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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98 조회 : 2,167




숭고한 자연은 끝없는 변화를 지속하고 계절은 그에 순응하듯 변화를 반복했다.

하늘이 사나흘을 두고 변덕스럽게 꾸무럭한 형태로 흐렸다 개이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하루 내 하늘에 나지막하게 눈구름이 가득 끼어 날이 잔뜩 흐리더니 저녁 늦은 무렵부터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밤늦게 눈발이 제법 굵어지더니 이윽고 날이 훤히 밝아올 무렵부터는 포근하게 내리는 함박눈으로 바뀌어 마음이 예법 설레었다.
하늘 멀리 저 높은 곳에서 내리는 하얀 눈은 숱한 날을 가슴 졸여 기다린 보람이 있었나 보다.
하늘하늘 바람타고 전율하듯 땅위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눈꽃이 피어나는 까닭은 한 자락 가슴 시린 그리움을 허공 저만치 떨쳐내려는 저마다의 애틋한 몸부림인 듯싶었다.

소복하게 내린 눈이 이미 들메마을을 새하얗게 품안에 보듬고 있었다.
더불어 앞산도 온통 새하얗게 뒤덮어 가슴 설레게 온통 설원을 이뤘다.
그리고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앞펀더기가 산뜻한 은백색 설원을 이뤄 바라보는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고 말았다.

앞산 비선봉에도 내린 눈이 다보록하게 쌓여 설백색의 운치를 신비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산자락을 두른 나뭇가지마다 은빛 설화를 이루니 여느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색다른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겨울만이 줄 수있는 진솔한 정감인 듯 싶었다.

해를 거듭해 갈수록 더욱 듬직하게 서 있는 고태의연한 낙락장송은 추울수록 더욱 청록의 빛을 온연하게 발하며 숙연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아름답게 펼쳐진 마을의 모습에서 정이 끈끈하게 묻어나 한동안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만 보았다.
가득 쌓인 눈덩이를 무겁게 떠받들고 있는 소나무와 잡목 나뭇가지들이 무척이나 힘에 겨운 듯해 보였다.

조금 멀리 보이는 면소재지엔 눈이 듬뿍 쌓인 초가집들에 가려져 겨우 그 끝만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가 더욱 도드라지게 보여 성스러움을 가득 자아냈다.

세수를 하려고 앞마당에 내려서니 발목이 푹 빠질 정도로 눈이 예법 쌓여 있었다.
소담스럽게 자릴 잡은 마을의 초가지붕 위에도 흰 눈이 듬뿍 쌓여 내 눈 안에 하나의 경이로운 풍광으로 다가섰다.
그런 참한 모습들이 탁한 세태에 찌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듯했다.
온갖 고뇌로 뒤엉킨 번민들이 잠식한 내 육신을 잠시인들 해말끔하게 정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가슴을 쫙 펴고 다소 차가운 듯싶으면서도 시원스런 공기를 폐 속 깊이 힘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내 숨을 몰아 내쉴 때마다 온몸으로 가득 번져나는 청량감은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값진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어 보았다.
더불어 그 참한 모습들 하나하나가 묵시하는 것이 너무도 컸기에 의도적으로 마음을 가지런히 가다듬으려 했다.

분분하게 내리는 눈이 시야를 가려 저 멀리 들녘너머 읍내의 전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에 또 다시 쓸쓸함이 잔잔하게 감돌기도 했다.

면소재지로부터 읍내로 이어지는 신작로도 내려 쌓인 눈에 한껏 뒤덮여 있었다.
길가 양쪽으로 줄져 서 있는 가로수를 따라 눈 속에 거북이걸음을 하는 자동차의 행렬이 아스라이 보여 경적소리 또한 은연하게 귓가에 와닿았다.

동네 어른들은 그렇듯 눈이 많이 내리면 저마다 입을 모아 그 이듬해엔 보리농사 부터 어김없이 풍작을 이룬다고 했다.
허나 그런 어른들의 말씀이 선뜻 실감나게 몸에 와 닿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몇 차례를 거듭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기근에 너나 가릴 것 없이 뼈저린 고통을 치렀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처절한 아픔을 당하지 않으려는 각오에 찬 말로 들렸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진절머리 나는 역경을 몸소 겪었으니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마을 앞개울 둑길에는 내년에 상급학교 진학을 앞둔 동네 동생들이 겨울방학의 오붓함도 잊은 채 한데 어울려 다정스레 걸어가고 있었다.
헝겊 천으로 둘둘 말은 책보자기를 어깨에 질끈 둘러매고 학교로 향하고 있는 활기찬 모습이 보기에 믿음직스러웠다.

