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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68 조회 : 972




『여름 끄트머리
내 고향 나들목 벼랑바위에
해마다 온유로운 꽃 능소화가 곱게 피었다.

눈여겨보는 사람 그리 적어도 섭하지 않고
화사하지도 않아 오만하질 않으니
꽃다운 꽃처럼 어여쁘기 더없어라

그맘때쯤 등메산에
청미래덩굴 사이 산딸기 검붉은 얼굴 내밀면
알알 맺은 산머루는 잎 사이로 얼른 몸을 숨겼다.

야트막한 언덕배기
밤나무에 밤송이들 속살을 틈실하게 채우면
개구쟁이 콩서리에 입 가장자리 시커멓게 물들고

보송보송 목화송이
만추의 풍요를 남몰래 기다리며 몸을 부풀리면
불그레한 감들이 앞 다퉈 얼굴을 내밀었다.

백일을 피고지는 백일홍
한낮 햇볕 내리쬐어 수수하게 꽃망울 터트리면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코스모스 하나 둘 피어나

서쪽 옥녀봉에 노을빛
소리 없이 다가서면 턱밑에 두 손 모아
읍내 장터 다녀오는 내 어머니 눈 시리게 바라보고

뒤따라온 검둥이도
두 귀를 모아 세우니 그런 마음 저도 아는지
나들목 벼락바위에 능소화도 함께 기다려 주었다.』

종일토록 바지런히 움직이던 해가 제 할일을 다한 듯 노을빛 속에 스러지고 나면 해거름 녘부터는 제법 서늘해졌다. 그렇게 윤회를 반복하는 계절은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변화시켰다.

차분해지도록 더없이 푸르기만 한 높은 하늘엔 고적운(高積雲)이 탐스러울 만큼 피어올라 마음은 심오하기만 했다. 여름내 검푸름으로 번질거리던 비선봉 아래 산자락이 드문드문 푸르누런 색을 띠기 시작했다. 아마도 가을이 서서히 다가오는 듯했다.

광대(廣大)한 호서평야의 들녘엔 벼이삭들이 다소곳하게 머릴 숙여 마음 부듯하게 풍요로 가득 채웠다. 아침저녁으로 산골짜기의 고요한 정적을 온통 뒤흔들어 일깨우던 참매미 소리도 요 며칠 전부터는 한결 잦아졌다.

여름내 나무에 들붙어 수액을 빨아 배를 채워 살을 찌운 매미들이 그들의 뒤를 이어갈 종족 번식을 위해 서둘러 짝을 찾는 듯싶었다. 한여름 내 힘차게 울어대는 수놈 매미와는 달리 암놈 매미는 복부에 떨림막이 없어 긴 여름 속에 그 짧은 일생 동안 단 한 차례도 울지 못했다.
그렇듯 불우한 암놈 매미는 며칠 남지 않은 다음 달인 9월 초순을 비켜서면 나무의 목질부(木質部)와 껍질 사이에 아주 작은 알을 잔뜩 낳아 제 할 일을 다 하고 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무려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고로 기다린 끝에 성충으로 자라 껍질을 벗고 매미로 태어나지만 주어진 수명의 한계가 겨우 10일간의 짧디짧은 삶이니 그토록 서러웠나 하늘 향해 애절하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무딘 내 발길을 붙들어 세웠다.

뭉게구름 사이로 트여진 오솔길에 가을빛이 차곡차곡 채워지기 시작하면 바지런히 목청 돋우던 매미들은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어느 순간부터 냉정하게 소리를 멈춰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가니 그리도 허무할 수가 없었다. 그렇듯 내 주위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의 생태계도 때가 되면 섭리 따라 변모해 가는데 감성이 두드러진 우리 인간들이 처해진 삶의 환경에 따라 야기(惹起)되는 변화의 과정 또한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까지는 예측을 할 수 있어 그토록 옥순이의 고통이 컸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어지길 은연중에 바랐던 내 위주의 편의적인 사고(思考)가 너무도 안이(安易)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부름을 다녀온 기현이로부터 전해들은 옥순이의 격한 반응은 역시! 내가 우려(杞憂)했던 것처럼 너무도 완고(完固)해 옥순이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그와 더불어 한차례 소낙비가 내리려고 꾸무럭거리며 잔뜩 흐린 날씨처럼 마음 한구석이 다시금 침침해지며 무겁기만 했다. 그리고 가능할 수 있는 다음 수순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동구 밖 느티나무 위에 철버덕하게 내려앉은 해가 짱짱하게 햇살을 내리비추는 정오 무렵이 되었다. 연주황빛 능소화가 곱게 피어나는 벼랑바위 너머로 바라보이는 종구네 기와집에 들어갔던 기성이형이 정희누나와 함께 종구네 집 대문 밖을 나서고 대문 앞까지 따라 나온 종구는 동네로 향하려는 기성이형을 배웅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너나 가릴 것 없이 당장 목구멍에 넘길 끼니를 걱정하고 살아야 하는 간고하기 짝이 없는 삶 속에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급급하다 보니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꿈꿔 볼 여지조차도 없었다. 그런 탓에 집집마다 벽시계는커녕 둥근 사발시계 하나도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비행기의 공습이 심해지자 공습에 신속하게 대피를 하여 생명을 보호하려고 모든 면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알리려 지서에는 나무로 높다랗게 세워놓은 망루 위에 사이렌을 설치했다. 사이렌 소리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려 퍼지면 전 면민들이 공습을 피하려고 방공호로 숨어들었다.

