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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37 조회 : 1,818




광활한 논산들녘을 시원스레 가로지르는 호남선 철길 옆 자락에 삼십여 호 초가집들이 오순도순 머릴 모아 마을을 이뤘다. 동네 고샅길은 답답하리만큼 더없이 비좁기만 했다.
어쩌다 소달구지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길을 걷던 동네 사람들이 길 양쪽 토담에 바싹 달라붙어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 비라도 흠뻑 내히는 날엔 지나가는 달구지가 튀기는 흙물이 옷자락에 묻어날 정도였다.

고샅길 흙 담장을 덮고 있는 볏짚으로 얽어놓은 이엉이 얼추 한 해가 다 되어 가니 눈과 비에 젖어 희읍스름하게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나지막한 두 그루 향나무가 서로 다정스레 마주보고 있는 마을 우물터엔 동네 아낙네들이 저녁밥을 지으려 보리쌀을 씻고 동이에 물을 길어 나르느라 꽤나 부산해 보였다.
우물터 맞은편 내 친구 주현이네 집 뒷뜰 대나무 숲이 노을빛에 젖어들어 시푸른 댓잎이 저마다 앞을 다퉈 희번득거렸다.

넓은 앞 들녁 끝머리 금강 둑엔 저녁노을이 여운을 곱살하게 남기고 있었다. 노을빛에 듬뿍 젖어 든 고샅길을 따라 종구 집 울타리를 끼고 돌았다.
종구네 집 앞에 이르자 두려움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하여 가쁜 숨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 숨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런 내 속내도 모르는지 골목길 맞은편 구장님댁 돼지우리에서는 늙은 수퇘지가 끼니를 찾는지 소갈머리 없이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며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종구네 집 울타리에는 노을빛에 젖어 등 언저리에 윤기가 푸르스름하게 도는 애호박 한 덩이가 잎사귀 사이로 작달막하게 보여 그도 앙증스러웠다. 그리고 종일 그리 부지런히 꿀을 나르던 벌들도 하루가 저무는 것을 알아챘는지 토방(土房)에 놓인 벌집 안으로 부산스레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의 상징물인양 높다랗게 버텨 선 종구네 집 대문 앞에 자전거가 멈춰 섰다.

“안녕하세유, 종구 어머님 계신가유?”

나보다 몇 걸음 앞서가시던 선생님이 조금 열려진 종구네 집 대문 안으로 먼저 들어가셨다. 그리고 마른 논배미에 자라처럼 잔뜩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린 나는 그 뒤를 바짝 따라 들어갔다. 그러자 안마당을 지키던 거위 한 쌍이 하얀 깃털을 세워 길게 목을 앞으로 내밀면서 텃세를 부리듯 겁 없이 달려들었다.
밖이 소란스러움을 느끼셨는지 종구 어머니가 안방 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어메 선생님 오셨구만유. 어서 이리루 올라오셔유.”

읍내 양품점(洋品店)에서 비싼 돈을 주고 샀다면서 온 동네에 그리 자랑을 하던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종구 어머니가 밉살스러울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선생님을 맞았다. 그리고 선생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셨다.

“참 걱정이 많이 되시겠습니다. 이런 일이 없어야 되는디.”
“아 왜 아니래유? 먼 넘에 철천지 웬수를 졌다구 사람을 그러콤시루 맹기러놓았나 모르것네유.”
“종구 어머님께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유. 그저 용서해 달라는 말밖에는 …….”
“어찌 용서를 해줄 수 있는 감유? 멀쩡헌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디. 절대루 안되지유.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망정이지. 지 서방 세상 살기 싫어서 물에 빠져죽은 걸 가지구 온 사방간디 돌아 댕기면서 우리가 상처를 줘서 죽었다구 줴 소문을 다 내고 …….”

작달막한 키만큼이나 야무지게 생긴 얼굴의 종구 엄마가 어린 병아리를 채어가는 솔개처럼 날카롭고 무서운 눈으로 나를 계속 쏘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지 남편 병 고친다구 몇 날 밤낮으로 찾어와 쌀 빚 좀 달라구 하두 졸라싸서 오죽하면 저러랴 싶어 우리 종구 아버지가 자꾸만 안 줄려고 하는 것을 조르고 졸라서 빌려준 죄가 그렇게두 큰감유? 그런디두 동네 사람들은 속두 몰르구 우리만 나쁘게 생각하는구만유.”

