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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75 조회 : 1,056




정오 무렵이 되자 머리 위로 해가 바짝 다가섰다. 손톱만큼도 인정머리 없는 낮 더위는 어제와 한 치도 다를 바 없어 무덥기만 했다. 이글거리는 대지는 무쇠 솥에 빨래를 푹푹 삶아내듯 숨이 탁탁 막히게 열기를 뿜어냈다.

불그레 녹이 슨 군부대 철조망 울타리를 타고 오른 초록빛 가냘픈 줄기에 연분홍빛 나팔꽃이 드문드문 가녀린 모습으로 보였다. 뜨겁게 쏟아지는 햇살이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부대 정문 앞에 이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루나무 에서 매미가 온통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리고 얼마 후 부대 정문이 마주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둔덕에 올랐다.

부연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아카시아나무도 낮 더위에 축 처진 모습으로 어설프게 그늘을 이뤄 잠시 쉬었다 가기에 별로 마땅치 않았다. 더욱이 간헐적으로 부는 바람마저 마냥 후덥지근하니 땡감을 입에 가득 물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잔뜩 찌푸려 들기만 했다.

넓적한 바윗돌 위에 몇 걸음 앞서 가시던 어머니가 ‘휴우’ 숨을 크게 내시며 덥석 앉으셨다. 웬만한 아낙네들 다 쓰고 다니는 꽃무늬 양산 하나 없이 뙤약볕 아래 이십여 리 길을 걸어오시다 보니 땡볕에 온몸이 눅신하게 그을리시어 지칠 대로 지치신 듯했다.
뜨거운 태양의 열로 오전 내 잘 달구어진 바윗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번져나 공연히 앉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엉덩이가 뜨거워 불편했지만 그냥 꾹 참고 있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그 뜨거움마저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사르르 지쳤던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어설프게 한데 어울려 나름대로 면모를 갖춰 작은 도시로 탈바꿈하려는 것 같았다.

황산벌이란 이름에 걸맞게 방대한 터가 논산과 강경 두 읍내의 면적에 비교해 몇 배는 더 커 보였다. 하지만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건물들의 숫자는 두 읍내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쳐 섣불리 도시라고 칭하기엔 참으로 어중간한 그런 곳이었다. 마을 중심부를 시원스레 가르며 뻗어난 길이 비록 비포장도로일지라도 신흥도시로 도약하려는 모습처럼 비교적 반듯반듯하게 보였다. 그 작은 마을 어디쯤에 있는 시골 극장에서 영화 프로를 선전하는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제법 커다랗게 들려왔다.

언덕 아래에 있는 군부대 취사장으로 보이는 건물에는 병사들의 점심밥을 짓고 있는 듯했다. 밥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바람결에 퍼져 나와 은근히 허기를 재촉했다.

빈 드럼통을 높이 쌓아 올린 굴뚝 위로 검은 석탄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옆 벽면에는 기다란 함석판에 하얀 페인트칠을 한 바탕 위에 멀리서도 바라보일 수 있을 정도로 검정색 굵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한 알의 쌀알도 부모님의 피와 땀’이라고 쓰여 있어 아깝고 소중한 양곡을 아끼려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눈을 모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 마을 정도의 작은 동네 어귀 팽나무 우듬지 너머로 강경역을 출발하여 채운역을 거쳐 종착역인 연무대역에 도착하려는 증기기관차가 힘껏 내어 지르는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뒤에 겨우 객차 세 칸 정도를 달고 달랑거리며 역구내로 들어서는 모습이 퍽이나 단출하게 보였다.

철로 둑 너머로 펼쳐진 널따란 들녘과 더불어 아늑하기만 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이 소담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마을 끝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는 시커먼 석탄 저탄장이 눈에 띄었다. 적재함에 석탄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도심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군부대를 에워싸고 그 주변에 소꿉장난을 하듯 다닥다닥 무질서 하게 늘어선 판자 집들의 지붕이 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듯 검은 콜타르칠을 한 루핑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연무대의 작은 마을이 좀 전에 보았던 한적한 시골 마을과는 느낌이 판이하게 달라 군인도시로 발돋움하려 하는 곳임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마을의 외곽 지역 군부대 정문 앞에서 마을 중심부까지는 약 오 리 정도 되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다.

도로 위를 걷다 보니 어디서 바람 따라 날아왔는지 군용 화랑 담배 빈 갑이 오가는 자동차의 바퀴에 깔려 납작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들붙어 있었다. 그리고 흙벽 위에 얇게 바른 시멘트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구멍 난 흠이 보이는 허름한 연탄 가계 하나가 조촐하게 보였다.

한낮 더위에 지겨운 듯 졸고 있는 나무 전봇대엔 둥그렇게 휘감아 찰싹 붙어 있는 영화포스터가 새침하게 보였다. 그리고 작은 전파사 나무통 안의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구성진 유행가 노랫소리를 들으며 마을의 중심가에 닿았다.
그 중심부 사거리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길이 트여 있었다.

