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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54 조회 : 1,112




어찌 보면 그런 내 주장(主張)들이 어머니에게 불효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는 명분(名分)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 했다. 그 명분(名分) 속에는 지난날에 있었던 종구네 집과의 대립적인 관계가 최우선이었다. 비록 처해진 삶의 여건이 미흡(未洽)할지라도 내 나름대로는 최소한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더불어 지난날 종구 아버지로부터 당했던 그 치욕적인 수모가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또 다른 이유는 옥순이와의 우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솔직히 다른 한편으로 볼 때는 내 어머니의 생각이 지극히 실리적이고 현실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배고픈 설움은 이미 몸에 배일대로 배어 이미 익숙해진 터라 거의 습관(習慣)이 되었다.

게딱지처럼 등껍질에 찰싹 들러붙은 가난이 모지락스럽게 숨을 조여 오는 엄동의 긴 겨울이 느작머리 없이 찾아들면 강추위에 어머니께서는 그나마 장사도 못나가셨다. 그로 인해 겨울방학 동안은 어린 순덕이를 제외한 남은 식구들은 짧은 해를 핑계 삼아 점심을 건너뛰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밤을 기다리는 부엉이처럼 서편 하늘에 해가 지기를 그리도 기다렸다.
어쩌다 저녁밥이 늦기라도 하면 허기진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갈라진 흙벽 틈새로 새어 나오는 생솔가지 타는 매캐한 냄새뿐이었다. 쫄쫄 굶주린 배는 입에 고였던 침까지 말라 텅 빈 뱃속에서 몰아쳐 나오는 비릿한 냄새를 맡아 본 적도 있었다. 그런 고통을 익히 잘 알면서도 끝내 처해진 현실을 애써 외면(外面)하며 참고 견디려 했다.

각박하게 눈앞에 닥친 삶에 역경(逆境)을 그렇게라도 극복해 보시려는 내 어머니의 간절(懇切)한 의사에 반의(反意)하는 행동을 하였으니 그 또한 불효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은 무엇이라 표현키 힘든 혼란으로 깊이 빠져들어 그토록 고심(苦心)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려움은 비단 겨울뿐만이 아니었으니 지난여름 장마철 궂은 날씨 때문에 어머니가 며칠 동안 읍내로 행상을 나가지 못하시자 물밑 들여다보듯이 뻔하고 간고(艱苦)한 살림은 그 여파(餘波)가 그리도 빨리 투명하게 나타났다.

아랫목에 놓여 있던 보리쌀 자루에 들어 있던 얼마 되지 않는 보리쌀마저 자루를 털털 털어 텅 비워졌다. 포대 자루의 널브러진 주둥이가 방바닥에 납작하게 뉘어 있을 때 당장 저녁거리부터 걱정을 하시던 어머니는 질금질금 내리는 빗속에 어머니만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의 끼니 걱정에 보리쌀을 구하시려 아랫동네 이집 저집 형편을 살피시며 양식을 꾸러 다니셨다.
그런 가슴 아렸던 아픔은 송두리째 잊은 채 논리적으로 어머니에게 따지려 드는 내 행동이 어찌 생각해 보면 헛된 투정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후회를 몇 차례쯤 반복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끝내 마음에 용납이 되질 않으니 여전히 답답함은 풀 길이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몸엣것’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만 알았는데 갑작스레 돌변한 옥순이의 마음이 이제는 이해가 되는 듯했다. 허나 일이 이렇게 명확하게 드러나고 보니 서로의 사이는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물론 옥순이 어머니가 마음을 정하신 일이기에 심적으로는 부담감이 적었다.

그러나 동근이 아버지 말씀대로 어머니가 두 분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셨기에 결코 심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어 참으로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부담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종구네 집과 전혀 원하지도 않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지기 시작하는 옥순이가 그동안 얼마나 심적인 고통이 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스럽기만 했다.

옥순이가 내 어머니를 원망도 하고 있을 것은 물론이고 나 또한 보기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옥순이 앞에 선뜻 나서 뭐라고 말 한마디도 할 용기조차 나질 않아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그보다 더 큰 부담감은 아랫목에 지금도 놓여 있는 저 쌀가마니가 내 어머니의 중간 역할의 대가로 종구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이런 내막까지도 옥순이가 알고 있다면 내 어머니와 나를 바라보는 심정이 어떨까 하는 우려와 그리고 종구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고 업신여겼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처절하게 무너지는 자존심에 무척 마음이 괴롭기도 했다.

