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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69 조회 : 961




푸름이 넘쳐나는 팽만한 하늘은 맑게 갠 만큼 마냥 드높기만 했다. 계절은 이제 늦여름을 비켜서 초가을 문턱으로 발걸음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하늘을 바탕으로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는 새하얀 새털 같은 구름들이 오후 한나절 햇볕을 듬뿍 받으며 너른 들녘 서남쪽 끄트머리로 유연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산 밑 끝자락을 벗어난 들녘 초입에 나지막하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기다랗게 늘어선 고만고만한 초가집들이 눈앞에 정연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마을엔 집집마다 마당에 한 뼘 정도 크기로 잘 자라 빨간 고추들이 크고 작은 멍석 위에 풍족하게 널려 있었다.

재 너머 ‘삼밭네 마을’로 이어지는 작달막한 선산 한쪽 기슭을 개간하여 해마다 부락에서 고추 농사를 제일 많이 짓는 준섭이네 집에는 온 마당이 꽉 들어차게 빨간 고추가 가득 널려 있어 풍요를 자아냈다. 감나무 가지 끝이 곧바로 닿을 듯싶은 초가지붕 추녀에 소나무 등껍질을 벗겨 만든 사다리가 간조롬하게 걸쳐 있어 그 또한 농촌 마을의 정취를 한껏 불러일으켰다.

그리 심한 우기가 없었던 탓에 고추 농사가 풍작을 이뤘다. 그래서 초가지붕 위에까지 고추를 너부죽하게 널어놓아 내리쬐어 따끈한 한낮 햇볕에 푸석푸석 잘 마르고 있었다.

근래 보기 드물게 쾌청한 늦여름 하늘 아래 잿빛 초가지붕과 마당에 널려진 빨간 고추들이 한데 어울리고 지게를 걸머지고 고샅길로 들어서는 영호 아버지가 쓰고 계신 누런 보릿짚 모자도 그런 시골의 풍광에 한몫을 했다.

읍내 장터에 다녀오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머리 위에 보퉁이를 이고 냇둑을 걸어오시는 한가로운 모습이 마을의 전경 속에 더욱 돋보였다.

오랜 가뭄으로 동네 우물터에 물이 턱없이 모자랐다. 저녁나절엔 동네 사람들이 온통 몰려들어 제법 붐볐다. 그 저녁녘을 피해 물을 길으러 가시는 순덕이 어머니 뒤를 따라 물지게를 지고 돈들막에 올랐다.

산머리로부터 두어 차례 불어오는 명지(明紬)바람이 그리 마음에 팍 와 닿게 시원스럽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고맙기만 했다.

언덕배기를 오르는 순덕이 어머니와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 좁다란 길 옆 기성이형네 수수밭에서 정신없이 수수 알을 쪼아대던 산새들이 ‘포르륵포르륵’ 소리를 요란스레 내며 산 밑 아래로 떼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낮 동안 요사스럽게 분잡을 떨던 해가 들녘으로 점점 멀리 달아나려 해 햇살이 누그러들자 이번에 새로 보금자리를 이룬 흥남이 아저씨 부인이 빨랫줄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으시며 말씀하셨다.

“여보, 야가 참 요상허지유? 흰둥이 요놈이 요사이 몸땡이 어디가 안 좋은가? 사람들이 집 가까이 지나가두 통 짖을 줄을 모르네.”

그러자 폭이 좁다란 마루에 앉아 왕골 꽃돗자리를 손질하시던 흥남이아저씨가 자기 부인 말에는 대꾸를 하지 않으시고 물을 길러 가시는 아주머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계셨다.

요 며칠 전 언덕배기에서 기현이를 따라 놀러 온 흰둥이가 제 깜냥엔 저도 수놈이라고 우쭐대며 검둥이에게 겁 없이 달려들다가 치도곤을 당한 줄 아직은 모르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속으로 은근히 미안스러우면서도 이제는 물려고 달려들지를 않아 내심 통쾌하기도 했다.

