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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92 조회 : 2,222




겨울하늘 빛이 늘 그렇겠지 하며 별반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었다.
그런 덤덤한 생각은 어렸을 적이나 조금은 자란 듯한 느낌이 드는 그즈음에나 매한가지였다.
그래서인지 하늘은 겨우내 희끄무레한 민낯을 심심치 않게 드러내었다.
더불어 우중충한 분위기를 곧 잘 보여주는 하늘이 그닥 별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데 요 근래에는 보기 드물게 하늘이 높지막이 해말끔한 모습을 도드라지게 드러냈다. 그런 참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흔쾌해져 마음 또한 그저 가볍기만 했다. 더불어 온 누리가 환희에 가득 차올라 생동감이 넘쳐나는 새봄을 과묵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
허나 좀처럼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겨울은 깊은 침잠의 상태로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동녘에 찬연한 빛으로 또렷이 떠오른 해를 오늘 아침녘에 또 보았다. 그리고 귓불이 시리도록 썩 달갑지 않게 부는 매서운 바람도 텃마당에서 심드렁하게 다시 만났다. 내 몸 주위를 감싸고 어푸수수하게 부는 바람에 바깥 날씨는 더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그래선지 몸밖으로 숨을 내쉴 때마다 체내(體內)에서 뜨거운 김이 코와 입으로 허옇게 새어 나와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늘 텃마당에서 서성거리던 닭들도 호된 추위를 견뎌내기가 어려웠는지 아침 햇볕이 인색하게 들이 비치는 굴뚝 옆자락 흙벽에 바짝 몸을 들붙여 웅크리고 있었다. 더불어 봉창 앞 사철나무에 제가끔씩 자릴잡고 앉아 그리 짖어대며 부산을 떨던 참새들도 겨우 한두 마리 정도밖에 눈에 띄질 않아 왠지? 주위의 분위가 좀 허전키만 했다.

그런 탓인지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맵싸한 바람 속에 흙먼지가 가볍게 푸석이고 아랫도리에 한기를 느꼈다. 텃마당에 내려서 앞뜰을 바라보니 돌무더기 쌓인 둔덕마루에 감나무 한 그루가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채 뻘쭘히 서 있어 그리도 쓸쓸하게만 보였다. 다소 앙상해 보이는 그 나뭇가지에 까치 한 마리가 추위도 아랑곳 않고 무엇을 애태워 갈구하듯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우짖었다.

부엌 입구에 길게 늘어트린 볏짚 거적때기의 버름한 틈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송진 타는 냄새가 비릿하면서도 텁텁한 흙냄새와 함께 퍼져 났다. 매섭게 몰아치는 삭풍에도 방안이 그리 춥지 않았던 것은 비단(非但) 부엌 아궁이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의 훈기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시퍼렇게 널름거리는 불잉걸보다 더 작열(灼熱)한 우리 네 식구의 끈적거리는 정이 늘상 살아 숨쉬기 때문이었다.

나와 옥순이 우리 둘 중에 어느 누구도 읍내로 이어진 통학 길에 동행을 하자는 선약은 커녕 어떤 제의도 주고받은 적이 전혀 없었다. 더욱이 어젯밤 같이 두 모녀의 감정이 격해져 심하게 말다툼을 하는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런 약속을 할 조건과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자신도 모르게 옥순이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자분자분 일기 시작했다. 그런 감정이 나로 하여금 들 주막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려는 마음을 어느 순간부터 접게 했다.

