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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90 조회 : 2,210




뒷동산에 둥글게 떠오른 보름달이 호젓하게 밤나들이를 나서는지 왕소나무 우듬지 위를 느릿느릿 비켜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온 누리가 적요(寂寥)한 산골짝 밤은 무거운 정적(靜寂)에 깊이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런 고요를 가볍게 깨트리는 것은 이따금씩 뒷산 가름재 갈참나무 숲 어딘가에서 처연하게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두어 시간 여 남짓한 간격을 두고 호남선 철길을 가삐 오르내리는 열차가 남기는 날카로운 기적소리와 육중한 파열음(破裂音)이었다.
열차가 남기는 기적과 진동소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귀에 박히도록 들어 온 터라 그다지 색다른 정감을 불러일으키질 못했다. 그저 무미하게만 들렸고 때론 잠을 설치게 하여 가벼운 짜증을 불러 일으켰다.

뒤뜰과 맞닿은 언덕배기에 서 있는 두 그루 왕소나무가 삭풍(朔風)에 부대껴 울어대는 솔바람소리가 내 작은 초가집을 밤새껏 어수선하게 에워쌌다. 그 소리는 벅찬 삶의 고통이 역겨워 터트리는 우리네의 처절한 삶에 울부짖음 같이 들렸다. 그토록 밤을 지새워 울어대던 솔바람소리가 먼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나절이 되니 그제서야 소릴 멈춰 외진 산골짝이 일상의 고요를 되찾았다.

눈을 뜨고 나면 당장 끼니를 연명할 양식 걱정부터 해야 할 극히 절박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 자라의 목처럼 잔뜩 움츠러든 우리네에게는 강추위가 그리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낮으로는 온 사방이 탁 트인 넓디 넓은 들녘에서 거침새 없이 불어오는 들녘 바람에 볼이 베일만큼 시렸고 손과 발이 참아내기 힘들 정도로 아려왔다. 그리고 밤으로는 북녘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산릉선을 넘어 골짝마다 섧게 울어대는 산짐승의 울음처럼 굉음(轟音)을 남기며 매섭게 몰아치니 적적한 심신(心身)이 긴 겨울의 늪 속으로 자꾸만 깊이 빠져들었다.

구름에 잔뜩 가려진 햇볕은 이따금씩 궁색한 적선(積善)을 하듯 잊을만하면 마치 큰 인심이나 쓰듯 겨우 찾아드니 그나마 소중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더해 가는 추위가 엄습하여 쪼그라든 살림살이만큼이나 온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푸시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려하면 문틈에 낀 찬 서리가 거울 같이 투명한 얼음을 긁어내고 매서운 칼바람에 밤새껏 모진 추위에 시달린 바깥 문고리가 잘 녹은 갱엿처럼 손에 쩍쩍 들러붙었다. 그리고 쪽마루 위에는 물기 채 마르지 못한 걸레가 단단하게 얼은 붙은 동태 모양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텃마당에 나뒹구는 낙엽들은 바람에 날려 길섶에 쌓인 채 오가는 발길에 무심하게 밟혀 바스러지고 으슬으슬한 추위에 떨리는 어깨는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그리 극성스럽게 며칠을 두고 추위를 부추기며 온통 찌뿌둥했던 하늘이 본디의 제 모습을 찾으려는지 산릉선에 묵직하게 내려와 닿은 구름 서너 덩이를 빼놓고는 흠잡을 데 없이 파란 모습을 모처럼만에 드러내 생기를 불러일으켜 기분이 한결 가뿐해졌고 한낮으로는 쪽마루까지 다스하게 내리쪼이는 햇살이 있어 그라도 다행스러웠다.

앞산의 주봉인 비선봉으로 조금 가파르게 이어지는 산자락에 줄져 서있는 갈참나무 옆에 좀처럼 보기 드문 희귀품종인 오엽송 두서너 그루가 주변의 풍광과 적절한 조화를 이뤄 한결 윤기 있게 보이니 황량함을 비켜서 또 다른 하나의 잔잔한 서정을 듬뿍 담아냈다.

북녘을 향해 줄 늘어선 고압선 철제송전탑이 가파르게 산등선을 타고 올라 끝 모르게 이어지고 텅 빈 들녘 논 자락엔 지난 추수 때 떨어진 낟알을 주우려는지 갈까마귀들이 모여들어 이저리 촐랑거려 온갖 부산을 떨고 있었다.

한 해도 거의 다 저물어가는 마지막 달에 이르니 잠자리에서 일어나신 어머니는 순덕이 어머니와 함께 부엌에서 메주를 쑤시려는지 함지박에 넣어 밤새껏 잔뜩 불려놓았던 누런 콩을 씻는 소리가 방문 틈사이로 가늠하게 들려왔다.