비가 멈춘 끝이라 그런지 산마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 바람답지 않게 무척이나 서늘한 만큼 조금은 드셌다. 바람결에 힘겹게 나부끼는 포도나무 잎사귀 사이로 성글성글하게 매달린 포도알들이 그라도 알차게 보였다. 텃밭 가장자리에 줄을 서 있는 옥수숫대의 길게 늘어진 이파리들이 혼란스런 내 마음처럼 요란스레 나풀거리고 있었다.

비록 가난하게 살지라도 ‘달그락달그락’ 밥숟가락 부딪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오면 식구들이 함께 등 붙어 오순도순 살고 있다는 깊은 의미(美德)로 받아 들여졌다. 비록 찬거리 없는 밥일지라도 식구들끼리 흐릿한 등잔불 밑에 머릴 맞대고 오붓하게 둘러앉아 먹는 밥상엔 식구들이 서로를 감싸 안아 두터운 믿음 속에 의지하며 살아가려는 참된 미덕(美德)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종구네 집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일로 인해 얼마 전부터 갑작스레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와 나 때문에 가뜩이나 비좁은 방 안이 숨이 조여 오는 것처럼 답답했다. 순덕이 어머니는 천형(天刑)으로 비록 말씀을 못하셔도 워낙 눈치가 빠르신 분이셨다.

조금은 아시는 듯싶으면서도 깊은 속내까지는 모르시는지라 덩달아 서먹해 하시는 모습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밥사발을 비우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판이(判異)하게 변해 버린 내 모습에 적이 당황하시며 속심으로는 나를 이해를 하시는 듯했다.

쉽사리 속사정을 파헤쳐 밖으로 시원스레 드러내 놓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안타깝게만 보여 더욱이 답답해지는 마음에 훌쩍 바람이라도 쐴 겸해서 동구 밖 둥구나무 밑으로 갔다.

그때 읍내에 겨우 두 대 밖에 없다고 하는 시발택시가 동네를 향해 저 멀리 면소재지 건널목에 올라서 벼랑바위 앞쪽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무슨 신바람이라도 난 것처럼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앞을 다퉈 뛰어갔다. 둥구나무 밑에 앉아 계신 동네 어른들도 동네를 향해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드는 택시가 신기하신 듯 턱을 들어 바라보셨다.

그리도 흙먼지가 사정없이 휩쓸고 일어나던 큰길이 한 이틀 동안 내렸던 비 탓인지 눅눅해져 흙먼지는 그다지 일지 않았다, 마을을 향해 시원스레 달려오던 택시가 나무다리를 건너 둥구나무 앞에 멈추셨다. 다소 비좁아 보이는 택시 안에서 제일 먼저 내린 사람은 그동안 그곳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 애를 많이 태우셔 그런지 핼쑥해진 모습의 종구 아버지였다.

그 금쪽같은 합의서 덕분에 쉽게 풀려나왔는지? 아니면 내일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되는 제 2공화국의 신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식을 앞두고 선심을 써서 나왔는지? 알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후로 며칠 동안은 종구 아버지가 풀려나오게 된 이유를 두고 동네에서 어른들의 의견이 분분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기가 많이 죽으신 종구 아버지는 어물쩍한 모습으로 동네 어른들과 대충 인사를 나누셨다.

사실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하게 그리 좋은 곳도 아닌 곳에 다녀오시느라 동네 분들 보기가 좀 껄끄러우신지 동근이 아버지와 함께 서둘러 집으로 가려고 동네 고샅길 모퉁이로 접어들었다. 드문드문 아주머니들이 풀려나오신 종구 아버지를 보려고 담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계셨다.

그리고 방앗간 순태아저씨는 종구 아버지에게 자기가 이번 일로 그만큼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종구 아버지보다 몇 발짝 앞을 서 마치! 고을 원님 행차에 앞을 서는 이방처럼 촐싹거리며 걸으셨다.

그런 모습을 보고 계시던 우현이 아버지께서 한 말씀하셨다.

“저 사람 순태 하는 꼬락서니 좀 보라구. 참 가관이구먼 그려. 뭐시 그리 자랑헐 일이라구. 깝죽대고 가는 꼴이 꼭 ‘백정놈 여편네 가마 타고 으시대며 길모퉁이 도는 꼴’이네, 그려.”

