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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58 조회 : 1,068




‘하늬바람에 곡식이 모질어진다.’는 말처럼 사계(四季)의 모습이 절기(節氣)마다 완연하게 뒤바뀌는 들녘엔 자연의 힘이 은혜롭게 넘쳐났다. 끝없이 번져 나는 비옥(肥沃)한 땅에 올지게 알이 차오르는 검푸른 벼이삭들이 햇살에 활기찬 모습으로 번득거려 탐스럽게 굼실거렸다.

허나 뭉그적거리는 늦여름 더위는 좀처럼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땡땡한 햇살은 살가죽을 볏겨 허연 허물을 남기려 등짝에 끈질기게 달라붙으려 해 후줄근한 날씨에 온몸이 늘쩍지근해져 하루하루가 지루하도록 길기만 했다. 늘쩡거리는 해는 한나절 동안 마을 한복판에 아금박스레 자릴 잡고 있었다.

‘둥둥 둥더쿵 둥둥 둥더쿵’ 자진가락으로 볶아치는 풍물 소리가 하늘 높이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소리에 맞춰 오랜 세월을 두고 가슴 깊이 쌓였던 한을 풀 듯 격 없이 한데 어울려 덩실덩실 추어대는 민초들의 어깨춤이 흥겹게 보였다. 귀가 얼얼하도록 들려오는 구성진 풍물 소리에 는적거리던 해가 저 또한 마음을 빼앗긴 듯 오래도록 꼼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을 그렇게 짯짯이 바라보던 해가 이젠 그마저도 싫증이 나는지 주저앉았던 엉덩이를 어기적어기적 들어 머물다간 흔적을 남기려는가? 둥구나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마을을 벗어나 홀가분하게 너른 들녘으로 내려서 검푸른 빛으로 윤기가 돋아나는 논배미에 내려앉았다. 그런 다음 소곳하게 머릴 숙인 벼 이삭들을 뜨겁게 달구어 벼 포기의 대를 실하게 하고 조금씩 고개를 숙이려 하는 벼 이삭들을 여물게 했다.

지광(地廣)한 들녘엔 풍요로움이 끝 모르게 번져나고 있었다. 비릿한 풀 냄새가 가득 밴 산바람도 홀로 떠나려 하는 해를 길동무 삼으려 뒤늦을 새라 성급하게 따라나섰다. 푸르디푸른 서편 하늘 끝이 파름하게 바라보이는 들녘과 서로 맞닿은 아득한 그 곳엔 고스란히 남겨진 애틋한 기억들이 다붓다붓 자리를 잡아 예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되뇌는 기억 속에 숱한 상념들이 쉴 새 없이 다가서니 바라보는 마음이 더없이 고즈넉하기만 했다.

푸석푸석 흙먼지 이는 토방엔 동네잔치에 저도 한 점 살코기를 얻어먹으려 얼쩡얼쩡 눈치를 살피던 검둥이가 운 좋게 뼈다귀 하나를 물고와 아주 널찍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분잡하게 물어뜯더니 더는 발라 먹을 것이 없는지 축축하게 침이 잔뜩 묻어난 뼈다귀를 머리맡에 두고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었다.

텃마당에 놀던 꼬리 긴 수탉이 뼈다귀를 쪼려 겁 없이 슬금슬금 다가서자 얼른 몸을 일으켜 수탉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겁 많은 수탉이 ‘꼬곡’ 소리를 내며 마당 한복판으로 자발스럽게 허겁지겁 달아났다.

둔덕 너머 밭에는 알이 채 영글지도 않은 수숫대 모가지에 들러붙어 시끄럽게 재잘대던 멧새들이 후루룩후루룩 날개를 치며 둔덕 아래 콩밭 쪽으로 날았다.

