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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36 조회 : 1,041




대다수 동네 사람들은 땅덩어리를 많이 가진 종구네 집과 싫든지 좋든지 간에 서로 얽히고설킨 채 살아왔다. 그런 연유(緣由)로 자기 주관을 명확하게 관철(貫徹)치 못하고 눈치를 적당히 살피는 선에서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어쩌다 종구 아버지의 눈 밖에라도 나는 날에는 그나마 딸린 식솔들의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는 소작을 놓칠까봐서 노심초사(勞心焦思)했다.

어쩌다 한데 어울려 주고받는 대화도 종구 아버지의 기분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저 빚에 쪼들려 살다보니 냇물에서 갓 잡아 올린 자라처럼 납작 엎드려 목을 잔뜩 움츠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손톱만큼이라도 자기 땅을 가진 사람들은 슬금슬금 한두 마디씩 자기들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 그래도 좀 나은 듯 보였다. 삶이 힘들기만 했던 암담한 그 시절 가슴을 눌러가며 살아야 했던 답답함은 이나저나 매한가지였다.

둥구나무 밑에선 오랜 세월 동안 동네 사람들의 손때가 고루 묻어나 거무튀튀해 글씨조차도 잘 보이지 않게 어른거리는 장기 알들이 장기판 위에 제자리를 찾아가는지 부딪는 소리가 제법 둔탁하게 들려왔다.

그 무렵 동네에 사는 젊은이들은 윗대 어른들이 허울 좋은 유산인 양 남겨놓은 가난에 대한 그 모든 것들을 냉철한 의식의 눈으로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잘나터진 선친들이 남기고 간 가난을 이제는 떨쳐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지독스런 가난을 다음 세대를 살아가야 할 후손들에게 대물리기 싫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작은 것 하나부터 뒤바꿔 보려는 심사(心思)에서 안간힘을 썼다.

물론 그 지긋지긋했던 전쟁이 남겨 놓은 통한의 상처도 있었지만 종구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결혼의 꿈을 이루어 보지도 못하고 견디다 못해 지난 늦가을 어느 날 새벽에 정희 누나와 함께 고향을 떠나간 기성이 형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기성이 형이 그런 사정으로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마을 젊은이들이 주체가 되어 농촌 개화 운동을 벌렸던 마을 청년회 회장을 맡아 마을을 혁신시키려 했다.

그리고 잘산다고 하는 종구 아버지의 눈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주관을 거침새 없이 내세우는 경수 아저씨가 그들과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려고 지금은 대전의 어느 철공소에서 쇠붙이 다루는 일을 배우고 있는 병막 터에 사는 얼굴이 살짝 얽은 만큼이나 한 고집 부리는 정섭이형도 그 부류에 속했다.

그와 더불어 그 아래 터울의 우물가 종기형이 읍내에 새로 생긴 농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여 나름대로 다음 세대의 농촌을 이끌어 갈 선두주자의 꿈을 키워 나가고 그 다음을 잇고 있는 우리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꿈들을 키우며 살았다.

그런 시대적 변화가 몰고 오는 잔잔한 파문에 눈에 보일 듯 말 듯 서서히 변해 가려 하는 마을 모습에 가장 백안시(白眼視)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오랜 세월 동안 장리변(長利邊)으로 소작농들로부터 억척스레 거둬들인 턱없는 이익으로 증식된 재산 속에 푹 파묻혀 사람 위에 존립하는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갖은 오만을 떨며 사는 종구 아버지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동네에서 종구네 집 다음으로 땅을 많이 소유한 영택이 아버지였다. 어른들 말씀에 ‘늦바람 난 수캐가 낮밤을 모른다.’고 지난번 후처를 들이면서 읍내 선술집에서 뭇 사내들의 품에서 놀아나던 작부를 읍내에서 포목점을 하는 차분한 아낙네라고 동네 사람들을 속이면서 동네로 불러들여 안방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다 하나뿐인 혈육 다 큰 딸 중례누나와 큰 싸움이 벌어져 역마살(驛馬煞)이 끼어 얄궂게 생긴 여편네가 새벽 찬바람에 소리 소문도 없이 꼬리를 감춰버렸다. 그 일로 집안 망신을 당하고 있는 터였다.