동쪽으로 뻗어난 길을 따라가면 구자곡면사무소가 있는 마산을 거쳐 군 급수의 저장시설이 있는 구자곡면 소룡리 산 밑 저수지에 닿는다. 아침마다 해가 떠오르는 소릿재를 넘어서면 논산군 가야곡면과 왕궁면이 나오고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과 접점을 이룬다.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을 따라가면 인삼이 나는 금산을 거쳐 대전으로 연결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 길로 계속 가다보면 전라북도 운장산 기슭에 있는 싸릿재에 닿을 수 있었다.

서쪽으로 끝 모르게 트여진 길로는 전국에서 입대를 하여 온 장정들이 머물며 머리를 삭발하고 신체검사와 각종 전염병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으며 개인 적성검사를 거쳐 비로소 군인의 첫 관문인 입대 장정으로써 입소를 앞두고 잠시 머물게 되는 수용연대 부대 건물이 나왔다.
수용연대 부대 앞을 지나면 강경선 철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철로를 따라 채운면 동심리 언덕을 넘으면 강경읍내로 가는 비포장도로가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그리고 조금 멀리는 서해바다 항구도시 군산과 연결이 되고 왼쪽으로 방향을 조금 틀면 전북 익산군 용안면과 그리고 대리석으로 유명한 함열면과 황토 빛 고구마로 인근에 소문이 퍼져난 황등면을 거쳐 이리(지금의 익산)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왕의 왕릉이 있는 서촌마을을 지나 육군훈련소 본부 건물이 있는 신촌마을을 경유하여 육군훈련소 26교육연대와 30연대가 있는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오른다. 그 언덕마루에 도계의 경계를 알리려는 붉은 페인트 글씨로 써 놓은 작은 경계석이 길가에 외로이 서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을 내려서면 바로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황화정리 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 앞을 지나 십여 리쯤 흙먼지 이는 비포장도로 위를 달려가면 규모가 그리 크지 않는 여산 중학교를 지나 붉은 벽돌로 쌓아올려 지은 성당의 높다란 종탑이 보이는 여산면 중심부에 닿는다.
그리고 그곳 여산에서 조금 더 가면 보병 병과를 부여 받은 훈련병들이 전반기 교육을 끝마치고 후반기 교육을 받는 27교육연대가 있는 미륵산 자락 아래에 금마면이 나와 지금의 익산(이리)으로 연결되었다. 또 다른 한쪽으로는 가을 김장철 생강이 많이 나는 봉동면을 거치면 전라북도의 도청소재지인 전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눈을 들어 앞에 바라보이는 동남쪽 하늘가엔 전북 익산군 여산면 호산리 문수산 정상이 우뚝하게 보였다. 그곳 정상엔 옛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태봉이 있어 충남에서 전북으로 넘어서는 첫 길목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시내 중심부로부터 북쪽으로는 동양에 있는 석불들 중에 크기가 제일간다는 은진 미륵과 방대한 저수 용량을 자랑하는 상평 저수지가 있는 은진면을 거쳐 군청 소재지 논산읍내로 들어서게 된다.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얼마쯤 계속 올라가면 오골계 사육지로 유명한 황산벌 연산과 계룡산 기슭에 있는 두마면 (지금의 계룡시)를 경유하여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인 대전에 닿았다. 그리고 논산 읍내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머리를 돌려 가면 천오백 백제의 유서가 가득 서린 부여읍이 나오며 논산읍내에서 동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공주에 닿을 수 있었다.

그렇듯이 연무대가 충남과 전북을 잇는 최 근접 경계지역이었다. 겨우 차량 두 대가 비켜갈 정도의 폭이 그다지 넓지도 못한 도로를 몇 발짝 걸어 건너면 전라도 땅이고 역시 길 건너 전라도 땅에서 보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충청도 땅이 코앞이었다.

그래서 속된 말로 ‘아침은 충청도 땅 집에서 먹고 점심은 친구들과 어울려 길 건너 전라도 땅에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는다.’는 말처럼, 두 지역이 서로 맞닿아 있어 생활풍습과 언어가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신도시로 급변하는 지역 정서가 온통 들떠 있어 새로 형성되는 도시에 대한 동경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숱한 사람들로 갑작스레 인구가 불어났다. 그렇게 갑작스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복잡스레 얽혀 고의였던 실수였던 크고 작은 범법을 저지르게 되는 사례가 다른 지역에 비해 다분했다.
그런 탓으로 일을 저지르고 난 일부 사람들이 이쪽에서는 저쪽으로 숨고 저쪽에서는 이쪽으로 치안구역을 벗어나 도망을 쳐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기도 한다는 소리를 외삼촌으로부터 들었다.