때 묻은 벽에 붙어있는 수업시간표를 보고 책가방을 챙기는데 몇 해 전 일이 문득 생각나 가볍게 웃고 말았다.

아마도 국민학교 시절 3학년 때쯤으로 기억되는데 어머니께서 메주를 쑤시는데 턱밑에 바짝 쪼그려 앉아 메주콩을 달라고 조르자 메주콩을 많이 먹으면 속이 부글거려 밤늦게 설사를 한다고 하시며 괜히 입만 버리게 작은 그릇에 아주 단작스럽게 주셨다. 그러니 양이 덜 찬 나는 메주콩이 더 먹고 싶어 어머니께서 수 십 번 손으로 두드리셔 매끈하게 만드신 김이 나는 메주를 마루에 옮겨놓으시고 부엌으로 들어가시면 메주 한 귀퉁이를 슬쩍 떼어서 얼른 입속에 우겨넣고 망가뜨려진 부분을 손으로 대충 조몰락거려 표시가 나지 않게 해놓은 후 시침을 뚝 떼고 있었다. 그래도 눈치 빠르신 어머니는 용케도 찾아내시어 힘껏 만들어 놓으신 메주가 균형을 잃어 속상하시면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듯 겉으로는 실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워메 그새 어떤 고망쥐새끼가 댕겨간 모양이네. 쎄가 빠지게 메주를 이쁜 내 새끼 얼굴처럼 맹기러놨더니만 이리 와서 슬금슬금 뗘 먹었네. 이놈의 고망쥐새끼 어디 걸리기만 혀봐라! 내가 가만히 냅싸두는가?”

어머니께서는 내가 그리 말썽을 부려도 크게 싫지 않으신 듯 우스갯소리로 표현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빡빡 깍은 머리에 한 여름내 검게 그을린 보잘 것 없는 내 얼굴 보다는 별스레 꾸미지 않으셔도 근엄함이 절로 묻어나는 쪽진 머리의 내 어머니 얼굴이 훨씬 더 나은 듯싶었다.

여느 날 같으면 벌써 잠자리에서 일어나 온 방안이 비좁다고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놀았을 순덕이가 감기로 몸이 매우 아파 몸 가눔이 힘든지 무척이나 힘겨워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면 소재지 지서 옆에 있는 양씨네 약방은 믿음이 덜 가셨는지? 마다하시고 비교적 규모가 큰 읍내 약방에서 약을 지어 왔으나 순덕이 감기는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 내쉬듯 시나브로 거칠게 내뱉는 기함소리와 더불어 하얀 목 줄기에 돋아나는 새파란 실핏줄이 보기에 안쓰럽기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방정맞은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저리도 심하게 아프다 혹시 내 누이처럼 잘못이라도 되는가 싶은 조바심이 은근히 들었다.

순덕이 어머니께서 아침밥상을 들고 오셨는데 밥그릇이 넘쳐날 정도로 높다란 고봉밥이었지만 쌀은 거의 보이질 않고 온통 거무튀튀한 보리쌀에 수수와 큼직큼직한 고구마 덩이뿐이었다. 그토록 널따란 들녘에서 나는 쌀이 넘쳐날듯 하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때만 되면 쌀이 그리도 귀했던 그 시절 부족한 양식을 늘려 먹으려고 여름에는 감자를 깎아 넣어 섞었고, 가을겨울에는 고구마를 그리도 많이 넣어 먹었으니 여름감자와 고구마는 삶에 가벼운 간식거리가 아닌 소중한 주식이 되었다.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집집마다 아랫방엔 수숫대를 얽어 만든 큼직한 고구마 둥지가 겨우내 방주인 노릇을 했다. 더러는 고구마와 메밀가루로 만든 ‘고구마버무리(범벅)’만으로도 한두 끼니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쌀을 아주 조금 넣고 보리쌀에 차좁쌀과 수수를 섞어 고구마를 넣고 지은 ‘고구마잡곡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럴 땐 둥그렇게 잘 익은 무김치 한 조각과 무시래기를 넣고 끓인 된장국 한사발이면 한 끼 식사로는 충분했다.