극도의 혼란을 몰고 왔던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전쟁이 멈추고 치안이 안정되어 사회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러자 지서에 설치했던 사이렌이 그 용도를 바꿔 시계가 없이 사는 면민들에게 정오의 시간을 알려 주려고 하루 중에 단 한 차례 우렁차게 울렸다. 매일매일 정오엔 어김없이 하루 한차례씩 두 귀가 멍멍하게 온 들녘으로 퍼져나가 길게 꼬리를 끌며 불다가 멈춰 마을 사람들은 정오에 부는 사이렌 소리를 ‘오포(午砲)와 같은 소리’라고 했다.

그렇게 모든 면 사람들의 귀에 익숙해졌던 사이렌도 서슬 퍼렇던 자유당 정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허정’의 임시 과도정부가 들어서자 그 어느 날부터인지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멈춰버렸다. 그러자 철길 인근 부락에 사는 사람들 모두는 하루해의 흐름을 정오 그 시각에 하루도 빠짐없이 마을 앞을 통과하는 느릴 대로 느려터진 서울행 완행열차를 바라보며 하루해가 정오에 이르렀음을 가늠하며 살았다. 그래서 들녘에서 논밭 일을 하시던 어른들은 점심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점심밥을 먹으려 집으로 돌아오시고 마을 아낙네들은 점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둥구나무 밑에는 동네 어른들이 기성이형과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정희누나의 인사를 받으시고, 정희누나 등에 업혀 있는 아기가 마치 자기들 손주인 것처럼 찬찬히 바라보셨다. 우여곡절 끝에 그 고생 막심했던 객지 생활을 끝마치고 귀향을 하는 두 내외를 진정한 기쁨으로 맞이해 주셨다. 밭에서 점심을 먹으려 집으로 돌아오던 동네 아주머니들도 아기를 서로 빼앗듯이 번갈아 두 손으로 안으려 하셨다.

그리고 그동안 객지에 나가서 그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애를 낳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시며 자기들 딸처럼 정희누나 등을 다독여 주고 계셨다.

기성이형 어머니는 이런 시름 저런 시름 다 잊어버리시려는 듯 손주를 애지중지 안아 드시고 서둘러 고샅길로 접어들으셨고, 그 뒤를 기성이형 내외와 경수아저씨가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 평온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생각이 떠올라 종구네 집을 바라보았다. 종구네 아버지가 겉으로는 매섭게 다그쳤어도,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이 난생처음 객지로 나가 혼자서 그리 어렵게 낳은 외손주라 정이 가는지 담장 너머로 은근슬쩍 그런 모습을 바라보시다 사람들 눈을 의식하시는지? 일부러 전혀 관심이 없는 척 하시며 등을 돌리시어 널따란 마루 위로 올라서는 모습이 보였다.

동네 어른들 말씀처럼 역시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진정으로 맞는 듯싶었다. 그리 복잡다단(複雜多端)하였던 굴곡진 사연 속에 하나둘씩 점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제자리를 잡아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유독 옥순이와 우리 집 관계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있어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지속될는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워이, 워이!’ 이른 아침부터 앞산 자락에 버섯을 따러 올라갔던 동네 아낙네들이 각자 들고 있는 바구니가 어느 정도는 채워져 점심을 먹으려 산에서 내려오려는 듯해 보였다. 여기저기서 자기들이 있는 위치를 알리려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산골짝에 메아리쳐 간간이 들려왔다.

산 그림자 가득 드리운 언덕배기 아래로 내리뻗어 구불구불한 오솔길에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검둥이를 앞세우고 순덕이 어머니가 내려오시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띄엄띄엄 동네 아주머니들이 내려오고 있어 나도 따라 ‘워이’ 하고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흔들어주었다.

