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춤까지 검회색 비구름에 자오록하게 잠긴 저 산은 본래의 제 모습을 잃은 침울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으스름하게 보이는 구름들이 산봉우리를 떨쳐 내어 홀가분히 빠져 나오려나 굼뜬 몸짓으로 어물쩍거렸다.
그제서야 구름에 가려졌던 산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눈에 보여 잠시인들 잃었던 제 모습을 차츰차츰 찾고 있는 듯해 보였다. 조금은 따분할 정도로 지질구레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산마루턱을 벗어나 들녘으로 내려서 희뿌옇게 번져나는 구름 따라 흩뿌렸다.
아침부터 먹이를 찾느라고 비를 맞으며 이저리 부지런히 설쳐댄 탓인지 잔뜩 빗물에 젖은 닭들이 토방으로 올라서 날개깃으로 가볍게 흙먼지를 푸석이며 꿉꿉한 닭똥 냄새가 밴 털을 털고 있었다. 말로는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역겨운 지독한 냄새에 비위가 틀어질 정도로 역겹게 풍겨났다. 그래서 참다못해 땅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고무신짝을 주워들어 쫓으니 마지못해 내려서는 척했다. 그러나 쫓겨나는 듯싶던 닭들이 제 딴에는 그래도 마른 토방 흙바닥이 좋은지 내 눈치를 슬슬 살피며 다시금 토방 위로 오르려 했다.
눅눅해져 가는 마룻바닥엔 여기저기 파리 떼들이 증상(憎狀)맞게 옴실옴실거려 어머니께서 영 못마땅하신지 파리를 잡으려고 파리채를 ‘탁탁’ 내려치시며 말씀하셨다.
“뭔 놈의 염병 지랄을 헌다구 아무짝에두 쓸모없는 파리 새끼는 이러콤시로 많은가? 잡아두 잡아두 끝이 없네. 사람 먹구 살 것두 없는디 뭐시 그리 빨아먹을 게 많다구 느작머리읍시 징상허게 달겨드는지 모르것네 그려.”
등껍질 벗기는 삼복더위를 피하시느라 그동안 장사를 못하신 아쉬움에 가득 찬 얼굴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비안개 속에 희뿌옇게 바라보이는 읍내 쪽으로 한동안 눈길을 모으셨다.
가뜩이나 비좁아 터진 토방에 자꾸만 들척거리는 닭들이 못마땅한지 검둥이는 옆으로 몸을 뉘인 채 조금은 무료한지 몸을 한차례 가볍게 털며 턱이 떨어져 나갈 듯이 입을 쩍 벌려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었다. 그런 검둥이 모습이 그리도 밉살스럽게 보였는지 파리채를 치켜드시고 파리가 앉아 있는 쪽마루 이곳저곳을 살피시던 어머니가 다시금 말씀을 하셨다.
“참 ‘늘어진 개 팔자’라드니 진짜배기 상팔자네 그려, 검둥이 저놈 팔자 좋게 네 다리 쭉 뻗구 축 늘어져 버렸네.”
어머니께서는 애호박에 된장찌개라도 끓이시려나, 가랑비에 목을 가볍게 움츠리시며 뒤뜰 장독대로 재빨리 가셨다. 동네 어느 집이고 비가 올라치면 어른들은 집안 앞뒤를 두루두루 살펴보시며 이 구석 저 구석 들척거리셨다. 구질구질하게 비가 오는 날씨 탓인지? 어머니께서 여느 날보다는 말씀이 싫지 않을 정도로 많으셨다.
비가 멈춘 듯싶어도 찌뿌듯하게 어둑어둑한 날씨는 언제라도 비가 뿌릴 것만 같아 변덕스런 여름 날씨답게 통 가늠하기 어려웠다. 산마루를 내려선 비구름이 감질나게 실실이 가는 비를 뿌리며 앞뜰로 내려섰다.
풀 잎사귀 위에 달팽이 한 마리가 목을 길게 내밀고 어디론가 나들이를 나서나 곰작곰작 기어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차분하게 보였다. 그리고 해바라기의 기다란 대궁을 타고 빗물이 보일 듯 말 듯 흐르니 두엄 가 산초나무엔 오글오글 달린 알맹이에 빗물 방울이 보기 좋을 만큼 성글게 겉돌고 있었다.
