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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44 조회 : 1,198




어제의 흔적들을 말끔히 지워 시원스레 비워 놓은 동녘 산마루에 아침노을이 불그레하게 물들어오면 어제와 또 다른 하루의 장이 새롭게 열렸다. 산골짝을 소리 없이 찾아드는 아침 해는 늘 격 없이 대할 수 있는 오래된 지우(知友)처럼 살갑기만 했다.

산등성을 따라 이어진 능선에 나직나직하게 누워 있는 먹구름을 보고 혹여 한차례 시원한 소나기라도 내릴까 싶은 기대감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연일 지속되는 폭염에 지칠 대로 지친 심신(心身)에 ‘조금은 서늘하겠지.’하고 생각했던 내 작은 기대는 그냥 나 혼자만의 우매한 바람으로 멈춰야 했다.

하루해가 한낮으로 기울자 하늘 한가운데 밉살맞게 꼿꼿이 자리를 잡은 해는 뜨겁다 못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끝이 예리하게 가는 침으로 온몸을 마구 쪼아대듯 따갑게 내리쬐었다.

그리 뜨겁게 달아오른 해는 사립짝 옆 아주까리에 당글당글하게 달린 알맹이가 탱탱하게 여물라고 옴팡지게 내리쬐었다. 그리고 검푸른 잎사귀 사이로 알몸을 불쑥불쑥 드러내 벌러덩 드러누운 호박들의 등때기에 햇살을 세차게 쏟아 붓고 있었다.

비좁기만 한 부엌이지만 흙바닥에 보릿짚을 깔아 한가운데에 개다리소반을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았다. 철이 철인지라 반찬이 좀 부실하더라도 그나마 텃밭에 열무 푸성귀라도 있어 덜 아쉬웠다. 널따란 바가지에 찬밥을 덜렁 쏟아 붓고 달달하고 매콤한 맛으로 알맞게 잘 익은 고추장을 듬뿍 넣고 쪽파와 마늘도 잘 다져 넣은 다음 어머니가 그리 애지중지하시는 참기름도 두어 번 휘둘러 석석 비볐다. 그리고 서로 눈치 볼 것도 없이 편하게 바가지 속에서 밥을 떠먹으니 바가지 속에 넉넉하게 들어 있던 밥이 그리도 빨리 없어져 훤하게 밑바닥을 드러냈다.

좁게만 보이던 부엌이 식구들의 훈기로 가득 차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참 의미이며 식구들 간의 찰진 사랑인 듯싶었다.

뒤뜰 밤나무에선 그 작은 몸뚱이에서 어쩌면 그리도 옹골지게 큰소리가 울려 나오는지 땀이 얼굴과 등을 타고 줄줄이 흘러내리는 한낮 더위를 더 한층 부추기듯 속없는 매미는 좁은 산골짝이 제집인 것처럼 마구 울어 귀가 따갑게 들렸다.

발밑에 후끈대는 지열까지 겹쳐 마음이 온통 어수선산란해지려는데 계절에 걸맞지 않게 영마루를 넘어 반비알진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들찬 바람이 좁다란 텃마당에 가볍게 회오리를 일으켜 부연 흙먼지와 푸석이는 땅거죽 위에 나뒹굴던 모래알들을 대글대글 굴렸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더위에 축 늘어진 호박잎들을 곧게 세우려 온통 들척거리다 제 뜻대로 되질 않아 심술이 난 듯 잽싸게 언덕배기에 성큼 올라섰다. 그리고 애꿎게 참나무 숲을 한번쯤 흔들어 보고 이내 방죽가로 치달아 미끈하게 서 있는 미루나무 가지에 매달린 작은 이파리들을 마구 흔들어 바람개비처럼 팔랑팔랑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기는 듯했다.

텃밭 밭이랑에는 옥수숫대 사이로 몽글몽글한 토마토가 손끝만 닿아도 금방 터질 것처럼 물씬하게 익어 덜컹 한입 베어 먹고 싶은 충동감이 절로 솟아났다.