시야로부터 조금멀리 떨어진 국민학교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교실 지붕 위로 난로의 연통에서 퍼져나는 연기가 하얗게 피어올라 그 또한 정겹기만 했다.
아마도 학교 소사 일을 보시는 양씨 아저씨께서 아침 일찍부터 난롯불을 피워 놓으신 듯했다.

불현듯이 국민학교 졸업반 시절 근엄하셨던 담임선생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알콩달콩 깊은 정이 들었던 같은 반 급우들의 면면이 생소하게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마도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구애됨이 없는 영원불변의 뜨거운 인간 본연의 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앞 나무다리 위에는 두툼한 솜바지저고리에 벙거지를 푹 눌러쓰신 순아네 할아버지가 소달구지를 몰고 오셨다.
내리는 눈 속을 헤쳐 동구 밖 거북바위 앞으로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순아네 할아버지께서 마을로부터 시오리쯤 떨어진 까치마을(연무대)에 있는 두부공장으로 가셨다.
군부대에 납품할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비지를 직접 사서 소달구지로 실어 나르셨다.
마을 사람들은 그 비지로 부족한 양식을 채우려 끼니때 밥에 섞어 먹기도 했고 겨울 김장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 비지찌개를 끓여 먹기도 했다.
그렇게 비지는 궁색한 겨울을 넘기는데 알게 모르게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마을 대다수의 집들이 그 비지를 감지덕지하면서 먹고 살았다.
그러나 남들은 없어서 못 먹는 비지를 소먹이로 주는 집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단 한 집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종구네 집이었다.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그런 작은 것 하나에서도 빈부의 차이는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이라도 먹고 살아야 하는 내 처지와 부유가 넘쳐나 소먹이로 주는 그들의 삶과 비교를 해보며 격이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나 비록 삶의 질이 낙후되었을지라도 정신만큼은 절대로 그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다.
무릇 그 누구를 탓하기엔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쳤다.
어찌 보면 모진 세파 속에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고, 아니! 그렇게라도 살아야만 했기에 있는 힘을 다해 억척을 떨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내리던 눈이 멈추려나, 소강상태로 접어든 듯 주춤해졌다.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식구들이 모두 마당으로 나왔다. 싸리 빗자루로 가득 쌓인 눈을 쓸고 고무래로 눈을 밀어 마당 한쪽 가장자리에 수북하게 끌어 모아 눈을 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틈새에 동네 아이들은 그도 신이 나는지 서로 어울려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눈덩이를 굴리고 더러는 눈싸움을 하며 구김살 없이 마냥 쾌활하게 뛰어놀았다.
더불어 동네 개들도 흰 눈이 그리도 좋은지 제 세상을 만난 듯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그런데 슬그머니 마루 밑을 내려다보니 검둥이 또한 오간데 없었다.
아침밥을 얼렁뚱땅 먹어치우고 벌써 아랫마을로 내려가 동네 개들과 무리를 지어 정신없이 노는 듯했다.

중천에 떠 있는 해가 머리 위를 비켜서는 점심때가 되자 흐릿한 구름사이로 해가 새치름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구름사이를 비집고 나온 해를 똑바로 바라보기엔 눈이 시려 거북스럽기만 했다.
더불어 눈이 시린 만큼 싸늘했던 아침나절에 비해 날씨가 퍽이나 포근해졌다.
다소곳하게 내리쪼이는 햇볕이 주위에 방대하게 펼쳐진 은혜로운 자연의 모습들과 적절하게 부합되어 기분이 산뜻해졌다.

따스한 햇살에 지붕 위를 덥고 있는 눈이 조금씩 녹아내리는지 추녀 끝에서 지시랑물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옥순이 어머니께서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 우리 집으로 마실을 오신 것은 점심때를 훨씬 넘겨 해가 동네 한복판을 비켜 설 무렵이었다.
서로 인연을 맺어 흉허물 없이 지낸지가 오래인지라 수더분하게 사립짝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집에 놀러 오신 것을 식구들에게 알리기라도 하시려는 듯 기침을 두어 차례 하시고 성큼 마루 위로 올라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네 집 안방처럼 아랫목으로 앉으셔 눈길에 젖은 버선을 벗으시며 어머니를 향해 말씀하셨다.