콩잎이 무성하게 자란 텃밭을 지나 원두막 참외 밭에 닿으니 빗물에 촉촉하게 젖은 노란 참외가 검푸른 잎사귀 사이로 눈에 팍 띄었다, 노릇노릇한 모습이 달달하게 잘 익은 것 같아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낮은 추녀 끝에서 잿빛으로 변한 볏짚을 타고 흘러내리는 누리끼리한 낙숫물이 땅이 동글동글하게 파인 곳의 고인 물에 떨어져 ‘톰방톰방’소리를 냈다.
방문턱을 넘어서 쪽마루로 나오는 순덕이는 양은솥에 넣고 찐 찰옥수수를 누가 뺏기라도 하는 듯이 손에 암팡지게 움켜쥐고 있었다.
끄느름한 날씨에도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쇠꼴을 베시려는지 순아네 할아버지가 등에 지게를 지고 냇둑을 향해 걸어오셨다. 그리고 조금 멀리 방죽 앞 큰길에는 읍내 우체국의 우체부 아저씨가 커다란 우편 행낭을 어깨에 걸머지시고 검정 우산을 받쳐 들고 동구 밖 나무다리를 향해 걸어오셨다.
부연 구름이 나지막하게 깔려 있는 너른 들녘 하늘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제아무리 비가 내려도 허기진 배는 채워야 했던지 잿빛 두루미 한 쌍이 바지런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들녘 논배미에 사뿟이 내려앉아 벼 이삭 사이 논물에서 우렁이와 미꾸라지 그리고 개구리를 잡아먹고 있었다. 더러는 검푸른 벼 이파리에 몸 숨기려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방아깨비와 윤기가 반지르르 도는 메뚜기를 잡아 배를 넉넉하게 채워 포만한 모습으로 논둑에 제법 여유를 부리며 걷고 있었다.
그리 한참 동안 먹이 사냥을 하던 두루미 한상이 눈에 보일랑 말망 하게 내리는 가랑비 아랑곳하질 않고 금실(琴瑟)을 자랑이나 하는 듯 앞산 높다란 소나무 숲을 향해 여유롭게 날아가고 있었다.
희부연 비안개가 벼 이삭 위에 흐늘거리는 들녘 논배미를 바라보니 지금은 읍내 농공장에서 농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는 내 친구 주현이 얼굴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어느 해 여름인가? 온 들녘 논배미에 새하얗게 번져난 벼꽃이 떨어질 무렵이었다.
논물이 겨우 잘름잘름하는 논고랑에서 논물 위에 떠돌며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수꽃 도화(徒花)를 먹은 붕어가 민물고기 중에서 일 년 중 가장 맛이 좋다고 동네 어른들이 그리도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자라 오는 동안 해마다 벼꽃이 떨어지는 여름이면 그 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함석 물통을 들고 찰진 진흙 속에 들어가 발을 빼려 하면 진흙이 착 들러붙었다. 발이 좀처럼 빠지질 않아 억지로 힘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철푸덕’ 소리를 내며 진흙탕에 그만 나뒹굴고 말았다.
그러자 빡빡 깎은 머리에 동글동글 허옇게 기계총이 올라 군데군데 불긋불긋 붉은 인주를 듬뿍 바른 내 친구 주현이와 한쪽 콧구멍에 누런 코를 바보처럼 유난스레 많이 흘리는 뽕나무집 막내둥이 영호가 그리도 좋다고 손뼉을 치며 나를 놀려주려 깔깔대며 웃었다.
가뜩이나 옷까지 버려 집에 가면 어머니에게 한차례 되게 혼쭐이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옆에서 약까지 올려 화가 잔뜩 났었다. 그래서 진흙을 한 움큼 손에 집어 들고 확 뿌리려고 하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논둔덕을 타고 얼마쯤 뛰어 달아나다가 다시금 되돌아서 얄밉게 약을 바싹바싹 올렸다.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붕어를 먹을 만큼 잡아들고 죄를 지은 것처럼 집에 가면 생각한 대로 어머니는 옷을 버려 진흙탕물이 잘 안 빠진다고 큰소리로 나무래키셨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붕어를 양이 찰 만큼 잡아 온 지라 대견스럽게 생각을 하셨는지? 꾸중 반 칭찬 반으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어머니는 내가 잡아 온 붕어를 지난 늦가을 김장철에 잘 엮어 말린 무시래기를 넣고 온갖 양념을 하셔 붕어찜을 해 주셨다. 더러는 텃밭에 알이 덜 들어찬 풋마늘과 삼복 여름 더위에 독기가 있는 대로 오른 매운 풋고추를 숭숭 썰어 넣으시고 얼큰한 매운탕을 바글바글하게 끓이셨다. 반찬 중에서 제일 먼저 젓가락이 가게 식욕을 돋워 그 무슨 별난 음식보다 맛이 있었다.
