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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62 조회 : 1,073




하늘은 쪽빛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냥 자글대는 햇살은 끝 모르게 펼쳐진 푸른 들녘을 수더분하게 아듬었다.

볏짚을 간조롬하게 잘 다듬어 지붕을 곱살하게 이어 놓은 높다란 원두막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주변의 산세와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 전원의 정취를 한껏 자아냈다.

원두막에선 동근이 아버지가 튼실하게 잘 익어 큼직한 수박 한 덩이를 안아 드시고 밭고랑을 걸어 나오셨다. 푸른 넝쿨이 무성하게 뻗어난 밭두렁에는 여름 뙤약볕에 몸을 욕심껏 부풀려 눈에 띌 만큼 커다랗게 자라나 속이 빨갛게 꽉 차오른 수박 덩이가 풍요롭게 보였다.

퍽이나 험난한 내 삶도 그런 풍요 속에 머물러 주길 간곡하게 바랐다.

반들반들하게 잘 다져진 작은 앞뜨락의 석류나무엔 한동안 활짝 피었던 주황색 꽃이 떨어져 나가고 아직은 덜 익은 석류 알들이 앙증맞게 매달렸다. 그리고 겉모양이 길둥글게 생긴 모과도 가지마다 듬직하게 매달려 누르끄름하게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이 잎사귀 사이로 드문드문 보였다. 그와 더불어 나뭇가지 틈새를 비집고 비치는 여름 햇살이 탐스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늘 간고한 삶에 내 작은 몸뚱이가 외소하게 움츠러들려 하면 내 어머니는 참신한 마음의 소리로 나를 일깨워 영의 양식을 불어넣어 흐트러진 사고를 바로 잡아주셨다. 그런 힘은 나로 하여금 올바른 각도에서 삶을 체험케 했다. 그로 인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이렇듯 살아남아 있는 것 자체가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의 덕인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어머니의 존재가 고귀한 줄 알면서도 어머니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그리 게으르고 인색했는지 모른다.

삶은 참으로 가혹하리만큼 냉담하기만 했다. 그로 인해 버텨내기에 힘들고 고난할지라도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에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셨던 그런 분이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새우젓 장수라고 업신여김도 당하셨고 지독스런 냄새 때문에 곁에 오는 것조차도 꺼려했지만 그런 멸시와 비웃음에 당황하시거나 결코 노여워하시지도 않으셨다.

그토록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멀쩡했던 지아비를 전쟁 끝에 그리 허무하게 잃고도 국가와 사회로부터 그에 합당한 응분의 대가를 보상받기는커녕 오히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구설수에만 오르고 내렸다. 그라도 비참하게 보였던지 열강으로부터 원조받은 구호품인 밀가루 몇 포대를 받아먹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 반해 가진 자들은 그런 고귀한 희생의 대가로 지켜 얻어진 땅에서 뼈 빠지게 힘들이지 않아도 소작농들의 고혈로 허구헛날 풍요를 즐겨 통한 속에 남겨진 유가족들의 아픔을 너무도 등한시하며 살았다. 어찌 보면 어두웠던 만큼이나 세상은 그렇게 너무도 공평하지 못했다.

그들이 당연시 하게 누리는 풍요가 가진 것 없는 우리들에게는 아득한 별나라처럼 느껴졌다. 그런 아픔조차도 눈물로 삭이고 살아가셨기에 골 깊은 애환이 그리 많으셨던 어머니였다.

그 무렵 그런 아픔의 순환이 비단 우리 두 모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참혹한 전쟁이 남긴 상흔은 말로써 표현키 어려웠다. 아픔으로 얼룩진 연륜(年輪)처럼 늘어나는 주름살이 얼굴에 주름진 골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가칠해져 가는 손등에 드러나 시퍼렇게 돋보이는 힘줄이 확연하게 눈에 띄어 어머니의 몸이 점점 쇠잔해져 가는 것을 충분히 감지(感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늘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내 어머니가 몸이 지나칠 정도로 지쳐 힘이 드시고 철없는 내가 일을 저질러 마음이 크게 상하실 때는 나에게 커다란 경각심을 주려 하셨다.

