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읍의 대로변(大路邊) 양쪽으로 크고 작은 점포들이 줄지어 있어 나름대로 시가지의 면모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구자곡면 소재지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교육 훈련장에서는 훈련병들의 패기에 가득 찬 젊음의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들려왔다.
소읍의 중심부 요지에는 ‘홍안각’이라는 중국음식점이 있었다. 그저 한 눈으로 썩 보아도 아주 좋은 위치에 자릴 잡고 있어 손님들의 내왕이 꽤나 있을 듯싶었다. 그리고 날마다 학교를 오가며 눈에 마주치는 강경 읍내 역전에 있는 중국집과는 건물의 규모부터 차이가 크게 났다.
면회제도가 있었던 번성기에는 한꺼번에 밀려드는 면회객들로 무척이나 붐볐다고 한다. 그래서 손님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 욕심 많은 중국 음식점 주인이 인접해 있는 땅을 자꾸만 소문 없이 사들였다. 그렇게 규모를 늘리다 보니 중국 음식점 옆에 아주 널따란 터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 자가용이 그리 흔치 않던 시절이라 손님들이 타고 오는 차량은 군용 지프차가 고작이었다. 아무튼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리만큼 컸었다. 그런 중국 음식점 건물 내부에는 손님을 접객할 수 있는 방이 십여 개 정도에 단체손님들까지 받을 수 있는 큰 방이 두 개 정도가 더 있어 음식점이라기보다는 웬만큼 큰 여관처럼 보였다.
면회제도가 있었을 당시 일요일에는 전국각지에서 온 면회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군인들과 한데 어울려 북새통을 이뤄 각 방은 물론 카운터 앞에 탁자 몇 개가 놓인 그리 작지 않은 홀까지도 꽉 들어차 더 이상 앉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손님들이 많은 일요일 날엔 가게에 오는 손님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일손이 너무나 딸려 시내 일반상점으로 배달은 아예 사절할 정도로 장사가 호황을 누렸다.
그 무렵부터 작은 시골 군소재지 논산이 돈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밤늦게 음식점 장사가 끝난 후에 어쩌다 외삼촌이 쌀 배달을 하느라 중국음식점에 가서 보면 주인 식구인 화교들이 나무로 된 돈 통에서 돈을 꺼내 돈을 펴고 세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런 중국집이 그 작은 면소재지에 서너 군데가 더 있어도 저마다 즐거운 비명을 울렸다고 하니 즐비한 일반 한식 음식점을 빼놓고 중국 음식점 규모 하나만 보아도 호시절 그곳의 장사 경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 호황을 누리게 된 중국집 음식 중에 효자노릇을 한 것이 바로 짜장면이었다. 그런 짜장면의 역사는 일설에 의하면 대한제국 말기인 1888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후 중국에서 건너온 이주 노동자들이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면서 점심식사로 간단하게 삶은 국수에 춘장을 넣고 고추를 썰어 넣어 비벼 먹기 시작한 것이 짜장면의 시초라 했다. 그 후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주를 하여 온 화교들의 손에 의해 새로운 재료와 맛이 가미되어 비로소 짜장면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게 되었다.
그 시절 된장과 고추장 간장에만 미각이 오랜 세월 동안 잘 길들여진 우리네들에게 짜장면은 쉽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별미의 음식이었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다 집에 흉허물 없는 손님이라도 오게 되어 밥상에 차려 놓을 반찬거리가 만만치 않을 경우에는 간편하게 접대를 할 수 있어 주부들의 걱정을 한결 덜어주었다.
그나마 시골 촌 동네에 사는 우리들 같은 경우에는 철 따라 산과 들에 나는 열매가 있었을 뿐 제대로 된 간식거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운 좋게 읍내 오일장에 부모님을 따라나서 짜장면 한 그릇을 먹게 되면 면발을 얼른 다 먹고 나서 그래도 양이 덜 차올라 그릇에 남아 있는 춘장을 볶은 시커먼 양념 찌꺼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삭삭 긁어 먹을 정도로 입에 붙는 맛이 정말 꿀맛이었다.
면회제도가 없어진 탓인지 그리 북적거렸다는 말이 통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기만 한 중국집 한 귀퉁이 방 안에, 왕골돗자리를 깔고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짜장면 한 그릇을 얼른 뚝딱 제일 먼저 비웠다. 그리도 빨리 그릇을 비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외삼촌이 그릇에 담겨 있던 짜장면을 덜어주셔 두어 번 사양하는 척하다 얼른 받아 그마저도 홀딱 먹었다.