동구 밖 둥구나무에는 가랑비라도 내려 그런지 한 사람도 모습이 보이질 않고 나무 평상 하나만 덩그러니 비어 있어 조금은 쓸쓸하게 보였다.
눈에 익을 만큼 익어 친숙하게 와 닿는 동네 고샅길 첫들머리 진식이네 집 담벼락엔 선거가 끝나 뜯어내다 남겨진 선거 벽보 조각이 듬성듬성 붙어 있었다. 그 짧은 추녀 끝 안쪽으로 동네 어른 서너 분이 몸을 웅크리시고 앉아 면소재지 쪽을 바라보시고 계셨다.
그 틈새에 방앗간 순태아저씨 모습도 보여 한곳에 진득하게 앉아 계시지 못하시고 자꾸만 좌로 갔다 우로 가기를 반복하셨다. 종구네 아버지 일로 아침 일찍 수원에 올라가신 동근이 아버지가 동네로 돌아오시려면 제아무리 빨라도 늦저녁이나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벌써부터 촐싹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 가볍게 몸을 움직이시는 순태 아저씨가 언젠가 면 소재지에 찾아온 가설극장에서 보았던 ‘춘향전’ 영화에서 오도방정을 떠는 가벼운 이방처럼 보였다.
어머니께서 점심밥에 호박하고 매운 고추를 잘게 썰어 넣어 된장찌개를 하시려는지 뒤뜰 장독대에서 손끝에 묻어난 된장이 아까우신지 손을 쪽쪽 빠시며 사기그릇에 된장을 가득 퍼 담으셨다. 그리고 안 동네 추녀 밑에서 서성거리시는 순태아저씨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참, 사람 산다는게 뭔지? 저 양반이나 내나 조상 복이라구는 지지리두 없어 쪼그라지게 살다 보닌께. 그 잘나 터진 부잣집 눈치 안 보구 살 수 없어 저 양반 매냥 슬슬 비위나 맞추구 살아야 허니, 에이구 언제나 이놈의 신세 면허구 살란가 모르것네 그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려니 다시금 무엇이라 형언키 어려운 아픔 속에 잔잔한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그 분노는 저 산자락 물레치기에 무책임하게 말없이 누워 계신 내 아버지를 포함하여 가뜩이나 힘에 겨운 삶을 더욱 어렵게 하는 종구 아버지는 물론 일부 몰지각한 기성세대들에 대한 무언의 도전이기도 했다.
순덕이 어머니는 울타리 호박 섶에서 호박을 따시려는지 부엌에서 부엌 빗자루를 들고 나오셔 빗자루로 이곳저곳을 훑어보셨다.
빗속에 더 가깝게만 들려오는 ‘까치마을 삼거리’에 있는 훈련소 사격장에서 훈련병들이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지 약간의 간격을 두고 ‘타다다당 타당, 타다다닷 타탕’하는 총 소리가 콩 볶듯 들려왔다.
요 얼마 전부터 정부의 방침에 따라 수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훈련병 면회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니 별다른 생산성 없이 죽으나 사나 훈련소 하나만 바라보며 살고 있는, 그곳 사람들에게 면회제도 폐지는 지역 경제의 마비는 물론이고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큰 충격이었다.
매주 일요일마다 전국 각지에서 자식을 보려고 밤을 새워 기차를 타고 몰려오는 면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 탓에 한때는 논산이 아닌 ‘돈산’으로 불렸을 만큼 돈의 흐름이 흥청망청하였던 곳이 면회 제도가 폐지된 순간부터 지역 경제가 그리도 냉정하게 침체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우스갯소리는 어쩌다 비가 흠씬 내리기라도 하면 속된 말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유행어를 남길 만큼 뻘건 황토가 신발짝에 끈적끈적 묻어났었다.
