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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8 조회 : 1,731




언제나 볼수록 탐이나 우리들 모두에게 생명의 근원지가 되어 버린 채운들녘이 다른 지방에 비하여 비교적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는 평야지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하늘에 뜻만은 하늘 아래 그 어느 누구도 절대로 거역할 수 없었다.
해를 거듭하는 극심한 가뭄은 들메 마을인들 예외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잊을만 하면 반갑지 않게 찾아 오는 춘궁기에 보릿고개가 이젠 힘들기 보다 진저리 쳐지도록 싫기만 했다.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빈곤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해 끼니를 제대로 챙길 수 없어 허기진 배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버티더라도 겨울을 나려고 쌀독 안에 그리도 알뜰하게 채워 놓았던 쌀은 허전하리 만큼 벌써 밑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되었다.
텅 빈 쌀독 안에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세월 속에 가난의 고통과 설음을 버텨 온 만큼이나 닳고 닳은 바가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곰팡이 냄새가 조금은 비위에 거스릴 정도로 번져나는 아랫목, 수수깡 둥지 속에 고구마까지도 감지덕지하며 겨우내 알뜰하게 먹어치워 그마저도 다 떨어지고 말았다.

먹을 것이 궁해지자 봄철이면 앞산과 들녘으로 발걸음 하여 먹거리를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어 실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막막한 시절이었다.
속된 말로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어 찬물로 배를 채웠다는 말이 저마다의 입에서 서슴 없이 나올 정도로 처절했던 고난스런 삶이었다.

그저 먹을 것이라고 그나마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은 이제 겨우 연초록 빛의 여리디 여린 목을 힘들게 처 들고 있는 풋보리 뿐이였다.

이저리 궁리를 해 보다 답을 얻지 못해 어슷하게 굽어진 들녘 길을 걸어 논배미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라도 굶어 죽지마라고 독사풀과 자운영이 수부륵하게 자라나 그리도 많았다.
눈 앞에 바라보이는 자운영 꽃이 곱다고 느껴지기보다는 때 없이 찾아드는 배고픔이 늘 앞섰다.
저녁 한 끼 나물죽을 쑤어 허기를 달래려고 꽃이 채 피어나지 않은 자운영의 연한 잎줄기를 골라 뜯어 대소쿠리에 담았다.

야윈 두 무르팍에 푸릇푸릇 풀물이 묻어나게 나뒹굴던 논배미에는 내 어린 유년시절의 가슴 아린 아픔들이 송두리째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아픔들이 뇌리 속 깊이 옹골지게 각인된 꽃이 바로 자운영(紫雲英)이었다.

허기져 까칠해진 몸뚱이에 찰싹 들붙었던 것은 오직 모진 가난뿐이었다.
한 서린 그 시절을 살아온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마디마디 뼈를 뚫는 아픔 속에 한 서린 덧살이 돋아났다.
그리고 우리는 돋아나는 아픔의 덧살을 운명이 아닌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았다.

기아는 질병을 몰고 온다고 했다.
그 무렵 억척스럽게 번져났던 괴질인 이질로 나보다 두 살 터울인 누나가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그리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난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극도로 열약한 환경에 읍내에 단 하나 뿐인 병원은 커녕 제대로 된 약 한 봉지 먹어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이었다.
그저 헌 이불에 둘둘 말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남몰래 산자락 그 어느메에 묻히고 말았다.

자라나는 동안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내 누이가 묻힌 곳이 어디냐고 어머니에게 수없이 물어 보아도 끝내 대답이 없으셨다.
그리고 세월이 그리도 많이 흘러 어머니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도 그에 대한 일은 끝까지 알려주시질 않았다.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면 어머니가 이따금씩 내 누나의 생각이 나는지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넋두리처럼 말씀하셨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어머니의 눈언저리에 고여 있던 눈물은 못다 준 모정에 애태워 가슴이 찢어져 흘러내리는 혈루였다.

햇살에 시푸르뎅뎅한 자운영 꽃은 풍진(風塵) 세파(世波)가 잔인하게 할퀴어 놓은 우리들의 멍든 자화상이었다.
그런 처절한 세월 속에 짓궂은 동네 형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따돌림을 당하며 아픔을 꾹 참고 나름대로는 잘 버텨왔다.