선명한 아침 해가 두어 그루 화살나무를 쓰다듬고 있는 동네 남쪽 어귀 밖에 있는 원목다리 쪽으로 자연스레 발길이 옮겨졌다.
내가 늘 가던 밭둑길로 들어서질 않고 엉뚱하게 정 반대쪽인 남쪽머리 동구 밖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의아스러운지 순덕이 어머니께서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바라보기에 알맞은 크기로 자란 소나무들이 가지런하게 층을 이룬 둔덕 아래에 자리잡은 등 굽은 다랭이논 모퉁이를 끼고 돌아 냇둑으로 비스듬히 내려섰다.
동네 어귀 냇둑 길에 아침 햇살을 듬뿍 받으며 저만큼 앞서 홀로 걸어가는 옥순이 모습이 조금 외롭게 보이는 듯싶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더욱 참하게 보였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하게 나타난 내 모습에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눈빛이었다. 몇 걸음 앞서 걸어가던 옥순이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우며 말을 건넸다.

“상운아 너 왜? 버스를 안 타구 이쪽으로 걸어 왔냐? 나사 쳐다보기 싫은 인간들 때문에 그렇다 치지만 너까장 걸어갈 필요가 뭐 있냐? 널랑은 그냥 편하게 버스 타고 가지 뭣 땀시 사서 생고생을 허는지 모르긋네.”

다소의 부담감이 있었는지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옥순이의 어투가 조금은 까칠한 듯 하면서도 두루뭉실하게 들렸다.
그래서 나도 얼른 속내를 감추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 뱉고 말았다.

“그냥 운동두 할겸 나두 너처럼 걸어서 학교에 댕길려고 하는디 왜? 그러냐? 나 너랑 하냥 가고 싶어서 온건 절대루 아니여 아예 말하지만 그런 생각일랑은 눈꼽만치라두읍쓰닌께 그리 알어”

그런 내 말에 추위에 두 귓불이 발그레한 옥순이가 이미 내 속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 피식 웃고 있어 그 모습이 참으로 복스럽게 보였다. 그렇게 옥순이와 나, 우리 둘은 아주 친숙한 모습으로 사람 하나 겨우 비켜 설 만큼 좁다란 냇둑 길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걸었다.

동네 어귀를 벗어나 원목다리 앞에 이르니 십 리쯤 떨어져 있는 읍네 모습이 바로 손끝에 와닿을 듯싶게 바라보였다. 나름대로는 제법 걸었나 싶은데 발걸음은 그저 그 턱에 물고 있는 것만 같아 그날따라 읍내 학교로 향하는 십리길이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 한참을 걷다보니 몸에 달아 오른 열기로 추위는 한결 덜한 듯싶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읍내에 닿고 싶은 섣부른 조급함에서 오는 피로였는지 발바닥이 후끈거리고 다리가 조금씩 저려왔다. 어찌 보면 그동안 버스를 타고 편하게 읍내로 통학을 한 탓인 것 같았다.

허연 살얼음으로 얄포름하게 덮인 논 자락이 올곧게 내리쪼이는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온통 번득거려 눈이 시렸다. 논 자락 이 곳 저 곳에는 탐스런 빛깔의 청둥오리들이 무리지어 내려앉아 먹이를 찾으려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곧게 뻣은 철길 옆 둔덕진 밭에는 까마귀들이 인기척에도 그다지 개의치 않고 머릴 두리번거리며 느물거렸다.

조금 멀리 바라보이는 높다란 금강 둑 위엔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향하는 학우들의 행렬이 보였다. 그 모습들이 추위에 다소는 을씨년스럽게 보여도 끈기 있는 생동감이 가득 넘쳐났다.

그런 생기 어린 모습들이 추위에 잔뜩 움추렸던 몸을 풀어주워 홀가분한 기분을 가득 불어 넣어 주었다. 그리고 마음 한 편으로는 그토록 염원하는 내 작은 소망이 요원할지라도 늘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더불어 언젠간 삶의 찬연한 무지개가 떠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마음속 깊이 가져도 보았다.

어득히 흔들리는 갈대숲에 스치는 겨울 찬바람소리가 그지없이 쓸쓸하기만 했다. 희끗희끗한 갈대가 탁한 빛깔의 몸을 반쯤이나 덥수룩하게 숙이고 있는 샛강 가장자리엔 살얼음이 열어 붙어 가뜩이나 웅크려 드는 몸에 냉랭한 기분을 더했다. 마을 앞을 거쳐 가는 희뿌연 강물이 거침새 없이 개어귀로 흘러들어가니 그 냇물이 강물과 서로 맞닿는 곳이 바로 금강이다.

