인가 뭔가하는 여자를 잘 구워삶아 들여앉혀 놓구 깨가 쏟아지게 한번 살아보지 그러는가?”

그런데도 용철이 아버지가 읍내 나가 바깥 물정에 물들어 그러시는지 준섭이 아버지의 말씀을 느긋하게 받아 넘기시며 말을 이었다.

“아따! 성님두 시방 그걸 말이라구 허구 있는감유? 나사 어쩌다가 목이 컬컬허면 탁배기 몇 잔 하는 건디 그걸 가지구 헐 일 드럽게 없어 넘에 흉보기 좋아라 허는 속창알머리 없는 사람들이 미주알고주알들 허는 갑소 ‘뱁새가 황새 걸음 따라갈라구 허면 가랭머리가 쫙 찢어진다.’구 난봉질두 등 따십구 배불러 뭐가 있어야 허는 거지. 내 꼬라지가 이 모양 이 꼴인디 그런 말을 헌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유, 안 그런남유? 지 계집 하나 가지구 양이 안 차 겹사리루 난봉질 허는 그런 사람들이사 팔자 늘어지게 타구나서 그러는지 몰라두, 성님들두 다 잘 알다시피 내사 가진 거라고는 씻고 벗구 뒷산 머리 일 년내 하늘만 빠꿈허게 바라보는 천수답 서너 마지기 뿐인디 죽도록 농사랍시구 지어봐야 나오는 거라구는 맑은 샘물 밑바닥 들여다보듯 뻔한거구. 두 눈만 껌뻑거리구 날 바라만 보는 토끼 같은 어린 새끼들 배 않 굶길라구 급한 김에 겁 없이 덜컥 장리변(長利邊) 얻어 쓴 것이 원금에 이자두 제때 갚지 못했네유. 자고 나면 그 놈에 원금은 놔두더라두 뭔 놈에 이자가 삼복더위에 축 늘어진 엿가락처럼 늘어나는디, 성님이 어디서 뭔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는 몰라두 빚 걱정에 한 날 한시두 그리 맘 편하게 살질 못하네유. 그리구 설령 그런 돈이 나한테 하늘에서 미친 척허구 뚝 떨어지기라두 허면 늘 목구멍에 가시 걸린 것처럼 껄쩍지근하게 달라붙은 그놈의 캐캐묵은 장리 빚부터 얼른 쳐넘기구 두 다리 쭉 뻗구 맘 편히 살구 싶네유.”

그렇게 살아가는 처지가 무척이나 답답하신지 말이 나온 김에 속이라도 확 풀어 버리고 싶은 심정에 조금은 오랫동안 말씀을 하시고 주위가 다 들리도록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애타는 눈빛으로 답답한 마음처럼 흐려진 먼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동네 어른들도 저마다 어렵게 사는 터라 모두들 가슴속에 깊이 와닿게 하는 용철이 아버지 말씀에 공감하시는 듯 갑작스레 동네 어른들이 말을 멈추셔 주위가 숙연해졌다.

마냥 짙푸러가는 둥 나무숲에선 철딱서니 없는 매미가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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