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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42 조회 : 1,167




한 자락 시원한 바람이 들녘을 가로질러 둑 너머 읍내 쪽으로 불고 있었다. 그지없이 넓기만 한 들녘을 바라보고 있는데 따끔거리는 햇살에 눈이 가득 시렸다.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방대한 들녘은 어느 한곳 빠짐없이 검푸른 벼이삭들로 꽉 들어차 녹색 바다를 이루었다.

늘 생각으로는 너른 들녘이 산 밑자락에 들붙어 있는 줄만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활기가 넘쳐나는 저 들녘이 봉긋봉긋하게 솟아오른 크고 작은 산들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을 향해 내리뻗은 비탈진 산자락과 산자락 사이 햇볕이 넉넉하게 찾아드는 펑퍼짐한 터에 부지런히 일궈 놓은 밭들이 계단처럼 층을 이루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 중참 때가 되었는데도 이글거리는 해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뜨거운 햇볕이 옹골지게 내리쬐어 콩밭을 매는 아낙네들의 고역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푸석거리는 땅에 동네 아낙네들이 호미질을 하니 찌는 더위 속에 목과 입 안이 온통 까끌까끌하다 못해 버석버석 타들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호네 어머니가 우리 집 물두멍에서 벌써 두어 차례 물을 가져간 듯싶었다. 그런데 또다시 물을 가지러 사립짝을 들어서고 있었다. 영호 어머니께서는 순덕이 어머니가 먼 곳 동네 우물에서 목이 아프게 물동이를 이고 오는 모습을 몇 차례 보아 온 터라 미안스러워 그러시는지 우리 집 식구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부뚜막에 가마솥을 바꿔 걸려고 마당에서 황토 속에 섞인 풀뿌리와 검불을 가려내어 흙을 고르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부뚜막에 솥을 갈아 끼울라는 모양이구먼. 해묵은 옛날 것이라 그런가? 쇠가 두툼해 보이는 것이 엄청 탄탄하게 보이네 그려. 허긴 돌아가신 그 어르신네가 성격이 좀 깐깐한 양반이셨남? 그러니 솥단지 하나두 이렇게 야물딱지게 생긴 걸루 고르셨지.”

마음은 서둘러 밭일을 마치려니 일꾼들이 기다리는 물을 얼른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건만 그래도 미안스런 마음에 눈치를 살피시느라 투실투실한 누런 새끼줄로 야무지게 묶어 놓은 질이 반지르르하게 난 무쇠 솥을 애꿎게 만지고 있었다.

그러자 흙을 펼쳐 고르시던 어머니가 영호네 어머니를 바라보시며 말을 받으셨다.

“에이구 솥단지만 번지르하면 뭐 한디유? 빛 좋은 개살구지 사는 꼬라지가 요 모양 요 꼴인디 언제나 허리 좀 쭉 피구 살 날이 올란가 모르건네유. 그나저나 이번 가뭄에 콩밭에다가 씨를 늦게 뿌려 제대루 될란가? 하구 걱정을 많이 했는디 그래두 저러콤 잘 자라 주닌께 쳐다보는 내 맴두 엄청나게 편키만 허네유.”

어머니께서 봉곳하게 쌓아 놓은 흙더미에 장난을 치려고 달라붙으려는 순덕이를 한 손으로 막으려 하시자 순덕이는 어머니를 이리저리 비켜 자꾸만 흙더미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 천진난만한 순덕이의 모습이 귀여우신지 영호네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래두 상민이네는 상민이 엄니가 원칸 부지런해서 어찌 됐던 지간에 이 살림 다 꾸려 나가구 자식까장 읍내 학교 보내는 것보면 다들 용타구 허지. 그저 넘 말이라구 다덜 떡 빼먹 듯 쉽게들 말하지만 여자 혼자 몸으로 이 우라질 놈에 흠한 세상 헤쳐 나가는 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인감? 암튼 상민네가 고생이 무지허게 심허구먼 그려.”

영호네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머니께서는 영호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에 조금은 고무되신 듯 다시금 말을 이으셨다.

“나사 분에 넘치는 그런 소리 듣고 싶은 맴두 별시리 없지만 또 들어 본들 뭣헌데유. 글타구 지지리두 고생허구 사는 거 저놈에 하늘이 알아준데유? 아니면 말 한 자락 없이 땅속에 푹 들어앉아 있는 죽은 서방이 알것이유. 가난한 집구석 씻나락 주물러 대듯이 아래턱 빼서 위턱 막느라고 정신 혼창이 다 빠져 이른 아침부터 새비젓 동이 이구 이 동네 저 동네 고샅길을 동네 강아지 새끼 마냥 다리가 퉁퉁 부어 가지구 헤매구 다니는디 그것두 타고난 복살머리라구 힘이사 들던 어쨌던 간에 장사 좀 헐라치면 오장육부 쇠깔고랭이루 박박 긁어댈려구 그러는지 밀가리 장사 할려고 하니 바람이 불고 소금 장사로 바꿔 해보려 하니 비가 내린다고 장마철엔 비가 와서 못허구 하늘이 쪼매 말끔하다 싶으면 날씨가 무지막지허게 쪄 내려 더위에 걸어 댕길라닌께 숨이 차서 장사헐 엄두도 못내구 한겨울 시한에는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아 못허니 손에 쥔 건 없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구 먹구는 살아야 허닌께 이 집 저 집 눈치 보며 쌀 빚이나 내러 댕기구 살지유 뭐, 에휴.”

