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238 조회 : 1,096




새털구름들이 다정하게 몸 붙이는 서편 하늘가에 선홍빛으로 물들이던 저녁노을이 금강 둑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더불어 푸석한 마당에 돌돌 내려앉는 어둠살이 서둘러 밤을 부르려는 것 같았다.

해질녘부터 어김없이 몰려드는 모기떼를 쫓으려 말린 쑥에 냇가에서 베어 온 생풀을 듬성듬성 섞어 넣고 억지로 태웠다. 채 마르지도 못한 생풀에서 번져나는 매캐한 냄새가 쑥 향기와 더불어 온 집 안에 흐트러졌다. 철길 너머 아랫마을에서도 모깃불을 피우는 연기가 어둠살 속에 드문드문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줄을 알았는지 서둘러 잠자리에 들려나, 예닐곱 마리 닭들이 굴뚝 옆에 매달아 놓은 둥그런 대나무 둥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꼬오옥꼬오옥’ 소릴 내며 몇 차례 갸웃거리다 갑자기 날개를 푸덕거리며 위로 날아 둥지 문턱에 오른 후 한두 마리씩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덜 자란 어린 닭 한 마리가 제 딴엔 열심히 날아오른 듯싶어도 문턱에 겨우 발가락을 걸쳐 땅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날개를 푸덕이며 버둥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 겨우 둥지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어미 닭들은 가로질러 놓은 횃대 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서로 다툼질을 하는지 소릴 내어 푸덕였다.

온종일 아랫동네로 마실을 나다니던 검둥이도 저녁밥을 기다리며 능청스럽게 토방에 엎드려 식구들 눈치를 슬슬 살피고 있었다.

쪽마루에 놓인 쌀가마니를 어머니와 순덕이 어머니가 달라붙어 안방으로 들여놓으려 안간힘을 써 보아도 육중한 무게를 움직이기엔 연약한 두 분의 힘으로는 벅찬 듯싶었다. 그래서 힘을 보태려 나도 함께 들러붙어 쌀가마니를 들어 옮기려 했다. 무거운 쌀가마니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아랫목 반다지 옆에 자리를 잡아 놓고 보니 우리 네 식구 들어앉기에도 가뜩이나 좁은 방 안이 묵직한 쌀가마의 모습에 눌려 더욱 작게만 보였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느껴오는 부담감에 벽에 기대 있는 쌀가마니가 자꾸만 큼직하게 보였다.

삭정이 하나 주워 오지도 못하면서 거추장스럽게 지게까지 어깨에 메고 산을 오르내리느라 땀을 많이 흘렸던지 온몸과 발에서 밀로 담근 식초 냄새가 시큼하게 났다. 어머니께서 하도 성화를 하셔 광목을 잘라 만든 수건을 손에 들고 앞 도랑가에 가려고 문밖을 나서는데 면소재지 철로 건널목을 넘어서는 종구가 자전거를 타고 새로 지은 집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문득 얼마 전에 정섭이 형이 한 말이 떠올랐다. 종구네 아버지가 아무런 타협도 없이 정섭이 형네 산에서 소나무를 마구 베어 그 일로 인해 어떠한 형태라도 심한 말다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남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한동안 조용했던 동네에 또 한 차례 소란이 일어나면 어떤 모습으로 끝이 나더라도 그 여파(餘波)가 동네로 번질 것 같아 그저 원만하게 끝났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초닷새를 겨우 넘긴 눈썹달이 그리 밝지는 않아도 어룽어룽하는 모깃불이라도 있어 조금은 늦은 저녁밥을 먹기에 별스런 지장이 없을 듯했다. 그보다는 가뜩이나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 비좁은 방에서 저녁밥을 먹기가 불편할 것 같아 마당에 멍석을 펼쳐 놓고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일껏 가만히 앉아서 순덕이 어머니 눈치만 보며 밥을 기다리던 검둥이가 갑자기 사립짝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골짜기가 쩡쩡 울리도록 세차게 짖어댔다. 그래서 얼른 밖을 바라보니 병막 터에 사는 정섭이 형이 동내로 향하고 있었다. 검둥이에게는 정섭이 형이 눈에 낯선 사람이라 더욱 세차게 짖는 것 같았다.

조금은 급한 걸음으로 서둘러 철길 앞 언덕마루에 오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새로 짓고 있는 기와집 터에서 집으로 돌아오시는 종구 아버지를 둥구나무 앞쯤에서 만나려는 듯 보였다.