방죽가에 있는 흥남이 아저씨네 집에는 곱다란 무늬가 수놓아진 화문석이 마지막 손질을 기다리고 있어 다음 장날에는 읍내에 내다 팔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다 누가 그 집 앞을 지나가려고 하면 득달 같이 달려들어 양쪽 입술을 실룩거리며 허연 이빨을 드려 내고 그리 앙살스럽게 짖으며 달려들던 흰둥이가 며칠 전 철길에서 검둥이에게 된통 당하고 나서는 잔뜩 겁을 먹고 꼬리를 바짝 내렸는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높다란 탱자나무 가시덤불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단작스럽게 항아리 몇 개를 모아 놓은 자그마한 장독대 옆에 하늘 향해 곧게 뻗어난 줄기에 한동안 곱게 피어났던 빨간 접시꽃이 꽃잎을 지워 쓸쓸해 보였다. 어쩌다 아주 드물게 한두 송이 뒤늦게 피어난 꽃잎 위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나비 한 마리가 그리 떠나려는 늦여름이 저도 아쉬운 듯 한동안 쉴 새 없이 팔랑이었다. 그리고 뜰 앞에 심어놓은 콩들의 이파리가 누르끄름하게 색이 변하여 콩깍지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게 탱글탱글 잘 익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증기기관차가 마을 앞을 스쳐 지나가고 나면 하늘가에 남겨지는 검은 연기 속에 나지막이 퍼져나는 석탄 냄새가 비릿하게 코끝에 묻어났다. 철로 레일을 받치고 있는 침목에서 잔뜩 배어나는 콜타르 냄새가 짙게 묻어나는 철로 건널목을 건너 숨이 차오르는 언덕배기에 올라서 잠시 걸음을 멈춰 숨을 돌렸다.

가파른 언덕 아래 개울가엔 갈대들이 어른 키만큼 자라나 무성한 숲을 이뤘다. 그 숲에선 ‘개개개개’하고 자발스럽게 울어대는 개개비 울음소리가 자발스럽게 들려오고 희뿌연 끝자락이 보일랑 말랑한 갈대가 산바람에 서로 몸을 부대껴 사각사각 아주 미세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언덕 밑 저만큼 떨어져 있는 병막 터 둔덕 너머로 내 꿈이 듬뿍 서렸던 국민학교 교실 유리창에 한낮 햇살이 온통 달아올라 앞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시려왔다.

오솔길로 접어든 검둥이가 멀리서라도 나를 보았는지 목을 잔뜩 치켜들고 두리번거렸다. 언덕배기에 있는 나에게 달려올까? 아니면 순덕이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함께 갈까?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다 마음을 굳힌 듯 그냥 앞을 서 순덕이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향하고 있어 조금은 마음이 서운키도 했다. 어차피 하루 두 끼니 밥에 목줄을 달고 사는 미물인 짐승인지라, 저한테 밥을 챙겨주는 순덕이 어머니가 우선인 듯싶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머리를 잔뜩 숙인 수수 머리에 오글오글 들러붙은 수수 알들이 누렇게 익어가자 어찌 그리도 귀신같이 잘 알고 찾아드는지 멧새들이 다글다글 들러붙어 알들을 쪼고 있어 길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를 집어 ‘훠이’ 하고 큰소리를 치며 세게 내던졌다. 그러자 놀란 멧새들이 날개깃이 찢어져라 사방으로 퍼져 파드닥거리며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정신없이 날아 도망을 쳤다.

사립짝 앞에 닿은 순덕이 어머니가 늦더위 속에 순덕이까지 등에 업으시고 산을 오르내리시느라 힘에 부쳐 지치시고 숨이 차오르시는지 어깨에 둘러메고 계시던 버섯이 담긴 망태기를 서둘러 내려놓으셨다. 그리고 허리에 두르셨던 광목천 띠를 풀어 순덕이를 땅에 내려놓자마자 목이 타시는 듯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언제나 변함없이 묵묵하게 살아가시는 순덕이 어머니의 근면성이 나에게는 큰 귀감(龜鑑)이 되었다.

사립짝 앞에서 검둥이가 머리를 또 한 차례 갸웃거리는 듯싶더니 잽싸게 달려 원두막 앞을 지나 내 옆에 찰싹 들러붙었다. 그래도 제 주인이라고 귀여움을 받고 싶은지 능청맞게 꼬리를 마구 흔들며 커다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검둥이와 함께 사립문을 들어서는데 순덕이는 또 다른 장난 거리를 찾으려는 듯 나무 그늘 밑에 어미 닭과 놀고 있는 병아리를 쫓으려 달려가고 놀란 어미 닭이 ‘꼬꼬꼬꼬’ 병아리들을 불러 모아 품 안으로 감추며 몸을 잔뜩 웅크려 순덕이에게 달려들었다.

순덕이가 겁을 잔뜩 먹고 얼른 순덕이 어머니에게 달려가 검정 몸뻬 자락을 붙들고 몸을 반쯤 가리고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 어미 닭과 병아리를 조심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비록 좁다란 마당이지만 빨랫줄 가장자리 한쪽에는 마른 나물을 하려고 열십자로 갈라 걸쳐놓은 가지가 꼬들꼬들 말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쪽마루 한쪽에는 대나무 채반에 둥글고 얇게 썰어놓은 애호박이 네 식구에게 작은 기쁨이라도 주려는 듯 햇볕에 잘 마르고 있었다.

그리고 텃밭 돌 틈 사이에선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가 애잔하게 들려왔다. 며칠 전에 뿌려놓은 김장 배추와 무 씨앗이 두툼한 흙을 밀쳐내고 파름파름 곱살한 잎을 두 잎씩 달고 있었다.
한낮 해를 바라보고 있는 채소들의 자금자금한 모습이 퍽이나 귀염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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