그리고 읍내로 향해 뻗어난 철로 양옆의 좁은 길에 마을을 향해 걸어오시는 동네 어른 두 분의 모습이 보였다. 해마다 여름 한철에는 우묵골 콩밭에 열무를 심어 이른 아침에 열무를 뽑아 볏짚으로 가지런하게 묶어 읍내로 내다 팔아 재미를 쏠쏠하게 보는 상수 아버지와 비석골 산자락 밭에 배꼽이 톡 튀어나온 개구리참외를 심어 한철 재미를 톡톡하게 보시는 광식이 아버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며 건널목 내리막길을 내려서고 계셨다.

‘뚝배기보다 장맛이 낫다.’고 못생긴 겉모양보다는 달짝지근한 참외 맛이 어느 참외보다 월등하게 뛰어나 읍내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렇게 진작부터 널리 소문이 났지만 원두막으로 오르는 산길이 너무 가파르고 험해 사람들 발길이 무척이나 뜸했다. 그래서 광식이 아버지가 여름철에는 오일마다 열리는 장날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비 오는 날만 빼놓고 아침 일찍부터 바지게에 한가득 지시고 철로 길을 걸어 읍내로 나가셨다.

그리고 읍내 사거리 약국 모퉁이에 받쳐 놓고 주머니칼로 껍질을 깎아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맛을 보여 주시며 뙤약볕 아래 흘러내리는 땀을 밀짚모자로 훔치셔 참외를 파셨다. 그런 연유로 읍내 사람들은 광식이 아버지를 ‘비석골 참외 장수’라고 불렀다.

누런 대나무 바지랑대에 걸쳐진 빨랫줄에 걸려 있는 누런 삼베 홑이불 자락이 산모퉁이를 휘도는 바람에 하느작거렸다. 쉽사리 들춰내지 않으려는 삶에 지친 가는 신음처럼 들려 가뜩이나 어수선한 마음을 더욱 심난하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나는 비록 척박할지라도 산기슭 한구석에 터를 잡아 꾸밈없는 삶을 살려 노력 했다. 메마른 땅속에 더욱 뿌리를 깊이 내려 몸 하나로 모진 비바람을 버텨 내려고 하는 민들레의 고뇌(苦惱)하는 모습처럼 내 어머니는 어린 나와 함께 살아남으려 그리 안간힘을 쓰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작은 반감이라도 갖고 있는 내 자신이 더없이 불효막심하게 느껴졌지만 마음 깊은 곳에 묵직한 쇳덩이가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무척이나 무겁기만 했다.

두엄 가 옆 대추나무에는 덜 익은 대추알들이 알알마다 살을 불리고 있었다. 누르뎅뎅하게 익어 축 쳐진 호박이 힘에 벅찬 듯 싸리 울타리가 한결 기우뚱하게 보였다. 그리고 잿빛으로 빛바랜 헛간 지붕 위에는 허연 박이 둥그스름하게 옴팍 자리를 잡아 쨍쨍한 오후 햇볕에 몸을 실팍하게 데우고 있었다.

내 고향 들메 마을은 살아가는 환경이 참으로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지긋하게 풍기는 흙냄새와 군데군데 밭에 뿌려진 인분 냄새가 한데 엉켜 가득 배어나는 소박한 삶 속에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정이 살갑게 묻어나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하늘 위로 풍성하게 울려 퍼지는 농악 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왔다. 그렇게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는 그 이면에 빛바랜 모습으로 잊혀져가는 커다란 슬픔들이 동네 한구석에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었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지긋지긋했던 지난 난리 때 그 흉악무도한 놈들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동네 구장 일 한 것이 그리 큰 죄라고 우물가에 사시던 인식이 아버지가 탄창이 동그랗게 생긴 소련제 기관단총인 따발총의 총구에 등 떠밀려 끌려가셨다. 인민군들이 면소재지를 강제로 점령을 하자 종구네 삼촌이 그들을 찬양하려고 동네 앞터 기성이 형네 마늘 밭에 인공기를 높게 게양할 게양대를 세우려 했다. 그런데 기성이 형 아버지가 종구네 삼촌과 심한 말다툼을 하며 게양대를 못 세우게 극구반대를 했다, 그런 이유로 반동으로 몰려 날카롭고 끝이 뾰족한 대나무 창에 끌려가셨다.

