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부터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아침 해가 성글게 떠오르자 물안개는 심성(心性) 고운 모습으로 자리를 내주고 서서히 물러서고 있었다. 비켜서는 안개 속에 너부렁넓적한 산자락이 짙푸른 자태로 눈앞에 다가서 상큼한 아침의 장을 펼치려 했다.
찬란하게 영근 햇살이 마지막 남은 여름날의 기억들을 한데 끌어 모으려 하니 차분하고 충만(充滿)한 가을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가온 듯싶었다.
입추가 며칠 앞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다보록하게 내린 물안개 때문인지 둥그스름하게 맺힌 물방울이 몸을 눕힌 풀잎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면 금방 툭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동글동글하게 맺힌 은구슬 방울의 고운 모습들이 마음을 온통 빼앗았다. 그리고 슬퍼지도록 푸르기만 한 하늘은 높다랗게만 보여 더없이 광활하기만 했다.
아침 햇살에 눈이 가득 시려와 께끄름하게 앞산 자락을 바라보았다. 언덕마루 갈참나무 숲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산자락 밑으로 줄곧 쏟아 내려 아침의 활력을 마냥 불어넣었다.
먼 길 나들이를 나서려는 뽀얗게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위로 너그럽게 웃고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음각(陰刻)처럼 깊이 새겨진 기억의 아픔들이 되살아나 마음 더욱 서러워질까 두려워 머리를 돌렸다.
싸리 울타리를 온통 뒤덮어 세차게 뻗어난 호박의 널따란 이파리 위에 앙증맞게 생긴 작은 여치 한 마리가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만끽 하려는 듯했다.
아침 밥상을 물리신 어머니가 텃밭에서 따 온 깻잎을 양념간장에 절여 밥솥에 넣고 찌시려는 듯 공을 들여 한 장 한 장씩 들춰 양념장을 바르셨다. 순덕이 어머니는 어제 늦저녁 어머니가 아랫동네에서 가져온 감자 부대를 끌러 놓고 바가지에 반쯤 담으셨다. 누런색 감자가 주를 이뤘지만 더러는 파란 잉크 같이 짙은 청색 감자와 극히 드물게 불그레한 빛깔이 도는 감자도 더러더러 섞여 있었다.
순덕이 어머니가 돌확에 곱게 갈아 놓은 보리쌀과 감자를 섞어 밥을 하시려고 모지랑숟가락(달챙이숟가락)으로 긁어 감자 껍질을 벗기셨다. 근 일 년 가까이 한 지붕 밑에서 살다 보니 이제는 얼굴빛만 보아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순덕이도 제 깜냥엔 한몫 거들려했다. 밥숟가락을 들고 제 주먹보다 훨씬 더 큰 감자를 어렵게 손안에 쥐어 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사립짝 앞에는 검둥이가 아침밥을 욕심껏 먹어 배가 더부룩하게 든든한지 앞다리를 쭉 뻗어 목을 털며 한차례 기지개를 켰다. 이제 슬슬 아랫동네로 짝을 찾으러 가려는 듯 슬금슬금 식구들 눈치를 살피는 듯싶더니 갑자기 집안이 떠들썩하게 짖어대었다. 그래서 얼른 사립짝 밖을 내다보았다.
영호 어머니가 등에 헝겊 차데기를 멜빵으로 끈을 만들어 양쪽 어깨에 걸머지시고 산 밑 뽕밭에 뽕을 따러 오시고 있었다. 그리고 기성이형 어머니는 기성이형과 정희누나 문제로 원두막에 동근이 아버지를 만나려고 오신 듯했다. 텅 빈 원두막에 누런 참외들만 밭을 지키고 주인장은 오간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우리 집에 잠시 쉬어 가시려 사립짝을 들어서고 계셨다.
“어여덜 오시유. 날한질라 우라지게 더운디 두 분이서 우짠 일루 요기까장 발걸음을 다 하시게 뭔일 있는감유? 그건 그렇구 요리 앉으셔유. 집꼬라지는 이래두 꼴에 산골짝이라구 산바람 하나는 시원허게 불어 주닌께 아랫동네보다는 휠씬 시원헐끼구만유.”
어머니는 두 분을 반갑게 맞이하여 쪽마루에 놓였던 깻잎들을 한쪽으로 밀쳐 내시고 서둘러 자리를 권하셨다. 그러자 기성이형 어머니가 언덕배기를 오르내리시느라 더우셨던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으로 훔치셨다.
“아! 뭔 일은 무신 뭔 일 있것는가? 상민이 에미두 알것지만서루 내나 그 일 땀시루 하두 답답혀서 동근이 아부지라두 맨나 볼려구 왔는디 도대채 이 양반이 으디 하늘루 솟아올랐는가 땅 밑으루 숨었는가? 통 코빼기두 안 보이니 답답허네 그려.”