“내 죽기 전에는 천하 없어두 내 몸뚱아리 구석구석에 밴 젓갈 냄새가 사그러들지 않을 건 께. 내 죽거들랑 남들보다 향을 엄청나게 많이 피워야 헐 끼다. 안 그럴라면 뻣뻣한 내 시체를 쑤세미로 박박 문대서 닦어야 헐 꺼구먼. 그래야 저승길에 만나는 저승사자에게 문전박대 안 당하구 박복한 년이 그나마 쪼게 나은 곳으로 끌려갈 거닌께 알았지?”

정말 어린 가슴속을 끝이 날카롭게 뾰족한 대꼬챙이로 후벼 파내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아픔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거친 삶은 서로 얽히고설킬 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어 무료한 반복만을 거듭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어머니는 비록 작게 보일지라도 나름대로 우리들만의 울타리를 지켜 내시려 하셨다.

백로(白露)가 아직은 조금 남아 늦더위는 용서 없이 온몸을 달궈 내렸다.
오늘도 어머니께서는 동네 그 누구 보다 일찍 일어나셔 국방색 군복 천 쪼가리로 만든 때 묻은 전대를 허름한 몸뻬 위에 두르시고 자드락밭 모퉁이를 돌아 잰걸음으로 읍내에 나가셨다.

보릿짚으로 얽은 멍석을 깔아 놓은 뒤뜰 밤나무 아래에서 순덕이 어머니가 머리에 꽂고 계시던 머리핀으로 자꾸만 움직이려 하는 순덕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귓속을 찬찬히 들여다보시며 귓밥을 파주고 계셨다. 그런 귀를 파는 귀이개 하나도 변변하게 없었다.

대다수 집들은 대나무를 아주 가늘게 깎고 다듬어 귀이개를 만들어 썼다. 그러나 생활 형편이 좀 낳은 사람들은 읍내 잡화점에서 파는 은으로 만든 귀이개를 사용했다. 그리고 어쩌다 동네 남정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 때에는 잘사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라도 하듯 은 귀이개로 귀를 파내어 모두 보라는 듯이 귓밥이 묻어난 은 귀이개 끝을 입으로 ‘훅훅’ 불어대며 거들먹거렸다

그렇듯 빈부의 차이는 그런 잡다하고 아주 작은 생활의 단면에서도 여실히 들어났다.

가까운 예로 보편적으로 쓰는 도장 하나도 일반 가정집에서는 장날에 새겨 온 목도장을 사용 했다.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거의 평생토록 쓰려고 마음먹어 손때가 묻어나 반질반질했다. 사용한지가 오래되어 말라붙은 인주와 먼지 때가 가득 차 글자가 다 메워지면 바늘 끝으로 일일이 글자의 문양을 따라 후후 불며 파냈다. 때론 끝이 때가 너무 많이 끼어 입으로 불어도 되지 않을 때에는 문드러져 가는 헌 칫솔로 박박 문대어 사용하였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도장을 석유에 묻혀 헝겊으로 싹싹 문댔다. 그리고 남의 집에 양식 변통을 하지 않고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은 같은 목도장이라도 나무 재질이 단단한 것을 사용하였으며 그런 나무 도장 중에서도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도장이 그리도 좋은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동네에서 두 번째 부자인 영택이 아버지가 그 도장을 가지고 계셨다.

그에 뒤질 새라 제일 잘 사는 종구네 아버지는 햇살에 영롱하게 오색 빛이 난다는 수정으로 만든 도장을 갖고 있었다. 종구가 그런 도장이 ‘인감도장’이라고 하면서 자기네 집 자랑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땅을 갖지 못하여 소작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나 땅뙈기가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는 인감이란 것에 대한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떵떵거리고 잘사는 선택된 사람들이 땅이 많아 단순하게 문서 관리를 하는데 쓰이는 중요한 걸로만 생각하고 살았다.