“그나저나 뭔 놈의 눈이 이리두 옴팡지게 내려 번졌다냐? 니네 집으로 오는디 양쪽 발목댕이가 푹 빠져서 을매나 용을 썼던지 버선이 몽땅 다 젖어버렸다. 어여, 니 버선짝이라두 좀 줘 봐라! 발이 젖어 끄끕한 것이 영 개운치 않구먼 그려.”

“그러길래 왜 아니라냐? 지금까장 눈이 내둥 안 오더니만 한꺼번에 오라지게 몰아붙여서 왔는가 부다. 그나저나 눈이 이리 엄청나게 왔는디 니네 영감이랑 그냥 집에 틀어박혀 있지 뭣 땀시 멀쩡한 버선은 생으로 버리구 그러냐? 우리네 같은 것들이사 그저 광목버선이나 깁어서 신고 살지만 니 옥광목 버선은 돈을 설찮이 주고 샀을 껀디, 버선이 젖어서 워쩐다냐? 암튼 내가 버선을 찾어볼께.”

어머니께서 옥순이 어머니가 눈길에 무리하게 오신 것이 적잖이 부담이 되시는지 가볍게 눈을 흘기시며 아랫목에 놓인 고리짝 문을 여시고 뒤적뒤적 버선을 찾고 계셨다.

“허긴 니 말두 맞지만서루, 가뜩이나 말수도 적은 그 양반하고 진종일 얼굴 맞대고 있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 글구 좀 차분하게 방에 있는 승질도 못 되서 입에서 밥숟가락만 빼면 집구석 앞뒤를 돌아댕기면서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서 일거리를 만들어 꼼지락거리며 한시도 가만히 안 있는당께. 그러다가 쪼매 심심허다 싶으면 온다간다 말 한자리 없이 삼베바지 풋방귀 새듯 면소재지로 그냥 훌러덩 내뺀다닌께. 참말로 남들 모르게 어디다 금쪼가리라두 숨겨놨는가?”

가뜩이나 고집이 세고 타고난 성품이 그런지 늘 바지런하게 부산을 떠는 종구 아버지가 조금은 못마땅하신지?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시며 말을 마치셨다.

“허기사 그 승질머리가 어디 가긋냐? 좀 유별나야지. 기나저나 너 니네 서방이 면소재지 자주 가는 모양인디 단디 챙겨라. 엊그제 면소재지에 두루두루 볼일이 있어 내려갔는디 왜? 면사무소 건너편에서 푸줏간 하는 강씨네가 어디서 얼굴이 좀 반반한 작부 하나를 데리고 와서 고기도 구워 팔 겸혀서 이번에 선술집을 하나 차렸다고 하던디. 혹시 그 기집헌티 눈이 멀어 바람이라두 나면 어쩐다냐?”

여느 때에도 두 분 사이에 격 없는 농담이 오고가는지라 어머니께서 옥순이 어머니에게 가볍게 농을 거셨다. 그러자 옥순이 어머니께서도 지지 않을 새라 어머니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말을 받아치셨다.

“야! 그기사 자기 신세 자기가 잘 알아서 하것지 뭐. 이제 다 늙어 가는 나이에 늘그막하게 쪽박 찰 일 있남? 어디 기집이 없어서 하필이면 딸자식 벌되는 술집 작부년에게 눈길을 주것냐? 안 그러냐?”

“야, 옥순이 에미야! 내가 그저 허튼소리 하는 게 아니여. 이 세상 남정네들 죄다 불러다 놓고 물어봐라. 열 계집 마다하는 사내놈 있는가?”

“그래도 그렇지 세상 사내들이 몽땅 다 그렇것냐? 사람 나름이지 안 그려?”

“아니여. 그 뭐시냐? 영택이 아버지 좀 봐라. 그해 가을에 그 아줌니 죽고 세상 못살 것 같이 땅을 치며 울고불고 그러더니, 때가 되닌께 첨에는 동네 사람들 알게 모르게 사부작사부작 읍내로 댕기더니만... 어느 날 떡하니 자기 딸 같은 귀때기 새파란 기집애를 옆구리에 차고 동네에 버젓하게 나타나지 않더냐?"

“허긴 내가 보기에도 그건 좀 그렇더라. 당사자 영택이 아버지 마음은 어떨란가 몰라도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나닌께, 그렇게 사는 게 썩 어울리지도 않더라.”