막상 모처럼만에 손님이라고 오셨는데 뭐 하나 제대로 내놓을 것이 하나도 있을 리 없었다.아침 나절에 동네 우물에서 길어다 놓은 물이 그리 시원할 리는 없고 그저 찬물에 설탕은 아예 있을 리 없어 사카린이라도 타드리려고, 어머니가 방 안에서 사카린이 들어 있는 봉지를 가지고 나오셔 순덕이 어머니에게 건네주셨다.
그러자 기성이형 어머니가 삼베 치맛자락을 모아 쪽마루에 앉으시며 말씀하셨다.
“썩어문드러질 놈이 으디 하늘 똥구녁 밑에 기집이 없어서, 그래 지 애비 죽인 원수네 집 딸래미를 붙어먹어서 애까장 덜렁 낳아버렸으니 일을 으쩌면 좋데.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장 죽어두 그 집 문턱은 안 밟는다구 죽두락 맹세를 혔는디 이를 어쩌면 좋을란가 모르것네 그려. 난중에 저승 가서 지 애비 만나면 귀싸대기 한차례 번갯불이 번쩍허게 얻어맞구 욕이나 실컨 얻어먹으면 되것지만서루. 에미 뱃속에 들어있는 저 어런거시 뭔놈에 죄가 있건는감? 다들 안 그려?”
말을 끝마친 기성이 형 어머니께서 한숨을 크게 내쉬자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 그기사 아주머니 말씀이 천 번 만 번 맞는 말이지유. 이미 엎지러진 물인디 다시 쓸어 담지두 못할 일인지라 아줌니 가슴에 대못 박힌 거시사 뽑을 수는 없지만, 그 어린 것두 세상 한번 살어 볼 거라구 삼신할매헌티 볼기짝 시퍼렇게 멍들도록 얻어맞으며 태어난 죄밖에는 읍는디, 뼉따구는 찾아서 살어야 할 거 아닌감유?”
그러자 두 분 사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영호 어머니가 울타리 너머로 얼핏 무엇을 보셨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아니 저기 꽃양산 받쳐 들구 팔자 좋게 벌건 대낮에 걸어가는 게 영택이 애비랑 그 불여시 같은 첩년 아닌감유? 첩년이 꼴에 더 꼬랑탱이를 흔든다구 지랄 염병을 떨구 있구먼유. 가만히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두 잔등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디, 이 벌건 대낮에 나서는 거 보닌께 어디 읍내라두 갈라는가 보네유. 참 늘어진 개팔자라더니 딱 그짝 나번졌네유. 지집헌티 미치닌께 눈에 뵈는 게 읍는지 귓때기 시푸런 지 딸내미 같은 거 옆구리다 끼구 댕기면 넘사스럽지두 않은감?”
그런 모습이 영 못마땅하신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신 기성이형 어머니가 다시 말을 이으셨다.
“아이구 동상. 세상 남정네들이라는 게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그 짓들 할라구 하는디, 아무리 그래두 그렇지 참 무신 놈의 낯짝이 벽창호를 닮았는지 아니면 어디 몇백 년 묵은 산삼이라두 캐 먹었는지. 능력두 좋지 한동네에서 두 지집을 거느리구 사니 그게 어디 보통 비윈감? 그러니 집구석에 들어앉아 있는 큰 여편네가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저 꼴 보구 살아야 허니, 그 공주댁은 속이 을매나 썩어 내릴 꺼시여.”
두 어른들과 함께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시던 어머니도 말을 놓치지 않으셨다.
“다덜 능력이 되닌께 저러구 댕기것지유 뭐. 해 뜨면 때꺼리 걱정허구 사는 우리네들 허구는 사는 판때기 자체가 아예 다른디 으짜것시유. 좁은 동네라 숭이 될란가는 몰러두 읍네만 나가 보셔유. 그놈의 신식 바람인가 뭔지가 잔뜩 불어 닥쳐 가지구, 나이 어리고 젊은 것들두 대낮에 팔짱 끼구 댕기는 꼬라지덜이 차마 눈뜨구는 못 볼 일이 허다하게 쌔 분져버렸구먼유.”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영택이 아버지가 얼마 전에 읍내 골목집에서 술집 작부를 만나 동네에 새살림을 차린 지 일 년이 채 안되어 벌써 두 번째 여자를 맞이했다. 그 젊은 여자 분이 읍내로 나가시려나, 들주막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언짢은 눈빛으로 계속 바라보시던 영호 어머니가 다시금 말을 이어서 하셨다.
“그러니 이놈의 세상이 으쩔라구 이런데유. 다덜 허는 말이 읍내 극장인가에서 돌려대는 그놈의 활동사진이 사람 죄다 버려 놓는다구 하던구먼유. 그러니 젊은 것들이 뭘 보구 배우것시유. 다덜 대가리만 영글라구 허면 밤낮을 안 개리구 휘파람 쌕쌕 불어대며 느작머리 읍시 연애질이나 허러 댕기니, 지두 나이 찬 딸자식이 하나 있으닌게 혀 짧은 소리는 못허지만서루. 암튼 보통 일은 아이니구먼유. 글타구 모가지에다 사내끼 줄루 꽁꽁 묶어서 키울 수두 없구. 어디 방 안에 처박어두고 방문에 대못을 칠 수두 없으닌게 으짰으면 좋을란가 모르것네.”