아침 내 산봉우리에 들러붙어 엉거주춤하던 구름 조각들이 물러간 산 모습은 자태가 빼어난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선연하게 보였다.

아주 먼 곳에 있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말로만 들어 왔던 서울역을 출발하여 원행을 한 증기기관차가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오르려 숨이 차오르는 소리를 남겼다. ‘뽀오옥뽀오옥’ 늘쩍지근하게 소리를 내며 산모퉁이를 벗어나 완행열차라 그런지 뒤꽁무니에 객차를 꽤나 많이 매달고 흔들거리며 마을 앞으로 달려왔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생소함에 멀게만 느껴지는 남쪽 끝머리 목포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차가 힘들게 빠져나온 산기슭 그 가파른 계곡엔 우물가 사는 인식이 동생 억시기(인수)가 동네 아이들과 더불어 놀고 있었다. 개구리 뒷다리 살을 바늘에 미끼로 끼워 미유기(산메기)를 잡아 바늘에 걸려든 미유기가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가려 어지럽게 팔딱거렸다. 아이들은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우스워 보이고 산메기를 잡았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었는지 큰소리를 내어 마음껏 웃고 있었다.

그런 순수한 모습들 하나까지도 허전하기만 한 산골짝에 큰 활력이 되었다.

그런 천진스런 모습의 인수는 지난 한국전쟁에 자기 아버지가 동네 구장 일을 보았다는 이유로 종구네 삼촌이 밀고하여 그날 밤 인민군들에게 끌려가셔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 당시 둘째로 태어난 인수는 젖먹이였는데 그때 이질이 창궐하여 병에 걸린 인수가 밑알이 빠져나올 정도로 피똥을 그리 많이 싸며 사경을 헤매어 탈진이 된 상태로 기력을 잃어 몸이 축 늘어져 젖도 제대로 빨지 못해 동네 사시는 분남이 할머니가 맥이 뛰질 않아 가망이 없다고 하시며 방 아랫목에 홑이불을 덮어 밀쳐놓으려 하셨는데 인수 어머니가 붙들고 울부짖으시며 젖을 짜내어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입 안으로 넣어 겨우 살려 놓았다고 동네 어른들이 말씀을 하셨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의학적인 면에 상식이 전무한 분남이 할머니가 자칫 잘못하였으면 하나의 고귀한 어린 생명을 잃을 수도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참으로 무지하기만 했다. 그 시절 우리 모두는 열약하기 더할 나위 없는 그런 환경 속에서 그 정도로 어둡게만 살았다.

어쩌다 집 안에 누가 아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읍내 의원까지 거리도 멀었고 갑자기 가진 돈도 없어 급한 마음에 궁여지책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제일 먼저 찾아 가는 곳이 분남이네 할머니 집이었다.

‘소가 뒷발로 모기를 잡더라.’고 그새 중간에 어설픈 민간요법으로 운 좋게 한두 번은 효험(?)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런 연유로 동네 사람들은 은연중에 분남이 할머니에게 의지하여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며 살았다.

우물가 집 인수네 어머니는 지난 전쟁 난리 통에 그리 허무하고 억울하게 죽은 자기 남편 원수를 기필코 갚으려 하셨다. 그리 하려면 자식들이 억척스레 살아남아야 한다고 아이들 어렸을 적 이름을 그 흔한 개똥이 쇠똥이 막둥이 그리고 조금 점잖은 이름인 복동이라는 이름도 피했다. 악착 같이 억세게 살아남아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원한을 풀어 달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 탓에 동네 사람들은 인수라는 이름이 버젓하게 있는데도 늘 ‘억시기’라고 불렀다. 그리 죽을 고비를 넘긴 인수는 이름에 걸맞게 튼실하게 자라 제 나이 또래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그리고 한두 살 위턱인 우리들에게까지 은연중 힘을 겨루려 했다.