어머니께서는 늘 가슴 한곳에 응어리졌던 아픔을 조금이라도 푸셨는지 붉은 황토가 간조롬하게 담긴 싸리 삼태기를 번쩍 들고 어레미로 흙을 고르시는 순덕이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몸을 옮기셨다.

그제서야 영호 어머니께서는 물두멍에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급히 들어가셨다.

날씨 따라 훈김이 후끈후끈 아지랑이처럼 이는 두엄 가엔 장닭 한 마리가 보슬보슬하게 부풀어 오르는 깃털을 세우고 지렁이를 콕콕 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울타리 호박 덩굴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옥수수는 불그레한 수염을 늘어트려 겹겹이 쌓인 껍질 속에 알맹이가 튼실하게 여물어 가는 것 같았다.

빛깔 고운 황토의 고운 가루를 고르려 어레미를 흔들고 계신 순덕이 어머니 옆에는 순덕이가 바싹 다가와 쪼그려 앉아 어레미 밑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가는 흙가루가 신기하게 보이는지 눈을 끔뻑끔뻑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허연 조개구름들이 떼를 지어 기다랗게 줄을 이뤄 나지막이 떠 있는 밭 자락엔 밭을 매는 동네 아낙네들이 후끈후끈 땅속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시며
무엇이라 크게 떠들면서 서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수박 밭의 동근이 아버지는 원두막 마루 위에 누워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그런 시끄러움과 요란스레 울어대는 매미소리 마저도 자장가로 삼으신 듯 가볍게 코를 골며 태연하게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어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그런 모습이 퍽이나 편안하게 보였다.

그리 여유로운 주인을 닮아 가는지 밭두둑에 둥그런 배를 불쑥불쑥 내민 검은 줄무늬 수박들의 등 언저리가 햇살에 반사되어 군데군데 번뜩거리고 풀숲에 몸을 숨긴 맹꽁이도 숨이 차오르는지 멋없게 울고 있었다.

마당가에 놓인 검정 윤기가 반질거리는 무쇠 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 해 여름밤 모깃불 앞에 덕석을 깔고 누워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며 어머니께서 ‘너도 이제는 알고 있으라.’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 대한 말씀을 하시던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겨우 똥오줌을 가릴 나이인 네 살 나던 그해 여름 새벽 청천 하늘에 날벼락 같은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막중한 화력을 가진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쳐 내려온 인민군들이 대전을 불법 점령했다. 이어 논산과 강경의 두 읍내를 점령하여 외진 이 곳 시골 작은 면까지 쳐들어오자 종구 삼촌이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하며 그 불순 세력에 동조하여 하수인 노릇을 자청했다.

하룻밤 사이 벼락감투를 쓴 것처럼 팔목에 붉은 완장을 차고 온 동네를 으스대고 다니며 기세등등하게 대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 인민군 장교에게 턱짓을 하여 바른말을 많이 하시며 사신 마을 유지라는 명분으로 밧줄로 묶여 날카롭게 뾰족한 대나무 창끝에 등 떠밀려 끌려가신 외할아버지가 면내 화정리 방앗간집 널따란 마당 안에 있던 인민위원회 임시 감옥 겸 취조실에 같은 면에 사는 숱한 사람들과 함께 갇히셨다.

놈들의 감언이설에 넋을 뺏겨 온통 고무되어 눈이 뒤집힌 종구 삼촌이 고향 불알친구인 외삼촌마저도 밀고를 했다.
읍내에 있는 산림조합에 임시 서기로 근무한 것을 생트집 잡아 반동으로 몰려 하자 화를 면하려고 산속으로 깊이 숨어 피하신 외삼촌의 행방을 대라며 다그쳤다. 그러나 외할아버지께서는 끝내 대답을 안 한다고 혹독한 매질을 당하셔 거의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종구네 삼촌에게 몇 날 며칠을 두고 찾아가 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정을 하여 온몸에 핏물이 얼룩진 채로 겨우 풀려났다.

