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동에는 야트막한 반야산이 있다. 그 산자락 중턱에 천년고찰인 은진 관촉사가 오붓하게 자릴 잡고 언제나 넓다란 연무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찰 경내에는 거대한 자연 석불인 은진미륵(恩津彌勒)이 천년의 온갖 풍상을 묵묵히 견디며 듬직하게 서 있어 그위용를 자랑 하고 있었다. 높이 18,21m 의 화강석재로 세워진 미륵보살은 고려 광종 19년에 세워졌다고 전해 내려 오고 있다..늘 입가에 온화한 미소(微笑)를 지으며 자혜롭게 앞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 고찰과 미륵석불은 군내에 사는 불교 신자들의 정신적인 믿음의 본거지였다. 더불어 봄과 가을철엔 인근에 근접해 있는 학교들의 수많은 학생들이 소풍을 가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관촉사에서 동쪽으로 높다랗게 보이는 제방 둑이 둘러져 있었다. 그 제방 둑 너머엔 일제 강제 점령기에 만들었다는 논산평야의 젖줄인 탑정저수지가 방만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수지 둘레길 따라 한 바퀴를 도는데 어림잡아 십여 리가 족히 되니 그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높다란 수문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물은 수많은 포말(泡沫)을 이루어 저수지 둑 밑의 상평리 마을 앞을 굽이돌았다.
거침새 없이 흘러내린 물은 은진면을 경유하여 강병 육성의 요람지(搖籃地)인 연무읍의 외곽지점을 통과했다. 그리고 몇 개의 크고 작은 교량(橋梁)을 지나 채운면 앞 들녘으로 유유히 흘러들었다. 오랜 세월동안 물결은 여러 마을의 앞뜰과 뒤뜰에 여러 갈래의 크고 작은 냇가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냇물이 한곳으로 모여 샛강을 이루고 그 샛강 물은 개어귀를 거쳐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
땡볕이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철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동네 아이들은 흙탕물 속에서 붕어와 참게들을 잡았으며 놀았다. 어쩌다 미끈둥거리는 미꾸라지가 손에 걸리면 재수 없다고 투덜대며 냅다 내던졌다. 그러다 운이 좋은 날에는 여법 굵은 메기와 잉어를 잡는 횡재를 하기도 했다. 냇가 가장자리 버드나무가지에는 서서히 달아오르는 초여름 땅의 열기에 지친 듯 검정 실잠자리가 내려앉아 쉬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꽃망울을 달고 있는 개망초 위에 하얀 나비가 분주하게 나붓거렸다.
뭉게구름 떠 있는 청아한 하늘이 더없이 펼쳐진 내 고향 마을 들메의 전경은 그 어느 것 하나도 나무랄 데 없이 수려하기만 했다. 하루 내 마을 앞 냇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종구네 누런 황소와 순아네 검은 염소의 등 언저리가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빛에 번질번질하게 윤기가 돌았다. 그렇듯 내 고향 땅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개울둑 너머 다랑논 천수답에는 경수 아저씨가 늦저녁까지 메말라가는 논에 물을 끓어 올리고 있었다. 양쪽으로 버텨 놓은 버팀목을 양손으로 붙들고 둥그런 물수레바퀴의 날개 판을 두 발로 번갈아가며 부지런히 밟으셨다. 위로 끌어올려진 냇물이 봇도랑을 타고 높은 자리 논배미로 시원스레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냇둑을 타고 자전거를 타고 가시던 선생님과 무자세(무자위) 위에 서있던 경수아저씨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경수아저씨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구 선생님 오랫만이네유? 근디 우쩐 일루 동네에 오시는감유?” “네. 일이 좀 있어서 종구네 집에 가는 길이구먼유.”
그러자 경수 아저씨가 다소는 더듬거리듯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의 얼굴과 잔뜩 굳어진 내 얼굴을 번갈라 바라보시며 다시금 말씀을 이으셨다.
“그렇구먼유. 지두 점심참에 동네 사람들헌티 소문을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암튼 걱정이 되네유.” “네 그렇네유. 그래도 찾아뵙고 사정을 해 봐야 될 것 같네요, 암튼 그리 아세유. 그럼 저는 이만 ……." “네, 살펴가세유.”
경수 아저씨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마을 안팎으로 소문이 날대로 난 것 같아 동네 사람들과 얼굴 마주치기가 더욱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좁다란 둑길을 따라 마을 종구네 집으로 용서(容恕)를 빌러 가고 있었다. 잠시 후 종구와 심하게 싸움을 했던 장소인 비석골 앞을 지났다. 이윽고 눈앞에 마을의 모습이 더 가깝게 보이자 몹시 불안한 마음에 심장(心臟)의 박동(搏動)이 거칠게 뛰었다.
