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전쟁의 포성이 울린지 채 한 해가 되지도 못한 1951년 화창한 어느 봄날이었다. 그러니까 내 나이 겨우 일곱 살 나던 해였다.
그와 더불어 하늘 아래 땅 위에 단 한 분이신 내 아버지가 그리 비참하게 숨을 거두신지 불과 9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다. 채 아물지 못한 마음에 상처로 때때로 참기 어렵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가슴앓이를 거듭하여 무척이나 힘들었던 때였다.
더욱이 인간의 정상적인 이성에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형언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게 훼손된 내 아버지의 시신을 불효스럽게도 내 두눈으로 직접보았기에 더더욱 잊을 수 없는 날이였다.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상민이는 땅그지래유. 움막집 사는 땅그지래유, 새비젓 장시 아들이래유.”
마을 앞 둥구나무 아래서 나보다 두세 살 더 먹은 동네 형들이 나를 놀잇거리 삼아 마구 놀려댔다. 비록 나이는 어릴지라도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간파(看破)할 능력이 미약하게라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부당한 놀림에 완강하게 저항을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에게 처해진 현실의 그 모두는 형들의 놀림을 부정할 수 없을만큼 엄연한 사실이었다.
늘 가난으로부터 오는 수치심은 일부 짓궂은 동네 형들로부터 유형무형으로 놀림을 당해도 그토록 기가 죽어 움츠리며 살 수밖에 없었다. 밉살맞기 그지없는 동네 형들은 무엇이 신이 나는지 어린 나를 몇 번쯤 더 놀려댔다. 참다못한 내가 불의에 항거(抗拒)를 하듯 이내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 울음소리에 놀란 형들이 마을 어귀 언덕배기에 있는 큰 소나무 밑으로 줄달음질을 쳤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나는 서러움에 겨워 어깨를 한없이 들먹였다. 그리고 작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턱밑까지 차오르는 분을 억지로 참아냈다. 허나 그조차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 흐느끼며 있는 힘을 다해 동네 고샅길로 내달렸다.
눈물에 젖은 눈에 마을 앞산이 어물어물하게 바라보였다. 그래도 봄을 찬미하는 듯 연분홍 진달래와 붉은 철쭉이 마을 앞 등뫼산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 산기슭에 붙어 있는, 낮은 추녀가 눈에 쉽게 띌 만큼 초라한 작은 초가집 하나가 보였다. 그곳이 그나마 하늘이 내게 허락해준 유일한 삶의 터였다.
언제나 광연한 아침 해는 이른 아침부터 소릿재에 늠름하게 떠올랐다. 하루 중 반나절은 훨씬 지난 것 같았다. 똑바로 바라보기에 눈이 시린 해가 마을 초가지붕 한복판에 우뚝 떠올라 온 사방을 두루 살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울분에 들릴 듯 말 듯 흐느끼며 벌겋게 녹이 슨 양철지붕의 방앗간 앞마당을 벗어났다. 그리고 울타리에 측백나무가 무성하게 서 있는 동네 이장 댁 대문 앞을 지났다.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좁다란 골목길을 꺾어 돌아 동근이네 집 앞에 닿았다. 널따란 마당엔 동근이 아버지가 이번에 아주 큰 맘먹고 읍내 부화장에서 사왔다는 칠면조 한 쌍이 불그레한 혹이 덕지덕지 달린 기다란 목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리고 뒤꽁무니에 달린 꼬리털을 부챗살처럼 널따랗게 펼쳐 무섭게 달려들었다.
바로 옆 분남이 누나네 집엔 살구꽃이 너무도 화사하게 피어나 봄을 더욱 온유하게 했다. 살구나무 밑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가쁜 숨을 내쉬어도 분이 풀리지 않아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훔쳐냈다.
그렇듯이 각박한 내 어린 삶은 진저리쳐지는 가난에 대한 원망이 언제나 작은 가슴속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니, 그러했기에 주위의 그 모든 멸시를 체념하면서 살아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싶다.
잠시 멈췄던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힐끔 돌아보니 앞뜰 채소밭에서 갓 자란 상추 솎음을 하고 계시던 민균이 어머니께서 말씀을 건네셨다.