동구 밖 둥구나무 밑이 얼마 전에 있었던 기성이형 일 빼놓고는 한나절 내내 한가하리만큼 조용했다. 그랬던 둥구나무 밑이 다시금 분잡해지기 시작한 것은 읍내로 수박을 팔러 갔던 동근이 아버지가 끌고 오시던 소달구지가 둥구나무 한쪽 그늘 가에 멈춰 설 무렵이었다.

종구네집 늙은 황소가 오랫동안 참았는지 사발만한 크기의 질퍽질퍽한 쇠똥을 땅 아래로 툭툭 떨어트렸다. 목에 땀내 찌든 광목 수건을 걸치신 순태 아저씨가 가들막거리며 소달구지에서 내리셨다. 비포장 자갈길에 소달구지를 타고 오시느라 오고 가는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로 목구멍이 껄끄러우신지 기침을 한두 차례 걸쭉하게 하시며 흙먼지가 잔뜩 낀 가래를 풀숲에 대고 냅다 내뱉으셨다. 그리고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려 해 읍내에서 수박 장사를 하시며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시려는 것 같았다. 어렵게 수박 장사를 끝내고 장터 막걸리집에서 탁배기를 건하게 마셨는지 술이 덜 깨신 듯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셨다.

순태 아저씨는 타고난 역마살에 어디 한군데 진득하게 머물지 못하시는 성격이셨다. 총각 시절부터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니시다가 어떠한 연유로 마을에 머물러 사시게 되었는지 동네 어른들 그 누구로부터 전해들은 바가 없어 잘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을에 정착을 하셔 방앗간 일을 돌보시며 남산리에 사시던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 자리를 잡으시고 비록 간고할지라도 두 내외분이 오붓하게 사셨다. 그런데 불행이 찾아 들려고 몇 해 전 여름 독사가 일 년 중 가장 치명적인 맹독(猛毒)을 갖게 되는 칠팔월 무렵이었다.

살기 어려운 삶에 다소라도 보탬이 될 성싶어 등뫼산 산기슭에 있는 계단식 밭을 소작으로 얻어 가꾸셨다. 그해 여름 아주머니께서 콩밭에서 풀을 뽑는 일을 하시다가 독사 중에서도 제일 독한 살모사에게 물려 온몸으로 독이 번져 소달구지를 타고 읍내 의원으로 가시던 중 읍내로 들어서는 오르막 신작로 위에서 그리 허무하게 숨을 거두셔 세상을 떠나셨다.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아주머니가 숨을 거두시자 슬픔에 잠기셔 더욱 마음이 들뜨신 순태 아저씨가 근 한 달여 동안 허한 마음을 달래시려고 술로써 방황을 하셔 온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셨다. 그렇게 울분을 가누지 못하시고 방황을 하시던 순태 아저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잡게 해주신 분이 바로 동근이 아버지였다.

순태 아저씨의 어려운 생활을 간과해 동네 분들과 상의를 하셔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방앗간 일을 하시게 마을 사람들이 배려를 하여 그때부터 방앗간 일을 하게 되셨다. 그러나 그 아픔을 다 지우시질 못해 방앗간 일이 끝나고 나면 동네 온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셔 종일토록 텅 빈 집안은 썰렁하기만 했다.

그런 주인을 대신하여 빈집을 지키려는 뒤뜰 모과나무가 늦은 봄 그리도 곱살하게 연분홍 꽃을 피웠고 어느새 알찬 둥그스름한 열매를 탐스레 맺었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은 이른 봄 연분홍빛 모과나무 꽃이 참하게 피어나면 돌아가신 아주머니의 혼백이 찾아오는가 보다고 늘 말씀을 하셔 애써 애석함을 달래려 하셨다. 하늘을 힘찬 모습으로 올려 보며 누름하게 익어가는 모과 열매가 풍요를 재촉하는 믿음직스런 모습 같이 보여 잠시 눈길을 모아 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가까운 곳 어디선가? 우당탕거리는 듯싶더니 이내 ‘쨍그렁쨍그렁’ 땅바닥에 부딪쳐 사기그릇들이 깨어져 나뒹구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와 소리가 나는 쪽을 얼른 바라보았다. 대추나무가 유난스레 큼직하게 사립짝 앞에 버텨 서 있어 동네 사람들이 대추나무집라고 부르는 상두네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상두 아버지가 대낮부터 마을 삼식이네 집에서 술을 얼마나 많이 드셨는지 걸음걸이도 온전하지 못하게 비틀거리셨다. 그리고 무슨 이유였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듯 몽둥이를 손에 거머쥐시고 작달막한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셔 시렁 위에 있는 그릇이라는 그릇들을 깨부수셨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시는지 두 손으로 그릇들을 밀쳐내 땅 위에 떨어트리시며 상두 어머니를 향해 삿대질을 하시며 온갖 심한 욕설을 퍼부어 소란을 피우셨다.

