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를 녹이는 용광로의 열기처럼 금새라도 타오를 듯 했다. 이글거리는 삼복의 불볕 더위 속에 여름을 참으로 지루하리만큼 스산스럽게 넘겼다. 그리고 기다림의 보람 속에 서늘한 가을이 마음 뿌듯하게 찾아왔다. 가을은 온 산과 들녘을 추색(秋色)으로 곱살하게 물들여 격에 알맞은 조화를 초자연적으로 이루었다. 고연(固然)한 하늘은 후덕(厚德)한 옥빛을 드넓게 펼쳐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그렇듯 가을은 마음 조여 기다린 결과에 대한 후한 보답을 우리들 모두에게 고루 나누어 주는 듯했다.
허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작은 가슴 속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마음속 깊이 도래(到來)됨은 또 무슨 이유일까? 하는 생각을 수차례씩이나 반복해 보았다.
부유스름하게 보이는 산릉선에 구름 한 덩이가 차분하게 머물러 있었다. 그 구름 속에 은은하게 배어오는 그리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듯이 드넓은 하늘과 땅이 은혜롭게 보여 그 어디 한곳인들 실로 사려 깊지 않은 곳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끝없이 들었다.
빼곡히 들어찬 소나무 가지 사이로 마을과 면소재지를 가르는 가름재 오솔길이 무성하게 자라난 숲에 가려 힐끔힐끔 보였다. 펑퍼짐한 둔덕에 색 바랜 그리움을 간당간당하게 매단 키가 커다랗게 자랄대로 자라난 억새의 하얀 우듬지 위로 교회 십자가가 얼핏얼핏 보여 알듯 말듯한 짙은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등마루 마을로 넘어 가는 언덕 아래 단초롭게 자릴 잡은 담배 밭엔 분홍빛 담배 꽃이 넉넉하리만큼 피어났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어느 작은 토성(土城)의 망루처럼 흙벽으로 높다랗게 세워진 담배 건조장의 지붕이 그토록 소담스럽게 보였다. 자연과 더불어 펼쳐지는 풍경 속에 그것 또한 한자리를 차지했다.
싸리나무로 엮어 만든 울타리에 때를 놓쳐 뒤늦게 피어난 새빨간 나팔꽃 한 송이가 새치름하게 보였다. 텃밭 덤불숲엔 씨앗을 뿌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동이가 거의 물동이 크기를 따라 잡을 만큼 큼직하게 자랐다. 그리고 야트막한 둔덕 감나무엔 불그레하게 익어가는 감이 탐스럽기만 하고 잎사귀가 누렇게 변해가는 콩밭 고랑 사이를 스치는 갈바람이 짙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읊조리는 것 같았다.
울타리 군데군데 메말라 들어가는 호박 줄기에 끝물 애호박이 드문드문 매달려 있었다. 연한 끝 순과 갓난쟁이의 오므린 주먹만 한 애호박을 넣고 뜨물에 된장을 풀어 끓인 된장국이 또 다른 별미로 미각(味覺)을 돋우었다. 순덕이 어머니께서 정성들여 싸주신 도시락을 책가방 안에 챙기고 다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립짝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추석명절이 한 사날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샛노란 색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들 주막 정류장엔 이른 아침부터 각기 다른 마을에서 나 온 대목장을 보려 가는 사람들로 예법 분잡스럽게 보였다.
마을 어귀에도 상수 아버지와 민균이 아버지가 장에 내다 파실 물건들이 가득 올린 바지게를 걸머지시고 달구지 길로 걸어오셨다. 그리고 장날이면 빠짐없이 읍내로 가는 순아네 황소가 끌고 가는 달구지도 철로 건널목을 여유롭게 넘고 있었다.
양력으로 3일이 논산 읍내 장날이고 하루걸러 4일이 강경 장날이였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나 5일이 되면 이십 여리 떨어져 있는 연무대 까치마을의 장날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목장은 강경 장날이었고, 여느 장날보다는 장이 큼지막하게 들어설 것 같았다.
쇠잔(衰殘)해 가는 여름을 뿌리치려 밤사이 찬이슬이 자분자분하게 내렸다. 이슬이 산자락에 두루 흩뿌려졌다. 심심찮게 살랑거리는 잎사귀 사이로 드문드문 모습을 보이는 은행알들이 그리 풍요롭게 보였다. 이슬에 흠씬 젖은 샛노란 은행 알이 아침 햇살을 받아 탐스런 빛을 양껏 내비쳤다.