그리고 두 해 동안 병석에 누워만 계시다 휴전이 되던 그해 늦가을 무렵 숨을 거두셨다. 그 일로 충격을 크게 받으신 외할머니도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으시다 내 나이 여덟 살 되던 그 이듬해인 늦은 봄날이었다. 외갓집 앞마당에 빨간 앵두 알이 주렁주렁 매달렸을 때 외할머니마저도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렇게 두 집안 사이에 영원히 풀 수 없는 그토록 질기고 질긴 악연은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 악연은 비단 우리 집 뿐만이 아니었다. 종구네 삼촌의 밀고로 끌려가 참살(慘殺)을 당하신 동네 두 집과 지금까지도 서로 등을 돌려 살아가고 있으니 그 다음 세대인 우리들까지도 서로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던 암울하고 불운하기 짝이 없던 시기였다.

그 당시 종구네 아버지도 비록 지난날의 행적이 일본인 밑에서 미천한 종노릇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어찌되었던 그토록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빈농들을 상대로 장리변 노리를 하며 살았으니 그들이 노리는 주적(主敵)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새 중간에 들어선 종구네 삼촌이 방패막이를 하며 놈들이 먹는 것까지도 죽은 조상님 제사를 모시듯 나름대로 있는 정성을 다 들여 장만하고 인민위원회가 설치된 면소재지까지 소달구지로 실어 나르며 뒤치다꺼리를 했다.

자기네 허물을 감추려니 자연히 그들의 믿음을 사려고 종구 삼촌이 더욱 앞장을 서 죄 없는 인근 부락 사람들까지 턱없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아 화를 당하게 했다.

무심치 않은 하늘이 벌을 내리듯 전쟁이 끝나기도 전선의 상황이 불리해진 북괴군이 북으로 도주를 하기 시작했다. 종구 삼촌도 야밤에 도주를 하여 운주골 싸리재 고개 너머 깊은 산속에 숨어 살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북으로 가지 않고 어느 날 달빛 흐린 야밤에 몰골을 한 형색으로 동네로 찾아들었다. 그리고 종구네 뒤뜰 대나무 밭에 굴을 파고 숨어 살다 동네 사람들 중 누가 신고를 하였는지 국군과 순경들에게 체포되어 지은 죄값만큼 중형을 선고 받았다.

대전 형무소에 좌익 장기수로 지금껏 복역(服役)을 하였어도 남은 형기가 너무도 길어 까마득하기만 하니 하늘은 무심치 않은 듯했다.

그렇게 전쟁의 시작부터 전쟁이 끝난 날까지 동네 몇몇 집이 받은 전쟁의 상처로 숱하게 한 맺힌 아픔들을 간직한 채 겉으로는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종구네 집과 말다툼이 일어날 때는 늘 심심찮게 과거의 한 맺힌 이야기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종구 아버지는 생활이 간고하여 빚을 내려 말 붙여 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별스레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길 꺼려했다. 어쩌다 면내에서 큰 행사가 있어도 얼굴을 들고 나서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지난날 일본 사람 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자신의 열등감과 자기 동생의 일로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빨갱이 집구석’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다 보니 실추된 자신이 명예와 자존심을 되찾으려 더욱 억척스레 재산을 불리려는 것 같았다.

그런 불운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슴 아린 사연으로 숨을 거두신 외할머니께서 이 땅에 살아 계셨을 적이었다. 어머니가 처녀였을 때 나중에 좋은 남편 만나 시집가면 새 솥을 걸고 자식 낳고 알콩달콩 잘살라고 하시며 단 하나 밖에 없는 딸자식에게 주려고 읍내 주물공장에 특별히 부탁을 해서 마음의 선물로 주신 것이었다.
그 후에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셔 아랫동네 우물가에 있는 집에 신접살림을 차릴 때부터 지금 살고 있는 산골짜기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십 년을 쓰시다 그리 애지중지하시는 마음으로 잘 보관해 놓았던 지난날 삶의 기록이 묻어난 무쇠 솥이었다.

바로 그 무쇠 솥을 부뚜막에 새로 걸려고 순덕이 어머니와 함께 온종일 그리도 애를 쓰셨다.

서쪽 금강둑 너머로 스러져간 붉은 저녁 해가 남긴 잔광(殘光)으로 어스름한 회자색(灰紫色)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싱그러운 풀 냄새가 다복하게 묻어나 후덥지근한 저녁 공기가 무겁게 가슴에 와 닿았다.

‘데엥뎅, 데엥뎅,데엥뎅 데엥뎅’

언젠가 내 친구 주현이와 음력 사월 초파일 날 연등 구경을 하려고 딱 한번 가 본 적이 있는 노루목 고개 너머 골짜기의 수련암 암자에서 울리는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梵鐘) 소리가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왔다.

어머니께서는 방 한구석에 놓인 등잔대를 끌어당겨 조심스레 석유를 사기 등잔 안에 잘름거리게 넣으시고 머리에 꽂고 계시던 머리핀으로 호롱의 심지를 돋우어 불을 켜신 후 손끝에 조금 묻어난 석유 기름을 뽀송뽀송하게 마른 방 걸레에 대고 쓱쓱 문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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