높지막이 보이는 동근이네 원두막에는 동근이가 방학 숙제를 하고 있는지 마루에 엎디어 방학 공부 책을 펼쳐 놓고 문제를 풀고 있는 듯해 보였다. 동근이 아버지께서는 좁다란 밭고랑 사이에 몸을 오그리고 앉아 수박과 참외 이파리에 들러붙은 벌레를 잡고 계셨다.

새로 지은 종구네 기와집 쪽을 빤히 바라보시던 동근이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으신지? 발길에 수박 줄기라도 밟을까 봐 조심스레 어기적거리며 기다란 밭고랑을 서두르시듯 걸어 나와
좁다란 밭둑길에 줄달음질치셨다. 그래서 나 역시 궁금한 마음에 눈을 모아 종구네 집 쪽을 바라보니 연한 회색빛 하복에 흰 옥광목 커버를 둘러씌운 경찰모를 쓴 순경이 종구네 아버지를 데리고 마당을 나서 지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어 달 전에 새로 부임한 낯이 설은 풋내기 순경에게 끌려가는 종구네 아버지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그리도 매가리 없이 보여 병막 터 정섭이 형 말대로 일이 심상찮게 돌아가는 듯싶었다.

밑바닥이 유리처럼 맑게 들여다보이는 개울 하늘하늘 여린 몸짓을 하는 푸른빛 선연한 가느다란 수초 사이로 등빛 검은 붕어 네댓 마리가 떼를 지어 유유히 물결을 헤쳐 가고 다보록한 풀숲으로 속속들이 아늑함이 배어나는 개울 가장자리엔 작은 송사리들이 옴실옴실 모여들어 반작반작하는 가느스름한 몸을 유연하게 움직여 지느러미와 꼬리를 좀처럼 눈에 띄지 않게 미세하게 흔들어 알른거리며 몰려다녔다.

그러자 먹이를 찾아 나선 물떼새가 개울가 흙 벼랑 위에 앉아 물밑을 느긋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물살이 돌에 부딪쳐 작은 포말을 하얗게 이루는 조금 떨어진 징검돌다리 위에는 하얀 왜가리 한 마리가 물고기를 낚아채려나, 어정어정한 모습으로 목을 잔뜩 구부려 은근슬쩍 한쪽 발을 가볍게 들어 틈새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뜨거운 열기 속에 엊그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일반 국민들의 예측대로 전통을 내세우는 민주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을 맺었다.

자유당을 대신할 마땅한 대안 정당이 없어 그나마 신생 정당이라고는 일부 혁신 세력들이 모여 이룬 이름도 처음 들어 보는 생생한 군소 정당 정도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으니 어차피 민주당의 집안 잔치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민주당도 조금 깊이 속내를 파고들어 가 보면 나름대로 계파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한 지붕 아래 두 살림을 차리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람들의 관심이 오히려 그보다는 면민이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면 의회 의원 선거에 쏠려 각 마을에서 출마를 한 인물들의 면면을 놓고 저마다의 의견을 개진(開陳)하며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시대적 변화의 물결은 그 동안 면내에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슴팍에 커다란 꽃을 달고 누런 차광막(遮光幕) 안에 놓인 의자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던 낯익은 얼굴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다지 알려지지도 못해 초야에 묻혀 있었던 순수한 새로운 인물들이 자리바꿈을 하여 물갈이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들에서 세월에 흐름을 논하기 이전에 변화되어 가는 시대의 흐름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였는지 면 의회 의장에 출마를 한다고 진작부터 동네 사람들의 입술에 오르내렸던 병수네 아버지가 요즈막에는 동네에 통 모습을 보이시질 않아 궁금했었는데 둥구나무 밑에 모습을 보였고 평상 마루에는 동네 분들이 다소 모여 앉아 있었다.

어차피 사람 둘 이상만 모여 앉으면 남의 얘기가 오가는 법이기에 조금 전 지서로 붙들려 간 종구네 아버지 얘기가 서두를 장식하고 그다음 자연스레 기성이 형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여 뚝심 있게 말을 하시는 삼식이 아버지가 맨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아! 동섭이 성님이 지서로 끌려 갔는디 이리들 약 먹은 꿩처럼 몸짝 축 늘이구 그짝만 빼꼼허게 쳐다보면 어쩐디야? 밉네 곱네 혀두 한동니 사는 사람인지라 내 몰라라 못하는 건디. 우쨌으면 좋을란가 모르겄네 그려.”