내리막 길섶 군데군데엔 삶의 편(片)을 어렵사리 거머쥔 가을 전령사 구절초가 온 산자락에 튼실한 모습으로 서운치 않을만큼 두루두루 피어났다.마침 때를 맞춰 불어오는 산바람에 힘을 얻어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조심스레 온 사방을 살펴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모두가 폭염을 끈질기게 견뎌 가을을 말없이 기다린 보람의 댓가인 듯싶었다.
가을 들꽃들이 낮으론 그래도 뻣세게 자글대는 햇살에 얼굴이 따가운지 가볍게 몸을 움츠리려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조금 서운해지는 듯 했다. 그래도 무수히 많은 꽃들이 한기가 서린 밤이슬에 몸을 적셔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의연함을 갖추려했다. 조촐한 아름다움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구불구불한 소릿길 양지바른 쪽에 구절초와 더불어 심심찮게 진주황색 꽃무릇도 여법 피어났다. 그저 수더분한 모습이 이른 봄부터 요사스럽게 앞 다퉈 성급하게 피워낸 모든 꽃들의 경망함을 탓이라도 하는 듯 더없이 의젓해 보였다. 아마도 시간과의 속 깊은 묵사적인 약속으로 오랜 기다림 속에 얻어낸 값진 결과인 듯했다.
늘 평온하게 보이는 마을에 그저 젊은이 두 사람이 동네를 빠져나갔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한구석이 텅 비어오는 것처럼 허전하기만 했다. 지난 이삼일 전에 마을에 사는 기성이형과 병막 터 정영감님 아들 정섭이형이 함께 군에 입대했다. 그날 아침 둥구나무 앞에서 군대생활 하는 동안 무탈하게 몸성히 잘 다녀오라는 동네 사람들의 정에 가득 서린 전송을 뜨겁게 받으며 고향 마을을 떠나 연무대에 있는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를 했다. 그런데 입대를 하던 날 그 숱한 동네 사람들 중에 치마귀로 눈물을 훔치시는 사람은 병막 터 정섭이형 모친과 기성이형 모친 그리고 어린 자식을 등에 업은 채 헤어짐을 애태워하는 정희누나 뿐이었다. 기성이 형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애태워 바랬던 결혼식을 끝내 올리지도 못하고 나라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대체 그놈의 체면이 무엇인지? 그날도 종구네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절대로 않 볼 듯 하면서 괜시리 마당을 빙빙 돌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얼굴에 지었다. 그러다 어느 결엔가 흙담너머로 바라보면서 속내로는 무엇인가? 나름대로 자못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듯해 보였다.
웅장한 규모의 상평저수지에 담겨있는 풍족한 담수량 때문인지 웬만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질 않아 끄떡없었다. 끊임없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은 물밑에 잠겨 있는 작은 돌멩이들을 일일이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게 보였다. 언제나 수더분하게 자릴 잡고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려니 물빛이 너무 해맑아 어둡게 내려앉은 내 마음속을 마냥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가벼이 부는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돋보이는 벼랑바위 앞에 멈춰 섰다. 옥순이가 뽀송뽀송한 얼굴에 잘 익어 옹글게 벌어진 석류 알처럼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하얀 치아를 보일락 말락 하게 드러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우며 걸어왔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옥순이가 자기 어머니의 재혼 문제로 속으로는 애가 타들어가도 남들 앞에선 그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볼품사납게 느실거리는 때까오가 자발스럽게 울어대는 종구네 기와집 담을 버릇처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리 머지않아 두 집 사이에 있을 일들에 대하여 만감이 교차하는 듯 옥순이도 애써 감정을 추스르려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탐스럽게 도톰한 옥순이의 두 볼에서 이따금씩 잔잔하게 풍겨나는 비누냄새가 싫지 않을 만큼 부담스러웠다. 그 냄새는 아마도 내 어머니가 읍내 젓갈 도매상을 하시는 재숙이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미제 럭스 비누냄새와 향이 흡사했다. 그래서 옥순이 어머니가 올가을 재혼을 앞두고 한껏 멋을 부리시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옥순이 어머니가 전혀 살갑게 느껴지질 않았고 아니 그보다는 자꾸만 관심 밖으로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친구 옥순이가 받고 있는 아픔만은 결코 아니었으니 종구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진 반감이 꽤나 컸기 때문이었다.