자전거가 마을 앞 나무다리 밑에 있는 빨래터를 지날 무렵 학교에서 돌아온 같은 반 옥순이가 둥그런 사기요강을 볏짚 수세미로 닦고 있었다. 옥순이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선생님과 나를 발견하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선생님께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고, 선생님과 나는 자전거를 멈추고 함께 내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유?” “응 옥순이구나. 옥순아 종구, 읍내 병원에서 왔데?” “아니유! 쪼매 전까장은 안 온 거 같던디유.” “음, 그래?”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선생님은 나보다 몇 걸음 앞서 천천히 걸으셔 둥구나무 밑에 앉아 계신 마을 노인 분들과 인사를 나누셨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개울가에서 둑으로 올라선 옥순이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야, 상민아 니네 집 참말루 큰일 나긋드라!” “왜?” “음 ……. 아까, 우물가에서 종구네 엄니가 동네 아줌니들헌티 말하는디. 종구네 집에 빚진 거 다 내놓으라 하구. 만일 못 내어 놓으면 읍내 재판소에 고소를 혀서 너랑 니 엄니 동네서 쫓아내버린디야.” “증말?” “그랴, 거짓부렁이 아니구 진짜라닌께!” “글구 니네 아부지 묘등두 자기네 산에서 파가라구 한데. 그러니 으짜면 좋다냐?” “응, 알았어!”
억센 종구아버지의 팔에 붙들려가 온 동네를 끌려 다니면서 욕을 먹을 때부터 이미 마음에 각오는 하였던 터였다. 허나 옥순이 말대로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기에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마을 앞 둥구나무 앞에서 잠시 쉬어 가시려는 듯 선생님이 자전거를 받쳐 놓으셨다. 둥구나무 아래 앉아 계시던 동네 어른들이 서로 평상 위에서 일어나시어 선생님에게 자리를 권하셔 몇 번 정도 사양하시던 선생님이 평상 위에 앉으셨다. 그리고 뒤따라가던 나는 동네 어른들과 눈이 마주치면 큰 죄를 지었기에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마치 도축장(屠畜場)에 강제(强制)로 끌려가는 황소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서 있었다. 둥구나무 아래 앉아 계시던 동네 어른들이 선생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암튼 큰일은 큰일이구먼, 그려! 안 그런감?” “허긴 그려. 이동섭이가 누군감, 막말루 하늘이 무너져 내려두 절대로 안 참을 거구먼 그려,그놈의 승질머리가 좀 별나야지.” “근디 가만히 생각혀보면 뭐 그렇지두 안 혀. 철딱서니 없는 나이 어린 것이 저질러 놓은 일인디. 막말루다가 저 어린 걸 가막소에 넣지는 못허는 법인디 뭘 으짜것는가?” “기나저나 죽은 기태 처두 참 딱허지 딱혀. 지난해 여름 기태가 샛강에서 그렇게 물에 빠져 죽구 홀로 어린 자식새끼하고 살어보것다구, 매일같이 읍내루 댕기면서 새오젓 장사까장 허는디 말여.” “그러게 말여, 내 생각은 이려! 동섭이가 절대루 누구 말도 안 들을 건께. 이참에 이장이 나서서 치료비 부담한다고 하구 사정하는 수밖에 없지. 뭐 별도리 있것는가?” “아 그리만 되면 뭘 걱정허긋는가, 이 사람아? 뭐신가 어려울 거 같으닌께. 이렇게 학교에서 선상님이 다 찾아 오신거지 안 그런감?”
동네 어른들 모두가 깊은 관심 속에 걱정을 해주시는 것이 고마웠지만 그리 좋지도 못한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퍽이나 부담스럽기만 했다. 분명 그날의 일은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의 리듬에 균형을 깨는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약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자(母子)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날이었다. 가뜩이나 몇 달씩 밀린 원금은 둘째치더라도 그에 대한 이자까지 밀려 눈만 뜨고 나면 빚 걱정에 얼굴 필 날이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큰일을 저지르고 나니 참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불을 보듯 뻔했다. 빚을 제때에 갚지 못하자 늘 꺼림칙하게 대하며 온갖 거친 소리를 서슴지 않던 종구네 아버지의 험상궂은 얼굴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눠보려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동네 앞산을 바라보았다. 노을빛이 가득 깃든 산은 언제나 자순한 모습으로 어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내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주진 못했다. 시간은 그런 내 어린 마음의 조급함도 끝내 외면한 채 덧없이 흐르고 있었다. 온 대지를 단숨에 집어삼킬 듯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내 어린 가슴 구석구석에 짙게 남아있는 그 아픔까지도 남김없이 쓸어 담아가길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