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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41 조회 : 1,129




거무스름하게 바라보이는 앞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녹음(綠陰)으로 뒤덮인 산자락의 오묘함이 또 다른 감성을 불러일으켜 마음이 심오해졌다.

온 대지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름이 열기로 가득 차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에 상응하듯 떨칠 수 없는 가난이 빚어낸 열약한 환경은 그 어느 작은 것 하나도 마음 편히 가질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얻어진 안타까움이 온몸을 무지막지하게 달구는 한여름 더위보다 더 큰 비중으로 내 작은 몸뚱이를 무겁게 짓눌렀다.

전쟁의 화마가 온 산야를 스쳐 지나간 지도 수해가 지났건만 전쟁이 남긴 상흔(傷痕)은 채 아물지 못했다. 이따금씩 동네 어른들이 들려주시는 전쟁에 대한 참혹한 말이 그리 팍 실감나게 몸에 와 닿지는 않았다. 더욱이 어린 나이에 직접 체험을 못해 본지라 기억에 남는 것이 없어 그저 어른들의 말을 귀동냥을 할 정도였다.

그 지긋지긋했던 지난 난리 때 잔혹했던 전쟁이 종반부로 치닫자 패색(敗色)이 짙어진 인민군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으로 도주를 했다. 그중 퇴로가 막힌 일부 패잔병들과 산에 숨어서 극열하게 저항을 하던 공비들이 합류하여 산세가 가파르고 험한 깊은 골짝으로 더욱 깊숙하게 숨어들었다.
한낮에는 계곡 바위틈에 두더지 모양 몸을 숨겨 눈을 피해 있다가 주위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빛이 어스름한 밤에는 근교 아랫마을로 어둠을 타고 내려왔다. 굶주림에 지친 그들은 먹을 양식거리는 물론 심지어는 살림 밑천인 잘 키워 놓은 소와 돼지들을 총부리를 들이대고 겁박(劫迫)하여 강제로 빼앗아 끌고 갔다.
그렇게 허기를 달래며 악착 같이 저항을 하였으나 국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대다수는 사살되었다. 그리고 투항한 포로들을 제외하고 끝까지 대항하던 일부 좌익 골수분자들이 산골짝에서 목숨을 잃어 한동안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그런 탓인지 어쩌다 땔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다 보면 전쟁의 무상함을 말하여 주는 듯 백골의 허무한 모습이 더러더러 눈에 띠여 등골이 오싹해졌다. 또한 흙 속에 파묻혀 삭아 문드러지지도 못한 옷가지들과 쓰다 버린 붉게 녹슨 실탄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좁다란 산길이 트여진 앞산 산마루턱에 언제 밀려왔는지 손끝에 닿을 듯 마냥 탐스럽게 잘 부푼 새하얀 솜털구름 한 덩이가 먼 길을 오느라 숨이 찼던지 잠시인들 쉬어 가려 산릉선에 닿을 듯 말 듯 머물렀다. 산 밑자락을 깎아 일궈 놓은 계단식 밭 윗부분으로 좁다랗게 트여진 둑길이 가름하게 보였다.

절정을 이루는 한낮 폭염(暴炎)이 소금기로 찌든 등판을 더욱 달궜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熱氣)가 턱밑을 치고 올라 가삐 숨을 몰아 내쉬게 하니 나른해지려는 몸을 더욱 는적거리게 했다.

보통 때는 그리 힘들지 않던 서낭당 언덕의 오름길이 찌는 더위 때문인지 더욱 길게만 바라보여 걷기에 힘들기만 했다. 그저 마음 같아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차례 소낙비라도 내려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맑은 하늘은 비는커녕 빗낱도 들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아 바싹 타오르는 목에 갈증만 더욱 부추겼다.

지난 장맛비에 후줄근하게 늘어져 바람에 제멋대로 나부끼는 모습이 영 볼품없었던 서낭당 당산나무에 매어 놓았던 울긋불긋한 천 조각들이 재 너머 ‘수랑골’에 사는 무당네가 둘러놓은 듯 새로 꼰 누런 새끼줄에 색감이 또렷한 헝겊들이 둘러 있어 나름대로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밤사이 누가 치성(致誠)을 드리고 남긴 듯 땅에 떨어져 흐트러진 떡 조각과 나물거리 위에 때를 만난 듯 검정 개미들이 들붙어 분주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하루의 흐름이 정오쯤에 머물려 하자 탱글탱글하게 야물 대로 야물어 똘방똘방해진 한낮 해는 마을 지붕 머리 위에 오붓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마을에서 제일 높게 바라보이는 동네 방앗간 녹슨 양철 지붕에 지글거리는 햇살은 있는 힘을 다해 내리쏟았다.

