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가 집요(執拗)하게 기승을 부려도 세월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이 쇠잔(殘衰)해지는 것 같았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들녘 마을에 비해 산골짝이 더욱 심해 계절이 아직은 여름인데도 이른 새벽녘으로는 늦가을 날씨처럼 싸늘했다.
가을 김장 무 배추를 파종하려고 저마다 수확을 마친 감자와 마늘 밭에 소를 몰아 서둘러 밭갈이를 끝마쳤다. 갈아엎어 놓은 흙덩이 위에 폭삭 삭아 내린 거름을 내고 더러는 인분까지 잔뜩 뿌려 놓아 신선한 아침 공기에 뒤섞여 바람이라도 살짝 불라치면 소금기 가득 찌든 구린내가 온 사방으로 쾌쾌하게 퍼져났다. 그래도 그런 냄새가 참지 못할 정도로 싫지는 않았으니 어찌 보면 그만큼 흙에 잘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앞 들녘엔 희유끄름한 지평선이 눈에 가물가물 바라보일 뿐, 더는 그 끝을 가늠키 어려웠다. 그 지광(至廣))한 들녘을 빼곡하게 메운 검푸른 벼 이삭들이 부는 바람 따라 초록빛 물결로 장관을 이뤘다. 이제 큰 비바람을 몰고 오는 불청객 태풍과 늦장마만 피하면 틀림없는 풍년이 온 들녘에 넘쳐날 것만 같아 그 또한 진솔한 자연의 자애로운 은혜의 덕인 듯싶었다.
둥근 박들이 벌러덩 드러누워 있는 동네 초가지붕에 홍연(紅煙)이 뭉그적거려 이른 아침의 문을 차분하게 열었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진초록 대나무 이파리에 부딪혀 바람이 불 때마다 물고기의 하얀 비늘처럼 번득번득 튕겨져 나왔다.
좁다란 동네 고샅길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울타리 너머로 들려와 얼른 바라보았다. 동네 사람들이 애어른 할 것 없이 우르르 몰려나와 뒤늦게라도 가면 누가 먼저 물고기를 잡아갈까 싶어 그랬는지 퍽이나 바지런을 떨었다. 옹자배기나 양철 세숫대야 그리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함석 물통을 하나씩 손에 들고 냇가로 죄 몰려가고 있었다.
오랜 가뭄 탓으로 냇가에 물이 밑바닥을 거의 드러낼 정도로 줄어 있었다. 냇물이 말라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 잡을 수 있는 민물고기는 그런대로 동네 사람들 모두의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한여름 폭양(曝陽) 아래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온몸이 나른해지고 눈앞이 침침해질 정도로 힘이 빠질 때, 미꾸라지 한두 사발이라도 잡아 추어탕이라도 먹음직스럽게 끓여 먹으면 더위로 잃었던 입맛을 되찾을 수 있었다. 비록 하잘것없는 민물고기일지라도 그나마 고기라고 맛을 볼 수가 있어 저마다 열심히 미꾸라지와 물고기를 잡았다.
너른 들녘의 젖줄인 저수지는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에서 약 오 리 정도 떨어져 있는 은진면 상평리 동네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쉽게 그 동네 이름을 따서 ‘상평 저수지’라고 불렀다.
그 상평저수지는 일제 강제점령기때 논산 들녘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전쟁에 소요되는 군량미를 찬탈하기 위하여 군내에 거주하는 수많은 군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수년을 걸쳐 공사를 하여 이루어 놓은 가슴 아픈 수난의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더불어 수치스런 역사가 남겨 놓은 부산물일 수도 있었다.
그토록 풍부하게 넘쳐나던 저수지 물이 봄부터 시작된 오랜 가뭄 탓으로 어느 때부터인지 차츰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름 장마라고 그리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스쳐 지난지도 이미 오래라 기어이 마을 앞개울 밑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동네 어른들이 칠팔 년 만에 일어나는 극히 드문 가뭄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셨다.
농사철을 앞두고 늦은 봄까지 호되게 가물어 마을 사람들 애간장을 그리도 태웠다. 그래도 꼴에 여름 장마랍시고 일찍이 구질구질하게 내리던 비마저도 한 삼 일 동안 내리다 말다를 거듭하여 지지부진하더니 이내 멈추고 말아 잔뜩 감질나게 했다. 그런 장맛비마저도 멈추고 말아 어찌 보면 계속되는 호된 가뭄은 그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인 듯싶었다.