영택이 아버지는 그나마 조상님이 돌보았는지 다시 공주 사곡에 산다는 참한 분을 새로 맞아들였다. 그랬으면 계집질을 멈출 만도 하련만 뉘 말마따나 자고 나면 늘어나는 게 장리변 놓은 이자 돈이고 발길에 차이는 것이 쌀가마니뿐이라는 말처럼 사는 형편이 넘쳐나니 남아도는 시간이 많아 뭇 여자에 대한 헛된 공상 내지는 정도를 뛰어넘는 과도한 욕심을 부렸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고 속된 말로 몸이 추우면 따뜻한 아랫목 생각이 나고 몸을 추스르고 나면 생리적으로 허기를 느껴 먹을 것이 생각나 배를 채우고 나면 곁들여 술 생각이 나 술기운이 전신으로 몽롱하게 퍼져 나 알딸딸해지면 그 다음으로 보드라운 여자 속살이 생각나는 것이 일반 남정네들의 공통적인 심리일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 또한 사회적 통념(通念)의 굴레 안에서 지켜야 할 도리와 명분이 있음에도 영택이 아버지는 그 모두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 채 방탕 생활을 하는 듯해 보였다.

드문드문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영택이 아버지가 집에 새로 맞아들인 아주머니 한 분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 읍내 저잣거리 선술집에서 오다가다 만난 나이 어린 작부(酌婦)에게 푹 빠져 집을 허다하게 비워 근래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쳤다는 동네 사람들이 드물 정도로 어찌 보면 너무도 방종(放縱)하게 살아가는 영택이 아버지의 면모도 그리 곱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진 자들의 그런 방종한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비위에 거슬렸다. 그것은 비단 가진 자에 대한 턱없는 시기 내지는 질투가 아니었다. 더불어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시류(時流)의 물결을 타고 도도하게 밀려오는 격동의 사회적 변화에 힘만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만큼 찌든 가난의 굴레를 떨쳐 벗어나려고 도사려 먹은 마음속에서 번져 나오는 이유 있는 반항 그 자체였다.

그저 모두가 더불어 스스럼없이 살 수 있는 곱디고운 마을의 오붓한 터 안에서 크고 작은 다툼 하나 없이 다함께 머물길 바랐다. 그것만이 어린 내가 유일하게 꿈꿔 볼 수 있었던 그토록 작은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검푸른 미나리가 무릎 밑까지 자라 오르고 길쯤한 왕골이 내 턱밑까지 닿을 듯이 자란 우물가에서 옥순이네 집 감나무가 눈에 띄었다. 한두 번쯤은 무슨 이유였는지? 그리 갑작스레 틀어진 이유를 꼭 알고 싶어 옥순이네 집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엊그제 아무리 친구 지간이라도 내 어머니가 옥순이 어머니에게 쌀과 보리쌀을 꾸어 오시며 자존심을 구겨 남기신 혀 짧은 소리를 옥순이도 들었을 듯싶어 내 작은 자존심이 그마저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습관처럼 좀처럼 어색하지도 않게 등판에 잘 달라붙는 매끈매끈한 물지게 멜빵이 내 몸의 분신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직은 어려 힘이 미약한 탓으로 벅찰까 봐 양쪽 양철통 안에 절반 정도로 채워 가던 먹을 물을 중학생이 된 이제는 욕심을 더 부려 거의 한가득 채웠다 그러다보니 힘이 미치지 못해 몸의 균형을 잃어 좌우로 비틀거려 다리가 꼬일 듯했다. 몸을 바로 세우려 하니 균형을 잃은 양철통 속의 물이 출렁출렁 넘쳐흘러 푸석한 고샅길 흙바닥을 걸어가는 모습 따라 구불구불하게 줄무늬를 남겼다.

출렁거리는 물지게를 지고 종구네 집 앞 대문을 비켜서려는데 이장댁 막둥이가 간식거리로 누런 호박 풀떼기를 먹으면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양쪽 볼때기에 누렇게 미끈둥거리는 물을 잔뜩 묻히고 밑이 훤히 터진 멜빵 반바지 사이로 작은 고추를 내보이며 대문 밖으로 나와 나를 알아보는 듯 작은 입을 헤벌려 웃고 있었다.

