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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93 조회 : 2,190




저녁 해는 결코 서두름이 없이 기우러 가고 있었다. 노을은 마냥 붉게 타올라 드넓기만 한 들녘을 영롱한 빛으로 곱게 물들였다.
그런 충만한 은혜 속에 하루를 마무리 하는 듯했다.
내가 서 있는 땅이 축복으로 가득 차오르니 늘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에 감사하고 싶다.
더불어 자연의 숭고함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저 멀리 시야에 아물거리는 그쯤에 내 고향 들메 마을이 다소곳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앞 들녘은 마을을 제 살붙이처럼 자애롭게 에워싸 언제 바라보아도 마음이 한결 포근했다. 살아온 나날 동안 너무도 많이 바라봐 눈에 익은 탓인지 마을이 마치 지근거리에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더불어 주위를 한 바퀴 돌려보면 끝없이 펼쳐진 들녘의 방만함에 가슴이 절로 뭉클해졌다.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계절은 시간의 흐름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의 옷을 걸쳐 입었다. 다스한 봄 햇살에 연녹색 새순은 푸른 잎으로 성글게 변해 튼실한 가지를 하늘 향해 힘차게 뻗었다. 저마다 피어나는 꽃들은 시기적절하게 알찬 열매를 고루 맺어 모두에게 삶에 원동력을 부여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겨울이라는 반증(反證)도 있지만 넓은 들녘이 그지없이 황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허나 땅이 얼어 부르트고 문드러지는 순환에 고리가 없다면 어찌 약동하는 새봄의 푸름이 도래(到來)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그런 감정에 젖어드는 휑한 마음을 달래주려나 저녁 해는 다붓이 기울고 있었다. 노을이 선홍빛으로 평원을 아우르니 시샘하는 겨울바람이 어푸수수하게 스쳐 지났다.

종일토록 온 들녘을 헤집던 저녁 해는 제 할일을 다한 듯 마냥 타올라 겨울하늘의 공허함을 메워 놓는 듯했다. 어느 누구인가 한 사람을 가슴 조려 기다린다는 것은 자못 가슴 벅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지는 노을 속에 애틋한 감성이 젖어들면 더욱 그 기다림의 비중이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탐스런 저녁노을이 불그레하게 타올라 호서평야를 두루 아우르고 있었다. 그 빛은 내 고향 채운 들녘 땅에 머물러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몸을 깊이 파고들어 역동에 의지를 키워냈다. 그런 장대한 힘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숱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며 축복 어린 삶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쯤엔 불그스레하게 달아오르는 낙조 속에 눈에 띄는 모든 사물들이 각기 크고 작은 선연한 모습으로 가슴 뭉클하게 다가섰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뭔지 모를 애잔함도 내 작은 가슴속으로 잔잔하게 젖어들었다.
그런 나의 일상이 남들의 의식과 눈에는 그저 별반 다름없는 소소한 일상으로 보일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무상하게 스쳐가는 들녘 바람소리에도 잠시인들 차분히 귀를 기우려보면 잊혀진 듯싶던 크고 작은 온갖 기억들이 알 듯 모를 듯 새롭게 돋아났다.

하늘 향해 힘찬 나래를 펼치는 몸집 큰 겨울 철새들의 군무에 화답을 하듯 드넓은 들녘은 노을빛으로 더더욱 붉게 물들여졌다. 꼭 필요한 만큼만 얻고 하늘 높이 나는 철새들의 장엄한 몸짓에서 무수한 자유로움을 느끼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 연유인지 사방으로 시원스레 확 트인 들녘을 바라볼수록 의미 깊은 여운이 감칠맛 나게 묻어났다.

허나 처해진 삶이 지극히 열약하다보니 그 무엇 하나 남들 앞에 떳떳이 내세울 것 하나 없이 궁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왜소해지지 않으려 나름대로는 안간힘을 썼다. 그런 삶의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은 우연스러움 속에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더불어 그로 인해 얻어진 계기가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하나의 만남을 이루어 놓는 듯했다.

아마도 옥순이와 나와의 관계가 그랬던 것 같았다.