방만하게 펼쳐진 상평저수지를 가장자리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려면 가히 십 리 길 정도가 되고도 남을 정도로 그 규모가 무척이나 커 보였다. 상평 저수지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흡족하지는 못할지라도 둘레 바위가 물에 잠길 듯 말 듯 그나마 물이 고여 있었는데, 워낙 무섭게 쪼이는 햇볕에 이제는 물이 푹 줄어들었다.
그 상평 저수지는 일제 강제 점령기 때 농수 공급을 원활하게 하려고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 동원시켜 오랜 세월을 걸쳐 파놓은 저수지였다.
이른 아침부터 주먹밥 한 덩이를 허리춤에 싸들고 그 먼 곳까지 걸어 나와 그토록 넓은 터를 수해에 걸쳐 무척이나 깊게 파 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저수지 안에 고여 있는 물이 그토록 방대하여 어지간한 가뭄에도 수면이 파랗게 찰랑찰랑 푸른 물결을 이루었다.
여름철에는 논병아리들이 수없이 몰려와 놀고 늦가을에는 청둥오리들과 기러기들이 북쪽에서 떼를 지어 날아와 겨울 한철 도래지로 삼아 여유 있게 쉬어 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 배경이 산의 단풍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 풍광이 빼어나 군내에 있는 초중고 학생들이 가을 소풍을 심심찮게 오는 곳이었다.
그 넓은 상평 저수지가 날마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견뎌내지 못할 정도였으니 동네 우물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걸핏하면 황토물이 샘 밑바닥에서 들고 일어나 물이 뿌옇게 뒤집혔고 그나마 물마저도 잘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 모두는 아예 두레박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밑바닥에 질금질금하는 물이 한 바가지가 채 고이기도 전에 이마에 힘줄이 터져 나오도록 거꾸로 머리를 박고 퍼내야 했다. 그나마 게으름을 부리면 발 빠른 사람이 먼저 물을 차지하기 때문에 한 발짝이라도 늦으면 물을 길어 가기 어려워 애를 먹는 일이 허다했다.
그럴 즈음이면 동네 어른들이 정갈한 옷차림으로 모여 우물 앞에 정성 들여 음식을 차려 놓고 제를 올리기도 했다.
구름 몇 자락이 힘없이 걸쳐 있는 왕소나무 앞자락에 계단식 밭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밭에 혹한의 긴 겨울 추위를 견뎌내려 겨울 이불과 옷 속에 푹신하게 넣을 솜을 만들려고 목화를 심었다. 줄기에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검붉은 목화다래가 조금씩 열개(裂開)를 하면 짓궂은 동네 아이들은 달짝지근한 그 맛에 매료되어 어른들 눈을 피해 목화 서리를 했다.
동네 아이들은 저마다 윗저고리와 아랫바지 주머니에 꽉 들어차도록 욕심껏 목화다래를 따서 산 밑 소나무 숲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죽도록 땀 흘려 농사를 지으신 밭주인 애간장 타는 줄 모르고 단물이 흠씬 배어나는 목화대래를 천연덕스럽게 깨물어 먹었다.
어른들이 흔히 즐겨 쓰시는 ‘문전박대’라는 말이 있다. 기성이형이 종구네 아버지에게 무참하게 당하고 나온 수모가 그에 합당한 듯싶었다. 종구네 집에 갔던 기성이형이 맥 빠진 모습으로 원두막에 돌아온 것은 한낮 해가 마을 지붕 한복판에 머물려 하는 중참 때였다. 가뜩이나 남들보다 눈이 유난스레 작은 기성이형 얼굴이 잔뜩 찌푸려 눈이 더욱 작게 보일 정도로 불만이 가득 차올라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나름대로 기대를 걸었던 일이 그 지경에 이르다 보니 기성이형도 자기 아버지 죽음에 대한 원한 관계도 있어 만감이 교차하는 듯싶은 표정으로 다소는 얼굴색이 어둡게 보였다.