깊은 내막을 모르시는 어머니는 밥을 드시다 말고 조금 멀리 집 앞을 스쳐 지나 언덕 위로 오르는 정섭이 형을 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아니 쟈는 병막 터 사는 정섭이 아닌가벼? 근디 대전에서 뭔 일을 배운다구 허든디 뭔일이 있어 집에 잠시 댕기려 내려왔는감? 다 저녁 때 뭔 급한 볼일이라두 있는가? 밝은 날 다 놔두구 하필이면 어둘 때 동네를 내려가나 모르것네.”

어머니께서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 내가 말씀을 드렸다.

“엄니! 시방 정섭이형이 저렇게 싸게싸게 내려가는 거는 종구네 아버지하구 한판 되게 따질라구 내려가는 기여.”

그러자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머니께서 더욱 궁금하신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며 말을 가로채셨다.

“에이구! 또 뭔 놈에 일이 생겨버려 가지구 서로덜 따질라구 헌다냐? 그 집 허구는 멀리 떨어져서 별반스런 일이 없을 틴디, 뭔 일이라냐?”
“엄니 그랑께 그게 뭣 땜시 글케 됐냐며는 이번참에 종구네가 새로 집을 짓는디 서까랫감으로 쓰는 솔낭구를 자기네 산에서 베어 쓰다가 모잘라서 정섭이 성네 산인지도 모르구 종구네 아버지는 그 솔낭구가 자기네 산쪽으루 있는 건지 알구 일꾼들 시켜서 막 베 버렸는디 그게 자기네 것이 아니구 정섭이성네 산에서 베어간 거래 그래 가지구 정섭이성 아버지가 정섭이 성이 있는 대전으루다가 편지로 기별을 해서 정섭이성이 엊저녁 늦게 내려온 모양인디. 아까 산에 낭구하러 갔다 내려오다가 정섭이 성을 만났는디 나보구 하는 말이 만나기만 허면 가만히 안 놔둔다구 하면서 되게 벼르더라구.”
“참! 병막 터 노인네 딱허기두 허지. 소낭구를 을매나 많이 베어 갔는지는 잘은 모르것지만 서루 모르는 처지두 아니구 자기네 솔낭구가 맞으면 좋게 무러 달라구 허면 될 것인디 입 뒀다 뭐 헐려구 그런 걸 가지구 멀리서 일 잘허구 있는 자식새끼까장 불러 내렸나 모르것다. 그건 그렇구 뭔 놈에 깨구락지 새끼들은 시두 때두 없이 청승맞게 울어댄다냐?”

내가 느끼기에는 어머니의 태도가 여느 때와는 달라 조금은 이상스럽게 보였다. 그토록 속으로 미워했던 종구네 아버지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린 소견(所見)이라도 자꾸만 그런 생각에 치중하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찝찝하게 느껴졌던 방 안에 떡 버티고 있는 쌀가마니가 차츰차츰 의심스러워졌다. 허나 어려서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 온 어른들이 하시는 일이라 어머니에게 더는 되물어 보지도 못해 답답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런 작은 것 하나부터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홀로 추측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앞서 동네로 내려간 정섭이형이 둥구나무 밑에서 종구 아버지를 만나 이미 말다툼을 격하게 벌이고 있는지 거리가 좀 멀리 떨어져 있어 말소리가 확실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커다랗게 언성을 놓여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흐릿흐릿한 달빛 사이로 드문드문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거무스레하게 보였다.

저녁식사를 끝마치신 어머니가 모기장을 치시려 방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틈새를 이용해 슬금슬금 사립짝 앞으로 걸어가 텃밭을 내려서 언덕배기 쪽으로 줄달음질쳤다. 동구 밖 나무다리 위에 오르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이미 말다툼은 격해질 대로 격해진 듯 보였다. 감정이 치솟은 격한 음성으로 말을 하는 정섭이형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예! 그러닌께 아저씨 말씀대로 하면 남에 집 물건을 훔쳐 놓고 몰라서 한 거라구 시침을 딱 떼구 나중에 물어주면 그만이라구 허면 되는 거네유? 참! 어이가 없네.”

정섭이형이 분이 덜 풀린 듯싶은 억양으로 말을 마치려 하자 종구네 아버지도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식 같은 사람한테 당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어 역시 격한 음성으로 소릴 높이셨다.