그리고 마을 앞산 비석골 골짜기에서 같은 날 으슥한 밤에 두 분 모두 무참하게 목숨을 잃고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두 집에서는 매년 같은 날 밤에 제사를 모시는데 그 제삿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모두가 축복해줘야 하는 동네잔치에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종구 아버지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땅 위에 존재하는 동물들 중에 여우가 참 간교하다고 하지만 그 교활한 여우보다 더 간악(奸惡)한 것이 바로 우리들 속에 끼어 있는 사악한 인간인 듯싶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종구네 삼촌이 기성이 형 아버지에게 ‘형님형님’하면서 그리도 붙어 다니더니 전쟁이 일어나 어느 날 갑자기 팔뚝에 완장을 두르자 금새 얼굴을 바꿔 그리 못된 짓만 일삼았다. 제아무리 무지막한 개망나니라도 저 사는 동네에서는 그 짓거리를 안 한다는데 평온키 그지없는 작은 마을에 골수 깊이 아픔을 남겨 놓은 종구네 삼촌이 엄청 잔인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런 아픔을 당한 인식이네 집과 기성이 형네 집이 종구네 집에 대하여 지울 수 없는 구원(舊怨)이 뼛속 마디마디에 깊이 박혀 있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가해자 입장인 종구네 집과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만 두 집과의 관계가 적대감으로 이글거렸다. 지금까지도 어쩌다 동네 고샅길에서 종구 아버지와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마치 흉물스럽게 허물을 벗는 뱀을 본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시고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쳐다보지 않고 살려고 했다.

그중 우물가에 사는 인식이는 먼발치에서 종구네 아버지는 물론 종구 모습만 보여도 재수 없다는 듯이 침을 팍 뱉으면서 그 어린 나이엔 걸맞지 않게 모진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 모습이 당차게 보이기보다는 무엇이라 표현키 어려운 측은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러더러는 전쟁이 무참하게 앗아간 내 외할아버지와 두 다리를 비참하게 잃어버리신 채 모진 세상 탓만 하시다 허무하게 숨을 거두신 내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 심리적으로나마 그들과 함께 동조를 했다. 그리고 누런 코를 질질 흘리며 동네 형들 틈바구니에 끼어 놀던 기현이도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에 깊은 의미도 모르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혼란스럽고 암울키만 했던 그 시절 그런 아픔이 우리들에게만 국한(局限)되지 않았다. 같은 마을에서도 낙동강 전투에서 자기 아버지가 전사를 하신 옥순이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뱃속에 태아로 있을 때 아버지를 잃어버린 어린 순아도 있어 전쟁이 남긴 비극적인 참화는 실로 극에 달했다. 그런 가슴 찢어져 내리는 슬픈 연유로 그 숱한 분들이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아 타고난 명대로 살지도 못하시고 억울하게 숨을 거두셨다.

눈만 뜨면 바라보이는 마을 앞산 자락에 제가끔 영면의 터에 말없이 쉬고 계시니 남은 가족들에게 목구멍에 차오르는 피맺힌 아픔 속에 끓어오르는 울분만을 남겼다. 그런 애끓는 사연 모두 끌어안고 언제나 과묵하게 입을 다문 저 산은 때 묻지 않아 파릇파릇한 동심이 싹터 올랐던 우리들의 영원한 안식처였다. 또 한 편으로는 혈육의 정이 그리워 마음이 울먹여질 때는 늘 아픔을 되뇌게 하는 고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특이한 다툼이 없는 한 자연스럽게 같은 아픔을 가진 집들끼리 속 깊은 말을 나누게 되었다. 쑥떡 한 개 콩 한 조각이라도 함께 나누려 해 서로 간에 돈독한 교감 속에 남다른 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크고 작은 일이라도 있으면 맨 먼저 달려가 있는 힘대로는 도우며 살려고 했다.