그 최종 목표는 평생토록 지우지 못할 아픔을 부여한 원한 맺힌 집의 아들인 바로 종구였다.
그런 점을 간과한 종구는 동네에서는 물론 학교를 오가면서도 인수를 의식적으로 피하려 했다. 동네 어른들은 연자방앗간 앞에서 놀고 있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같은 또래 끼리 씨름을 곧잘 시키셨다. 그런 중에 어쩌다 종구와 인수가 맞붙게 되면 인수는 거침없이 달려드는데 종구는 자신감이 없었는지 뒤로 꽁무니를 뺐다.

등뫼산 기슭 계단식으로 일궈 놓은 밭에 검푸른 빛으로 무성하게 자라나는 콩밭에 풋콩들이 콩깍지 속에서 알이 영글고 있었다. 그 밭 자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생생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이상하리만큼 해마다 여름철엔 동네에 크고 작은 불행이 꼭 찾아 들었다. 예닐곱 해 전으로 기억이 되는 국민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방앗간 일을 하시는 순태아저씨네 아주머니가 밭일을 하시다 살모사에게 물려 숨을 거두셨다.

그때 순태 아저씨가 종구네 산 밑에 있는 계단식 밭을 도지(賭地)로 얻어 소작을 하며 살았다. 그 더운 여름날 뙤약볕 아래서 밭을 매시던 순태아저씨 부인이 운이 나빠 뱀에게 물려 순아네 소달구지에 실려 읍내 병원으로 가시던 중 온몸에 독기가 퍼져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뱀 중에서도 독성이 제일 강하다고 하는 살모사에게 물리셔 돌아가신 것이라고 동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그 뒤로는 뱀만 보면 원한이 맺힌다고 하시는 순태아저씨가 어쩌다 아무런 독성이 없는 ‘무자치’라도 눈에 띄기만 하면 가차(假借) 없이 잡아 죽이셨다. 어찌 보면 한없이 아둔할 정도로 어둡기만 하였던 그 시절 그 모든 주위를 형성하고 있는 여건들이 성숙치 못한 터에 배움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위기에 대처하는 응급처치 방법도 전혀 몰랐다. 또한 교통 여건도 열약하여 응급에 대처할 만한 교통수단이라고는 주막집을 통과하는 군내에 겨우 두 대밖에 없는 버스가 1시간에서 2시간 간격으로 다녔을 뿐이었다.

그나마 어쩌다 고장이라도 나면 덜덜거리고 와야 오는 것이고 가야 가는 것인 버스였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더러더러 촉각을 다투는 응급환자라도 발생하게 되면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다. 동네 어른들 말씀대로 집 떠나 읍내 의원에 가다가 의원 문턱에 닿지도 못한 채 황천길로 바로 들어서기가 십중팔구였을 정도로 모든 여건이 미약했다.

어쩌다 운 좋게 겨우 허겁지겁 의원 문을 열고 들어서도 열약한 의료시설에 대수술은 엄두도 못내 대다수는 뾰족한 수를 못 찾아 발을 동동 굴렀다. 대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나이 지긋하신 의사가 환자의 병세가 조금만 위중하다 싶으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어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니 이리저리 애 터져 죽어나는 것은 환자와 가족뿐이었다.