‘우우웅우우웅’ 산짐승 소리를 내며 북풍이 골짜기마다 불어오고 눈발이 거세게 휘날리는 길고 긴 겨울밤이면 저녁을 먹었는데도 이미 배는 홀쭉해져 버릇처럼 유난히 군것질이 생각났다. 그래서 저녁밥을 지을 때 가마솥에 넣어 찐 고구마는 그리도 고맙게 허기를 달래주었다.
더러는 아궁이 잉걸불 속에 넣어 구워 먹기도 했는데 구들방 따뜻한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발을 넣고 식구들이 둘러 앉아 양푼 속에 가득 찬 고구마를 무척이나 맛있게 먹었다. 우리 마을에서 나는 고구마는 다른 지방보다 땅에 수분이 많은 탓인지 거의가 물고구마였다. 겉껍질이 단단하고 찰진 밤고구마보다 오래 보관하지는 못해도 그 맛은 파삭파삭한 밤고구마에 버금갔다. 읍내를 오고 가다 가끔씩 눈에 띄는 군고구마 통에서 쓰는 고구마는 물고구마가 단연 인기였다. 물고구마는 밤고구마처럼 껍질이 두텁질 않고 쉽게 타지 않으면서도 단맛이 듬뿍 배어났기 때문이었다.

김칫국물 냄새가 찬 공기 속에 더욱 뚜렷하게 나는 책가방 속에 도시락을 챙겨 넣고 사립문을 나서 구부러진 좁다란 밭둑길에 올랐다.
행여! 옥순이 모습이 보일까 하는 생각에 동네 어귀를 얼른 바라보니 모습이 보이질 않아 조금 늦나 싶어 고샅길 입구를 바라보아도 역시 옥순이 모습은 보이질 않고 찬바람만 둔덕을 향해 싸늘하게 불어왔다. 밤사이 어디 몸이라도 아픈가? 싶은 걱정스런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내 생각이 가벼운 기우처럼 나보다 앞서 갔나 싶어 벼랑바위를 바라보아도 없고 오르막 철길 건널목에도 옥순이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부는 바람 따라 솔향기 풋풋하게 묻어오는 산모롱이를 끼고 돌아 살얼음이 희뿌옇게 얼어붙은 개울을 가로 지르는 섶다리를 건너 야트막한 둔덕에 오르자 부의 상징물처럼 큼직한 종구네 기와집이 부담스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훈김이 무섭다고 비록 집 규모가 커 웅장하게 보이는 기와집이지만 종구 아버지와 종구, 단 두 식구가 단출하게 살았을 때는 꼭 뭔가 빠진 듯 적적하기만 했던 집에 새 식구가 들어와서 그런지 굴뚝에선 아침 연기가 높게 솟아오르고 늘 잠가놓았던 육중한 나무 대문이 남들 보라는 듯이 반쯤은 열려 있었다.
앞마당엔 종구아버지께서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시고 언제 동네 아랫집에서 옮겨다 놓았는지 때까오(거위)가 주둥이를 잔뜩 늘어뜨려 ‘꿰에엑 꿰에엑’ 시끄럽게 소릴 질러대고 두툼하게 살이 잘 오른 누런 황소는 콧구멍으로 허연 김을 내뿜으며 ‘음머’하고 한차례 소릴 내어 겉으로 보기엔 그 모두가 평온하게만 보였다,

비록 감정이 썩 좋지 않은 남에 집이지만 윤택함이 절로 묻어나는 모습에 새삼 부럽기도 하면서 마음 한 자락엔 열등감마저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적당히 열려진 대문 틈사이로 혹시 옥순이 어머니가 보일까봐 부엌 쪽을 눈여겨보아도 방안에 계신지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고 ‘뎅뎅뎅뎅뎅뎅뎅뎅’ 마루 벽기둥에 달린 괘종시계에서 오전 여덟 시를 알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 들 주막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언덕 아래 바로 눈 밑으로 가참하게 바라보이는 들 주막을 향해 혼자 걸어가는 내 모습이 조금은 외롭게 보였던지 서낭당 당산나무 우듬지에서 까치 한마리가 뜻 모를 말을 붙이듯 심심찮게 울어주었다. 옥순이에 대한 가벼운 기우가 연이어져 벼랑바위 앞에 닿았을 때나 건널목을 올랐을 때도 그랬고 들 주막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해서도 주위를 몇 차례씩 둘러보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옥순이 얼굴은 그곳에서도 끝내 볼 수 없었다.
흔들리는 차창 뒤로 미끄러지듯 밀려나는 동네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걱정 속에 제발 별다른 큰일이 없기를 그저 바랄뿐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에 학교가 끝나는 저녁 무렵 들 주막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만하면 집으로 가기에 앞서 얼른 아랫마을 옥순이네 집부터 찾아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꿩이 들녘 밭에 내려와 있어도 마음은 산에 콩밭에 가 있다.’는 말처럼 무슨 일에 깊이 치중하다보면 다른 일에는 신경이 안 써지듯 하루 내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옥순이 일 때문에 온통 마음이 음울한 겨울 하늘만큼이나 심란해졌다.