단작스럽게 생긴 앞마당을 어느 역무원이 깔끔하게 쓸어 놓은 한적한 채운역 앞마당에 닿았다. 그 지점이 마을로부터 읍내까지의 거리 중에서 얼추 절반이 되는 거리였다.
마을 앞 산모롱이를 돌아 나오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등 뒤에서 요란하게 들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는 덥수룩한 대나무 숲 위로 기차에서 뿜어 나온 연기가 희뿌옇게 실실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토록 느물거리던 까마귀들이 달리는 열차의 기적소리에 놀라 정신없이 날아가는 모습이 한데 어울려 아담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렇게 나와 옥순이 우리 둘 사이를 에워쌓고 있는 그모든 것들이 포근한 정경으로 다가섰다.

비록 멀리서나마 바라 볼지라도 하늘이 허락한 자연의 품속에 자릴 잡은 작은 마을 모습이 그토록 정감이 다붓하게 어려 향촌(鄕村)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에 마음 편한 것이 세상 밖 그 어느 곳과 비교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만 같았다.

아슴아슴하게 바라보이는 마을엔 추운 바깥 날씨 탓인지 때가 아침녘인데도 어쩌다 우물터에 물을 길러 가는 것 같은 아낙네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그 외는 그다지 마을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잘 띠질 않았다.

그런데 온 사방이 아무런 거침새 없이 탁 트인 들녘인지라, 냇둑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동네 사람들 눈에 유난스레 잘 보일 것만 같았다. 그런 관계로 혹여 남 말하기 좋아하는 동네 아주머니들 입술에 오르내릴까 싶어 기우일지는 몰라도 한편으론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기차가 고적해 보이는 작은 간이역으로 진입을 하려나 철제 시그널 앞에서 또 한 차례 날카로운 굉음을 남기며 기적을 울렸다.
논산 읍내를 벗어나 강경 읍내로 향해 달리는 열차엔 통학생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때 ‘휘이익휘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 기차를 바라보았다.
우리들보다는 한두 해 위턱으로 보이는 상급생들이 객실 밖 승강기 쪽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 두 손가락을 입에 넣고 나와 옥순이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더불어 듣기에 거북한 놀림 비슷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 잡다한 소리가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전혀 가당치도 않게 지껄이는 말들에 개의치 않으려 잠시 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두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옥순이가 성이 잔뜩 난 목소리로 기차에 타고 있는 짓궂은 학생들을 향해 당차게 소릴 쳤다.

“웨매 요시랄 놈들, 비싼 밥 처먹고 시방 뭐시라고 주둥박을 놀려대는지 모르것네! 야, 이 자식들아! 쓰잘데기 읍는 소리 내 질러대지 말구 지발 허라는 공부나 혀. 저 지랄허는 것들이 공부는 지지리도 못허드리구.”

작은 몸뚱이 그 어느 곳에서 터져 나오는지 당찬 옥순이의 고함 소리에 순간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달리는 기차를 향해 한바탕 속 시원하게 소리를 지른 옥순이가 나를 쳐다보며 책망을 하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야, 너는 속창알머리두 읍냐? 입 뒀다 뭐헐려구 그딴 소리를 듣고도 빙신처럼 고개를 돌리냐, 왜? 난중에 학교에 가면 끌려가서 얻어터질까 봐 무서버서 그랬냐? 에이구 빙신아.”
“옥순아, 너 그렇게 함부루 씀벅씀벅 말하지 말라구. 뭐 상급생이라구 얻어맞을까 봐서 그런 건 절대루 아니닌께.”
“흥, 그렇게 겁 안 난다면서 그럼 왜? 죽은 자라 모양 잔뜩 움츠리구 말 한 자리두 못하구 있었냐?”
“그냥 하두 어이가 없어서 같이 갈구면 똑같은 사람 될까 봐 그랬구, 뭐 사실 너랑나랑 아무런 사이두 아닌닌께 그랬지 뭐.”
“넌 시방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소릴 허는디, 저런 놈들은 한번 쎄게 몰아붙여야 담에라두 다시 안 그런다구. 안 그래두 요즘 속 시끄런 일두 많은디 저것들까장 나대서 참 아침나잘부터 기분 잡치게 하네 에이 씨.”