“야, 상민아. 너 왜 그러냐? 뭔 일이라두 있는기여?”
나는 말을 잃은 채 바보처럼 무딘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또 그 싹박아지 읍는 못된 놈들이 널 놀려댔구먼, 그려. 내 말이 맞지? 내가 되게 혼내켜 줄 테닌께 어여 울지 말고 뚝 끄치거라.”
그래도 나는 한마디 말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그 염병헐 넘에 인공난리만 안 났어두. 즈그 애비 그렇게 허망허게 죽지도 않았을 것이구 저러콤시롱 살지두 않을 꺼인디. 에이고 그르니 이를 으짜면 좋타냐?”
아쉬움이 가득 찬 아주머니의 긴 한숨이 내가 서 있는 길섶까지 들려왔다.
“아줌니 고맙구만유. 그럼 안녕히 계시유.”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 가난의 표상인 내 작은 산밑 초가집을 향해 내달렸다. 마을을 빠져나와 좁은 논두렁길에 어렵게 몸을 가누며 뛰어갔다.
정오를 좀 벗어났는지 읍내 논뫼(論山)역을 출발한 기차는 등화동 공동묘지를 앞을 지나 면소재지 외곽지역인 산모롱이를 돌고 있었다. 화산리 마을을 스쳐 지난 증기기관차는 ‘뽀오옥뽀오옥’ 기적소리를 날카롭게 내어지르며 마을 앞을 향해 세차게 달려왔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면소재지가 있던 화산리 마을을 매꽃미라고도 불렀다. 상평리 저수지로부터 금강의 하구로 빠지는 물이 흘러가는 마을 앞 냇가 수문 앞에는 고만고만한 동네 꼬마들이 모여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스치는 듯 지나가는 기관차를 향해 반갑게 손을 힘껏 흔들고 있었다.
냇둑에 매어놓은 눈알이 유난스럽게 큰 종구네 황소도 기차소리에 놀란 듯 뒷발을 들어 가볍게 뛰면서 ‘음머’하며 소리를 질렀다.
논배미에는 잘름잘름한 논물 속에 파릇파릇 돋아난 어린모가 마냥 귀염성스럽게 보였다. 좁다란 논둑을 뛰어가는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 배가 불룩하게 나온 개구리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텀벙’하는 소리를 남기며 잽싸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내 부옇게 번져나는 흙탕물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논둑길을 달려조금은 길어 먼 듯하게 느껴지는 가파른 언덕배기에 올랐다. 아직은 좀 이른 듯 꽃몽아리에서 꽃이 필락 말락 하는 아카시아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숨을 모아 쉬었다. 언덕배기에 울창하게 들어찬 아카시아 나무를 보려니 문득 두 해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해마다 신록이 짙푸러가는 오월이 오면 내 고향 들메마을 동구 밖 언덕배기에 아카시아 꽃이 수두룩하게 피어났다. 아카시아의 꽃향기가 실바람 등을 타고 온 동네에 퍼지면 흙 내음 살갑게 묻어나는 담장 아래서 여섯 살 난 신랑 각시 소꿉장난을 하였다.
실로 꿴 감꽃을 목에 두른 내 친구 딸고마니 귀분이는 애써 주운 깨어진 사금파리 오목한 곳에 하얀 쌀밥 같이 보이는 아카시아 꽃을 작아 앙증맞은 손으로 욕심껏 듬뿍 담았다. 젖비린내 같은 꽃냄새에 마음 울적해지면 우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파랗게 녹아내리려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멀어 아득하게 바라보이는 시오 리 길, 해 그림자 어디쯤 왔는지 어림짐작해 봐도 애태우는 마음 외면하려 능청 떠는 해가 느긋느긋한 발걸으로 중천에만 머물려고 했다. 그럴 때면 하얀 아카시아 꽃을 한 움큼 입에 넣고 씹어 삼키며 어린 몸에 켜켜이 쌓였던 시름을 달래려 했다.