“아 글쎄, 나이가 찰만큼 차오르는 다 큰 지 딸자식하고 그래 한 지붕 밑에서 살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더니만, 결국에는 딸자식하고 그 기집이 머리끄뎅이를 잡고 난리를 떨어 기집년이 집을 뛰쳐나가 집구석이 그 꼴이 되더니만, 아예 이제는 떡하니 동네 사람들 보라는 듯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끌어들여 그것도 한동네서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사니, 어디 인두겁을 쓰고 사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냐구? 내 원 참.”

“그려 그건 니 말이 맞어! 영택이 아버지가 좀 심했지! 허지만 으짜것냐? 그렇게 사는 것도 다 타고난 팔자지 뭐. 내 꼬라지가 이래서 뭐라고 넘 말은 못한다마는 암튼 참말로 낯은 두꺼운 사람들이여.”

옥순이 어머니께서도 나이가 지긋하신 종구 아버지와 어떤 속내로 재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보면 그다지 남들 앞에 썩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였다.
그런 탓에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말 중에 오고가다 보면 다소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렇게 두 분께서 한동안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계셔도 이야기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불행하게도 순덕이 어머니께서는 농아이신지라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셨다.
그저 두 분의 얼굴 표정만을 살펴 지례짐작만을 하시며 뜨개질을 하실 뿐이었다.
그리고 이젠 제법 컸다고 온 방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노는 순덕이도 아직은 나이가 어린지라 더욱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방 한쪽에서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헌 털실을 동그랗게 둘둘 감아 만들어 주신 털실 뭉치를 가지고 놀고 있는 순덕이를 조금은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옥순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지지배가 눈이 크고 맑아 콧날이 오뚝하고 이마가 훤한 것이 난중에 다 크고 나면 한 인물 하긋네 그려. 암 그래야지! 타고난 팔자가 사나워 이리 고생을 하고 살지만 은젠가는 넘들 보라는 듯이 살아야지.”

“글쎄다.니 말대루 맘먹은 대로만 되면 좀 좋것냐? 니말마따나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다 지가끔 타고난 팔자대로 사는 거지 뭐. 나도 저 어린 것이 지 애비 얼굴도 모르고 지 이름 석자를 아직까지도 호적에 올리지 못하고 저리 사는 것을 보면 맘이 짠해 죽것단다.”

세상물정 모르고 그리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순덕이가 못내 측은해 보였던지 어머니께서 순덕이를 끌어안으시고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려주셨다.

“근디 상민에미야!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 너도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언제까지 쟤들 두 모녀를 데리고 살래? 글구 인제 봄 되면 너두 니네 오빠 있는 까치마을로 이사를 해야 할 건디 그때도 하냥 데리고 갈 꺼냐?”

좀 전과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어머니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고 마음을 먹고 눈길에 발이 빠지면서도 일부러 찾아오신 듯 보였다.

“그래야지 어쩌것냐? 기새라 맺은 인연인데 내가 고향 마을 떠난다고 그냥 길바닥에 나 몰라라 하고 내박칠 수는 없는 거 아니여? 어쩔 수 없이 하냥 가야지 으쩌것냐?”

“음, 왜냐면 아래깨 우리 집 그 양반이 나한테 넌지시 말을 하는데, 왜 방앗간 일하는 순태아저씨 있지? 근디 그 양반이 은연중에 순덕이 에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참에 두 사람 짝을 맺어주면 어떨까? 하던디, 니 생각이 어떤지 몰라 그냥 어물어물 넘기고 말았어. 그 양반이 몸이 그래서 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것이 흠이지만 원체 바지런해서 자기 식솔들 밥은 안 굶길 것 같은데 니 생각은 어떠냐?”

옥순이 어머니가 은근 슬쩍 어머니의 속마음을 떠볼 양으로 말을 건네셨다.

“글쎄다. 아무리 친형제 같이 허물없이 한솥밥을 먹고 한방에서 머릴 맞대고 잔다마는 혼인이라는 것은 인륜지대사인지라 내가 선뜻 나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함부로 못하것다. 그리고 금시초문으로 듣는 말이라 좀 더 차분하게 생각을 해봐야것다. 글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인 순덕이 에미 마음이닌께. 암튼 기회를 봐서 한번 물어볼게.”