자기 자식이 크게 다쳐 마음 아픈 이유도 있겠지만 너무도 강경하게 말하는 속모를 이면(裏面)에는 어린 내가 모르고 지났던 또 하나의 골 깊은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종구 어머님 좀 진정하시구 지가 상민이 모친이 읍내에서 오시면 같이 찾어뵙겠습니다.”
“선생님 저는 유, 그 여편네랑 말두 하기 싫으니깐 오실라면 생님이나 혼자 오셔유.”
“네, 잘 알고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바짝 움츠린 나는 지남철(指南鐵)에 작은 못이 찰싹 달라붙듯이 선생님 뒤를 따라 걸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온종일 지서에서 시달리느라 점심조차 먹지를 못한 것이 생각났다. 아마도 그런 탓인지 갑자기 허기가 져서 배가 몹시 고팠다.

종구네 대문을 나선 선생님과 함께 마을 정미소(精米所) 앞을 지나고 있었다. 담벼락엔 지난번 선거 때 붙여놓은 민의원 출마자들의 해묵은 벽보가 동네 개구쟁이의 손끝에 찢겨나간 듯 흉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득 지난해 가을 학교운동장에서 수많은 면민들이 모인 가운데 민의원을 뽑는 선거의 합동연설회가 있었던 일이 윙윙거리던 스피커 소리와 함께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어느 야당 후보가 울부짖듯 소리치던 말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말이 아직도 어린 뇌리 속에 옹골지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와 더불어 자기가 열성으로 지지했던 집권 자유당 후보가 당선 되었다고 온 동네를 휘돌며 거드름을 피웠던 밉살맞은 종구네 아버지의 얼굴도 찢겨 낡은 벽보 위에 겹쳐 보였다.
저녁노을이 빛을 거두고 어둠살이 서서히 드리워지는 마을 입구 둥구나무 아래는 동네 사람들이 서둘러 저녁밥을 먹으러 들어갔는지 텅 비어 있어 다소는 쓸쓸해 보였다.

그리 넓지 않은 달구지 길을 따라 담임선생님과 함께 산 밑 집으로 가려고 철로 건널목 바로 앞 둠벙가에 닿았다. 진종일 물가에서 노닐던 오리 떼들도 해거름을 아는지 모두 사라지고 휑하게 텅 비어 있는 제법 큼직한 방죽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둠벙가에는 동네에서 조금은 외떨어진 초가집 한 채가 단출하게 서 있었다. 그 집에는 한국전쟁 때 함경북도 흥남에서 살다가 인민군으로 끌려와 전투 중에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반공포로로 남한으로 전향하신 아저씨 한분이 외롭게 홀로 살고 계셨다.
수더분한 성격에 유난히 손재주가 좋으신 그분을 마을 사람들은 이름을 대신해 그분의 고향이 함경남도 흥남 지방이라서 그냥 부르기 쉽게 ‘흥남이’ 라고 불렀다.
그분은 내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룰 때에도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도와주신 아주 고마운 분이었다.

철길을 건너려 하자 철로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전봇대에서 바람을 타고 울리는 송전의 소리가 어쩌면 그리도 슬퍼 이내 곧 터져 나오려는 내 울음소리와 같아 그리도 섧게만 들려왔다.
몇 그루 갈참나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룬 가파른 언덕배기에 오르니 언제나 푸근하게 바라보이는 마을 앞 등뫼산이 장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선홍빛으로 번져나는 노을빛을 걷으려고 스멀스멀 찾아드는 어둠살에 거무스레하게 보였다.
그라도 정신적으로 버팀목의 역할을 해주는 산이 있어 나름대로는 자위를 하며 살 수 있었다. 그렇듯 언제나 말없이 입을 굳게 다문 저 산은 무언 속에서도 숱한 가르침으로 어린 나를 키워주었다.

산자락 중턱에 아무 말씀도 없이 영면해 계신 아버지가 그리도 미울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나 또한 무엇이라고 단 한마디 말도 못하고 아버지의 유택이 있는 곳을 그저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듯 힘이 들 때에 그저 말없이 누워만 계시지 말고 무엇이라 한마디 말이라도 해주셨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을 어른들은 흔히 말씀하시길 가난에 찌들려 모진 세파에 부딪기며 살아가는 것도 다 저마다 타고 난 팔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팔자도 내 어린 몸으로 버텨내기엔 참으로 힘에 겨웁기만 했다.
그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울먹여졌다. 그와 동시에 무슨 말이든 목이 터져라 허공에 대놓고 끝없이 소리를 치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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