그러자 벼랑바위 쪽을 바라보시던 우현이 아버지가 뭔 말을 하시려다 입이 싼 사람이 끼어 말전주라도 할까 싶어 그래도 조금 꺼림칙하신지 주위를 슬쩍 둘러보시는 듯싶으시더니 이내 말문을 여셨다.

“아, 말이사 바른 말이지. 욕심을 정도껏 부려야지. 깨구락지가 지 뱃때기 터지는 줄 모르구 아갈빡에다 짠뜩 우겨넣다 목구멍이 꽉 막혀 버린다구. 그놈의 욕심이 화근을 불러일으킨 기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오더락 말을 않고 그저 쳐다만 봤지만 어디서 그리 많은 나무를 용케두 잘 골라 온다 했더니 기어이 일을 큼직막허게 저질러 번졌네 그려. 그나저나 아까참에 저 동상이 말한 것 매냥 으짰으면 좋을란가 몰르것네. 동네 지간에 알구도 모르는 척해서두 안될 일인디, 글타구 내사 어디 내 놓을 사내끼줄만한 빽두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허네 그려. 그 뭐시냐 도살장에 끌려가는 늙은 황소매냥 잔뜩 풀 죽어 끌려가는 꼴을 차라리 안 봤으면 낫을 틴디.”

그렇게 동네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만큼이나 후덥지근한 날씨에 철딱서니 없는 매미는 그리도 자지러지게 울어대고 담뱃진이 누렇게 배어난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쯤 타 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바짝 무시고 계시던 진식이 아버지가 말을 거들었다.

“동섭이 성님 일두 그렇지만 그 뭐시냐 이참에 말을 들어 보닌께 그 집 딸내미 정희가 머슴애를 나서 두 이레가 지났다는디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고향 땅덩어리 떠나 서울 밑에 있는 수원이라는 디 산날맹이에 허름한 하꾸방집에 방 한 칸 겨우 얻어 그리 없이 옹삭허게 살다 보니 기성이가 더러는 집에 슬쩍 댕겨 가구도 싶은 맴이사 굴뚝 같었지만 그나마 쪽방 살림살이 허는 거 동섭이가 알게 되면 박살날까 싶어 지들 깜냥엔 여간 조심허구 산 게 아닌 모양이더라구유. 에휴.”

그리 이야기들이 오고가는데 어쩐 일로 입이 간지러 어떻게 참고 계셨던지 좀 조용하다 싶었던 방앗간 순태 아저씨가 촐싹거리며 같이 거들고 나섰다.

“뭐 잘됐네유. 이참에 고래등 같은 집 떡 벌어지게 졌으닌게 동섭이 형일랑은 글루다가 가면 되는 기구 묵은 기와집은 기성이란 놈 데릴사위 삼어서 들어앉히면 딱이것네유.”

그러자 기성이 형네 집과 이웃하며 사시는 민균이 아버지가 순태 아저씨를 가볍게 책망이라도 하시는 듯 말씀하셨다.

“아, 이 사람아! 그게 어디 모래밭에 무 뽑아 먹듯이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어? 허긴 자네사 그 난리 발광이 스쳐 간 담에 전라도 솜리 (익산)에서 동네루 살러 왔으닌께 잘은 모르것지만 그해 가실에 인민군 놈들이 동네루 쳐들어와 벌건 대낮에 쥐약 처먹은 개 모양 온 고샅길을 미쳐 날뛰며 을매나 지랄 발광을 하구 댕긴지나 알어? 뭐시냐, 시방은 대전 형무소에 끌려가 콩밥 먹구 있는 정섭이가 그놈들 눈에 잘 보일라구 그랬는지 멀쩡한 기성이네 남새밭에다가 인공기를 높지막허게 달려구 계양대를 세울려 하자 기성이 아버지가 안된다구 펄펄 뛰며 반대를 했는디 어느 날 갑자기 그걸 트집 잡아 맥없이 끌려가 죽은 기성이 아버지가 누구 땀시루 죽었는지 알기나 허구 말을 혀. 자상허게두 모르면서 말을 씀벅씀벅 뱉지 말구 모르긴 몰라두 두 집 사이가 철천지원수 같은지라 그리 쉽게 풀릴 일은 아닌 듯싶어 두 집 식구들 머리빡 깨나 복잡하기는 할 꺼구먼.”

