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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34 조회 : 1,157




예년보다 조금은 이른 듯싶게 여름 장맛비가 내렸다. 그해 여름 장마는 여느 해처럼 짜증이 돋아날 정도로 길고 지루하지는 않았다. 한 열흘 동안 하루이틀 간격을 두고 한두 차례 내렸다 그크기를 반복했다. 그런 탓인지 여름 장마라는 뚜렷한 느낌 없이 그저 흐지부지한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구름 한 점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하게 갠 맑은 하늘에 너무도 똘박하게 아침 해가 떠올랐다. 그로 인해 전형적인 여름 날씨처럼 한낮 더위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제법 기승을 부릴 것만 같았다.

눈에 바라보이는 저 앞산의 모습이 청초함에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수려한 솜씨를 지닌 이름 모를 어느 화공이 녹색 바탕에 검정색을 적절히 배합하여 붓끝으로 섬세하게 그려놓은 수려한 수채화처럼 단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또렷한 자태로 진한 여운을 가슴 가득 남겼다. 그러나 단 한점 옥의 티처럼 산자락 한 모퉁이에 불규칙하게 들어선 울창한 잡목 숲이 갑갑함 속에 부담스럽게 다가섰다.

온 산야가 검푸른색으로 짙어 가는 칠월답게 온 산골짜기를 저르렁저르렁하게 울어대는 매미 울음소리가 계절이 주는 정감을 잔뜩 불러 일으켰다.

어머니께서는 늘 남의 집에서 쌀 꾸어 오는 모습을 동네 사람들의 눈에라도 띄면 남사스럽고 자라나는 자식 기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 밤에 어머니가 순덕이 어머니가 함께 옥순이네 집에서 쌀 한 말과 보리쌀 두 말을 꾸어 오셨다. 쌀과 보리쌀이 담긴 밀가루 포대가 어둑한 봉창문 밑 아랫목에 자릴 잡았다.

양식이 구해지면 마음이 든든해질 것만 같았는데 남에게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다보니 그리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그저 평준한 삶의 대열에서 점차 멀어져만 가는 거리감을 느꼈다. 궁핍한 삶이 이루어 내는 소외감 내지는 가늠키 어려운 투명치 못한 앞날에 대한 묵직한 두려움이 좁아터진 뇌리 속으로 힘에 겨울 만큼 가득가득 차올랐다.

아랫목에 너부적하게 자릴 잡고 있는 양식 자루가 그리도 마음에 무겁게 보였다. 순덕이 어머니께서는 한 톨이라도 아껴 먹으려는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우리 네 식구 한 끼 필요한 양만큼은 바가지에 퍼 담아야 하는데도 자루 속에 담겨 있는 밥공기가 그리도 작아 보여 씁쓸하기만 했다.

책가방을 챙겨들고 마루를 내려 서려는데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와 옥순이 사이에 미묘하게 번진 ‘몸엣것’이란 사건이 일어나기 전 서로 사이가 원만했던 어느 날 옥순이가 배시시 웃는 얼굴로 나에게 준 보릿짚으로 층을 이뤄 멋을 내어 잘 엮어 놓은 여치집이 쪽마루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들녘 논배미에서 뜸부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햇살 아래 벼 이삭이 올곧게 자라나고 앞산 뻐꾸기 울음소리 따라 넝쿨진 숲속에 몸을 숨긴 청포도 알알들이 싱그럽게 익어 가는 칠월이었다. 너른 들녘에 꼿꼿이 자라나는 벼 이삭들이 검푸른 빛으로 물결을 이루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 밭에는 하늘 향해 올곧게 솟아올라 서로 키 재기를 하는지 수숫대가 푸르다 못해 거무스름한 빛으로 짙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보리쌀이 밑바닥을 드러내는 어중간한 계절에 양식거리 때문에 걱정스런 조급한 마음들은 아직 풀기도 채 벗지 못한 들녘을 바라보며 벌써부터 다음 곡식인 벼가 익어 가기를 저마다 성급하게 기다리며 살았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장마가 끝나자 읍내로 서둘러 장사를 나가실 줄 알았던 어머니께서 이상하게 장사를 서두르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저 한두 차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 뒤로는 더 이상은 되묻지를 못했다. 지나친 생각일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내가 걱정할까 봐 몸이 편치 않으시면서도 숨기고 계시지 않으신가? 하는 우려를 해 보았다. 언제나 스스럼없이 파고들 수 있는 내 어머니의 품이련만 그 질문 하나만큼은 되물어 보기에 그렇게 어렵고도 힘이 들었다.

7월도 초순을 넘어 중순으로 접어들자 마을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선거의 열기로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리고 우리들은 곧이어 시작될 여름방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대감에 그런대로 마음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텃밭엔 밤새 소담하게 머리를 숙였던 도라지꽃이 싱그런 햇살에 생기를 되찾으려는 듯 한 잎 한 잎이 소리 없이 꽃잎을 펼쳐 들고 있었다. 휘어 굽어져 긴 황토 밭두렁엔 납작 엎디어 뻗어내리는 고구마 줄기가 강인한 생명력만큼이나 하루하루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그리고 거름기 별로 없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나는 메주콩도 파릇한 새 잎을 한 잎 두 잎씩 아무도 모르게 늘려 가고 있었다.

서낭당 오르막길 양지바른 곳에 널펀하게 자릴 잡은 과수원에는 잘 익은 복숭아를 따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보였다.

산자락 계곡 모퉁이를 돌아설 때부터 동구 밖 나무다리 위에 옥순이의 모습이 작달막하게 보였다. 정말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나를 애써 외면하는 것 같았다.