그런 치욕스러운 놀림을 받고 살아온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육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어린 나를 이만큼 키워주시느라 내 어머니의 고난이 참으로 컸다.
시름 가득 찬 한숨이 작은 초가집 구석구석 어느 틈서리 하나에도 빠짐없이 스며들어 있었다.
숱한 나날 속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내 삶의 여정에 어렵게만 수놓아져 한 겹 그리고 또 한 겹 세월의 테를 둘러가며 이만큼 자라났다.
그래도 단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쳐질 줄 모르는 찌든 가난이었다.

어머니는 종구네 집에서 빌려 쓴 장리변 이자를 갚으려고 저녁 늦을 때까지 이 집 저 집 찾아다니시며 젓갈장사를 하셨다.
허름한 검정색 몸빼바지를 허리띠로 졸라매시고 끼니를 건너뛰어 한 푼 두 푼 모으신 돈으로 장리변 이자를 조금씩 갚으며 가파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좀처럼 줄어들 줄 모르는 이자에 종구네 집에 갚아야 하는 빚더미는 날로 늘어났다.
그런 애타는 삶에 실상인양 쪽마루엔 얄미울 만큼 반질거리는 옹기동이와 손때가 묻어난 똬리가 놓여 있었다.

두 식구의 보금자리인 산 밑 작은 초가집은 화산리와 채화리가 서로 맞닿은 경계지점에 있었다.
두 마을까지의 거리가 엇비슷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늘 채화리로 구분되었다.
나는 이러한 구분을 늘 마음속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자라왔다.
어려 속된 마음에 마을 사람들이 내 집에 대한 모든 아픈 일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그런 이유로 차라리 낯선 곳일지라도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며칠에 한 번씩 해질녘에 종구 아버지가 거들먹거리며 찾아와 빚 독촉을 하였다.
온종일 힘들게 젓갈 장사를 하시고 집으로 돌아 온 어머니께서 물 한사발 마셔 겨우 숨을 돌리시려할 즈음이였다.

제 때에 원금을 갚지도 못하고 그에 상응하는 이자까지도 연체를 하다보니 종구네 아버지가 그리 소리소리 질러대며 독촉을 해도 꼼짝 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집이 부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집이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갚지 못하는 빗 때문에 무시 당하는 어머니의 궁색한 모습을 보는 사람 듣는 사람들이 없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도대체 그리 크고 육중한 체격도 아닌데 그렇게 우렁찬 목소리는 어디서 나오는지 가끔씩 궁금키도 했다.
목소리한질라 유난스레 큰 종구네 아버지 한테 그렇게 당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장리변 이자를 매섭게 독촉하시는 종구네 아버지의 험상스런 얼굴과 마주하기가 정말 싫었다.

떨칠 수 없는 몸에 찌든 가난을 그저 체념하듯 숙명(宿命)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억울하여 울분이 가슴을 치밀고 목줄기까지 줄기차게 솟아올랐다.

나는 왜 척박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늘 가져 보았다.
허나 차디찬 현실은 그 해답을 찾으려는 것마저도 용이치 않았다. 언제나 일그러진 아픔은 현실의 턱 언저리에서만 맴돌고 말았다.
처해진 현실이 그렇다보니 오히려 체념하는 쪽으로 더 익숙해져 슬픈 자위(自慰)를 하며 살았다.
그렇듯 암울한 세월을 두 해를 넘겨 이제 여덟 살이 되었다.

다소 괴팍스런 동네 형들로부터 둥구나무 밑에서 그런 짓궂은 일을 당한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나 이제 국민학교 일학년이 되었다.
학교에 처음 입학식 하던 날 이었다.
전교생 육백 여명 중에서 란도새르 책가방을 메고 등교한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 뿐이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큰 탓에 동네 형들로부터 받는 그런 버거운 틈바구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허나 어차피 살고 있는 손바닥만 한 산 밑 땅덩어리도 종구네 산에 딸린 짜투리 땅이기에 그 또한 소유주는 종구네 아버지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종구를 만날 때마다 늘 기가 죽어 서로 얼굴을 대하기가 꺼림칙했다.
때때로 허전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이따금씩 어머니에게 심심찮게 물었다.

“엄니! 시방 우리가 살구 있는 요기는 화산리하구 더 가까운디 동네 사람들이 왜? 자꾸만 채화리라구 불러?”