그런 열약한 환경 속에서 순태아저씨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화를 당하신 후로 한때는 허구헛날을 술로써 슬픔을 달래셨다. 본성이 착하고 고우신 만큼 여리신 마음에 마치 실성을 한 것처럼 헛소리를 내지르셔 어린 우리들 눈엔 무섭기도 했다. 술에 취해 온 들녘을 헤매시다 그리도 마음 풀리지 않으시면 비석골 공동묘지에 아주머니 유택을 찾아가 소리쳐 울기도 하셔 동네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더러는 우리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정신을 잃으실 정도로 술에 취하신 채 개울가 수문의 받침돌 위에 몸을 겨우 기대고 계셨다. 그리고 산 밑 콩밭을 바라보시며 그리 슬프게 울부짖으셔 어린 나이에는 그런 모습이 그저 한없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 앞으로 지나다니지도 못하고 일부러 멀리 논둑과 밭둑을 빙 돌아서 걸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그해 겨울 어느 날, 더는 아주머니에 대하여 남은 상처로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숱한 세월 정이 들었던 고향을 버려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시려 마음을 굳히셨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시려고 동네 집집마다 찾아다니셨는데 동네 분들이 그리 간곡하게 말리시며 방앗간 발동기라도 돌리시며 취미를 붙이고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차차 잊혀지게 될 것이라고 달래셔 다시 동네에 머물게 되셨다.

옛날 조상님 때부터 내려온 방법으로 소를 끌어 엄청스레 커다랗고 둥근 맷돌을 돌려 방아를 찧던 연자방앗간이 두 해 전에 폐쇄되었다. 동네에서 몇 해 동안 가을 추수철에 가가호호 곡식을 조금씩 거두어들여 모아 두었던 마을 기금과 종구와 영택이네 동네 두 부잣집 어른들이 찬조금을 내셔 발동기를 사들여 방아를 찧는 방앗간이 새로 생겼다. 순태아저씨가 그 발동기를 돌리는 기술을 읍내로 한 이레 동안 다니시며 배워 동네 방앗간 책임을 맡게 되셨다.

갯바람이 제 아무리 드세다고 하여도 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 또한 만만치 않아 산을 맞바라보고 사는 동네라 그리 풍운이 심하였던 것 같았다. 동네가 한동안 조금 조용할 만하면 전혀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 마을 인심이 뒤숭숭해졌다.

그때면 일껏 조용히 지내던 무당들이 서로 저 잘났다고 온통 덜렁거리며 귀가 여린 동네 어른들을 부추겨 동네 굿을 하기도 하여 늦은 밤까지 시끄럽게 쿵덕거렸다. 그러나 그다지 큰 효험(效驗)을 보지는 못했다.

어쩌다 동네 앞을 지나가는 외지 사람들이 얼핏 쳐다보면 마을 앞이 광활한 들녘을 항해 시원스레 확 트여 있어 집집마다 양식 걱정 없이 사는 평온한 마을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면내에서도 제일 낙후되어 그 흔한 전깃불 한 등도 안 들어와 자고 나면 콧속에 석유 기름 타고 남은 그을음이 잔뜩 끼고 방 천장 한구석이 검게 그을렸다. 그리고 달빛 흐린 날 밤에는 낮 동안 그리 눈에 익었던 고샅길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 사방이 어둠에 묻히고 마는 동네였다.

그리 작은 마을에 구구절절 가슴 아픈 사연은 무엇이 그리도 많았다. 물론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일들이 비인간적인 종구네 삼촌 한 사람이 야기(惹起)시킨 일이었다. 어쨌든 면내에서 전쟁의 화마에 직간접으로 목숨을 잃으신 분들이 제일 많은 비극적인 동네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킨 우환 중에 바로 눈앞에 닥친 또 하나의 큰일이 일어나 동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 입장인 기성이형네 집과 가해지 입장인 종구네 집이 아들과 딸 문제로 서로 힘든 줄다리기를 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이것 또한 우환 많은 동네에 또 다른 우환이 될 성싶어 동네 사람들 저마다 두 집일에 대한 추이(推移)을 조용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기성이형이 작심을 한 듯 동근이 아버지와 함께 종구 아버지를 만나려고 했다. 그래서 기성이 형이 이번에 새로 지은 종구네 기와집으로 가려 철길을 건너 원두막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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