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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43 조회 : 1,252




낮 동안 잘 달궈진 땅거죽에서 쏟아내는 밤의 열기로 늦도록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밤이 이슥해서야 겨우 잠에 든 듯했는데 생리적 현상으로 방광(膀胱)이 저려와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희끗희끗한 봉창 문을 바라보았다. 방 안이 그렇게라도 어스름하게 보이는 것은 보름을 하루 앞두고 몸을 욕심껏 부풀려 만월(滿月)이 되려 하는 달이 남긴 여광(餘光) 때문인 것 같았다.

여명 속에 동녘 하늘을 가르려는 아침 해는 붉은 빛을 가득 띄우며 아주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미적거리던 첫새벽은 느슨하게 들붙어 있던 침잠의 깃털을 털고 방 안 가득 드리운 어두운 빛을 거두어 떠날 차비를 서두는 듯했다.

방광에 압축이 더욱 심해져 잠에서 덜 깨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쪽마루를 내려섰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제 딴에는 이른 새벽부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마루 밑에 잠을 자고 있던 검둥이가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리고는 별스런 일이 없음을 느꼈는지 새퉁맞게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가볍게 꼬릴 흔들었다.

마당가 두엄자리에 소피를 보면서 앞을 바라보니 멀리 읍내 건물들이 밝혀 놓은 전등 불빛이 희끄무레하게 하나둘씩 눈에 띄어 괜스레 쓸쓸하기만 했다. 이른 새벽녘이라 그런지 검뿌옇게 바라보이는 신작로에는 온종일 그리도 소란을 떨며 오가는 차량의 발길이 뚝 끊겨 온 들녘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만 했다.

괜스레 허해지는 마음에 머리를 들어 언덕마루를 바라보았다. 야금야금 소리 없이 트여 오는 희뿌연 하늘에는 오달지게 들붙은 샛별 하나 힘을 잃어 거무레한 솔숲 사이에 창백하게 머무적거리고 있었다. 울 밖으로 조금 멀리 건너 보이는 아랫동네엔 고만고만한 초가지붕들이 자금자금하게 보여 자못 정감을 자아냈다.

새벽안개가 마을 앞개울을 가볍게 넘어서더니 좁다란 고샅길 골목 안으로 헤집고 들어 다복하게 자리를 잡았다.

아침 해가 동녘 먼 산봉우리 밑에 아직은 머물러 앞산 자락 계단식 밭들이 가벼운 어둠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때 이른 새벽 정적을 깨려는 듯 북상하는 첫 열차인 화물 기관차가 쩌렁쩌렁한 기적 소리를 허공을 향해 울렸다. 그리고 우직스레 생긴 검은 동체로 세차게 밀어붙이듯 달려와 어둠 깔린 땅바닥을 들썩거리고 산자락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기관차의 앞머리에 달린 커다란 전조등을 세차게 밝혀 집광된 거센 빛의 힘으로 온 들녘을 환하게 훑어 내렸다.

기관차 앞머리의 불빛은 참으로 밝기만 했다. 그 불빛이 밭 끝자락부터 멀리 건넛마을 용화리 동네 어귀 산모퉁이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음산스런 상엿집 지붕 머리까지 고루 비치고 있었다.

마을 앞 들녘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앞산 마루에 거무스레한 구름들이 잔뜩 들붙어 있어 어제처럼 참기 어려울 정도의 찌는 한낮 더위는 피할 듯싶었다. 그런 탓에 하루를 맞이함에 있어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날이 새도록 숱한 이야기를 달님과 나눴던 분홍빛 분꽃이 이제야 늦잠에 들려나? 펼쳤던 꽃잎을 하나둘씩 오므렸다. 헛간의 색 바랜 볏짚 지붕 위에 은빛 쏟아 붓는 달빛에 몸을 적시며 밤새껏 몸치장을 하던 하얀 박꽃도 뒤를 따라 재빨리 꽃잎을 움츠리고 있었다.
울 밑에서 키가 제일 큰 해바라기는 눅눅하게 내리는 새벽이슬보다 이제 곧 떠오를 이른 아침 해가 더 그리운가? 동그란 노란 목을 반짝 치켜들고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동쪽 머리로 눈을 모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나무를 얽어 만든 길쭉하게 둥근 둥지 안에서는 새벽을 알리려나, 해묵은 수탉이 한두 차례 푸드덕 홰를 쳐 성대(聲帶)가 찢어지게 울어댔다. 그렇듯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만물들이 나와 더불어 생기로 가득 차오르는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려 저마다 준비를 하는 듯했다.

그렇게 사주가 온통 거무스레하던 하늘이 동쪽 끝자락부터 불그레한 누런빛으로 은연(隱然)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밤새껏 들녘을 맴돌며 자욱했던 아침 안개가 서서히 똬리를 풀며 하늘로 오르다 흐지부지 흩어지고 장엄한 빨간 해가 소릿재 산봉우리 위로 넘실넘실 떠올랐다.