아마도 그것은 그토록 가난으로 얼룩진 늪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난 때문에 늘 무시만 당하고 살았던 숱한 아픔들이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그 자체가 더욱 싫어서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인데도 유독 얄밉게 놀려대는 종구와 얼마 전 동네 연자방앗간 옆 공터에서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종구의 콧등을 머리로 들이받아 코피를 터트린 일로 종구 아버지에게 붙들려갔다.
응징(膺懲)을 당하듯 심한 욕설 끝에 들은 가슴 맺히는 그 한마디가 더욱 그런 마음을 갖게 하였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

내 어린 마음에는 지울 수 없이 큰 하나의 상처가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어쩌면 한 생명체에 대한 비극의 태동이 그 무렵부터 그렇게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 같았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그런지 산자락 비탈밭에 이따금씩 밭을 갈러 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적이 드물었다.
그런 탓인지 동네 어른들이 말썽꾸러기들에게 겁을 주시려고 늘 하시는 말이 있었다.
‘너 말 안 들으면 뒷산 상여 골 호밀밭에 숨어사는 용천배기헌티 데려다 준다.’고 하시며 잔뜩 겁을 주셨다.
우리 집 텃밭 자리가 예전에는 상엿집 자리였다.
수 해 전에 상엿집이 새터 마을 입구 비석골로 옮겨져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이 들어서 있는 자리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네 어른들이 가끔씩 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일제강제점령기 시절 나병환자 십여 명이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우묵골 병막 터에 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분들이 전혀 살지도 않고 동네 어른들 말씀이 모두 다 거짓이라는 것을 이내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무섭게만 불렸던 용천배기가 정말로 사람을 잡아가지도 않는다는 것을 내가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다섯 해를 넘겨 읍내 중학교에 입학을 한 후였다.

등메산 산기슭에 외떨어져 있는 작달막한 움막집 옆에는 숱한 풍상을 겪어 늙어 등이 굽은 노송 두 그루가 우람하게 버텨 서 있었다.
서로 키를 자랑이나 하듯이 하늘 향해 높다랗게 솟아 올라 떡하니 버텨 서 있어 바라보는 마음이 든든했다. 그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야트막한 둔덕에 자리를 잡고 버텨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 우둠지엔 지난해 봄부터 열심히 둥지를 튼 까치집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 새끼들이 다 자라 서로 짝을 만나 그동안 정이 들었던 둥지를 떠난 듯 이미 텅비워 있었다.
그래서인지 길을 오가며 덩그러니 비워져 있는 둥지를 바라보게 되면 퍽이나 고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싸리 울타리 밑에 돌덩이를 주워 쌓은 돌담 위엔 담쟁이덩굴들이 다정하게 서로 얽히고설켜 들붙어 있었다.

싸리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마을 앞 푸른 들녘엔 논산(論山)과 강경을 잇는 호남선 기차선로(汽車線路)가 참으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움막집 뒤편 둔덕 너머 펑퍼짐한 곳엔 세월 흘러 주인을 잃은 듯 군데군데 훼손된 묘지 몇 개가 시름처럼 졸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보리밭을 지나 개울가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 검정 콜타르칠을 한 목조건물의 채화국민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어머니와 내가 종구네 빚에 쪼들리다 못해 등 떠밀리듯이 아랫동네에서 이곳 움막집에 첫발을 옮긴 것은 두 해 전 늦가을쯤이었다.

더러는 내 어머니께서는 삶에 몹시나 지치시는 듯해 보여 무어이라 형언키 어려운 크고 작은 아픔들이 비좁은 어린 가슴에 감당키도 어렵게 뒤흔들었다.
그런 밤이면 석유 등잔불빛이 희미한 방 안 흙벽에 기대신 채 천장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실까 봐 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 그리고 외조부에 대한 들끓는 부성애 그 모든 것이 복합성을 이뤄 내 어머니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강인하신 내 어머니께서는 그저 말 없이 치마귀로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셨다.
그럴적마다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버릇처럼 두 눈을 모아 등메산을 바라보며 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끝내는 사랑할 수 밖에 없어 끝없이 울먹여 졌다.

그날 밤 하늘엔 우리 두 사람의 아픔을 달래주려는 듯이 무수히 많은 별들이 선명하게 빛을 발하였다.
그중 별 하나에서 떨어지는 별똥이 허옇고 긴 꼬리를 밤하늘에 선명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외진 움막집으로 옮겨오기 전 우리가 살았던 집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을 한중간(한中間)에 자리한 방 두 칸에 제법 마루가 넓어 보였던 아담한 초가집이었다.