그렇게 찝찝한 분위기를 남기고 기차는 그리 멀지도 않은 읍내를 향해 뒷모습을 점점 줄이며 매몰스럽게 사라졌다. 그들이 남기고 간 말들이 귀에 담기 정말 거북스런 저속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소리를 들을 만큼 빌미를 준 것 같았다.
텅 비워진 들녘에 오가는 사람 단 하나 없고 더욱이 같이 어울려 가는 일행도 없이 단둘이서 어깨를 맞대고 걸었기 때문인 듯했다.

그저 어설프게 햇볕을 내리쪼이던 아침 해가 머리 위쯤에 떠오르자 느낌으로 좀 포근해지는 듯했다.

“참, 상운아! 어저께 밤에는 울 엄니 땜시 증말로 미안케 됐다. 니가 으등박씨 모양 밥이 읍어서 어디 얻어먹으러 온 것두 아닌디 그냥 쫓겨나다시피 가게 해서 영 마음이 편칠 못했어. 니가 보다시피 어제는 그렇게 됐으닌게 이해를 해줘라 응?”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마음에 그도 꺼림칙하게 걸렸던지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듯 옥순이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니네 엄니랑 잘 풀었냐? 으쨌냐? 나두 너 그렇게 울고 있는디 훌쩍 혼자 나올랑께 집에 다 가도록 영 맴이 좋지 않더라.”
“야 풀께 뭐 있구 잘되구 말구 헐께 뭐 있냐? 이미 다 엎질러진 물인디. 그게 다시 쓸어 담을 수 있냐? 어차피 나는 나대루 독허게 맴먹구 살라는 팔짠가 봐, 내 복이 그것밖에 안되는가 보지 뭐, 인제사 누굴 탓허것냐? 안 그래?”
“건 그렇구 옥순아! 이따가 저녁나절 집에 올 때 니가 나보다 먼저 오게 되면 그냥 먼저 가지 말구 사주거리 다리 앞 외딴집에서 기달려라. 내가 학교 끝나면 얼른 달려올게, 알았지?”

강경 읍내 입구에 있는 사주거리 다리는 강경천과 읍내를 연결해 주는 다리로 다리 교각 밑에는 강물에 수위를 조절하는 아주 육중한 나무 수문이 달려 있었다. 그 다리를 사람들은 언제부터였는지 사주거리 다리라고 불렀다.
아마도 그 다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어 그리 불렀던 것 같았다.

동쪽으로 트여진 길을 따라 가면 내가 살고 있는 채운면을 거쳐 논산 읍내로 연계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서쪽으로 향하면 강경 읍내를 거쳐 군산 쪽으로 신작로 길이 트여졌다. 또한 남쪽으론 역시 채운면 남쪽 최단 변두리 지역인 동심리 동네를 거쳐 연무대에 닿을 수 있다. 더불어 북쪽을 향해 쭉 올라가면 성동면을 거쳐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로 향할 수 있었다.

우리들 키 높이의 몇 배나 되는 읍내 샛강 둑에 오르려 사람들이 억지로 길을 내놓은 반비알진 지름길을 따라 강경천 둑 위에 올랐다. 강경천 둑에 오르니 저마다 맞바람을 피하려 더욱 몸을 앞으로 구부려 열심히 페달을 밟아 줄지어 달려가는 자전거의 행렬이 진풍경을 이루었다.