“니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 혀두 잘 생각혀 봐라. 내가 뭐시가 그렇게 탐이 나서 일부러 니네 집 낭구를 베었것냐? 니네 집허구 나하구 처음부터 무신 측량을 해서 땅바닥에다 금을 딱 그어서 산내끼 줄이라두 쳐 놓구 니 산 내 산 하고 따지면서 살은 것두 아니구 어쩌다 집을 짓다 보니 쓸 낭구가 모잘라 내 눈으로 보기에 조금 애매하기는 혔지만 그래두 내 산이라 생각허구 베였구 물론 측량을 혀 봐야 알것지만 솔직히 지금두 내 속으로는 그놈의 솔낭구 베어 내린 곳도 내 땅이라구 생각한다.”

그러자 종구네 아버지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섭이형이 그 말에 더 화가 난 듯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뭐라구 하셨어유? 그 땅이 아저씨네 땅이라구유? 워매! 죽것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라구 솔낭구두 맘대루 벼 내려가더니 이제는 한 수 더 떠서 아예 자기네 땅이라구 우기시네. 보셔유? 혹시 글자 모르시는 건 아니지유? 아저씨두 눈이 있으시면 이따가 집에 가셔서 땅문서 한번 꺼내 보셔유. 아저씨네 땅 경계선이 어떻게 그어졌는지 잘 좀 보시구 말씀하라구유?”

정섭이형이 그렇게 말을 끝내려 하자 종구 아버지가 불끈 쥐고 있던 손을 부르르 떨면서 화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신 표정으로 정섭이형 앞에 바짝 다가서 곧 한 차례 때릴 것 같은 기세로 말씀을 하셨다.

“참! 어린 게 버르장머리 허구는... 나이 어린 것허구 말을 할라구 하닌게 내 오장육보가 다 뒤틀려 못살것네. 싸강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야, 이놈아! 그럴 리는 하늘땅 똥구녕 밑에 추호두 없것지만 설령! 내가 뭘 모르구 니네 집구석 산에서 솔낭구 좀 베였다 치더라도 어디 니가 나헌티 감히 대들구 지랄이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구. 참! 니네 집구석두 자식 교육은 영 엉망이구나.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구 뭘 보구 자랐것냐?”

그러자 잠시 주춤하는 듯싶던 정섭이형이 오히려 종구네 아버지 앞으로 아주 바짝 다가서며 말을 받아쳤다.

“아! 그래서 아저씨네는 자식 교육을 그렇게나 잘 시켜서 예식두 안 올린 처녀가 한동네 사는 총각허구 바람이 나서 애까장 배번졌구먼유? 그리고 아저씨가 을매나 들볶아댔으면 그 추운 날 새벽바람에 다 떨어진 헌 고무신짝 버리듯이 고향을 떠났을까유? 어디 내 말이 틀리는 감유? 어차피 온 동네 사람들 다 쳐다보구 있으닌께 지 말이 쪼그만치라두 틀렸으면 내 볼따구라도 한번 세게 쳐 보세유?”

종구 아버지가 더는 못 참겠는지 득달같이 달려들어 정섭이형 멱살을 움켜쥐려 하시며 격노하신 어투로 숨 가쁘게 말씀을 하셨다.

“참! 싹바가지 없는 천하에 호래자식 같으니라구. 세상사람 다 가길 꺼려허는 병막에서 용천배기들 질질 흐르는 피고름이나 닦어주구 왜놈 비위나 맞추며 살던 것덜이 아무리 세상 변했다고 하지만 어디 큰소리를 치구 지랄이냐? 지랄이.”

그러자 쇠심줄이라는 별명 같이 정섭이형이 다시금 한 고집 부리는 듯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예 우리 아버지유! 그렇게 살았어유. 살기 힘들어서 일본 놈들 비위 맞추구 살으신 거 내가 아니라구 말 못하지만 그럼 그런 말씀허시는 아저씨는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디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구 그 말이 딱 들어 맞네유. 일본 놈 밑에서 굽실거리며 말구루마나 끌고 머슴살이했구 일본 놈들 신다 벗어 놓은 게다짝이나 손으루 딱구 살으시다 해방이 되어 일본 놈이 정신 혼창이 다 빠져 도망가면서 수 년 동안 그 밑에서 같이 살았다는 정리로 서류상으로 거저 주구 간 그 많은 땅덩어리를 얻어서 어느 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어 어렵게 살은 옛날 생각을 못하시구 소문을 들어 보닌께 동네에서 어렵게 사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장리변 놀이나 허며 그리 괴롭히구 그렇게 살으신 아저씨는 그렇게 떳떳하신감유? 암튼 끝까지 그렇게 나오시닌께 어쩔 수 없이 내일 날만 새면 지가 열일을 제쳐 두구 읍내 경찰서에 가서 아저씨를 정식으루 고소를 헐 테닌께 그리 아세유.”

