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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38 조회 : 1,797




앞산 언덕배기엔 숱한 해를 넘겨 허리가 굽은 노송 한 그루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어난 가지 끝에 다보록하게 달린 솔잎들이 마냥 푸르게만 보여 한껏 활기차게 보였다.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솔잎들을 두루 감싸 안아 담홍빛으로 윤기가 돋아 눈에 띌 만큼 반질거렸다.
어느새 저녁 해는 서편에 뉘엿뉘엿 저물고 있건만 여름날씨답게 후덥지근한 바람이 언덕바지 위에서 둑 밑 소로로 불어왔다.
두서너 걸음 앞서가시던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시며 다리를 절름거리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상민아, 종아리 많이 아프냐?”

조금은 자상하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얼굴이 한결 부드럽게 보였다. 온종일 땀에 젖어 힘겨워하는 내 모습이 그도 안쓰러우신지 그윽하신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그제서야 선생님께서 화가 풀리신 것 같아 다소나마 마음이 놓였다.

“아니에유.”

무엇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뜨거움이 발끝에서부터 전신(全身)으로 번져났다. 그리고 두 눈이 옅은 물기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양쪽 어금니에 힘을 잔뜩 주었다.

“상민아 지금 내가 하는 말 귀담아 들어라.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내가 말했지? 참는 자는 꼭 승자가 되는 법이야 그걸 절제하지 못하면 인간은 낙오자가 되고 …….”

언제부터라 가늠하기 어렵지만 살아오는 동안 그리 수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터이라 선생님 말씀이 그리 새롭게 들리질 않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꼭 이렇게 말을 하고 싶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 아빠는유, 우리 마을을 지켜볼라구 공산당 놈덜과 싸우시다 돌아가신 훌륭한 분이에유. 근데 종구가 훌륭하다고 칭찬은 못혀두 그런 우리 아버지가 인민군헌티 급읍시 달겨들다가 따꿍 총 맞구 죽은 거라구 친구덜 앞에서 남사스럽게 흉을 보아 도저히 참을 수 읍어서 그만 …….’

힘을 주어 그리도 하고 싶었던 말이련만 그 무엇이 그리도 입을 굳건히 다물게 하고 말았다. 그런 내 어린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주시는 듯 선생님이 말씀을 이으셨다.

“상민아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이셨단다. 심성이 꽤나 고우시고 자상하셨는데, 그리고 ……. 달리기도 너무 잘 하셨지! 가을 운동회 날 부락대항 이어달리기는 니네 동네 채화리가 늘 일등을 했었는데.”

못내 아쉬워하시며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는 듯싶은 선생님 말씀에 조금 가라앉으려 했던 마음이 다시금 울먹여졌다. 거세게 밀려오는 인민군 놈들과 싸우시다 허무하다 못해 그리도 초라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신 아버지가 어린 가슴에 응어리져 풀리지 않는 한(恨)을 남기셨다.
그런 이유로 애타게 그리워지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 순간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상민아, 어머니는 매일 늦게 오시니?”
“네!”

노을빛이 잔뜩 깃든 논둑길에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난 검푸른 콩잎들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뉘엿뉘엿 저무는 저녁 해가 남긴 선홍빛 노을이 서쪽 하늘가에 탐스런 자태를 우아하게 드러냈다.
언덕배기 참나무가지에 머물러 있던 까치가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 ‘푸드득’ 소리를 내며 산자락으로 날아갔다.

“상민아, 너 어머니에게 잘해드려야 한다, 알았지? 참 불쌍한 분이시다. 옛날에는 그리 잘살던 집 고명딸이었는데 …….”

선생님은 참으로 만감이 교차되시는 조금은 떨리시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에 눈물이 일렁이며 이내 떨어질 것만 같은 흐려진 시야에 내가 사는 산 밑 오두막집이 눈에 띄었다.
조금 멀리서 집을 향해 걸어가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검둥이가 잽싸게 내달려오고 있었다.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적적한 집에 그라도 검둥이가 있어 큰 위안이 되었다.
지난해 어느 봄날 남산리에 사는 먼 친척집에서 어린 강아지를 데려왔다. 이제 한 해를 넘기자 여법 체격을 고루 갖춘 성견이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식구라고 해봐야 달랑 두 식구가 사는 단출한 오두막집에 선생님과 함께 사립짝 안으로 들어섰다.

찌든 가난에 거의 면역(免疫)이 되어 버린 내 삶의 단면처럼 뜨락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 몇 개가 소담스럽게 놓여 있었다. 뒤뜰 싸리 울타리에는 앞 다퉈 피어난 새하얀 찔레꽃들이 얼굴을 내밀어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선생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간고한 우리 집 형편을 익히 잘 알고 계셔서 충분히 이해를 해 주실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어린 마음에는 그렇게 간고하게 사는 집 안 모습의 그 모두가 내심 부끄럽기만 했다.
추녀 밑 제비 둥지에서 떨어진 오물(汚物)이 한낮 햇볕에 잘 말라붙어 마루를 더럽혀 놓아 서둘러 걸레로 훔치고 이내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침 학교 가기 전에 먹다 남겨놓았던 밥그릇과 비릿한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조개젓 반찬그릇들을 얼른 치웠다.
가난을 숙명(宿命)처럼 받아드릴 수밖에 없어 항변(抗辯)도 못하고 애를 태워 살고 있지만 앳된 어린 가슴속에 작은 자존심은 그나마 살아 있었다.
바로 그때 쪽마루 위에 수더분하게 앉아계시던 선생님이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상민아 나 물 한 그릇 줄래?”

부엌에서 그릇을 치우고 있던 내 귓가에 들려오는 말을 들으며 시렁 위에서 부지런히 그릇 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고 아끼는 그릇이었다. 명절날과 아버지 제삿날에만 쓰는 한자로 복(福)자가 새겨진 깨끗한 그릇에 물을 담았다. 부엌문짝이 없어 가마니를 뜯어 걸쳐놓은 부엌문 밖으로 나와 선생님께 두 손으로 드렸다.
참으로 모처럼만에 찾아오신 선생님이건만 사는 형편이 어려워 손님대접으로 내놓을만한 것이 어느 것 하나 있을 리가 없었다. 잘사는 집에서는 선생님이 심방을 오시면 아껴 두었던 씨암탉을 잡아 하얀 쌀밥을 대접했다. 그도 모자라 시원한 우물물에 꿀물을 타서 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보니 그런 것 하나도 대접할 수 없는 어린 마음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어느덧 저녁 해는 금강 둑 너머로 알뜰하게 자취를 감춰 주위가 어둑발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벼랑바위 너머로 내다보이는 화산리 주막집 버스정류장으로 이어진 소달구지 길에 오고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은 흐릿하게 보였다.
그 사람들 속에 그도 애태워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더욱 허전하기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앞으로 닥쳐 올 종구와 싸움질한 일이 좀처럼 원만하게 처리될 것 같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참으로 입술 타들어가도록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하루해가 우여곡절 속에 저물어가는 초저녁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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