그러자 바로 앞집에 사시는 구장댁 할머니와 구장댁이 담 너머로 바라보시고 무슨 큰일이 일어났나 싶어 고샅길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몰려들었다.

“참! 또 시작을 허는구먼 그려. 어찌 한동안 조용허다 싶었는디 그여 일이 또 터지구 마는구먼 그려. 내참! 언제까장 저러구덜 살라구 그러는지 모르것네.”

하얀 모시 적삼을 입으시고 검은 머리 군데군데가 희끗희끗하신 구장댁 할머니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씀을 하시며 혀끝을 가볍게 차셨다.

그러자 건너편에 사시는 준섭이 어머니도 뒤질 새라 한마디 하셨다.

“그새 몇 년 동안 저렇게 툭허면 살림 때려 부순 것이 모르면 몰라두 한디다 쌓아 놓으면 도락구루 한 도락구는 족히 될 꺼구먼유. 그러니 그릇 나부랭이사 또 사들이면 된다구 허지만, 여름 장마 먹구름 끝에 소내기 내리듯이 심심하면 저리 들부수고 여편네를 사정머리 없이 볶아대니, 저 여편네 속이 말이 아닐 것인디. 하루 이틀두 아니구 참말루 잘두 견뎌내네유.”

그런데 마침 구장님 댁에 마실을 오셔 마루 위에서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고 계시던 우물가 집에 사시는 인식이 어머니가 말씀을 이으셨다.

“아! 왜 아니래유? 서방한티 그 모진 욕 다 얻어먹구 온몸에 멍이 들게 실컨 두들겨 맞으며 사니 그 속인들 오죽허것는감? 글타구 속 시원허게 탁 터놓구 그 천하에 무지막지헌 놈과 있었던 귀신두 모를 일을 상두 에미 지 입으로는 차마 말 못헐 것이니, 상두네 애비는 애비대루 애간장이 터져서 저러는 거지 뭐. 암튼 죽이구 또 죽여두 분이 안 풀릴 놈을 그때 지네집 대밭 굴속에 오소리처럼 숨었다 잡혔을 때, 국군들이 진작에 총으루 쏴서 싹 죽여버렸어야 허는 건디. 뭣 땀시 아직까장 살려두구 그 비싼 콩밥은 처먹이구 있는지 모르겄네.”

그렇게 인식이 어머니가 종구 삼촌에 대하여 가슴에 잔뜩 응어리진 한이 쌓였는지 입에 거품이 나도록 장황하게 말씀을 하시자 우물가에서 볼일을 보시다 남의 집 굿거리를 보시려고 달려오신 기성이형 어머니께서도 말을 거드셨다.

“아, 뭐시냐! 그 징그런 난리 때, 하늘 높은 줄 몰루구 좀 까불구 댕기던감? 지 놈이 팔뚝에다 뻘건 헝겁때기 차구 댕기는 것이 무신 암행어사 마패라두 찬 것처럼 인두겁을 쓰구 차마 헐 짓 못헐 짓 죄다 저지르구댕겼으닌께. 그 죄값으루다가 말이 십오 년이지, 그 엄청나게 많은 징역을 받아번진 거 아닌감? 지 놈 나이 서른다섯에 붙들려 갔으니, 그놈의 징역 다 살구 나오면 지 나이 꼬부랑탱이 환갑이 되것구먼 그려. 그러니 그 인간두 인생 떡시루 엎은 거지 뭐, 안 그런가?”