그리 오랜 세월을 두고 노심초사하여 온갖 고뇌 속에 결단을 내려 찾아간 종구네 집이었다. 그런데 그 널따란 마루 위에 한번 앉아 보기는커녕 대문 안쪽 마당에서 겨우 말 몇 마디 꺼내지도 못하고 호된 욕설만 듣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래도 기성이형 깜냥에는 처갓집이라고 간고한 생활 속에서라도 나름대로는 예의를 갖추려 했다. 기성이형 어머니가 자기네들도 좀처럼 구경하기도 어려운 수박을, 동근이 아버지에게 신신당부를 하여 제일 잘 익은 놈으로 고르고 골라 힘들게 가지고 갔었다. 그런데 그 수박마저도 종구네 아버지가 손을 바르르 떨며 대문짝에 대고 냅다 내팽개쳐 산산이 조각난 수박이 온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대문짝에 빨갛게 잘 익은 수박 속살의 작은 덩이가 여기저기 들붙어 불그레한 수박 물이 나무판자 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러니 있는 자존심 모두 망가져 버린 기성이형 마음이 영 엉망인 것만 같았다.
기성이 형이 기분이 영 언짢은 듯 원두막 마루 위에 오르지도 않고 나무 기둥에 기대선 채 뿌옇게 담배 연기를 퍼트리며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놔둬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끝날 일인데 그런 수모를 당하고 나니, 깊은 속마음으로는 본전도 못 찾는 일에 자기 어머니의 성화에 등 떠밀려 종구네 집에 공연히 갔나 싶은 후회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당시 사회 풍습으로는 양가 부모들 허락 하에 사주단자([四柱單子)가 오가고 초례청에서 육례를 갖춰 식을 올리고 사는 것을 철칙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대주의 사상에 세월의 때가 찌들대로 찌들은 나이 드신 동네 어른들 사고에는 정희 누나와 기성이 형이 연애를 해서 혼인 전에 임신을 한 것이 쉽게 받아들이기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밉네 곱네해도 단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이라고 종구 아버지 맘속 욕심으로는 제아무리 운이 나빠 혼 줄이 닿지 않는다 하여도 어디 내놓고 그럭저럭 사위 얘기 꺼낼 정도의 신분을 갖춘 사위를 맞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동네에서 은연중에 경쟁 상대를 이루는 영택이 아버지는 그래도 면 서기를 하는 사위를 맞아들여 그런대로 체면을 유지하고 사는데 자기의 입장이 그에 못 미치다 보니 더욱 극성스럽게 반대를 하신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주된 동기가 그게 하필이면 자고 나면 논배미에서 흙이나 묻히고 쇠꼴이나 베러 냇가로 나가는 흔하디흔한 농사꾼이었으니 눈에 찰리 만무했다. 그것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바로 코앞에 있는 울타리 너머 옆집이고 그마저도 남들 볼썽사납게 한동네서 일을 저질러 놓고 말았으니 가뜩이나 자존심 강한 성품에 기성이 형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저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 그러니 땡감 먹고 되게 얹힌 것처럼 뱃속이 거북스럽다 못해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아 참말로 기성이형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조차도 싫었을 것 같았다.
더욱이 불과 몇 해 전 봄에는 가뭄으로 동네 사람 모두가 논물 때문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 논물 때문에 심한 멱살잡이까지 하였으니 더욱 거부감이 컸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그러나 진실한 속마음은 그런 제반의 이유보다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망종(亡種) 취급을 당하는 자기 친동생 때문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버린 기성이 아버지에 대한 무거운 부담감이 가슴속에 늘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정이 그러니 기성이형 측에서 제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해도 말 자체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 뒤틀린 모과나무 심사로 보아 무조건 의심부터 하려 드니 진실된 사람들이 그분 곁에 머물 수 없었다. 그저 자기 말에 맹종하는 힘없는 소작농들과 겨우 대화를 나누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밀폐시키며 살았으니 때로는 무척이나 답답하고 고독하였을 것 같았다.
얼마가 지나서야 동근이 아버지가 종구네 집에서 나오셔 원두막으로 돌아 오셨다, 그리고 기성이 형과 대화를 나누셨다.