들 주막에는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저마다 읍내 대목장을 보려고 집안에 있는 것들 중에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고루 챙겨 들고 버스를 기다리느라 벌써부터 명절 기분이 이른 듯싶게 일고 있었다.
얼마 후 덜덜거리며 버스가 정류장에 와 닿자 읍내 장에 가려고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느라 한바탕 북새통을 떨었다.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비좁은 차안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그저 우격다짐을 하듯 사람들을 억압하는 차안으로 밀어 넣었다. 얼굴에 오돌토돌 여드름이 잔뜩 난 조수 아저씨의 욕심이 차체에서 뿜어 나오는 매캐한 검은 연기만큼은 음흉해 무척이나 밉살맞게 보였다. 조수 아저씨의 그런 욕심 탓으로 차안은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로 숨이 콱 막혀 올 정도였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다행스럽게 운이 좋아 앞쪽에 자리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어렵게 자리를 잡았다는 안도감에 들려 하는데 이내 뒤를 따라 차에 오른 옥순이가 그 작은 몸으로 사람들 틈새에 끼어 뒤로 억지스럽게 떠밀리고 있어 안쓰럽게 보였다. 그래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옥순이에게 앉으라고 하니 무엇이 그리 눈치가 보여 신경이 쓰이는지? 아니면 부끄러움을 타느라 그랬는지? 주위를 얼핏얼핏 살피며 주춤거렸다. 생각다 못해 내가 한 손을 끌어당겨 어찌 보면 조금 억지스럽게 자리에 앉히고 조금은 쑥스러운 마음에 애꿎게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차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불과 삼십여 분이 소요되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울퉁불퉁한 자갈들이 뒤덮인 비포장도로를 달려가는 버스가 심하게 흔들려 사람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릴 때마다 몸과 몸이 서로 부딪쳐 곤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도 작은 것 하나라도 옥순이를 도왔다는 생각에 마음은 뿌듯하기만 했다.
운전석 앞 차창으로 밀려오는 읍내 건물들이 고담하게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도시의 건물들은 새로운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생기 있게 눈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아주 멀리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서편 금강 둑 위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통학생들의 모습들이 마치 개미만큼 작게 보여 더욱 정감이 갔다.
읍내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차에서 홀가분하게 내렸다. 그리고 서남쪽 황산동 사거리를 지나 강경역으로 향했다. 대합실로 향하는 역 광장 길모퉁이에 받쳐놓은 엿장수의 손수레를 빼놓고는 눈에 띄는 것이 하나도 없어 조금은 썰렁하게 보이는 역 앞마당에 그라도 외로움을 덜어주려는 듯 비둘기 예닐곱 마리가 후드득 내려앉아 자발스럽게 울어댔다. 한동안 플랫폼에 멈춰 서 있던 열차는 어디론가 원행을 계속하려나, 허공에 대고 버럭버럭 소릴 질렀다.
역사 대합실 출입구 앞에는 아침 햇살이 다복다복 풍족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역 광장 나무그늘이 다 가리지도 못한 옹골진 햇살이 양은 다라 위에 내리쬐어 은빛으로 번득거려 눈이 시려왔다. 양은 다라 위에 걸쳐놓은 나무판자 위에 갓 찌어 들고 나온 햇고구마를 무더기 쳐놓았다. 대합실로 오고 가는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의 쭈그러진 빈약한 젖가슴에 매달려 잘 나오지도 않는 물젖을 한 모금이라도 더 빨아 배를 채우려 암팡지게 젖꼭지를 물고 빨아 저도 힘에 부치는지 조금 트여진 입사이로 아쉬운 양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게 제풀에 늘어진 어린 아이의 새까만 두 눈동자와 삶에 지친 아주머니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고뇌에 가득 차 진한 아픔을 맛봐야만 했다. 그저 얼핏 바라보기엔 마냥 애처롭게만 보일지라도 결코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그분의 자태에서, 바로 험난한 세상을 어렵게 헤쳐 살아가시는 내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한적한 역사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제가끔 살기가 어렵다보니, 삶은 고구마를 파시는 아주머니보다 삶이 우려하지도 못해 선뜻 돈을 꺼내 사줄 형편이 되질 못해 애써 처연한 모습에서 눈길을 피하려 했다. 좁다란 사각 유리창 밖으로 광장 앞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더디 오는 기차를 애써 기다리는 척 하며 벽에 걸려 있는 나무판자로 짜 맞춘 열차운행시간표만 애꿎게 바라보았다. 세월의 때가 세세히 묻어난 대합실의 허연 벽엔 표정 없는 둥그런 벽시계의 초침이 분주하게 회전을 하고 있었다.