동네 연자방앗간 공터에는 동네 아이들이 채 자라지도 못한 옥수숫대와 단수수를 어른들 몰래 어디서 꺾어 왔는지 껍질을 벗겨 달달한 단물이 그리도 입에 들붙는 듯 히죽히죽 웃으며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누런 비료 포대로 큼지막하게 접은 종이 딱지를 들고 마른 땅바닥에 세차게 내리치며 딱지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루해가 점심나절로 서서히 기울려 하자 앞 들녘 논배미에서 애벌김을 매시던 동네 아저씨 네댓 분이 낮참을 드시려나, 시원한 나무 그늘 둥구나무 밑을 향해 좁다란 논둑길을 줄지어 걸어 나오셨다.

무거운 물지게 탓으로 더디 걷는 걸음 탓으로 언제 내 뒤를 바싹 따라오셨는지? 이장댁 아주머니가 똬리를 얹은머리에 일꾼들 새참이 담긴 광주리를 이고 한 발짝 나보다 앞서 고샅길 모퉁이를 돌아 둥구나무 쪽으로 향하셨다.

둥구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고 계시던 순태 아저씨와 준섭이 아버지는 마침 지루하던 참에 남의 집 새참이지만 반갑게 나오니 일꾼들과 더불어 시원한 막걸리로 컬컬한 목을 축이려는 심산(心算)으로 여느 때와는 달리 유난스레 이장댁 아주머니를 향해 인사를 거푸 하셨다.

논둔덕에 두더지와 웅어지가 구멍을 뚫어 가뜩이나 부족한 논물이 새어 나오자 논에 흙을 두둑에 퍼 올린 후 흙으로 미장을 하듯 삽으로 두드려 가랑을 붙이시던 민균이 아버지가 운 좋게 잡으셨는가? 무엇을 잡아먹고 살이 그렇게나 뒤룩뒤룩 쪘는지 자라처럼 짧은 목에 좁쌀보다 작은 눈이 반짝거리고 네 발가락이 잘 보이지 않는 두더지가 한쪽 다리를 실팍하게 묶인 채 손에 들려 대롱대롱했다.

그러자 둥구나무 밑에서 모여 놀던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무슨 큰 굿거리를 만난 듯이 두더지를 짯짯이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 밭고랑이 굽은 기다란 밭엔 새하얀 빛의 등을 줄기에 촘촘히 달아 금시(今時)라도 바람결에 달랑달랑 종소리가 울릴 것만 같은 참깨꽃이 소담스런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아직은 열매들이 채 달지를 못해 계단식 산 밑 밭 자락에 먹을 것이 그리 없는데도 철딱서니 없는 멧새들은 밭 자락 위를 낮게 날다 이따금씩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오면 조금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이내 겨우 자리를 잡아 가는 고구마 밭과 콩밭 사이 밭고랑으로 내려앉아 풀잎에 달라붙은 작은 메뚜기 새끼와 풀벌레들이라도 잡으려는 듯 저마다 반질거리는 머리를 들어 갸웃거렸다.

사립짝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서니 마당에서 놀고 있던 순덕이가 순덕이 어머니보다 나를 먼저 발견하고 그래도 제 식구라고 달려와 들붙으려 했다. 거치적거려 힘들어 하던 참에 부엌에서 나오신 순덕이 어머니가 냉큼 뛰어와 순덕이를 덥석 끌어안으셨다. 그 먼 곳에서 어렵게 물을 길어 오느라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바라보시며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얼른 점심을 먹자는 의사표시로 한 손을 들어 입에 대고 밥숟갈로 밥을 떠 넣는 시늉을 하셨다.

그래서 머리를 끄덕이고 이내 부엌으로 들어가 양철통을 번쩍 들어 동이 안에 물을 쏟아 부으니 철퍽철퍽 독에 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작게나마 내 할 몫을 다했다는 만족감에 마음이 후련해졌다.

별다른 반찬이 있을 리 없었다. 개다리소반 위에 수년 동안 먹어 온 탓으로 늘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켜 이제는 좀 지긋지긋하게도 느껴지는 짜디짠 새우젓과 시커먼 무장아찌가 조금 느끼한 듯했다.