한동안 숨 가쁘게 말을 했던 정섭이 형이 단호하게 등을 돌려 더 이상 뒤도 안 돌아보고 병막 터 산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냉정하게 말을 끊고 돌아가는 정섭이형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계시는 종구네 아버지의 모습이 좀 안쓰럽게도 보였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 여하를 떠나 딱 부러지게 앞으로 나서서 중재는 못할망정 흐린 달빛에 적당히 얼굴을 내밀고 저마다 남의 집 불구경하듯 슬슬 눈치나 살피며 싸움 구경을 하고 있는 동네 어른들이 무척이나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동네사람들 더러는 정섭이형이 입바른 소리를 할 때 속이 다 시원한 듯 눈에 보이게 안 보이게 히쭉히쭉 웃고만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던 대로 종구네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크게 잃은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연유였는지 말다툼을 말리려 들기보다는 오히려 적당히 즐기려는 것 같아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억눌려 살았던 그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풀려는 듯 보였다.

나 역시도 종구네 아버지가 내 삶의 근간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런저런 뼈아픈 사연이 있어 그리 좋게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때는 자유당 그늘 밑에서 큰기침하고 살았는데 세상이 뒤바뀌어 무참하게 당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려니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종구 아버지에 대한 마을 인심이 이제 밑바닥에 닿은 것 같아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아무리 읍내 조씨네 점방에서 돈을 빌렸다고 하시지만 그보다 내 어린 생각은 집에 있는 쌀 한 가마니와 우리 집 그리고 종구네 아버지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흐린 달빛이 어른거리는 풀숲 사이로 개똥벌레 불빛이 까막질을 하고 있어 나름대로 여름밤의 운치를 돋웠다. 그리고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밤하늘 옅은 구름 사이로 시려 오는 슬픈 눈망울로 반짝이던 여우별 하나가 슬며시 몸을 감추려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언덕 아래 선로 위에는 종착지 서울역을 향해 달려가는 야간열차가 기적 소리를 드높이며 마을 앞으로 힘차게 달려왔다.

그런저런 잡다한 생각에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모기장을 들추고 이제는 낮 동안 친숙해졌던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과 밤새 동안이라도 헤어져야 할 시간인 것 같아 잠자리에 들려 했다. 그런데 해가 저문 초저녁은 그런대로 열기가 좀 가라앉는 듯싶어도 어둠살이 짙어 밤이 되면 낮 동안 달아올랐던 지열로 온통 후덥지근하기만 하여 잠을 이루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에 못지않게 때를 기다린 듯 왱왱거리며 사정없이 온몸에 달라붙는 모기떼와 밤새 씨름을 해야만 했다. 짜증스러워 이저리 몸을 뒤척여도 편치 않았다. 그도 모자라 논배미에서 밤을 새워 시끌벅적하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까지 청승맞기 그지없어 짧은 여름밤이 더욱 길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어둡고 좁은 방이 더욱 후덥지근해 이따금 시원한 바람 인색하게 라도 들어오라고
허연 문종이 들러붙은 안방 문짝 아랫부분을 절반쯤까지 칼로 종이를 잘 떼어냈다. 그리고 그 위에 가는 모기장 망을 붙였지만 바람은 매정스레 단 한 점도 불질 않아 온몸이 끈적거렸다.

그런 답답함을 아는지? 구름 사이 얼굴 내민 어스름한 달빛이 는적거리게 새어 들어와 더위에 지쳐 더없이 너불거리는 흐릿한 석유 등잔불 주위를 소리 없이 맴돌려 했다.

살아오는 동안 크고 작은 시름들이 천체의 별들처럼 많기만 했다. 시작과 끝의 구별조차 어려운 숱한 상념(想念)들이 온몸에 파고드니 잘 감기지 않는 두 눈에 동공(瞳孔)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한 자락 남으려 하는 진한 아쉬움에 발목이 잡힌 듯 멈칫거리는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얄밉기만 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다시금 몸을 굴려 옆으로 누워 보아도 텅 빈 소라껍질 속을 파고든 바람이 남기는 뜻 모를 잔잔한 여음처럼 무딘 방바닥에 눌린 귓속에서 울리는 이음이 머릿속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드문드문 벌어진 방 벽의 가는 틈새로 끊기는 듯 이어지는 듯 풀벌레 울음소리만 처연하게 들려왔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