속 모르고 짜증스럽게 찐 고구마에 달려드는 파리들을 손때 묻어 반질반질하게 질이 난 부채로 쫓으시는 아주머니와 지친 듯해 보이는 아기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한 가닥 진한 아픔이 그도 적지 않으련만 냉엄한 삶의 벽을 뛰어넘지도 못하는 현실을 탓만 할뿐 어쭙잖은 얄팍한 내 동정심은 그쯤에서 접어야만 하였으니 내가 지극히 추구하려는 이상은 현실과 거리가 그리 멀어 동떨어져 실현성이 전혀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로 갑갑한 현실 속에 비춰진 아주머니와 아기의 애틋한 모습에서 자못 분주하게 뇌리에 가득가득 들어차 오는 덩어리 큰 아쉬움만 남기고 말았다. 그런 반감(反感)의 덩이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때론 섣불리 사회에 대한 불만적인 편견을 가질 수도 있었다.
험난키 그지없는 세상 아직은 심안(心眼)이 어두운지라 그 어느메가 잠시라도 마음에 안위를 느낄 수 있는 곳이고 또 어느 곳이 더 큰 아픔으로 나를 몰고 갈 늪인지 어느 누구하나 진실한 소리로 가르쳐주질 않아 탄식이 절로 새어나왔다. 좀처럼 풀 수 없는 막막한 현실에 숨이 조여 그로 인해 생겨난 침울한 마음은 학교생활을 하는 하루 내 지속되어 우울키만 했다.
다른 날에 비해 얼굴표정이 밝지 못한 내 모습에 성구가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무슨 일이 있냐고 몇 차례나 물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에둘러 덮으려 했다. 그 이유는 처해진 현실이 서로가 엇비슷하기에 그저 막막할 뿐인데 성구인들 무슨 뚜렷한 해법이 있을 리 없어 그쯤에서 나 홀로 가슴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그런 피폐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잃었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도래(到來 )되길 간절히 바랐다. 아무튼 그날 하루는 그런저런 생각에 여느 날과는 달리 갑갑한 마음에 우울하기만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 교정에 노을빛이 가득 들어찰 무렵 내 친구 성구와 함께 교문을 나서 읍내로 향했다. 그리고 황산동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아침에 역 대합실에서 보았던 아기의 두 눈동자가 자꾸만 눈에 떠올랐다. 더불어 무엇이라 쉽게 표현키 어려운 감정들이 내 작은 뇌리 속에 엄습해왔다. 허나 이 모든 답답한 현실을 그저 묵묵히 지켜봐야만 하는 내 자신이 너무도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다.
서편 금강 둑에 기우는 저녁 해가 영롱한 꼬리를 길게 늘어트릴수록 그 빛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어둠이 짙어갈수록 밤하늘에 떠 있는 별빛은 가일층 선연하게 빛을 발했다. 어둠살이 엉큼하게 내려서는 산골의 저녁은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 정도로 싸늘하기만 했다. 해는 서편 들녘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늦은 걸음 하여 아직은 또랑또랑한데 냉기를 가득 품은 어두운 산자락 그늘은 야금야금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 자연의 보살핌 속에 저마다 숨을 내쉬는 뭇 생명들이 숨죽여 단잠에 들려하는 시간에 이르니 참으로 은혜로운 반복을 거듭하는 것 같았다.
집집마다 군불 넣는 연기가 굴뚝으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기 속에 장사를 마치시고 돌아오실 어머니를 위해 방바닥이라도 따스하게 하려 헛간에서 삭정이를 한 아름 들고 나와 아궁이에 넣고 군불을 지폈다.