“증말이지 저는 첨부터 찾아갈 맴은 없었는디, 울 엄니랑 그 사람(정희누나)이 언제까지 서루 등돌리구 살거냐구 허면서 갓 태어난 어린 자식을 봐서라두 잘못혔다구 빌구 끝까장 참으라구 혀서 갔는디, 이게 무신 꼴이래유? 솔직히 따지구 보면 울 아부지 그렇게 억울허게 돌아가시게 한 게 다 자기네 집 때문인디, 뭐시 그리 잘났다구 대문에 들이닥치자 마자 참 나이 어디루 먹었는지 어른이 볼썽사납게 욕부터 해대구, 그 수박이 무신 잘못이 있다구 대문에다 내팽겨치니 증말이지 지는 더 이상 헐 말이 없더라구유.”
기성이 형이 흥분된 어투로 숨을 거칠게 내쉬며 말을 하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동근이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기사 자네 말대루 동십이가 좀 심허게 했지만 서루 어쯔 것는가! 밉네 곱네 혀두 서루 죽을 때까장은 얼굴 맞대구 살어야 허는디 자네가 이해를 혀야지 안 그런가? 글구 동십이가 허는 말 가만히 들어 보닌께, 그래두 자기 딴에는 자식새끼라구 딸자식 그거 하나 뿐인지라 자기 딴에는 화가 많이 난 것 같드라구, 안 그래두 자네가 그렇게 먼저 나가구 나서 내가 마루에 앉아서 조근조근 이해가 가게 말을 혔네 그려.”
그러자 그 말에는 기성이형도 귀가 솔깃한지 퍽이나 궁금한 얼굴로 동근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더우신지 겉저고리를 벗어 원두막 기둥에 걸쳐 놓으려 하시는 동근이 아버지에게 서둘러 물었다.
“그래서 뭐라구 허든감유?” “야, 이 사람아! 사람 더워 죽것구먼. 숨이나 좀 돌리구서 나서 말을 허자구. 어디 우물가에서 슝늉 달라구 조르는 것매냥 그리 졸라대는가? 그놈에 승질머리 급한 건 딱 자네 애비를 영판 빼닮았네 그려.”
동근이 아버지께서 말씀 중에 문득 기성이형 아버지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동네 살면서 형님 동생하고 지낸 정이 있어 그런지 그 어른 유택이 있는 비석골 공동묘지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러면서 원두막 천장에 끼워 놓았던 종이부채를 꺼내 들고 부치시면서 다음 말씀을 이으셨다.
“내 그 사람 고집 쎈 건 진즉부터 알구 있었지만, 무신 놈에 고집이 그리두 쎈지 끝까장 죽어라구 황소고집을 부리더라구. 그래서 내가 동십이헌티 담판을 질려구 맘을 단단히 챙겨 먹구 이야기를 나눴네 그려.”
동근이 아버지 말씀에 귀가 솔깃했는지? 이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기성이 형이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귀를 기우리고 동근이 아버지가 다시 말씀을 하셨다.
“동섭이가 하는 말이, 자기는 아직까장은 자네를 사위로 받아들릴 맴이 눈꼽 맨큼두 없으닌께 그리 알라구 하드라구. 그리고 정희란 년은 지 좋아서 그집 귀신 될려구 일 저질렸으니 어차피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구. 그집 식구가 됐으닌께 그 집에 들어가서 살든지 말든지 허라구 허든구먼 그려. 그러니 이제 뭐시냐 반승낙은 받은 거나 진배 읍지 뭐. 안 그런가? 이 사람아.”
말씀을 끝마치신 동근이 아버지께서 이제는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하신 듯 여유롭게 웃으시며 혹시나? 면소재지 쪽에서 수박이나 참외를 사려고 손님들이 오는가 싶어 머리를 쑥 내밀어 바라보셨다. 그러자 기성이형도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두 분이 종구네 집에 다녀오시도록 혼자서 원두막을 지키고 있던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던 또 하나의 파문(波紋)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류를 이뤄 서서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이번에 세상 밖으로 햇빛을 보려고 태어난 기성이형 아들인 어린 간난쟁이가 지난날 두 집 사이에 있었던 허물을 덮어주고 관용할 수 있는 그 가교 역할을 하는 듯싶어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 미더움이 바라보기에 그리 좋아 저도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듯 동근이네 수박 밭 건너 허리가 휘어진 자드락밭에 부족한 양식에 보탬이 되라고 심어 놓은 키 작은 산두벼(밭벼) 이삭이 한나절 햇볕에 눈이 부셨다. 그리고 산마루턱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벼 이삭이 엇비스듬히 흔들려 찰랑찰랑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