지난 6년의 세월을 두고 오고 지속되어 온 티끌 없는 우리의 우정에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내 자신의 우매함이 참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세월 동안 묻어났던 좋고 나빴던 온갖 아기자기했던 기억들로부터 이제는 나도 거리감을 두려 하니 서운함을 동반한 뜻 모를 안타까움이 잔잔하게 묻어났다.

그런저런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어쩌다 옥순이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나 역시도 새치름한 옥순이 모습이 보기 싫어 의식적으로 피했다.

읍내를 향해 달려가는 차창 너머로 점점 멀어져 가는 마을 앞산 산기슭 끝 자락부터 시작하여 부옇게 트여진 신작로 따라 널따랗게 펼쳐진 들녘 호남선 철로 따라 한 곳에 소담스레 자리 잡은 작은 간이역인 채화역을 둘러싸고 있는 어려 작은 나무들이 지난 겨우내 계절이 주는 황량함 만큼이나 쓸쓸하게 보였는데 이젠 제법 잘 자라난 푸른 잎들이 그런대로 조화롭게 어울려 고적함을 덜어 주었다.

역사에 진입을 알리려나, 기적소리가 한차례 울렸다. 연무대쪽 선로 위를 달려오는 통학 열차가 짧은 기적 소리를 내지르며 육중하게 서 있는 시그널 앞으로 차츰차츰 가깝게 다가서고 있었다.

오르막 샛강둑을 힘들게 올라선 버스가 수문 다리를 통과하여 서서히 읍내 중심부로 들어서려니 강둑을 타고 먼 곳에서 줄을 이어 자전거를 타고 오는 학생들의 모습이 듬직듬직하게 보였다. 차창 밖으로 흙먼지에 서서히 얼룩져 가는 선거 벽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고 지겟가지 위에 간조롬하게 올려놓은 두부 목판을 걸머지고 비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소리쳐 흔드는 방울소리가 작은 읍내의 아침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도로가 흙먼지에 얼룩진 가게 유리창 밖으로 내놓은 투박스런 나무 상자 안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불타는 숨 쉬는 거리다.’라고 그때는 나이가 어려 이름을 모를 수밖에 없는 남자 가수의 노래가 들려왔다. 읍내 중심부를 통과하는 소화다리를 넘어서자 제철을 만난 빙과 공장에서는 ‘덜커덩덜커덩’ 전기모터에 연결된 바퀴에 감겨 돌아가는 피대 소리가 힘차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변두리 지역으로 얼음과자 장사를 나가려는 남정네들이 받쳐놓은 짐 자전거가 대여섯 대쯤 보였다. 그중에 우리 동네를 몇 차례 다녀가 눈에 익은 듯한 턱밑에 검은 수염이 더부룩한 털보 아저씨 모습도 눈애 띄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겨우내 그렇게 달달하게 냄새를 풍겨 입 안에 잔뜩 침이 고이게 하던 과자 공장에서는 냄새는커녕 사람들도 별로 보이질 않으니 ‘장사도 철에 따라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를 해보았다.

연무대를 출발하여 강경으로 오는 통학 열차가 증기기관차 끝에 단작스럽게 화물차 한 칸에 객차(客車)라고 풍신나게 두 칸을 올망졸망 매달고 역 구내로 들어섰다. 다른 기관차들보다 턱없이 느린 속도로 촐랑거리며 달려왔어도 굼뱅이처럼 느려 터진 내가 타고 온 버스 보다는 조금 먼저 역에 도착했다. 통학 열차에서 내려 역사 출입구를 빠져나오는 남녀 학생들로 분잡스런 역 앞마당을 지나 성구네 집으로 다가섰다.

양지바른 벽쪽에서 성구와 성자 누나가 시커먼 석탄 가루에 진흙을 섞어 골고루 버무려 이겨 놓은 석탄 반죽을 손안에 쥐고 마치 송편을 빚듯 동글납작하게 만들어 햇볕에 말리려 넓적한 나무판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약삭빠른 성구가 어둑할 무렵 역구내(驛區內)에 있는 분탄(粉炭) 저장소에서 감시하는 아저씨의 눈을 피해 가져온 석탄 가루가 마음에 걸려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딴데로 돌려 능청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성자 누나는 내가 나타나기 무섭게 얼른 부엌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속마음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성자 누나 왜 나를 피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이 성구를 손가락질하더라도 나는 성구를 이해할 수 있고 가족에 대한 그런 책임감조차 없는 나는 그저 어머니가 뼈 아프시게 벌어 오시는 것만 먹고 사는 놈이고 어쩌면 이렇게라도 살아가는 누나네보다 우리 집은 훨씬 못한 환경에서 더 어렵게 살아가고 있어!’

물기에 촉촉하게 젖어 나무판자 위에 동그랗게 올려진 시커먼 석탄 덩이가 가난에 찌들어 사는 나와 성구의 모습처럼 애틋하게 바라보였다.

그렇듯 처해진 삶이 험난키만 하니 예단(豫斷)키 어려운 앞날이 어떤 행로를 거쳐 어떻게 결실의 극점(極點)을 찾아가느냐를 서툴게라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래도 눈앞에 쉽게 보이는 것들에 성급하게 현혹되지 않고 살아나가는 동안 크고 작은 역경이 도래(到來)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신념 하나는 꼭 갖고 싶었다. 더불어 그에 수반(隨伴)된 각고(刻苦)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친구 성구에게는 영원한 정신적 버팀목이신 성구네 아버지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시며 철로 둑 아래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염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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