영호 어머니께서는 과년한 딸을 둔 부모로서 조금은 근심스런 얼굴로 걱정을 하고 계신 듯했다.
여과(濾過) 없이 도도하게 밀려오는 개화의 물결을 타고 사회 전반으로 급격하게 번져 나가는 변화에 적응치 못함이 다소는 촌스럽게 보일지라도 그 시류(時流)의 혼탁한 격랑(激浪)속에서 자식을 지켜 내려는 부모의 깊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우(杞憂)였을 성싶었다.
어설픈 농사꾼 솜씨였지만 그라도 나름대로는 정성을 기울였던 탓으로 자그마한 텃밭에 그런대로 드문드문 노란 참외가 보기에 허전하지 않을 만큼 달렸다. 그 텃밭 모퉁이에서 검둥이가 또 한 차례 세차게 짖었다. 그러자 모두들 목을 높이 치켜들어 울타리 너머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병막 터 정섭이형네 집에 종구 아버지 일을 마무리를 하려고 가셨던 동근이 아버지와 방앗간 순태아저씨가 원두막으로 걸어 오셨다. 그런데 우리 집에 동네 분들의 모습이 보이자 뭔 일이 있나 싶어 사립짝 안으로 들어오셨다. 항상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행동하시는 방앗간 순태아저씨는 그런 사정 알 리 없어 속 편하게 오침을 하시려나, 원두막 마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동근이 아버지를 기다리셨던 기성이형 어머니가 자못 긴장하신 표정으로 말을 건네셨다.
“내 자식 기성이란 놈 일땀시로 긴히 나눌 말이 있어 찾아왔는디, 어째 쪼금 시간 좀 내줄 수 있는가 모르것네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구 지아무리 머릴 싸매구 별스럽게 생각을 혀봐두 별 뾰족한 수가 없네유. 길게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것지만, 지난날 그 일루다가 이미 두 집이 원수 척지구 갈라섰는데. 아무리 자식덜 일이래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말을 붙이자니 그것두 영 그래서 생각다 못해 그래두 그 집허구 제일 가깝게 지내는 분이 동근이 아버지뿐인 듯싶어 부탁 좀 드릴라구 이렇게 염치 불구허구 찾아왔네유.”
그러자 동근이 아버지가 거리가 좀 먼 병막 터까지 다녀오시느라 몸이 더우셨던지 누런 밀짚모자를 벗어 손에 드시고 부채처럼 얼굴에 대고 부치시면서 말씀하셨다.
“나사 두 집 사이 누구만큼은 잘 알구 있는지라, 그 사람 동섭이 속마음이 어떤지는 몰라두 이번 참에 한번쯤 의사를 물어볼려구 하던 참이었는디 안성마춤으루다가 마침 잘 오셨네유. 글구 기성이두 다음 달인가 군대에 입대를 한다구 하던디. 그러니 양쪽 집에서 이 일을 어떻게 받어들일지는 몰러두 자식들 앞날을 봐서라두 서로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 묵은 감정을 풀구 말문을 텄으면 좋지 않을까 싶네유.”
동근이 아버지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계시던 기성이형 어머니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암튼, 뭐라 고맙다구 해야 될련지 모르것네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더라구 다 내가 낳은 죄라구 생각을 허구, 죽은 그 양반에게는 헐 짓이 못되드라두 겨우 젖꼭지 빨구 있는 그 어린것 생각혀서 누가 뭐래두 이제는 마음을 풀어야 될 듯싶네유. 지가 이렇게 맘을 돌려먹으면 동네에서 남의 말허기 좋아허는 사람들은 속두 모르구 부잣집 재산 때문에 그런다구 헛소리를 헐련지는 몰라두, 내사 그 집 재산에 욕심내 본 적두 없구 낼 생각두 눈곱만치두 없으닌께 께림칙헐 건 하나두 없구먼유.”
숱한 날 고뇌를 거듭하신 끝에 아픔을 억누르시고 마음의 큰 결정을 하신 듯해 보였다. 그래도 그리 억울하게 돌아가신 기성이형 아버지 생각에 감회(感懷)가 깊으신 듯 그 어른님 유택(幽宅)이 있는 비석골쪽으로 눈길을 모우고 계셨다. 그렇게 바라보시는 눈시울에 무엇이라 일일이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의 눈물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모든 분들이 너무도 숙연한 모습으로 한동안 말을 잃으셨다. 그리고 언제나 과묵한 저 산도 그런 가슴 찢는 사연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 오랜 세월을 두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아 서로 반목내지는 증오를 거듭하여 살아왔던 나날들의 아픔이었다. 허나 무릇 티 없는 어린 생명의 탄생이 이제는 용서와 화합으로 치유될 수 있는 계기가 되려는 것 같았다. 인간은 그렇듯 험한 세상에 태어나 자의였던 타의였던 서로 묘한 인연으로 얽히고설켜 숱한 기쁨과 아픔을 남기며 살아 나가고 있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