동구 밖 둥구나무 밑에는 더위를 피하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도 도렷하게 바라보이는 미루나무 한 그루 뻘쭘하게 서 졸고 있는 앞 냇가에는 동네 아이들이 격 없이 한데 어울려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 모습들 하나하나가 정겹게 눈에 와 닿았다.

굽어진 밭두둑에 힘 있게 자리를 잡고 뻗어나는 고구마 잎들이 제법 성글게 바라보였다. 그리고 저마다 긴 목을 하늘 향해 쭉쭉 빼 내밀고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는 수숫대 위로 나지막하게 옅은 조개구름들이 새하얀 무늬로 운해를 이루고 있었다.

계곡 아래로 비스듬하게 트여진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늘 그 자리 길가 풀숲에 매어 놓는 염소가 낯이 설어 그러는지 한두 번쯤 싱겁게 울며 공격을 하려고 했다. 양쪽에 뿔이 잔뜩 구부러진 머리에 턱밑에 길쭉스름하게 자란 수염을 흔들며 곧 달려들 듯 조금은 우습게도 보였다.

장맛비에 한동안은 물이 제법 흐르는 듯싶던 계곡이 연일 타들어 가는 가뭄에 그라도 간지럽게 졸졸거리던 물마저 말라 바닥 군데군데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까칠하게 보였다.

계곡 바닥 위로 거무스레하게 멋없이 불끈 솟아오르는 큰 돌멩이 위로 회색 잠자리 두 마리가 밀회를 하듯 가쁘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바윗등 언저리에 내려앉아 암놈 잠자리 등에 올라탄 수놈 잠자리가 꼬리를 잔뜩 구부려 짝짓기를 했다.

지난 장마에 한쪽이 조금은 기운 듯 보이는 까칠하게 빛바래진 싸리 울타리 담장밖엔 햇살을 놓치지 않으려 하늘 향해 머리를 바짝 들고 있던 해바라기가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머리를 흔들며 들녘으로 내려서려는 햇살을 못내 아쉬운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자락 끝머리와 맞닿은 뒤뜰 밤나무 숲에선 더위를 재촉이나 하듯 매미 울음소리 드높아지고 울 밑 봉선화와 납작납작하게 엎딘 채송화도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뒤뜰 장독대 옆에 맨드라미도 햇볕에 그을려 붉다 못해 반질반질하고 마당 안 빨랫줄을 들춰 올린 바지랑대 끝에 회색 잠자리 한 마리가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검둥이도 더는 더위를 못 참겠는지 턱이 낮은 쪽마루 그늘 밑으로 비집고 들어가 응달진 곳 땅바닥을 발로 긁어 후벼 헤쳐 조금은 냉기가 도는 땅바닥이 좋은지 배를 넙죽 깔고 주둥이 한쪽으로 혀를 빼 내밀어 헉헉거렸다.

내 눈에 감지되는 그 모든 사물들이 나른하고 조금은 힘이 없는 모습으로 보이니 표독스럽게 달궈지는 여름은 무릇 지루하다 못해 때론 작은 짜증까지도 불러오게 했다.

좁다란 쪽마루와 문턱이 낮은 방을 제 맘대로 들락날락하는 순덕이는 이제는 제법 컸다고 그런지 아님 턱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빨다 누가 보지 않으면 얼른 손가락을 빼 문창호지에 대고 구멍을 여기저기 뚫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란 듯 방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한 장짜리 달력의 가장자리에 풀칠이 꺼덕꺼덕하게 붙은 곳을 손톱으로 자꾸만 긁어 뜯어내려 했다.
그리고는 연결이 되질 않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저 혼자서 지껄이며 딴전을 피우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저도 멋쩍은 듯 한차례 씩 웃고 슬금슬금 주위의 눈치를 살필 정도로 탈 없이 자라난 것이 그저 부듯하기만 했다.

그저 남들이 바라보기엔 볼품 하나 없어 쓰러질까봐 땅바닥에 납작 달라붙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낮은 초가집이지만 나에게는 그저 소중하기만 했다. 비록 양식거리 없어 배고프게는 살지라도 엄동설한 강추위에 춥지 않게 살라고 깊은 배려를 한 듯 그래도 정남쪽을 향해 지은 집이라 한겨울엔 쪽마루에 햇볕이 따스하게 들이 비췄다.