그렇게 한동안 말씀을 하시고 나신 기성이형 어머니가 갑갑하신 듯 한숨을 내쉬자 어른들 틈 사이에 끼어 담 너머로 구경을 하시던 경수아저씨 부인이 어른들 틈 사이로 끼어들면서 말을 하셨다.

“상두네 아부지 저 양반이 자꾸만 상두 엄니 신간을 들볶아대는 것이 종구네 삼촌허구 상두네 엄니가 그런 일이 생겨서 그런 거시사 둘째 쳐 놓구, 한 해 두 해 지나 점점 머리통 굵어져 가는 상두가 참말루 뉘 자식인지 몰라서 자꾸만 속이 답답허닌께 저러는 모양인디, 아직까장은 죽어두 상두 엄니가 당신 친자식이 맞다구 허는디두 상두네 아부지가 안 믿구서 저러니 참 딱허기만 허네유.”

그러자 잠시 동안 말문을 닫고 계시던 인식이 어머니가 다시 말씀을 하셨다.

“다 지난 얘기지만 그 무지막지헌 짐승만두 못헌 놈들에게 끌려가기만 허면 열 명에 한 사람이나 성헌 몸으루 살아나왔지 죽어서 송장이 아니면 반병신이 되어 가지구 나왔는디, 그 무렵에 상두 애비가 아무런 죄두 없이 그놈 농간에 끌려갔으니... 그 우환 중에 상두 에미가 상두 애비를 그리라두 살려 볼라구 허다 보닌께 그 개만도 못한 놈헌티 찾아갔다가 힘없이 당해 버린 거지 뭐 에휴.”

그때 우물가에 계시다 뒤늦게 오신 종금이 누나네 어머니께서 한말씀 하셨다.

“아 글쎄, 그때 끌려갔던 사람들 중에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 빼놓구 다덜 그리저리 풀려나왔는디, 오라지게 상두네 애비만 내보내지 않구 꼭 붙들구 늘어지다가 그해 가실에 국군들이 다시 밑에서부터 밀구 올라오닌께 정신 혼창들이 빠져 북쪽으로 도망을 치면서 그래두 한쪼각 양심은 있었는지 해꼬지를 않구 풀어줘서 상두네 애비가 죽지 않구 용케도 겨우 풀려나온 거 아니던감?”

그렇게 모두들 한 말씀씩 하시자 동네 분들 중에 제일 연로하신 구장댁 할머니가 다시금 말씀하셨다.

“아 글쎄 한날은 새벽참에 갑자기 뒤가 마려 뒷간에 들어앉아 볼일을 보구 있는디, 상두네 집 사립짝을 흔드는 소리가 들려 벽틈새루 가만히 쳐다보닌께, 아 글쎄 그 천하에 죽일 놈이 마당 안으루 지집처럼 들어서는디, 뭐가 어찌된 영문인지 상두 에미는 고양이 앞에 쥐모양 꼼짝두 못허구 사립문짝을 열어주구 얼른 방으루 들어가닌께, 그 늑대 같은 놈이 덜렁거리며 따라서 방 안으루 들어가니 참 기가 막혀서 귓구멍에서 윙허구 소리가 나던구먼 그려. 그리구 그 일이 있구 나서부터는 아예 지집처럼 잔뜩 굶은 쥐새끼 곡간 드나들듯 하면서 퍼질러 자고 새벽녘으로는 그래두 하늘 무서운지는 아는가? 도둑놈매냥 요리저리 살피며 상두네 집 안방을 들랑거리더니, 그여 한 집구석을 풍지박산 내번져버렸네 그려.”

그러자 동네에 크고 작은 일이 생겨도 좀처럼 끼어들지 않으려 하시고 남에 말을 좀처럼 하지 않으시는 준섭이 어머니가 그제서야 입을 여셨다.