말씀을 마치신 민균이 아버지께서 순태 아저씨가 덜렁 내뱉는 말에 어이없어 하시는 표정을 하셨다.

그렇게 종구네 아버지가 지서에 끌려가고 난데없이 기성이 형이 동네에 나타나자 자연스레 동네 사람들 입이 그쪽으로 모아져 웅성거리는데 조금 깊이 생각을 하시는 듯 병수네 아버지와 동네 이장님은 그 일에 대해 좀처럼 이러쿵저러쿵 말씀이 없으셨다.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어난 합죽선을 부치고 계시던 기현이 할아버지가 병수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주위에 침묵을 깨시듯 말씀을 하셨다.

“어이 병수 애비! 이번참에 뽑는다구 허는 면의원에 꼭 당선이되야 혀 동네한질라 요 모양으루 작아 터진디다 다들 사는 꼬라지까장 그런디 이참에 떡 허니 당선되서 동네 이름이라두 사방 간디다 번쩍거리게 날려 봐야 안 쓰건는감? 근디, 오다가다 말들 허는 거 들어 보면 나오는 사람들마다 죄다 민주당이라구 허니 도대체 어느 게 진짜배기구 어느 게 가짜배긴지 통 알 수가 없더라구. 같은 민주당인디두 이번에 대톨령 될라구 허는 윤보선인가 하는 사람허구 전번에 부통령 해먹었던 장면 박사가 서로 갈라져서 그런다는디 병수 애비는 어느 쪽인감? 그러구 이건 내 생각인디 동섭이 일을 다들 넘에 일이라구 쉽게들 말허구 있지만 뾰쪽한 수도 없으니 으찌됐던지 간에 그래두 동네에서 힘이 있는 자네가 좀 나서 줘야 쓸 것 같네 그려.”

기현이 할아버지가 궁금하신 눈빛으로 병수네 아버지를 바라보시자 병수네 아버지가 조금은 곤욕스런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뭐 어차피 동네 사람들 다들 알구 계시닌께 한번 더 말씀 드리지만 저는 처음부터 장면 박사님을 따랐구 앞으로두 변함없을 거 같네유. 그리구 이번 동섭이 형님 일은 그 형님과 저 사이에 복잡허게 얽힌 과거지사를 떠나 제가 힘은 미약허지만 지 나름대루 노력을 해보겠지만 그렇게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구먼유. 다들 생각을 혀보셔유. 지난 난리 때 비양기에서 폭탄 떨어져 버려 산이란 산은 온통 불바다를 이뤄 몽땅 타번지구 동네 생기구 나서부터 니나 내나 헐 것 읍시 밥숟가락 빼기 무섭게 죄다덜 산에 올라 쓸만한 낭구들 알게 모르게 슬쩍슬쩍 다 베다 때구 그두 모잘라서 시푸르딩딩한 생낭구까장 짤라 풋나무 혀서 아궁이에 불 지피구 사느라 산이라구 생긴 게 어디 하나 온전헌 게 있는감유. 그래두 한똥가리 양심들은 있었는지 아니면 사람들 눈에 빤히 보여서 그랬는지 저 앞산만 빼곰허게 남았든 게 바로 엊그제 같은디 정부에서 원칸 심하게 단속을 혀대닌 게 그나마 몇 년 사이에 겨우 저 정도라도 푸르딩딩허게 보이는 거 아닌감유. 그래서 드리는 말인디 산림보호법이 원칸 쎄서 이번 일이 그리 쉽게 호락호락 풀릴 일만두 아닌 것 같네유.”

병수 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 조금 전보다는 분위가 가라앉은 듯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 모두는 자신들의 능력 한계를 너무도 잘 아는지라 그 일에 대하여 거둠질할 엄두도 못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꺼림칙한 얼굴로 어정쩡하게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종구네 아버지가 지서 순경과 함께 걸어 넘어가신 흰 뭉게구름 고즈넉하게 덩실 떠 있는 건널목을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멀건이 바라보고만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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