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양지바른 곳이라 겨울 한철은 포근하게 스며드는 햇볕이 그런대로 큰 위안이 되었다. 그 와는 정반대로 한여름엔 덥다 못해 발바닥이 데일 정도로 뜨거워 방금 빨아 놓은 물걸레도 언제 말랐는지 모를 정도로 뜨겁기만 하여 속 편하게 마루에 앉아 점심밥을 먹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햇볕 드는 곳이라고는 멋대가리 없이 트여진 좁다란 봉창 하나인 가뜩이나 비좁아 터진 어두운 방 안에 석유 기름과 그을음 냄새가 온 벽에 배일대로 배어 물큰하게 묻어나 후끈거리는 방 안에서 점심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나마 부채라고 두어 개 있는 것을 순덕이가 그리도 알뜰하게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순덕이 어머니가 찢어진 부위에 종이를 덧대어 바르고 또 발라 이제는 아주 묵직해진 부채가 제구실도 못했다. 조금이라도 시원할까 싶어 묵직한 부채를 부치다 보면 오히려 더운 바람이 불어 그도 마땅치 않았다.

그리저리 살다보니 우리 식구들이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 그래도 응달진 부엌 바닥이 덥지는 않아 부엌문 양쪽으로 걸쳐 놓은 거적때기만 걷어 올리면 양옆이 확 트여 바람이 이따금씩 솔솔 불어와 시원해졌다. 부엌 바닥에 보릿짚을 깔아 개다리소반을 놓고 어쩌다 운이 좋을라치면 솔바람 소리도 들으며 식구들 끼리 둘러 앉아 밥을 먹으면 정은 날로 도타워지기만 했다.

그 무렵이면 봄에 심었던 봄배추가 다 떨어져 김칫거리가 마땅치 않아 힘이 드는 철이었다. 그래서 콩밭에 드문드문 뿌려 놓았던 열무가 콩잎의 그늘 속에서 자라 잎과 줄기가 그리도 연해 물에 씻어 꽁보리밥에 된장을 넣고 함께 썩썩 비벼 먹으면 그리 맛이 좋았다. 그리고 텃밭에 나는 오이를 얇게 조각내어 열무와 함께 물김치를 담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더러는 약이 오른 풋고추를 된장에 쿡 찍어 먹으면 별다른 반찬 없어도 그리 먹는 밥이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이 마음 하나는 그렇게 편했다.

그리고 늘 그맘때쯤이면 검둥이는 무슨 놈에 코가 귀신 같이 냄새도 그리 빨리 맡는지 퍼뜩 알아차리고 쪽마루 밑에서 기어 나와 찬밥 한 술이라도 주지 않나 하고 멋쩍게 부엌문 앞을 자꾸만 어슬렁거렸다. 그런 모습이 못내 안쓰러워 밥을 한 숱 떠서 땅에 던지면 밥덩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냅다 받아먹고 그도 양이 차질 않는지 다시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쯤이면 대추나무 그늘 밑에 흙이란 흙을 온통 파헤쳐 둥글둥글하게 흙 둥지를 만들어 잘 놀고 있던 닭들도 검둥이를 닮아 능청을 떠는지 한두 마리씩 얄밉게 머리를 갸웃대며 부엌문 앞으로 슬슬 모여들기 시작했다.

둔덕 왕 소나무 밑 너럭바위 위에는 찌는 더위를 꾹 참고 오전 내 콩밭을 매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앉아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봄에 농사로 재미를 수월찮이 보셨다고 동네에 입소문이 도는 밭 임자인 영호네 어머니가 먹을 물을 구하러 오시는지 굽어진 밭둑길을 따라 우리 집을 향해 걸어오셨다.

그리고 수박 밭에 나와 일을 하고 계시던 동근이 아버지도 점심을 드시러 가시는지 밭고랑을 헤쳐 나오셨다.

늘 그맘때면 동네 앞을 지나 목포로 향하는 작은 간이역마다 쉬어 가는 느림보 완행열차가 한차례 기적 소리를 드높게 울려 산자락에 메아리쳤다. 기차는 허연 수증기를 물씬물씬 밖으로 내뿜으면서 산모퉁이를 빙 돌아 육중하게 검은 머리를 앞으로 내보이며 달려왔다.

그러자 냇가에서 미역을 감고 나와 구릿빛으로 잔뜩 그을린 몸을 말리던 동네 아이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거숭이 알몸을 송두리째 드러내 달려오는 증기기관차가 너무 눈에 익어 무척이나 반가운 듯 작은 손을 마구 흔들어 주니 그런 모습에 화답이나 하는 듯 기차는 ‘꽤엑’하며 아주 짧은 소리를 내었다.

가뭇가뭇하게 바라보이는 먼 산자락 고갯마루에서 불어온 듯 시원한 바람이 조금 전 내가 머물다 온 읍내를 향해 내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어오는 바람이 드넓게 펼쳐진 너른 들녘의 벼이삭을 가볍게 뉘어 번득번득하게 윤택(潤澤)이 나는 청록색 길을 끝없이 트는 듯싶었다. 그러더니 어느덧 가을이 목전에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려는 듯했다. 찬연한 녹색을 뉘도 모르게 슬며시 지우면서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드문드문 누르스름한 빛깔을 남기며 스쳐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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