그리 허겁지겁 먹는 내 모습이 민망스러웠던지 나를 바라보시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야! 제발 좀 찬찬허게 먹어라. 누가 뺏트러 먹기라두 허냐? 그러다가 체하면 어쩔라구 그러냐? 촌놈이 부잣집 잔칫날에 배터지도록 목구멍까지 차오르게 먹구 통투가 나서 밤새도록 칫간을 들락거린다더니 니놈 허는 짓이 딱! 그짝이 날려는가 부다. 그리구 밥 먹었으면 냉큼 일어나서 외삼촌네 가게루 가서 정강이랑 정순이 허구 얘기라두 허구 놀아라. 날랑은 니 외삼촌 허구 헐 말이 남아 있어서 그러닌게.”
두 분이서 하실 말씀이 남아 있기도 하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누시기 좀 부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내심 나 혼자 속마음으로는 지난번 외삼촌이 우리 집에 다녀가셨을 때 내 어머니에게 하셨던 말씀 중에 한 대목이 떠올랐다.
‘이제는 네 몫도 돌려줄 때가 되었다.’는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제 개학을 하면 2학기 수업료도 납부해야 되고 지난해부터 동네 몇 집에서 여름내 빌려다 먹은 해묵은 쌀 빚을 갚아야 하니까 어머니가 삼촌에게 돈 부탁을 하시는 것 같았다.
돼지고기에 양파를 넣고 볶은 구수한 냄새가 번져나는 중국집 문밖을 벗어났다. 그런데 사거리 길가를 오가는 행인들에게 길가로 어서 비켜나라고 클랙슨 소리를 세차게 울렸다. 중국집 담 모퉁이에 양껏 늘어져 내린 버드나무 줄기 끝이 버스 지붕과 서로 맞닿아 서행(徐行)으로 움직이더라도 버스가 나무줄기를 훌치고 지나느라 ‘후드득후드득’ 소리를 내었다. 시내 중심부를 지나느라 속도를 내지도 못하는 버스 한 대가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어 찬찬히 바라보았다.
버스 앞 유리창에는 흰색 마분지 위에 붉은색 글씨로 ‘황화, 여산, 금마, 이리’라고 쓰여 있어 버스가 운행하는 방향에 따라 경유하게 되는 지역의 이름을 승객들에게 알리려 정교하게 써놓은 듯싶었다.
그런데 한 가지 참으로 이상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군부대 안에는 나무들이 정교한 모습으로 줄을 이루며 울창하게 서 있어 눈으로 보기에도 시원스럽게 보이는데 이제 새로 도시가 형성되는 작은 산골의 면 소재지라도 도심을 비켜난 외곽에도 길가에 가로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곳에 논산 훈련소가 들어선 지도 벌써 수해가 지난 듯싶은데 전쟁을 치르고 난 후 쇠잔해진 국력을 추스르느라 어려운 나라 살림살이에 국비 지원이 부족했던 탓인 것 같았다.
아니면 행정 당국의 안일한 태도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온 사방이 산을 깎아내린 황토바탕에 도심을 가르는 길만 네 곳으로 방향 따라 트여 있었다. 길가 양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른 읍내처럼 하다못해 포플러나무라도 서 있었으면 도시미관에도 좋을 성싶었다.
가로수가 단 한 그루도 보이질 않는 먼지만 자욱하게 나는 길에 그저 분주하게 오가는 군용차량의 엔진소리와 경적만 들려왔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지역 군부대 주변 아주 변두리에만 예전부터 누가 심어 놓은 듯 잡목 몇 그루가 그나마 길가에 드문드문 보였다. 늦여름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되쏘는 것 같아 매지근하게 보이는 길바닥에 도시의 분위기가 조금은 삭막하게도 느껴졌다.
매일매일 들 주막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읍내로 통학을 하여 눈에 익을 정도로 읍내의 건물들을 보아온 터라 그곳 연무대 또한 도시 건물들의 생김새가 강경 읍내와 엇비슷하고 규모가 훨씬 작아 그다지 생소한 느낌은 덜 느꼈다.
특이하게 강경 읍내 도시와는 다르게 평일 대낮부터 그곳 면소재지 두 군데에 있다고 하는 극장에서 주간에도 영화를 상영하는 것 같아 비록 규모가 작은 곳이라도 작은 술집들이 즐비하고 크고 작은 여관들의 간판이 다른 읍내보다 훨씬 많이 눈에 띄어 군인들을 위주로 형성된 소비도시 같았다. 대낮부터 극장 지붕 위에 높이 세워놓은 둥그런 철제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영화프로를 선전하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와 그 시끄러운 소음에 조금은 어수선하기도 했다.