영 못마땅하신 표정으로 입을 쩝 하고 다시며 다시 평상에 내려앉으셨다. 그러자 옆 자리에 앉아 계시던 상수네 아버지가 입에 물고 계시던 담배를 땅에 대고 비벼 끄시고는 짧게라도 꽁초를 남기시려는 듯 훅훅 두어 차례 불어 담뱃갑 속에 넣으시며 말을 이어서 하셨다.

“자네사 사는 형편이 좀 나으닌게 그리 말을 허는지 몰러두, 지나 내나 사는 꼬라지가 변변치 못하다 보닌게, 어차피 잘사는 놈 눈치를 실실 볼 수밖에 더 있건는감? 지 말마따나 평생을 방앗간에 모가지 걸구 사는지라 그리라두 발 붙이구 살려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뭐. 그러니 그리그리 좋게 생각을 허게나.”

상수네 아버지가 가난에 찌든 자신의 처지와 순태아저씨의 처지가 엇비슷하게 느껴지시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평상에 앉아 계시는 동네 어른들은 읍내 시발택시가 사라져 가는 산자락 밑에 자리 잡아 동네를 도도하게 내려다보며 말썽이 일기 시작하는 종구네 새 기와집을 바라보고 계셨다.

곰방대를 입에 조금 삐딱하게 무시고 연기를 뿜어내시며 싸리나무 삼태기를 만드시려나, 싸리나무 껍질을 벗기고 계시던 기현이 할아버지가 그런 분위기에 걸맞게 저렁저렁한 목소리로 말을 거들기 시작하셨다.

“기나저나 그 잘난 넘들 이따금씩 타 보는 저런 다꾸시를 언제나 떡 허니 한번 타 볼란가? 이놈의 팔자 내 살아생전에는 틀린 것 같구. 이담에 죽어서 저승길 갈 때나 운 좋게 한번 타 볼란가 모르것네 그려.”

못내 아쉬운 듯 애꿎게 물에 잔뜩 불린 싸리나무 껍질만 우악스레 훑으셨다. 그러자 그런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시던 인식이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아! 어르신님 그런 말씀허지 마세유. 참말루 그깟것 맴만 먹으면 을매던지 타실 수 있는 건디 그걸 가지구 뭘 그러세유. 어디 이마빡에 뿔이라두 난 놈덜만 타고 댕기는 것인줄 아셔유? 그리 사는 지 꼬라지나 지름 한 방울 안 넣구 돈 안 들이구 두 다리로 걸어댕기는 우리네 하루하루 사는 것이사 그기서 그기지유. 뭐 별스레 더 잘난 거 있는감유?”

나름대로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소외감을 애써 풀려는 듯해 보였다. 그리고 동네 분들이 무심코 하시는 말씀 중에도 종구 아버지처럼 다소는 잘사는 사람들에 대한 저항적인 심리를 느낄 수 있었다. 변모해 가는 시대의 흐름이 그동안 소작농으로 슬슬 눈치나 보면서 숨죽여 살아왔던 의식을 점차 깨우쳐 주는 듯했다.

급변하는 개화의 바람이 그 어느 때보다 드세게 몰아치던 그 시절 저마다 개화의 물결에 쉽게 접어들려 했다. 그러나 그 개화의 변화를 몸으로 체득하여 느낄 수 있는 문명의 혜택도 땅마지기나 넉넉하게 남아돌 정도로 가진 자들은 그리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삶을 이어 가는 우리네들에게는 신비한 요술을 지닌 딴 세상일들처럼 많은 거리감을 느껴지기만 했다.

비록 농경사회의 오랜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작은 시골 동네일지라도 더러는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끈적끈적 들붙은 가난으로 개화된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경제적인 여건이 뒤따르질 못했다. 그런 탓에 그저 아쉬움만 가득 남긴 채 그보다는 당장 가족들의 끼닛거리부터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례로 문명의 이기인 라디오와 측음기는 하늘로부터 선택 받은 사람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벌건 대낮엔 허리 아프도록 들녘 밭에 나가 진종일 일을 하다 보니 남는 시간이 없었다. 아낙네들은 밤이 되어서야 지친 몸으로 흐린 등잔불 밑에 머리를 바짝 대고 쪼그려 앉아 뒷산 소쩍새 소리 처량하게 들으며 눈이 시려 아파 오도록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여 때론 낮에 쌓인 피로로 등잔불 앞에서 바느질을 하다 말고 그만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잠깐 발에 힘만 주어 돌려면 가는 실밥이 헝겊에 매끈하게 촘촘히 박히는 재봉틀은커녕 쌀 두어 말만 주면 면 소재지에 있는 작은 사진관에서 찍을 수 있다는 가족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지 못하는 궁색한 삶을 살았다.