선홍빛 저녁노을이 어둠살을 몰고 오면 하루 종일 기다렸던 내 어머니 마중하려고 놀던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 홀로 남는 꼬마 각시 그리도 서운한지 손에 하얀 꽃 꼭 쥐고 두 눈만 끔뻑이였다. 그런 마음 알 것 같아 발걸음을 늦추어 얼마쯤 걸어가다 뒤돌아봐도 그때까지 혼자서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때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꼽장난을 곧잘 했었다. 그러나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 부터는 서로 가벼운 말다툼도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쑥쓰러워 소꼽장난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노란 개나리꽃이 군데군데 피어나 풍경이 돋보이는 마을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초가지붕들이 서로 머릴 맞대고 있는 마을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동네에 단 하나뿐인 검정색 기와집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작은 두 손에 안간힘 다해 움켜쥐고 입술을 마음이 아픈 만큼 꽉 깨물었다.
땅바닥이 울리도록 굉음을 내지르며 동네 앞을 스쳐 지난 증기기관차는 강경역을 향하여 검은 연기를 내뿜어 푸른 들녘을 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저 멀리 읍내 샛강 둑 너머로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읍내 상업고등학교의 건물이 시야에 흐릿하게 보였다.
‘지금쯤 엄마는 읍내 젓깔 도매집에서 내일 장사할 새우젓이랑 조개젓을 받아서 오고 있겠지.’ 하고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그리고 언제나 고스란히 남겨지는 외로움은 늘 나 혼자만의 몫이 되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약간 떨리시는 음성으로 나에게 다짐을 하시듯 말씀하셨다.
“상민아! 시방부터 귓구멍으루 내가 허는 말 똑바루 새겨들어야 혀. 내사 무슨 짓꺼리를 허드라도 니놈 공부는 끝까장 시키구 말 건께. 열심히 공부혀서 니 에미 한일랑은 꼭 풀어줘야 헌다.”
늘 힘이 들 때에는 그 말씀을 머릿속에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울먹이는 어깨를 애써 훑어 내리며 혼자만의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꼭 해내고 말 거야.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고 돈 많이 벌어서 종구네 기와집보다 더 큰 집을 사서 우리 엄마 호강시켜 드릴 거야.’
언덕배기를 내려서 얼마쯤 걸어 서낭당(성황당[城隍堂]) 고개마루에 오르자 푸른 잎이 소담스럽게 돋아나는 담쟁이넝쿨이 수많은 해를 묵어 굵디굵은 개두릅나무 등을 제집처럼 온통 휘감고 있었다. 다보록한 풀숲 사이로 풍선난초가 봄을 만끽하듯 부푼 연분홍빛 꽃망울을 살포시 매달고 있어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탁 트인 하늘은 화창한 봄을 재촉하듯 더욱 해맑기만 했다.
두 해 동안 빨아 입어 닳고 닳은 바지는 무르팍이 툭 튀어나와 군데군데 해어져 구멍이 나 있었다. 널따란 푸른 보리밭엔 연초록 풋풋한 이삭들이 하나둘씩 위로 솟아올라 가녀린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푸른 물결을 잔잔하게 이루는 보리밭 위로 끝 모르게 펼쳐진 청잣빛 하늘에 청량하게 우짖는 종달새 울음소리가 귓속을 간지럽혔다.
아침나절 산나물을 뜯으러 산에 오르는 아낙네들을 제외하고는 오가는 발길이 뜸한 산골짜기는 침묵으로 잘 길들여져 고요하기만 했다. 비탈진 황토밭들이 늘어선 좁다란 밭길을 따라 얼마쯤 걸으면 산골짜기를 홀로 지키는 내 삶의 그루터기인 작은 초가집이 소담스레 보였다.
자꾸만 정감이 가는 초가집 앞에 둘러진 싸리 울타리는 여러 해를 거듭하는 동안 내렸던 눈 비와 세차게 불었던 바람으로 비스듬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날이 갈 수록 점점 힘을 잃어 가는 싸리 울타리가 그래도 안간힘을 다해 개나리꽃을 제 살처럼 가슴 가득 끌어 안으려는 듯하게 보였다. 남들의 눈에는 허접하기 더할 나위 없는 울타리이지만 넉넉할 만큼 개나리꽃이 샛노랗게 활짝 피어 있었다. 보면 볼수록 은은한 정이 사뭇 느껴지는 노란 개나리꽃이 자꾸만 슬퍼지려는 내 어린 마음을 그라도 조금은 아울러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