그런 연유였는지 어머니가 장사라도 푸짐하게 잘되신 날엔 볼따구니가 꽉 차도록 이빨에 끈적끈적 묻어나는 눈깔사탕을 누런 비료 포대 종이에 꼬깃꼬깃 싸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기현이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불러 세워 젓갈 동이 속에서 사탕을 꺼내셔 한두 개를 기현이 손에 꼭 쥐어 주시며 아픔을 함께 나누시려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러면 기현이 할아버지는 솜씨 있게 만드신 수수 빗자루와 싸리로 엮은 삼태기와 빗자루를 들고 오셨다. 어머니께서 얼마의 돈을 드리려고 하면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극구 말리셨다.

‘가까운 남이 먼 일가보다 낫다.’는 말처럼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해가 마지막 빛을 텃밭에 뿌리려는 저녁녘, 찾아드는 외로움을 달래려 머릴 들어 바라본 하늘은 잡티 하나 없는 맑은 모습으로 파랗게 보이는 만큼 드높기만 했다.

부연 흙먼지 꼬리를 무는 저 멀리 떨어진 신작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과 산허리를 돌아 우직하게 질주하여 지축을 뒤흔들어 놓는 증기기관차 소리도 정감 어린 마음에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앞산 자락에서 간헐적으로 처연하게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와 밤나무 잎사귀 뒤에 숨어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 모든 소리들이 고요하다 못해 고즈넉하기만 한 산골짜기의 침묵을 깨고 나름대로 무료함을 달래 주었다.

한낮 동안 구성지게 울리던 풍물 소리가 멈춘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시끌벅적하던 둥구나무도 사람들의 모습이 한산하게 보여 고요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들녘을 헤집던 해가 서쪽 하늘 밑 지평선에 거의 닿으려 하는 이른 저녁 무렵쯤이었다.

벼랑바위 앞에는 인식이 어머니와 기성이형 어머니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은 기상이형의 모습도 보여 기성이형이 제사를 모시려 내려오는 듯싶었다. 두 어른들은 제사상에 고기 한 점이라도 올려놓고 싶은 마음에 읍내 장에 다녀오시는 듯싶었다.
그런데 혹시나 싶어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정희누나와 아기 모습은 보이질 않고 흙먼지 푸석거리는 큰길 위에 기성이형 혼자서 걸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그리 흘러 두 사람 사이에 아기까지 낳았는데도 두 집 사이에 숙명처럼 얽힌 사연으로 가야할 길이 아득하게 보였다. 그러니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접점을 찾기까지는 풀어야할 힘들고 어려운 삶의 숙제가 더는 남아 있는 듯싶었다.

종구네 집에 대해 나이 어린 철부지 우리들도 공통적인 적대감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러한 원한이 맺혀 있는 것을 누구보다 더 절감할 것 같은 기성이형이 때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동네 어른들 말씀처럼 왜 하필이면 종구네 누나인 정희누나와 인연을 맺게 되어 되돌릴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으니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동네 어느 형들보다 믿고 따랐던 형이기에 더욱 안타까워 오히려 조금은 바보스럽게도 보였다.

동네 사람들은 기성이형과 정희누나에 대한 일을 두고 이제는 아이까지 낳았으니 ‘길을 두고 산으로 못 간다.’고 하셨다. 그러니 종구 아버지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을 하시지만 무슨 고집인지 끄떡도 하지 않고 계시는 종구네 아버지의 심속이 퍽이나 의심스러웠다.
이번에 기성이형이 종구 아버지 일에도 전혀 풀릴 것 같지 않던 일을 어찌 되었던 원만하게 수습을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얼핏 보기엔 기성이형이 자신의 입지를 세운 듯 보였지만 그 입지 하나만으로는 두 집 사이에 얽힌 원한을 풀기에는 무엇인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눈에 보이지 않은 감정의 폭이 꽤나 큰 듯싶었다.