그러나 그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주시려 어머니가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옥순이네 집에서 꾸어 온 식량으로 지은 밥이었기에 섣부른 투정이 죄받을 것만 같았다. 찬물 한 그릇을 냉큼 떠 와 그릇째 엎어 물에 말아 헤실헤실 풀어져 누런 보리밥 알 따로 놀고 물에 듬성듬성 흐트러지는 퍼슬퍼슬하게 익은 감자 덩어리가 어쩌면 힘든 삶의 모습처럼 보여 마음이 착잡해졌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신 순덕이 어머니가 더덕과 산도라지를 캐시려고 벽기둥에 걸린 걸망태와 새터 마을 대장간에서 맞춰 온 폭이 좁아 가늘고 끝이 뾰족한 호미를 찾아 챙기시며 함께 산에 오르자고 하셨다. 그래서 드문드문 삭정이라도 주워볼까 하는 생각에 굴뚝 옆에 세워 놓았던 바지게를 어깨에 걸머지고 푸른 풀숲 사이로 좁다랗게 트여진 오솔길을 따라 산언덕에 오르려 집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서늘바람 한 줌이 고맙게 불어오는 언덕 위에 올라서니 맞은편 비스듬한 둔덕에 자리 잡은 고만고만한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시름처럼 졸고 있었다. 조금 외떨어진 곳 움막골 쪽으로 장맛비에 파인 듯 군데군데 허물어진 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우리 집처럼 살기가 어려운 집에서 써 놓은 묏자리인 듯싶어 바라보기에 더욱 초라해 보였다. 내 어린 생각이지만 그저 등 너머로 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져 있는 묏자리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듯 죽고 나서도 칠성판(七星板) 위에 등판때기 붙이고 드러눕는 땅 자락의 위치와 크기도 능력의 한계에 따라 제가끔 다르니 멀고도 험한 저승길 가는 것도 천차만별 차이가 나는 듯했다.

덜 익은 호두알처럼 푸르뎅뎅한 열매가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가래나무(楸木) 가지가 스쳐 지나는 내 어깨에 내려 닿을 듯했다. 그 틈 사이로 박달나무도 얼굴을 드러내려 하니 애꿎게 시샘을 하는 듯 길게 늘어진 줄기에 넙적넙적한 칡 잎사귀가 앞을 가로막아 저 먼저 얼굴을 내밀려는 것 같았다.

언덕에 올라 앞을 바라보았다. 뒷산 기스락 둔덕 밭에 자릴 잡은 종구네 새로 지은 기와집이 우뚝 서 있어 집터 뒤쪽으로는 알맞게 자란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풍치(風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앞터 쪽으로는 싱그러운 대숲이 적절하게 드리워져 한껏 집 모습과 적절한 조화를 이뤄 더욱 부럽기만 했다.

바로 발치 밑으로 내려다보여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내 작은 초가집과는 현저한 차이를 이뤄 그런 모습 하나에서도 빈부의 격차를 생생하게 절감할 수 있었다.

구름 사이를 완전히 헤쳐 나온 한낮 해는 아침 내내 참았던 눈요기를 뒤늦게라도 욕심껏 하고 싶은지 강한 빛으로 온 들녘을 짯짯이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갈래로 곧게 뻗어난 철길 선로에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레일 위에 강하게 반사된 빛이 새하얗게 번득거려 멀리서 바라보아도 눈이 시려오는 듯 시름 어린 마음을 꿰뚫고 가려는 것 같았다.

싸리 숲이 다보록하게 우거진 둔덕 밑으로 억지로 비스듬히 좁게 길을 트며 멍감 줄기 억세게 뻗어난 물레터 골짜기 위 자락에 잠들어 계신 내 아버지의 영면에 터에 이르렀다. 푸른 풀잎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봉분이 보여 더없이 애처로운 마음이 들끓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시야가 흐려 봉분의 모습이 어룩어룩해져 제 모습대로 보이질 않았다.

울먹이는 나를 향해 무엇이라고 단 한 마디쯤은 들려주셨으면 좋으련만 언제나 과묵한 저 산처럼 입을 굳게 다무신 내 아버지는 답답하리만큼 말을 잃고 계셨다. 모지락스레 스며드는 아픔들이 하늘 말끔하게 개인 오후 쨍쨍 내리쪼이는 햇살에 힘을 받아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땅의 열기보다 몇 배는 더 뜨겁게 되살아났다. 응어리져 오는 그 아픔이 예리한 칼날로 생살을 도려내는 듯 참아내기 힘겨워하는 내 모습을 그리도 모르시는 것 같아 부질없는 생각이련만 한편으로는 무척 서운하기만 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이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 속에 살아온 지난날들이나 앞으로 더 살아가야 할 날들 속에 마냥 투정을 부리고 싶은 나만의 철딱서니 없는 응석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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