느껴지는 감정이 우정의 폭은 분명 넘어 선 듯싶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둘 사이엔 그런 묘한 감정이 소리 없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너무나 순수했기에 서로가 얼굴을 대하기에 그리 거북스럽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 둘은 순수함을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크게 의지하려 했다. 어쩜 처해진 환경이 가난이라는 굴레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은 그리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한 가지 더욱 중요한 것은 납득이 되질 않는 어른들의 이기적인 행동에 반목하려는 공통심리가 심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이유가 아마도 우리 둘 사이를 더욱 밀착시켰는지도 모른다.

덧없는 시간의 흐름은 벌써 음력으로 11월 초순에 접어들어 동짓날이 되었다.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매섭게 차갑기만 하니 동지가 추위 노릇을 단단히 하려고 잔뜩 벼르는 듯했다.
이제 이삼일 후에는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뒤를 이어 성탄절이 다가오니 또다시 한해가 조용히 저물어 가는 것만 같았다.

활달하게 보냈던 학과가 끝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소 혼잡스런 시가지를 벗어날 때까지는 분잡하게 느껴졌다. 시내 외곽 사주거리 다리를 건너 선 후에야 들녘에서 한껏 불어오는 싸한 바람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굳이 따지고 보면 삶의 환경이 별스레 달라질 것도 없는 내 작은 집이었다. 그래도 나를 기다려 줄 가족들이 있기에 그런 굳건한 믿음이 발걸음을 더욱 서둘게 했다.

읍내를 벗어나 마을까지는 그다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십여 리 길이었다.

계절이 겨울철인지라 들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불었다. 마을을 향해 걸어서 되돌아가는 길이 추위 속에 조금은 곤욕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귀가 길에 옥순이는 늘 나보다 먼저 다리에 도착했었다.
내가 이처럼 추운데 점방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옥순이가 추위에 떨고 있을까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바쁜 걸음으로 걸으니 ‘챌칵챌칵’ 가방 속에 끼워 있던 주판알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자발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둑 너머 베틀 공장에서 베를 짜는 소리가 귓가에 잔잔하게 맴돌았다.

얼마 후 상업고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육중한 수문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단발머리 옥순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왠지 서운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살아온 나날만큼 눈이 아프도록 보아온 얼굴인데 다시금 새롭게 그리워짐은 무슨 심사일까? 나 자신에게 스스로 자문을 해보기도 했다.

외딴 점방집 앞에 내어놓은 찐빵을 찌는 가마솥에 땔감으로 쓰는 석탄 타는 냄새가 비릿하게 풍겨나고 있었다. 서서히 허기를 느껴 마음은 이미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 가마솥에 가 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그쯤에서 접어야만 했다.

샛강 둑에는 각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학생들의 자전거 행렬이 길게 늘어져 석양빛과 더불어 아담하게 조화를 이뤘다. 이따금씩 스쳐 지나는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피하려 몸을 온통 뒤로 돌리려니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조금은 엉거주춤하며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수문다리를 막 건너서는 옥순이의 모습이 작달막하게 보였다.

“야, 상민아! 오래 기달렸냐? 근디 날 한질라 차가운디 점방집 안에라두 들어가서 기달리지 너두 나처럼 고뿔이라두 걸리면 으짤라구 그런다냐?”
“야, 장삿집에 찐빵 한 개두 안 팔어주면서 넘네 점방에 들어가서 넉살좋게 불이나 쬐고 앉자 있으면 누가 좋다구 허긋냐? 니가 점방 주인이라두 기분 좋것냐? 안 그려?”
“허긴 니 말이 맞다. 너나 나나 지질이두 못사는 팔자라서 찐빵 하나두 맘 놓구 못 사먹는구먼 에이구 .”

옥순이가 야무지게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숨이 넘어갈 정도로 가삐 내쉬며 기침을 거푸하였다. 아침저녁으로 학교를 오가느라 몸이 피곤했던 탓인지? 아니면 들녘 찬바람에 고뿔이라도 들었는지? 옥순이가 뽀얀 목덜미에 파르스름한 실핏줄이 선연하게 돋보이도록 잦은 기침을 연신 내뱉어 보기에 안쓰럽기만 했다.
한 해 전만해도 옥순이의 그런 모습을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선에서 생각을 했는데 요즈음은 작은 것 하나에도 애잔하게 마음이 쓰였다.
아마도 그만큼은 우리 둘 사이가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았다.