어찌 해서라도 어린 나와 살아 남으려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시던 어머니께서 남의 집으로부터 쌀로 빚을 내셨다.
그 집이 바로 마을에서 제일 크고 단 하나뿐인 검정 기와집 종구네 집이었다.
기름진 평야지대에 다른 지역보다 수리시설이 잘된 논이라서 한 해 열심히 농사를 지어 갚을 요량으로 걱정을 하면서도 남들에게 더이상 피해를 주지 않으시려고 빚을 내고 말았다.

그렇게 빚을 낸 금쪽 같은 돈으로 재일 먼저 갚은 것이 내 아버지 때문에 수년 동안 이 사람 저 사람 들에게 빌려 쓴 적지 않은 돈이였다.

그 당시 내아버지께서는 농삿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틈만 나면 바깥 읍내는 물론 면소재지에서 활동하시던 유지분들과 어울리시느라 아주 열성이셨다.

그렇다 보니 거마비와 다과 값이 필요하여 수년 동안 혀 짧은 소리를 해서 동네에 있는 남에 집에서 빌려 쓴 돈을 한데 모아 갚을려니 옛말에 '가랑비에 옷 젖는다' 는 말처럼 그 액수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오랜 병석에 계시는 동안 그 많은 한약을 드시느라 읍내 한약방에 지은 많은 외상값을 모두 갚았다. 읍내 한약방에 돈을 다 갚을 수 박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때 어머니게서 한약방과 외상으로 거래를 할때 강경 읍내에서 어물전을 하시는 어머니의 친구 분이 보증을 섰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종구네 집 다음으로 부잣집인 영택이네 집에서 가을 바심해서 갚을 요량으로 얻어 쓴 쌀빗도 어느 정도는 갚았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사정은 어머니와 내 생각대로 그리 녹녹치 않았다. 속담에 "범을 피하니 사자를 만나다"고 그말이 틀림없었으니 종구네 아버지로 부터 빗 문제로 받는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그래서 하늘 아래 달랑 있는 논 서마지기를 눈 빠지게 바라보며 벼이삭이 잘 익어가도록 그리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리만큼 해를 거듭하여 극심한 가뭄을 몰고 와 논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쫙쫙 갈라져 온 동네 사람들을 피가 마르게 했다.

처지가 그렇다보니 남에 집 장리변 이자는커녕 당장 끼니를 이어갈 양식을 구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더불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제 때에 갚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종구 아버지가 이삼일 간격으로 해거름 녘에 집으로 찾아오셔 빚 독촉을 그리도 심하게 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빚을 재촉하는 종구네 집의 빗을 갚으려고 살던 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집을 근교 은진면에 살던 종구네 먼 친척이 사들여 새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래서 살던 집을 비워주고 산 밑으로 쫓겨나다시피 나와야만 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 어린 가슴에 지워질 수 없는 통한(痛恨)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 두 번째의 시작이었다.

계속되는 가뭄은 비다운 비가 내리질 않아 갈증만 더해 온 들녘은 바짝 푸석거리고 못자리를 하기에도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온 동네 사람들은 논물에 혈안(血眼)이 되어 동네인심이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한동네 사는 이웃끼리도 툭하면 멱살잡이를 했다.

그 예로 종구네 아버지와 기성이형이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더 넣으려 논두렁에 물꼬를 트는 일로 아주 큰 다툼이 벌어졌다.
종구 아버지에게 심한 욕설과 함께 귀뺨을 한차례 얻어맞고 화가 난 기성이형이 종구 아버지를 번쩍 들어 물구덩이에 던져버렸다.

그로 인해 허리를 다치신 종구 아버지가 기성이형을 고소하여 면소재지 지서에 붙들려가고 말았다.
그렇게 지서로 붙들려갔던 기성이형이 일을 해결치 못해 하는 수 없이 읍내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그러자 겁이 덜컥 나신 기성이형 어머니가 마을 이장님과 함께 밤늦도록 종구 아버지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어 그 이튿날 아침에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기성이 어머니의 심정이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가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기상이 형 아버지께서 자기네 마늘 밭에 인공기 계양대를 세우려고 하는 놈들에게 반대를 하여 인민군에게 달려들어 가벼운 몸싸움을 한 것이 반동으로 내몰려 결국에는 무참하게 목숨을 잃고 만지가 겨우 몇 해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때 주동자로 가담했던 종섭이의 친형인 종구네 아버지인 동섭이에게 그런 수모 속에 달랑 하나 남은 아들 자식을 구하려고 그리 빌고 또 빌었으니 그 애간장이 다 타들어 간 속을 마을 사람들 뉘라도 모를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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