길 건너 외삼촌댁 2층 건물 옆 단층 건물엔 빙과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늦여름 막바지인데도 얼음과자를 열리는 냉각기를 돌리는 모터에 감겨 ‘철썩철썩’ 돌아가는 피대 소리가 야무지게 들려왔다.
외삼촌네 쌀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중국집에서 음식 배달이 조금 늦었는지 외숙모와 정강이 누나 그리고 정순이가 그제서야 한참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식구들이 식사를 하는데 혼자서 쭈뼛하게 있기가 멋쩍어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대하는 그곳 도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난해에 고향을 떠나 연무대로 이사 온 기순이누나 집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석란이네가 전당포를 한다고 하여 혹시라도 간판이 눈에 보일까 싶어 길을 걸으며 두리번거렸으나 끝내 찾지를 못했다. 그리고 찾기에 힘이 들겠지만 기순이누나네 식구들을 꼭 만나고 싶은 마음이 꽉 차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사이렌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초록색 군용 트리쿼터의 흰색 칠을 한 바탕에 빨간 적십자 마크를 새긴 군용 앰뷸런스가 도심에 가까이 들어서 있는 육군병원 정문을 향해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다른 군부대들은 도심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는데 유난스레 육군병원부대만 시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얼마큼 지난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곳 육군병원 자리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제주도에 있던 육군훈련소를 ‘연무대’로 이전하는 과정에 군사적 고문 역할을 하였던 미 군사고문단들이 거처했던 부대 자리를 미군이 철수한 후에 물려받아 육군병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 미군들을 상대로 부대 주변에서 장사를 하였던 미군전용 술집 서너 군데는 오랫동안 문을 닫아 비워놓았나 페인트칠이 누렇게 색이 변해 군데군데 벗겨진 건물 자체가 허름하게 보였다. 간판에 쓴 영문자의 페인트 색깔이 변색되어 글자가 잘 보이질 않고 주변 땅바닥엔 녹이 잔뜩 선 미국산 캔 맥주 깡통이 쭈그러진 모습으로 즐비하게 흐트러져 있어 세월의 흐름을 말하여 주는 듯했다.
그곳 육군병원이 다른 부대와는 눈에 띄게 다른 점 하나가 멀리서도 육안으로 높다란 나무 물탱크가 보였다. 마치 서부 영화에 나오는 간이역에 멈춰선 증기기관차가 급수를 받는 둥그렇게 커다란 나무 물탱크의 모습과 똑같은 급수를 저장해 놓는 나무로 만들어 놓은 물탱크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물탱크 앞에는 어깨에 총을 매고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들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큰길가에서 비좁아 보이는 골목길을 따라 조금은 비스듬히 내려서면 그 골목 끄트머리쯤에 2층으로 된 작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건물의 2층에는 상록수라는 다방이 있었고 아래층에는 ‘신진전당포’라는 간판이 걸려 있어 급하게 돈이 필요한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나 군인들이 시계와 금반지 그리고 재봉틀과 축음기, 털 오버 등을 저당시키고 돈을 빌려 쓰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에 한참을 기다리느라 땀이 얼굴과 온몸에 흘러 내려도 꾹 참고 기다려 보았는데 문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석란이네 식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곳 연무대 어디쯤에 또 다른 전당포를 하고 있을 석란이네집 생각이 문득 떠올라 그곳이 어딜까? 하고 한참동안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 전당포를 약간 비켜서 앞으로 아주 널따란 마당 터가 나와 벽돌 콘크리트로 지은 2층 건물인 성도극장 건물이 서 있었다.
극장 건물 2층 추녀 끝에 걸어 놓은 헝겊 간판엔 상영 하고 있는 영화에 출연하는 영화배우들의 얼굴을 비교적 정교한 솜씨로 잘 그려져 있었다. 신상옥 감독에 김승호 주연의 ‘로맨스 빠빠’라는 영화 제목의 글씨가 멋스럽게 쓰여 있는 극장 매표소 앞에는 드문드문 표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극장 건물 옆으로 트여진 길가의 낮은 둔덕 위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우리 동네 둥구나무처럼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울창한 감나무 그늘 아래로 큼직한 기와집이 기다랗게 들어서 있는데 담 너머로 벌건 대낮부터 장구소리에 맞춰 ‘오동동 타령’을 부르는 기생들의 간드러진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 강경읍내에서 한번쯤 보았던 것처럼 아마도 그곳이 고급 요정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 요정 건물 끝머리쯤에 단층 건물이지만 그럴싸하게 보이는 콘크리트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 현관 벽기둥에 기다랗게 내려 걸은 나무판자에 굵은 붓으로 검정 글씨를 써 넣고 나무판자 표면에 니스 칠을 한 ‘중앙의원’이라는 간판이 단출하게 보였다. 그 병원 아래건물엔 ‘평양면옥’이라는 간판과 건물 벽 모서리쯤에 기다란 대나무 장대에 매달라 놓은 광목천 자락엔 붉은 글씨로 ‘冷麵(냉면)’이라고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곳 주인이 이북 평양에 살면서 음식점을 하였는데 한국전쟁에 남쪽으로 피난을 와서 그곳 연무대에 정착을 하여 평양식 냉면집을 열어 면회제도가 있었던 호시절 한때는 장사가 번창하였던 덕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었다.