불그레한 빛이 널리 번져 나가는 하늘 아래 엷은 남자줏빛으로 부옇게 솟아 있는 앞산에 뚜렷하게 보이질 않던 산릉선들이 차츰차츰 선명하게 미묘(微妙)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두 줄기로 갈려 내리뻗은 산자락 사이의 편평한 터에 예쁘게 자리를 잡아 서편 들녘을 향해 앞이 시원스레 트여진 들메 마을의 아침은 그렇게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바람에 휩쓸려 오글오글 밀려드는 모래알처럼 오랜 옛적부터 이 터에 한두 사람씩 찾아들어 내 조상, 아니 그 윗대부터 대물림을 하여 서로 도와 가며 흙을 일궈 다정스레 살았다.

때론 몰지각한 그 어느 한 사람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 몇몇이 치유될 수 없이 골 깊은 상처를 받아 마음에 가득 찬 증오의 불씨를 누그러트리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선조들에 뼈와 살이 묻혀 있어 어떠한 형태로든 그분들이 남기신 숨결과 발자취가 지금껏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들 모두 저마다의 마음속 깊이 곰살맞고 애틋하게 자리를 잡은 아늑한 고향임에는 틀림없었다.

발그레 고운 빛깔로 온 누리에 가득하게 퍼져 나는 아침 햇살은 생동의 기지개를 켜는 산골짝에도 고루 비췄다. 그리고 낮은 지붕 추녀 끝 짧은 초가집 봉창에도 다붓하게 스며들었다.

미적지근히 젖어든 아침 안개가 말없이 사라져간 끝자락에 맺힌 이슬이 울 밑 꽃잎들과 길쯤한 옥수수 이파리 끝에 대롱거렸다. 그리고 넓적한 호박잎과 해바라기 잎에도 고루 맺혀 영롱한 빛으로 탐스럽게 빛나 그 모습이 참으로 고결(高潔)하게 보였다.

아랫마을 초가지붕 굴뚝엔 아침밥을 짓는 홍연이 더러더러 몽실몽실하게 피어올라 포근한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듯 평온 속에 살갑기만 한 마을에 분란의 요소가 하나둘씩 싹트고 있었다.

얼마 전 종구네 아버지가 병막 터에 사는 정섭이 형과 심한 말다툼을 하여 서로 간에 감정이 격해졌다. 그로 인해 정섭이 형이 종구 아버지를 읍내 경찰서에 사유 재산에 대한 침해와 산림절도죄로 고소까지 해놓은 터였다.

자신의 체면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 하는 종구 아버지 성격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의연한 모습으로 별스런 일이 아닌 것처럼 무척이나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자신의 생각보다 판이하게 일이 어렵게 꼬여 그쯤으로 치닫고 보니 가뜩이나 짧은 지혜에 일이 어떻게 귀결 될까하는 생각으로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종구 아버지와 어찌 되었던 간에 마을로 다시 돌아온 기성이형 사이에 정희누나 문제로 금명간(今明間)또 다른 큰 다툼이 일어날 것 같은 우려가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삶이란 것이 꼭 우리들의 바람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비록 크지도 못해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 또한 사람들이 서로 몸 부딪쳐 사는 곳이다 보니 그렇듯이 크고 작은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살을 태울 듯 극심한 폭염 속에 짜증스런 날씨만큼이나 눈에 보이는 주위의 그런 불안한 요소들이 갑갑하고 답답하기만 한 가운데 아침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그날 1960년 7월 29일은 허정 내각 수반의 과도정부(過渡政府)가 마감되는 날이었다. 더불어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는 제2공화국 출범을 앞둔 제5대 국회의원 선거가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되었다.

서로 이념과 정강(政綱)을 달리하는 정당 간에 정권투쟁을 위해 첨예(尖銳)하게 대립한 선거가 아니었고 4.19 학생 의거로 자유당이 붕괴되어 자연스레 그 자리를 메우게 된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 사이에 당내 주도권 다툼이었다.

민의를 대변하여 올바른 정치를 펼쳐 민생을 고루 살펴야 함에도 그런 중차대한 사명감은 뒤로 접어 두고 ‘한 지붕 한 가족’내에서도 서로 제 밥그릇부터 챙기려고 다툼질을 일삼았다. 속된 말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는 말처럼 그 핵심 세력들 밑에 착생하여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우쭐거리는 일부 몰염치한 정치인들의 작태 또한 실로 가관(可觀)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어찌 민의를 배반한 실정으로 무너진 지난 자유당 정권의 무능보다 낫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그 당시 우리의 위정자들에게 수없이 했어야 될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느슨한 정국의 흐름을 틈타 자유당 독재 정권 하에서 힘없이 억눌렸던 민생들의 욕구가 사회 각계 계층에서 봇물처럼 들끓어 올랐다. 때론 여과되지도 못한 턱없는 요구를 부르짖었으니, 그렇듯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욕구가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얽히고설켜 서서히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지난 정권의 독재와 무능, 부패에 치를 떨었던 수많은 민초들이 새로이 들어설 다음 정권에 거는 기대 또한 자못 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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