“암튼 호랭이 물어갈 인간이지유. 아무리 총각 적부터 좋아했다구 허드라두 그렇지, 어디 기집이 읍서서 하필이면 한동네 사는 넘 여편네를 건들구 지랄을 했는지 참말로 알다가두 모를 일이구먼유. 그런 인간은 십오 년 동안 콩밥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난중에 죽어서 지옥에 가서라두 그 뜨거운 유황불에 몇 번은 들락거려야 할 꺼구먼유.”

그때였다. 술에 취하셔 부엌 바닥에 한참 동안을 철퍼덕하게 앉아 계시던 상두 아버지가 밖으로 나오시며 담벼락에 붙어 구경을 하시는 동네 사람들에게 화를 벌컥 내시며 큰소리를 치셨다.

“아따! 무신 큰 구경거리 났는감유? 그리들 눈 빠져라 치다 보구 있게? 넘은 애간장 쓸개 다 녹아 내리는데 뭐시 좋다구들 쳐다보냐구유. 아 어여들 안 갈래유?”

그러자 한동안 구경을 하시던 어른들이 얼른 담벼락 아래로 몸을 굽혀 내리시고 구장님댁 마루로 달려가셨다.

너무도 어렸던 탓에 그렇게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던 또 하나의 끔찍한 사실을 알고 나니 무엇이라 표현키 어려운 씁쓸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물론 애당초부터 자기가 태어난 출생지가 아니었기에 밭두둑에 모태를 묻어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고프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임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인데 종구네 삼촌이 마을에 저지른 일이 다시금 잔인하게 느껴졌다.

가끔씩 종구네 삼촌이 받은 형을 감면받으려고 종구네 집 머슴살이를 했던 용만이형이 동네 이 집 저 집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진정서에 받으러 다닐 때 동네 사람들이 도장을 선뜻 찍어 주지 않고 그리 주저하면서 꺼려했는지를 그제서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동안 상두네 아버지가 농사일 빼놓고는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으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렇듯 상두네 집 사정이 어수선해 얼른 우물가로 가려는데 고샅길 맨 끝머리쯤에 물을 길러 오는 듯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오는 옥순이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무척 반가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런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부담감은 우물가에서도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어떻게라도 자연스럽게 말문을 터 보려고 내가 옥순이에게 먼저 두레박을 쓰라고 양보를 하였는데도 그토록 사글사글하게 잘 대해주던 옥순이가 오해의 한계를 넘어서 그리도 우리 집에 대한 미움이 컸던지 마치 나를 송충이 보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싫다 좋다는 말 한자리 없었다. 그러더니 두레박을 확 뿌리치며 빈 물동이를 손에 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샘터 바닥에 두레박이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그러자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장죽(長竹)을 만드는 공방집 금실이 누나가 빙긋이 웃으면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야! 니덜 왜 그러니? 멀쩡한 두레박이 무신 죄가 있다구 땅바닥에 내팽개치냐? 니덜 혹시 서루 좋아허냐?”

저녁노을빛이 깃들기 시작하는 좁다란 고샅길을 물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날따라 유난스레 등에 진 물지게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뗄 때마다 생각을 깊이 하여 보니 이 고샅길을 이제는 얼굴이 가물가물해지는 근엄하신 내 외조부가 걸으셨고 또한 앞산 물레치기에 잠들어 계신 내 아버지도 저녁 설거지를 하시는 어머니를 도와주시려는 마음에 초저녁 선들바람도 쐬실 겸 철없던 나를 등에 업고 걸으셨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보다 두 살 위턱이었다는 얼굴도 알 수 없는 누나가 제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애석하게 병으로 죽어 아버지 무덤가 옆 어딘가에 묻혔다고 하는데 그 누나 또한 몇 번 정도는 아장아장 걸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 것 같아 자꾸만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내 어머니가 어린 자식 굶기지 않으시려고 이 집 저 집 양식을 꾸러 다니시던 무거운 발걸음이 스쳐 지났을 것만 같아 더욱 슬퍼지려 했다.

또한 이 작은 마을에 그리도 구구절절하게 아픔을 많이 남긴 종구네 삼촌도 한때는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이 고샅길을 걸었을 것 같아 실로 어린 가슴에 차오르는 감회(感懷)가 그토록 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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