조금 멀리 원목다리가 바라보이는 샛강 둑을 내려서 폭이 좁은 냇가 둑으로 내려서니 몰아치는 골이 깊은 찬바람이 우릴 기다렸다는 듯이 세차게 휘감고 불어왔다.
옥순이가 기침을 더욱 심하게 하면서 손에 쥔 책가방이 무거운지 자꾸만 몸 가눔을 못하고 애를 쓰기에 그도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책가방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옥순이 손을 덥석 쥐고 말았다.

“야, 너 시방 뭐하는데 내 손을 잡구 그러냐? 아이구 남들 안 보기 다행이지. 증말루 남들 볼가 무섭네.”
“아니, 난 니가 책가방 땜시 힘들까봐 그냥 좀 들어줄라구 그랬는데...”

내 딴엔 몸이 아픈 것 같아 도우려고 한 것이었는데 옥순이가 약간 당황하는 반응을 보이며 가볍게 짜증을 부렸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저 무심코 했던 내 행동이 더욱 당혹스럽고 멋쩍기만 헤서 그런 서먹한 분위기를 얼른 벗어 날 심사에 괜실히 헛기침을 거푸 내었다.

불그레하게 퍼져나는 노을빛을 온몸에 가득안고 우리 둘은 한동안 말 한마디 없이 걸었다.
조금은 무료해질 정도로 답답한 시간의 공간이 우리 둘 사이에 얼마쯤 흘렀다. 그런데 그런 멋쩍은 분위기를 해소시키려는 듯 마을 지나 논벌로 끝없이 이어지는 전봇대 위에 까막까치 두어 마리가 속없이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아무런 말없이 함께 걸어가던 옥순이가 못내 부끄러운 듯 의식적으로 내 눈길을 피하려는 듯했다. 그런 머쓱한 분위기에서도 내 가슴은 이상하리만큼 두근거렸다. 두 귀가 시리도록 싸늘한 공기 속에서도 두 뺨은 서서히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옥순이가 이내 눈치 챌까 무서울 정도로 숨결이 자꾸만 가빠졌다.

일찍이 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감정의 늪으로 가파르게 빨려들어 갔다. 무엇이라 한 마디 정도는 다정스럽게 하고도 싶었는데 심약한 마음 탓인지 옥순이에게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질 못하고 실금실금 눈치만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 둘은 하얀색 페인트칠을 한 행선지 표시판이 단출하게 서 있는 플랫폼에 키 작은 소나무 서너 그루가 외롭게 보이는 채운역사 앞에 닿았다.
희뿌연 석탄 연기가 함석 연통 끝머리로 솟아 올라 부는 바람결따라 흩트러지는 역사 앞에 이르자 건물 유리창에 저녁노을빛이 영롱하게 발하고 있었다.
텅 빈 대합실이 맞바로 보이는 자그마한 역사 앞마당엔 불어오는 바람이 혼자서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릭 역 앞 점방집에서 키우는 작은 강아지가 낯선 우리들 모습이 그다지 썩 달갑지 않은 듯 실팍하게 짖지도 못하면서 작달막한 역사의 마당을 냉큼 가로질러 갔다.

길섶 야트막한 쓰레기장에 자잘한 구멍이 수없이 뻥뻥 뚫린 채 자줏빛으로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석탄 잿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런데 다 타버린 석탄 덩어리 한 개가 무심코 발끝에 걸렸다,
가뜩이나 그런 분위기가 답답하던 차에 먼지가 푸석이도록 냅다 차버렸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옥순이가 입 밖으로 따스한 입김을 내쉬며 참으로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야, 상민아! 아까 참에 내가 그 말했다구 화났냐? 참 머슴애가 밴댕이처럼 속 좁기는.”

가볍게 눈을 흘기는 그 모습이 그리도 귀엽게 느껴졌지만 그런 속내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내가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멋없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아니 그냥.”