그런 불경기의 여파는 몇 년 전부터 훈련소 정문 앞에 자리 잡은 사진관에서 사진 기술을 배워 이제는 기사님 소리를 듣게 된 성균이형이 당장 월급부터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의 일을 그만두고 읍내에 나가 사진관을 개업하려니 겨우겨우 식구들 논 몇 마지기에 목숨 걸고 사는지라 그토록 엄청나게 많은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성균이형이 생각하다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수 없이 면소재지에 자그마한 남의 집 점방을 빌려 사진관을 차렸다. 그러다 보니 작은 면소재지에 봄가을 결혼식과 환갑 진갑 잔치 빼놓고는 어쩌다 영정 사진하고 도민증 사진이나 찍으면 모를까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군산 미군 비행장 부근에서 양공주 노릇을 하다 동네 사람들 입소문에 못 이겨 결국에는 고향을 등져 그곳 연무대로 이사를 갔던 귀순이 누나네도 훈련소 부대 부근에서 작은 하숙집을 하고 있다고 했다.
면회가 있었을 때에는 그런대로 돈을 모았는데 면회가 없어지자 손님이라고는 어쩌다 독신 장교들이나 하사관들과 휴가를 가고 오는 기간병들이나 주말에 외박을 나온 사병들이 겨우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나마 평일에는 파리만 날릴 정도로 손님이 없어 그곳 장터에 국밥집이라도 해볼까 생각 중이라는 말을 동네 어른들이 주고받으시는 말씀 속에 귀동냥을 하여 알고 있었다.
또한 그리 탐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우리 외삼촌이 외숙모 고향인 전라도 운장산 기슭 그 어느메에 있는 산을 사서 표고버섯 재배를 하시다 무엇이 그리 답답했는지 아니면 어느 누구처럼 돈산이라는 말에 입맛이 당겨 돈을 주고 사 놓은 산을 처남이라는 사람에게 맡겨 놓고 ‘연무대’로 나와 쌀장사를 하고 계셨다.
한때는 밤늦게까지 배달이 줄을 이어 기다릴 정도로 그리 돈벌이가 좋았는데 지금은 예전만은 훨씬 못해도 군인 가족들이 많이 살고 있어 다른 장사보다는 타격이 덜 심하다고 어머니께서 말씀을 해 주셨다.
내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우리 외삼촌이 고향을 떠난 이유가 종구네 삼촌과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는데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으로 서로 이념이 갈려 종구네 삼촌이 국군과 경찰에 체포될 당시 외삼촌이 면 치안대의 대원으로 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종구네 삼촌이 대나무 밭에 파 놓은 굴속에서 잡혔는데 누가 신고를 했는지? 지금껏 동네에서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그런데 종구네 아버지가 생각을 할 때 우리 외할아버지를 자기 동생이 붙들어 가서 뭇매를 맞고 나오셔 한 해를 병석에 누워 계시다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으니 그 앙갚음으로 우리 외삼촌이 자기 동생을 밀고한 것 같이 생각했다. 그래선지 전혀 근거조차도 없는 그런 말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퍼트려졌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그 헛소문이 동네 안팎으로 급격하게 번져났다. 그러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으로 한 말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일부 소작농을 짓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관성도 버린 채 종구네 아버지에게 잘 보여 그나마 소작이라도 붙여먹으려고 그 말을 곧이들으려 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장리 빚이라도 쉽게 얻어 쓰려는 심사로 종구 아버지 말에 동조를 했다. 그래서 외삼촌께서는 그런 헛소문에 시달려 부담을 느끼다 못해 사실이 아닌데도 서둘러 고향을 떠나셨다.
그런 소문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전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종구 아버지는 늘 가슴속에 형무소에 갇혀 징역살이를 하는 자기 동생에 대한 아픔을 지니고 사셨다. 그런 연유로 전쟁 통에 억울하게 희생된 동네 몇몇 집과 우리 집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기는커녕 저으기 적대시(敵對視)하며 살았다.
그 반대로 가족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동네 몇몇 집과 우리 집 또한 종구네 집을 철천지원수로 알고 미워하다 못해 저주하며 살았다.
그렇게 서로 감정의 골이 깊을 대로 깊어 반목을 거듭하여 지난 세월 동안 지울 수 없는 큰 아픔을 어린 우리들 가슴에 모질게 남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