이제 읍내 어귀에 닿았다는 안도감에 제일 먼저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읍내 상업고등학교였다. 언덕 위에 우람하게 떡 버텨 서 있는 팽나무와 누릇누릇 빛이 바랜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붉은 벽돌로 예스럽게 지은 향학(向學)의 전당이었다.

늘 그맘때쯤이면 연무대역을 출발한 아침 통학 열차가 채운역을 거쳐 읍내 샛강 철교를 넘으려 했다. 짧기만 한 강경선 종착역인 강경역에 진입을 미리 알리려나, 기차가 기적소리를 날카롭게 내어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야, 상운아! 저기 연무대 통근차 온다. 얼른 내 옆에서 좀 멀찍허게 떨어져라. 누가 아냐 혹시 석란이가 차타고 오다가 너랑 나랑 같이 가는 거 보면 뭔 헛소문을 낼지, 그 입 싼 지지배가 입이 근질거려 가만히 있것냐? 안 그래?”
“야 너는 뭘 우리가 어쩟다구 그리 난리냐 친구끼리 같이 걸어서 학교에 갈 수도 있는 건디. 뭐가 이상하냐? 그렇게 보는 인간들이 더 이상허구 웃습지, 안 그러냐? 인제 다 왔는디 뭘 떨어져서 걷구 말구 허냐, 그냥 가면 되지 뭐.”
“아니 그래두 나는 니 생각해서 그런 건디, 그리구 그 먼 길을 니가 나랑 같이 버스도 안 타구 함께 가면 왜? 이상허게 생각을 안 허긋냐? 그러다 니가 석란이헌티 오해를 받을까 봐서 그런 거야.”
“야 참 웃긴다. 내가 가랑 무신 관계가 있다구, 오해를 받구 말구 허냐? 어디 고자리 무서워 장 못 담글 나두 아니구, 글구 석란이는 이미 종구를 좋아하는디 내가 신경 쓸 일이 뭐 있냐?”
“어! 그럼 너 석란이 하나두 안 좋아한다구? 참 이상허네.”

옥순이가 내가 한 말이 미심쩍은지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리며 의미를 알 듯 모를 듯싶은 웃음을 조금 묘하게 지었다.

‘타당타다당, 타당타다당’ 하는 소리가 좀 요란스럽게 들렸다.
다리를 잇는 이음새 부분에 덧씌워진 철판이 통과하는 자동차들의 바퀴가 철판과 맞닿아 내는 마찰음이 커다랗게 들려왔다.

사주거리 다리 앞에는 내가 사는 집보다 더 작아 보이는 아주 작달막한 주막집이 한 채 외떨어져 있었다.
여름엔 길 가는 행인들이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찬물 한 그릇을 얻어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다. 나이 육십을 훨씬 넘기신 두 노인 내외가 오가는 행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고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냈다. 그리고 먼 길을 걸어오느라 갈증이 난 행인들에게 잔술로 막걸리를 팔았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강변 세도벌에서 나는 개구리참외를 가져다 팔았다. 겨울철에는 가게 앞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자전거 통학을 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누런 찐빵을 팔고 있었다.

아침밥을 든든히 먹었는데도 가마솥에서 뜨거운 김을 물씬물씬 내는 달짝지근한 찐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배가 고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찐빵을 그리도 좋아하는 내 친구 ‘깨곰보’ 성구 생각이 문득 났다.

사주거리 다리를 건너려는데 옥순이가 갑자기 나보다 몇 걸음 앞서 조금 빨리 걷기 시작 했다. 시내가 점점 가까워오자 그제서야 본능적으로 주위에 이목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기차를 타고 가면서 비아냥대는 한두해 윗턱인 상급생들에게 좀 과격할 정도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그저 의아스러울 정도로 차분하면서도 온순한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제가끔 크고 작은 건물들을 스쳐지나 도심을 꿰뚫는 단발머리 작은 소녀의 모습이 그날따라 더더욱 왜소하게만 보여 한가닥 측은한 여운을 가슴 속에 자잔하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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