어쩌다 운이 좋아 가족사진이라도 찍게 되면 우스갯소리로 집에 키우는 강아지만 빼놓고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집안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진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쌓였던 이런 저런 근심들 다 털어버리고 마음껏 웃음이라도 지어 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검정 차광막 안에 얼굴 가려 손짓하는 사진사의 신호에 따라 좌우로 힘들게 몸을 움직여 사랑이 풋풋하게 담겨질 수 있었다.

어쩌다 집안에 혼사가 있다 하여도 양쪽 집안 식구들이 얼굴을 빼곡하게 들이밀어 사돈 쪽 집안사람들 눈치를 살피느라 그나마 집안 식구들 중에 두서너 사람을 제외하고는 찍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 집안 어른들의 환갑이나 진갑 잔치 때 운 좋게 겨우 찍은 사진을 집안 식구들이 둘러앉아 눈이 뚫어져라 몇 번씩 돌려 보았다. 누구는 얼굴이 곱게 나왔으며 또 다른 누구는 얼굴이 엄청스레 삐딱하게 못 나왔고 누구는 입을 바보처럼 헤 벌리고 찍었느니 또 누구는 심봉사처럼 눈을 감았느니 하면서 온갖 수선을 떨며 흙내 물큰 나는 방 안이 떠내려가라 웃었다.

그렇게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헛간 지붕 위에 새하얀 모습으로 피어나는 박꽃처럼 큰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았다. 그래서 가족사진이라도 있는 집은 손님들이 오시면 보라고 과시를 하는 듯이 액자 속에 넣어 눈에 잘 띄는 벽 쪽에 반듯하게 걸어놓았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 집들은 식구들의 사진 한 장 한 장씩을 모아 작은 액자에 넣어 방벽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방청소를 하면서 깨끗이 빨아 온 걸레로 맨 먼저 액자부터 그리 정성스레 닦았다.

그리고 곁에 남아 있는 자식이나 품안을 떠나 멀리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이나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가슴속 깊이 묻어 담으셨다.

한 이틀 동안 비구름에 갇혀 있던 햇살이 참았던 열기를 한데 쏟아 붓듯 또다시 온몸을 후덥지근하게 달구었다. 번들번들하고 검푸른 잎사귀 뒤에 잘 숨어 있던 매미란 놈들이 다시금 ‘제 세상을 만난 듯’ 들썩들썩 울어대고 지글거리는 햇살은 들녘의 벼 이삭까지 영글게 하려나 뜨겁게 내리쪼였다.

쫄쫄 흘러가는 길가 도랑물 소리도 그렇고 때도 모르는 하루살이들이 도랑가 풀잎 위에 우글우글하여 그 또한 괜스레 심난하게만 느껴졌다.

버릇처럼 목 아프게 앞산 자락을 눈 아프게 둘러보아도 언제나 말씀 하나 없으신 내 아버지를 이젠 원망도 하기 싫었다.

자꾸만 울적해지는 마음에 한편으로는 이런 환경 속에 살아가야 하는 내 모습이 퍽이나 처량하기만 했다. 언제까지 냉혹한 현실 속에 이런 마음의 고통을 감내하여야 하며 엄습하는 가난 속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토록 고생하시는 내 어머니께는 끝없는 불효가 될지라도 불투명한 미래가 전혀 가늠키 어려워졌다.

그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이 늘 그맘때면 북쪽으로 올라가는 기차가 울적한 마음을 더욱 뒤흔들어 놓으려나, 그리도 무심하게 세찬 기적 소리를 울리며 마을 앞을 지났다.

언젠가 내 친구 ‘깨곰보’ 성구가 한 말처럼 잠시 동안이라도 이곳을 떠나 모든 것 다 떨쳐 버리고 목적지가 없을지라도 한없이 달리고 또 달려가 보고 싶었다.
그 어느 누구의 말처럼 삶은 끝없는 고뇌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그런 고뇌를 남에게까지 전가(轉嫁)시켜서는 더욱 안 될 일이기에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단단한 쇠고리에 걸려 굳게 닫힌 둔탁(鈍濁)한 자물쇠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새빨갛게 녹이 슬어 더욱 굳게 잠긴 것 같이 점점 굳어져만 가는 내 마음의 빗장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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