그곳 연무대에는 고향마을인 채운 지서장으로 계셨던 석란이 아버지가 4.19 학생의거가 일어나기 전까지 지서주임으로 근무하셨다.
그런데 그곳 연무대 일대가 어쩌다 진종일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저마다 멀쩡한 산기슭을 깎아내려 골목길을 만들고 단작스럽기 짝이 없는 무허가 집들을 마구잡이로 지어 지반이 연약해져 높은 지대에서 낮은 곳으로 시뻘건 황토 흙물이 넘쳐나게 흘렀다. 그래서 흔히들 하는 말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발이 푹 빠져들 정도로 땅이 무척이나 질기만 했다. 도로가 포장이 안 되었던 그 시절 그런 고통은 지역민들은 물론 야외에 있는 교육훈련장에 학과 출장을 하여 교육을 받는 훈련병들도 질척거리는 황토 속에 푹 빠지면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면회제도가 있었을 때 훈련병 면회가 있는 면회 날에는 전국각지에서 자식들을 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쓰고 가는 돈의 액수가 엄청났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면회 날에는 동네 강아지도 지폐 한 장을 입에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지역경기가 그리도 좋아 논산이 아니라 ‘돈산’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지역 경제에 황금 거위 알을 낳던 면회제도가 폐지되어 한동안 들썩거리던 마을이 그리도 조용해진 듯했다.

그런 연유가 있어서 그랬는지? 그곳 연무대 마을 이름이 ‘까치마을’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이른 봄에 집을 지어 알을 낳아 품고 알을 깨어 새끼를 키워 때가 되면 다음 해를 기약하고 까치들이 모두 떠나가듯이 ‘그곳에서 적당히 돈을 모았으면 그곳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왔다.

그런 지역 환경 속에 외삼촌댁은 외삼촌이 마누라 자랑을 하며 그리도 치켜세우는 억척빼기 외숙모 덕에 재산을 일궈놓으신 갓 같았다. 나름대로 사거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법 평수가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는 이층건물을 새로 장만하셨다.

진드기처럼 달라붙은 가난에 숨을 조이며 사는 우리 집과는 절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하게 보여 아무리 친족이래도 느껴지는 열등감이 왠지 모르게 거리감을 이루게 하여 낯선 곳에 대한 어색함이 더욱 크게 느껴지기만 했다.

외삼촌이 고향 마을 들메를 떠나신 것이 내 나이 여섯 살 되던 해 늦가을이었다. 외가 쪽으로 자손이 귀하다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처럼 외삼촌도 슬하에 아들 하나 없이 두 살 터울인 딸만 둘을 두었다. 외삼촌 큰딸이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나 동갑이라도 나보다 생일이 넉 달이나 빨랐고 너무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살아 정강이 누나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외사촌이면 그리 멀지도 않은 촌수인데도 어렸을 적에 헤어진 뒤로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이 서먹하기도 했다. 그보다 솔직한 마음은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열등의식이 정강이 누나와 나 사이를 더욱 서먹하게 만들어 놓는 것 같았다.

그런 탓에 그저 멍하게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말 한마디 없이 한동안 그리 어정쩡하게 서로 바라만 보았다. 쌀가게 한쪽에서 손님에게 담배를 팔고 계시던 외숙모님이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M1 총의 실탄이 담겨져 있던 실탄 통을 금고로 삼아 그 속에서 거스름돈을 꺼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어쩜 느그들은 그리 쌀쌀맞게 말 한자리두 않구 돌부처매냥 그러구 덜 서 있냐? 말이 사촌이지 한 뱃속에서 나온 거시나 진배 읍는 건데, 뭐라구 말들이라두 허지 그렇게 서 있기만 하는지 모르것네. 허기사 너무 어려서 서루 떨어져 살다 오랜만에 보닌께 서먹허긴 헐 꺼구먼 그려.”

가게 밖에서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한참을 열심히 말씀하시는 외삼촌과 이야기를 나누시던 어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 왜? 아니것시유? 시방이사 이렇게 가참허게 이사를 와서 사닌께 뒤늦게라두 이렇게 찾아두 오지만, 그새 중간에 서루 떨어져 거리두 엄청스레 멀기두 했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구 서루 벌어 먹구 사느라 정신없다 보닌께, 서루 자주 만나보지도 못해서 자식들끼리두 넘 보듯 서먹하게 지내니, 지들두 모진 세상 만나서 사는 죄두 있지만 다 우리 어른들 잘못이지유 뭐.”

한숨을 크게 내쉬던 어머니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강이 누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옆에 계시던 외삼촌은 그런 모습들이 영 마음이 언짢으신지 고개를 얼른 돌리시며 말씀하셨다.

“정강이 에미! 뭐시냐 모처럼 만에 야들이 왔으닌께, 집에 있는 밥이사 그냥 놔더번지구 길 건너 중국집에 가서 그냥 편허게 짜장면이라두 한 그릇 하구 올랑께, 당신 꺼 하구 정강이 글구 정순이 꺼는 가게루 배달을 시켜줄 틴께 그리 알구, 뭐 급한 배달이라두 생기면 정강이란 년 글루다 보내라구.”

외삼촌께서 한차례 큰기침을 하시며 가게 문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먼 길을 걸어서 오느라 배가 고프겠다고 하시며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길 건너에 있는 ‘홍안각’이라고 중국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한다는 중국집으로 걸어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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