그런 내 모습에 집에 무슨 일이 있냐고 자꾸만 캐묻는 내 친구 성구의 질문이 그날따라 더욱 거추장스럽기만 하여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어찌 보면 그런 내 모습이 성구의 시야에는 다소 불분명하게 보일지 몰라도 성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옥순이에 대한 세심한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는 듯했다. 그런 어수선한 감정 속에 좀 더 솔직히 표현을 하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몇 해 전 점동이 어머니가 부부싸움 끝에 분을 참지 못해 그만 양잿물을 먹어 사람들이 빨리 발견하여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그 여파로 혀가 고부라져 말소리가 어눌해졌는데 옥순이도 극한 선택을 하여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언젠가 나에게 넌지시 말한 군산 고무신 공장에 다니는 용순이누나처럼 아무런 말없이 고향을 떠나 직공살이라도 한다고 하여 참말로 헛된 마음을 먹었나 싶어 염려를 크게 했다.

학교 서편 울타리 너머 나바위 성당 쪽에 햇살이 불그레할 무렵 수업을 마치고 평소와는 달리 성구네 집에 잠시 들리지도 않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황산동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가 시내 중심부를 빠져나와 조금 외곽지역에 있는 남교동 임시 버스정류장에 이르렀을 때도 겨울 추위에 차에 오르는 승객들이 별로 없었지만 그리 샅샅이 훑어보아도 옥순이 모습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지난 전란 중에 미군들이 사용하다 남긴 군용트럭을 불하받아 낙후된 기술로 개조하여 만든 워낙 노후한 시골버스라 더디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궁금증에 사로잡혀 서두는 급한 내 마음이 버스보다 더 앞서려 했기 때문이었다.

강경천 내리막 둑길을 내려선 버스가 탄력을 받았는지 아니면 반동에 의해 제풀로 굴러가는지 한참동안 재빨리 달려 장화리를 지나 마을 앞 샛강을 잇는 새다리를 건너 주막집에 닿은 시간은 읍내 서편 하늘 아래 옥녀봉이 온통 붉게 물들어 가는 초저녁 녘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책가방을 옆에 끼고 동네를 향해 마구 달렸다.
동구 밖 거북바위를 지나 방죽 앞에 닿으니 추위는 아랑곳없이 온몸에 땀이 뻘뻘 나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늦가을에 씨를 뿌려 이듬해 초여름에 수학을 하는 가을보리를 심어 놓은 동구 밖 보리밭에 두툼한 솜옷에 털벙거지를 깊숙하게 눌러 쓰신 상수네 아버지가 한 겨울 추위 속에서 파릇파릇하게 올라 온 보리 싹이 추위에 얼지 말고 잘 자라고 두 발로 자분자분 밟아 주고 계셨다.

동네를 향해 바삐 뛰어가는 내 책가방 속의 빈 도시락에서 ‘딸그락딸그락’ 반찬통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자 얼른 얼굴을 돌리셔 그리도 급히 뛰어가는 나를 의아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어떤 면에서는 옥순이에게 지나치게 치중하는 내 행동과 생각이 무지랭이처럼 보일런지는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유형은 다를지라도 벅찬 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숨죽여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아픔이 도래(到來)되어 있기에 동질감을 세게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알 듯 말 듯 말로서는 표현키 실로 난해한 감정이 내 심속 깊이 소리 없이 싹트고 있었다.

여름내 그리도 동네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들던 둥구나무 밑도 계절의 흐름을 말해 주는 듯이 텅 비어 왠지 허전해 보이고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평상은 그쯤에서 쓸쓸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고샅길로 들어서 연자방앗간 앞을 지나 우물터에 이르니 저녁 밥할 물을 길러 온 동네 어른 두서너 분의 모습이 불그레한 노을빛을 듬뿍 받고 있었다.
녹슨 함석 대문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고 마지막 잎까지 떨궈 마냥 외롭게 보이다 못해 고연하게도 보이는 숱한 해를 넘긴 감나무가 빈집의 적적함을 더해주는 것 같은 옥순이네 집이 한눈에 팍 들어왔다.

느린 걸음 하는 저녁 해가 이루어 놓은 저녁 노을빛이 만연한 고샅길로 접어들어 낮은 담 너머로 얼른 마루 밑 토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옥순이 신발이 보이질 않고 찬바람만 텅 빈 마당을 홀로 쓸고 있는 집안에서 옥순이 목소리도 들리질 않아 더욱 궁금증만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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