그곳 성도 극장 앞에서 대충 주위를 둘러보고 구자곡면 사무소가 있다고 하는 마산리로 이어지는 길로 가려고 조금 가파른 길에 올라섰다.
그 길 왼쪽 건물에서 발동기 소리가 자발스럽게 들려와 바라보니 방앗간에서 고추방아를 찧는가? 매캐한 고춧가루 냄새가 밖으로 퍼져 나와 코가 조금 근질거렸다. 오른쪽에는 제법 큼직한 자전거포가 들어서 있고 그 건물 바로 옆에는 ‘대구집’이라는 선술집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규모가 조금 큰 건물에는 ‘일광’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양식을 파는 고급스런 음식점이 있었다. 그 양식집은 비교적 계급이 높은 군인 장교들과 조금 멋을 부리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했다. 그 길 건너편에는 ‘동아약방’이라는 작은 약방이 있었으며 그 바로 옆 가가에는 작은 군장품 가게가 있어 군인 명찰과 계급장을 살 수 있었고 도장을 팔수도 있는 곳이었다.
도로가 네 갈래로 갈라지는 사거리 로터리를 지나 길 건너 전라북도 땅인 안심리에 있는 시장터로 갔다. 길을 걸어가는데 맞은 편 나지막한 민둥산 아래 있는 군부대 주변에 보기에 좀 엉성하게 흙벽돌로 지은 고만고만한 판잣집들이 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든 학고방 건물들이 조금 화려하게 보이는 시내와는 또 다른 어두운 모습으로 보였다. 그런 상반된 모습이 작은 도시의 명암(明暗)을 이루니 그곳 역시! 빈부의 차이는 엄존(儼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장터 왼쪽으로 조금 걸어가자 널따란 공터가 나왔다. 그 공터에 검정 콜타르칠을 한 양철지붕에 소나무 판자로 벽체(壁體)를 세운 허름한 건물이 보였다. 논산훈련소 창설 당시 미군들이 주둔하였을 때 미군들 전용 무도장으로 쓰였던 곳을 극장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성도극장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은 연무극장이 있었다.
그곳 극장의 간판에는 챙이 넓은 카우보이모자에 목이 긴 가죽장화를 신고 허리에 두른 가죽혁대에 멋스럽게 권총을 차고 있는 외국 배우 ‘죤 웨인’의 얼굴과, 드넓은 황야에 부연 황토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역마차의 모습 그리고 서부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알록달록한 깃털의 모자를 머리에 쓰고 얼굴에도 여러 가지 색을 칠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기다란 창을 들고 있는 아주 사납게 생긴 인디언의 얼굴이 그럴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날 상영하는 서부영화는 ‘역마차’였다.
방음시설이 잘 안되어 있는 탓인지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대화를 하는 목소리가 극장 안에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 벽 틈새로 새어나와 밖에 까지 들려왔다. 극장 벽을 끼고 늘어선 공터에 잡초들이 허리까지 차오를 만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군데군데 우묵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썩은 곳에 장구벌레가 곰실곰실하다 사람의 인기척이라도 나면 시궁창 냄새가 진동을 하는 풀숲으로 숨어 버리는 멋대가리 없이 생긴 맹꽁이 울음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라는 팻말이 걸려 있는 극장 출입구에 얼굴이 우락부락 하게 생긴 기도(木戶) 아저씨가 딱 버텨서 지키고 있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총싸움과 인디언 얼굴은 보고 싶은 욕심에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 두서너 명이 극장 나무판자 벽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나무판자에 옹이가 빠져나온 둥그스름한 틈사이로 스크린에 비치는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훔쳐볼 욕심인 것 같았다. 작은 몸을 잔뜩 구부려 나무판자에 얼굴을 대고 이리저리 머리를 움직이며 안을 부지런히 들여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