의미심장하게 말씀 하시는 어머니의 차분하신 태도로 보아 평소에 촐싹거리며 가볍게 행동하시는 방앗간 순태 아저씨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으신 듯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상대가 순태아저씨라는 말에 떨떠름했다.
그런데다 그런 일을 새중간에서 추진하려고 마음먹은 당사자가 다름 아닌 종구 아버지라는 말에 더욱 거부감이 앞섰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방앗간 순태 아저씨가 종구 아버지에게 필요이상으로 온갖 아첨을 떠는 그 모습이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던 터라 더더욱 거부감이 생겼다.
그리고 불과 일 년 반 동안의 그리 길지 못한 세월이지만 그 동안 내 동생 순덕이와 정이 들 만큼 들었기에 마음에 허락이 되질 않았다.

더욱이 내 의식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그렇게 흐른 그 동안 비록 간고하게는 살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서로 헤어져 산다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어린 순덕이와 나 사이엔 정신적인 동질감이 이미 듬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 허물없이 숱한 말들이 두 분 사이에 오고 갔다. 그러면서도 내심 마음을 졸였던 옥순이와 나에 대한 낙서 이야기는 두 분의 입에서 끝내 한마디도 나오질 않아 적이나 안심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자서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정녕 두 분께서 그 일을 모르고 계시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으시는 것인지? 지극히 궁금하기만 했다.

잿빛구름이 묵직하게 드리워진 하늘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는 땅과 서로 적절하게 맞닿아 그 끝을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아물아물하게 지평선을 이뤄 놓았다.
해거름 녘이 되자 끝없이 이어진 지평선을 따라 불그레한 노을빛이 지평선을 따라 굵은 황금빛 띠를 둘러 곱살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탐스런 노을빛을 따라 증기기관차는 검은 연기를 단작스럽게 하늘가에 흩트리며 남녘으로 거침새 없는 질주를 계속했다.
기차의 꽁무니가 점점 작아져 끝내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려고 했다.
그런 아련한 뒷모습에 뜻 모를 애잔함이 가슴속에 잔잔하게 묻어나 또 하나의 그리움을 흠씬 남겼다.
그 짙디짙은 그리움 속에는 저주스런 전란으로 주어진 삶을 채 영위하지도 못하시고 억울하게 눈 감으신 내 아버지와 가난이 앗아간 얼굴 한구석조차 기억할 수 없는 내 누이가 오롯하게 담겨 있었다.

저물어가는 시간의 한 모퉁이에서 이제 노을 끝자락에 허한 내 가슴을 몽땅 꺼내어 비워버리고 싶었다.
그 애틋한 그리움이 내 육신을 떠나 사라질 때까지라도 노을빛에 시뻘겋게 물들여 보고 싶었다.
결코 끝이 안 보이는 가난에서 얻어지는 한숨이 응고되어 핏멍울 맺힌 가슴은 마치 체기가 있는 것처럼 마냥 미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젖어드는 눈자위가 그도 싫어졌다.
못내 이루지도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부질없는 몸부림인 듯싶어 한편으론 그저 멋쩍기만 했다.
눈언저리를 흠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풀나풀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몽환적인 그리움에 앓아누운 가슴은 역시나 따갑기만 했다.
그런 아린 마음속에서도 무릇 기대어 의지해 보고 싶은 딱 한 사람 있었다.
그 것은 다름 아닌 나에겐 단 하나 밖에 없는 애틋하게 소중한 단발머리 소녀인 옥순이었다.

세상사 흐름의 깊은 의미를 익히 잘 알고 있는 세월의 연륜이 짙게 묻어난 어른들의 시야에는 이런 내 모습이 비록 부질없고 하잘것없는 불장난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간절한 요원은 작은 인연 하나라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더불어 진취적인 사고로 알찬 성숙의 단계를 거쳐 내 마음에 소녀와 더불어 영원히 승화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늘 부끄러움에 주저하는 용기 없는 자세에서 벗어나 좀 더 가까이 대하여 진솔한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그것이 내 작은 바람이었다.

온 누리를 밝혀 주는 여명은 지난밤의 산고가 있었기에 도래되는 것이고 그런 새벽이 존재하기에 밝은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였기에 선혈(鮮血)처럼 불그레하게 물들어가는 저녁 해가 서편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집집마다 굴뚝에선 서로 앞 다퉈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꾸밈없는 전원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날이 점점 더 어두워지니 마치 풀을 베는 낫처럼 가늘게 등 굽은 겨울 초생달이 새치름하게 떠올랐다.
동구 밖 방죽가 높다란 미루나무 우듬지에 천연덕스럽게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며 동네 개들은 맹깔없이 소리를 내어 짖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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