들녘 아랫마을보다 해가 일찍 기우는지라 어둠 또한 일찍 찾아들어 부엌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아궁이 주변을 빼놓고는 온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아궁이에서 게슴츠레하게 새어나오는 불빛 속에 텃밭에서 캐온 동그란 토란 알을 하얗게 깎으시던 순덕이 어머니께서 무쇠 솥 가장자리에 허연 거품이 뿜어 나오자 부지깽이에 불을 붙여 솥뚜껑을 여시고 허옇게 퍼져 올라오는 김 속에 밥솥 안을 살펴보시더니 아궁이 불길을 줄여 밥에 뜸을 들이셨다.
아직은 겨우 초저녁을 벗어나는지라 밤은 이른 듯싶은데 뒷산 갈참나무 숲에선 가을 산새 울음소리가 청승맞게 들려오고 반쯤 트인 부엌문 거적때기 사이로 조금은 황량해 보이는 초저녁 하늘을 홀로 지키려는지 샛별 하나 밉살스런 모습으로 또렷하게 보였다.
온 주위가 어둠에 깊이 빠져들려는 시각 서러울 만큼 짙은 적막 속에 빠져든 산골짝의 정적을 깨우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타다당타다당’ 달리는 열차의 진동음이 퍽이나 요란스러워 부엌문 밖을 내다보았다. 남녘 어딘가에서 출발을 하여 북상하는 화물열차가 밝히는 대낮처럼 환한 불빛이 온 산자락에 퍼져나 저녁이 저무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온통 검게만 보이는 열차가 꼬리 끝에 한 자락 아쉬움을 매달고 질주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보통 날보다 장사가 수월하게 끝나셨는지 조금은 일찍 읍내에서 돌아오셨다. 밭모퉁이를 돌아 걸어오시는 어머니가 손에 종이로 곱게 포장된 물건을 조심스레 들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서둘러 저녁밥상을 차리시려는 순덕이 어머니에게 읍내에서 벌써 저녁을 드셨다고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하시며 손에 들고 오신 물건의 포장지를 조심스레 펼치셨다. 딱딱한 마분지로 정교하게 만든 동그란 곽에 수놓아진 아름다운 무늬가 눈에 선뜻 띄었다. 그 것은 아주 값이 비싸다고 하는 불란서에서 만들었다는 코티 분가루가 담긴 분통이었다. 그 순간 퍼뜩 떠오른 어림짐작에 아마도 낮에 읍내에서 옥순이 어머니를 만나서 선물로 받으신 것 같았다. 분갑뚜껑을 조심스레 여신 어머니가 분갑에 코를 바짝 대시고 향긋한 냄새를 연신 맡으셨다. 그리고 반다지 깊숙한 곳에서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으셨다는 제법 묵직하여 도톰하게 생긴 둥근 가락지 한 쌍을 꺼내셨다. 한 쌍의 학이 창공을 유유히 나는 무늬를 양각(陽刻)한 백동 은가락지를 꺼내셔 손안에 꼭 움켜쥐시고, 내밀한 의미가 담겨진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외동딸로 태어나 한 시절이라도 귀엽게 자랐던 기억이 있어 진보 없는 삶이 지겨울 만큼이나 힘들 때마다 남몰래 되뇌려 하는 내 어머니의 마지막 자존심 이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간사스러운 것이 사람에 마음인 것 같다. 그리도 옥순이가 애처롭게 보였는데 내 어머니가 옥순이 어머니처럼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려고 온갖 고생을 다 하셨다.그리고 언제나 나 하나만을 생각해 주셔 늘 내 곁에 함께 하신다는 포근한 믿음을 깊게 심어 주셨다.그러다 보니 자기네 어머니의 재혼 문제로 그토록 고뇌를 하는 옥순이보다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둔 밤을 홀로 가기 외로웠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고요를 자아내며 흐르는 고고한 달빛이, 잠자는 들풀을 간지럽혀 잠을 깨우려는 듯했다. 뜰 앞에 차분하게 피어난 쑥부쟁이도 휘영청 밝은 둥그런 보름달이 되려고 마지막 살을 찌우고 있는 달을 벗 삼아 밤이슬에 함초롬히 젖어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