겨우 애매모호하게 ‘그냥’이라는 볼멘소리 밖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잦은 기침소리에 마음이 안쓰러워 무심코 옥순이의 손을 단 한 번 잡았을 뿐인데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둘은 말문을 닫은 채 마을 앞으로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내 키보다 훨씬 더 크게 자라 적회색 빛으로 빛바래져 가는 샛강의 갈대숲은 세찬 바람에 그리 부대껴도 결코 나처럼 가볍게 초조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순리 따라 다시금 돌아올 봄을 듬직한 모습으로 차분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물속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저 강은 오늘도 어제처럼 작은 마을 들메를 어미의 젖가슴처럼 포근히 감싸 안고 있었다. 거침새 없이 흐르는 강물은 불그스레하게 녹슨 수문이 턱 버텨 서있는 금강의 입목인 개어귀로 쉴 새 없이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들녘에 부는 겨울바람도 만만치 않지만 강 골 따라 부는 냉기서린 강바람도 싸늘키만 했다.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멎어 국토가 남과 북으로 갈려 휴전이 된지도 벌써 수해가 지났다. 전쟁이 남긴 그 상흔이 서서히 지워져 가건만 들녘 한구석에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부서진 소련제 탱크와 두 군데 동강나 잘려나간 공굴다리의 녹슨 철교가 그 때까지도 그 자리에 흉물스럽게 육중한 몸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참으로 평온하게만 느껴지는 들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량함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들녘 한 켠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원목다리도 쓸쓸해 보이기는 매 한가지였다. 한때는 한양 천리로 과거를 보러가는 과객들과 숱한 보부상들이 강을 건너 충청과 호남을 연결하던 원목다리도 이런저런 애환을 가득 담고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잊혀져 가는 것 같았다. 숱한 세월의 풍파에 할퀴어 서로 맞물린 돌 틈이 버려지고 흙더미가 무너져 내려 그 또한 세월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언제 보아도 그지없이 포근하게만 느껴지는 마을의 초가지붕 굴뚝에서 저녁밥을 짓는 희뿌연 연기가 하늘 위로 흐트러졌다. 마을이 눈앞에 가까워올수록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 속에 더욱 허기를 느꼈다.

서서히 찾아드는 어둠살에 검푸른 빛 대밭이 마을에 운치를 더했다. 땅거미가 지는 마을 어귀를 돌았으나 그때까지도 우리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옥순이도 그런 분위가 어색하고 추위에 책가방을 든 손이 시린가? 이따금씩 손을 번갈라 바꿔가며 차가워진 손을 입에 대고 가볍게 입김을 쏘였다.

그런 우리들의 속내를 비아냥거리듯 앞산자락 어느메에서 속절없이 울어대는 산새의 울음소리가 가참하게 들렸다.

삶의 체취가 지긋이 묻어나는 동네 안에 이르자 저만치 앞서 동네 고샅길을 분주히 걷는 눈에 익은 듯싶은 옆 동네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밤새 아랫마을 용화리 어느 집에서 상(喪)을 당해 부음을 알리려는 것 같았다. ‘부고요’ 하고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를 치며 누런 편지봉투 안에 담긴 부고장을 사립짝에 적당히 끼워 넣고 있었다.

“워메 으쩐다냐 웃동네 용골 누구네 집에 초상났는가 보네.”

그토록 오래 지속되었던 침묵을 깨고 불쑥 내뱉는 옥순이의 목소리가 조금은 생뚱맞게 들렸다.
창백한 모습만큼 새치름하게 떠오른 초저녁달이 감나무 가지 우듬지에 걸릴락 말락하게 보였다.
바로 그 아래 옥순이네 집 사립짝이 고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여 싸게, 가봐 배 고풀 건디.”

옥순이가 말을 아끼듯 참으로 짤막하게 한마디 남기고 자기네 집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늘 건네는 헤어짐의 인사인데도 그날만큼은 유난스레 차갑게만 느껴졌다.

동네 어른들의 입담을 귀동냥하지 않은지라 건너 마을에서 작고한 망인(亡人)이 그 누구인지 채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햇살 다스하게 깃드는 등뫼산 남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비석골 공동묘지 그 어느메 한 곳을 채워 자리를 잡는가 생각을 하니 왠지 인간의 삶이 그리 길지도 못한 듯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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