더욱이 다음 달에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데 기성이형이 막상 군대에 입대라도 하고 나면 남는 정희누나와 아기의 문제가 어떠한 형태로 매듭이 지어질는지 자못 궁금하기만 했다.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앞산 뒤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싶더니 기스락을 굽어 돌아 나오는 증기기관차가 한두 차례 기적을 울리며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기관차 앞머리에 푸른 상록수 이파리가 더북하게 꼽혀 있었다. 그리고 둥그런 나무판자 위에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상상 속의 새, 금빛 봉황(鳳凰) 두 마리를 멋들어지게 그려 넣어 양쪽으로 테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경축 제 2공화국 대통령 취임’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놓은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그리 생활이 간고하다보니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지는 것만 같았다. 바로 어제 외삼촌이 어머니와 나누시던 말씀 중에 ‘이제는 네 몫도 챙겨줘야 할 때가 되었고’라는 말에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 몫이라는 것이 분명 재물을 뜻함인 것 같았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외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앞 들녘의 논 열다섯 마지기 중에서 우리 집 몫으로 서마지기를 남겨 주고 외삼촌이 나머지 열두 마지기를 자기 몫으로 차지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실 때 영택이네 집에다 팔아 정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유산으로 남겨진 전체 논 열다섯 마지기 중에서 우리 집에 겨우 서마지기를 남겨 주어 아무리 외삼촌이 장남이고 그 시절 법 제도가 어머니가 여자의 신분이라 상속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는 하지만 늘 불만은 싹트고 있었다. 너무도 부당하게 외삼촌에게만 유산의 혜택이 갔다고 생각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지난날 종구네 아버지에게 빚 문제로 그리 들볶이며 살아 삶이 어렵고 역경에 처할 때마다 은연중에 외삼촌을 원망도 했다.

종구네 아버지에게 그런 큰 시달림 속에 험한 말까지 들어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셨을 때는 그리도 심하게 미워도 했다. 그런데 그 날 외삼촌께서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시여 그 몫의 한계가 무엇일까? 하고 혼자 속으로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외삼촌이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이 모두 다 사실이라면 내가 외삼촌의 깊은 속내도 모르고 너무도 성급하게 판단을 하였나 싶어 한때라도 그리 심하게 원망을 하며 아주 격하게 미워한 적도 있어 무척 미안스러웠다.

그런 모든 정황들이 많은 궁금증을 유발하여 마음이 답답했다. 옥순이 어머니 일로 나 혼자만의 생각일는지는 몰라도 어머니와 전과는 달리 서먹해졌다. 그러나 무엇이라 선뜻 물어보기도 조금은 애매했다.
더욱이 외삼촌으로부터 돌려받을 그 몫에 대하여는 두 분 어른들이 하시는 일이라 묻지 않고 있어도 그저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만 같아 말없이 추이만 살펴보려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어찌 보면 하루하루 행상이나 막노동을 하여 연명해 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장마와 혹서(酷暑)의 여름은 혹한(酷寒)의 겨울과 같이 어렵고 지루한 계절이었다. 가뜩이나 빈곤하여 어렵기만 한 삶은 직접 피부로 와 닿는 고통이 실감나게 크기만 했다.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다고 하는 처서([處暑)를 넘겨 투명하게 맑고 고운 하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酷寒)가 되면 그때 장사를 다시 시작하신다는 어머니가 더없이 딱해 보였다.

이유야 어쨌든 그렇게라도 쌀 한 가마니라도 있어 우선은 구차하게 동네 이 집 저 집으로 양식을 꾸러 다니지 않으셔 눈으로 보기엔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 좋고 편한 만큼 내 마음에 또 다른 부담을 커다랗게 주고 있었다.

낮 동안 그리도 윤기 있게 번득거리던 눈에 익은 앞산 자락에 노을빛이 깃들자 산자락이 어슴푸레 보이고 산릉선이 아물아물했다. 마을 초가지붕 위로 앞을 다퉈 한 집 한 집 저녁연기가 희뿌옇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는 해 아쉬운 눈빛으로 애태우는 나들목에 주춤하는 저녁 해를 어둠이 등을 밀려 했다. 형연키 어렵도록 고운 노을빛을 남기던 저녁 해가 그렇게 지평선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산릉선 위엔 어느새 새침하게 떠올라 조금씩 살을 채워 가는 하얀 달이 희멀건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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