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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3 조회 : 2,574




'하늘은 온누리를 두루 살펴 주려는 듯 눈이 시리도록 높고 마냥 푸르기만 했다.
그런 탓인지 턱을 치켜 올려 바라 볼 수록 더욱 짙푸러 숙연함을 가득 자아냈다.
그럿듯이 공활한 하늘은 끝모르게 펼쳐진 금강평야를 제 살붙이 처럼 두루 감싸안았다.
그토록 참한 하늘의 모습은 폭염에 찌들었던 여름을 과감하게 떨쳐내어 이제 곧 가을이 대두됨을 우리들 모두에게 예시하는 것같았다.
그렇듯 자연이 신비롭게 빗어낸 탐스런 하늘의 예스러움에 마음이 심취되어 이내 손으로 한움큼 움켜쥐고 싶은 충동심이 저절로 일어났다.

해마다 그 무렵이면 수많은 제비들이 먼 남쪽 강남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지 마을 하늘 위로 무수히 몰려 들었다.
이른 봄부터 한쌍의 제비가 추녀 밑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여름내 열심히 먹이를 물어 날라 새끼들을 틈실하게 키워 놓았다.
얼마 전부터는 마당 안 빨랫줄에 모여 있는 새끼 제비들을 번차로 데리고 하늘 위로 날아 집과 들녘 사이를 부산스럽게 들락거렸다.

하늘 위로 민첩하게 비상하는 법과 먹이를 포획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숙지시키는 것같았다.
그런 과정에서 어미는 새끼들에게 홀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 시키고 있어 그 모습이 참으로 듬직하게 보였다.

그래도 한동안 정이 들었는데 이제 헤여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해 자뭇 서운함이 마음 가득 서렸다.

아침 저녁으로는 예법 서늘하여 막상 가을이 왔는가 싶은 생각이 설핏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낮으로는 역시나 뜨거운 열기가 지속되어 참고 견디기에 다소는 거북스러웠다.
그런 탓에 가을을 몸으로 확연하게 느낄 수도 없어 참으로 어정쩡 하기만 했다.
더불어 지겨운 여름이 끈길지게 더디 가는 것만 같아 지루하게 느껴졌다.

반쯤 트여진 싸릿문 사이로 드려다 보이는 안 마당엔 볏짚으로 촘촘하게 엮은 멍석이 길다랗게 펼쳐 있었다.
그 위에는 계절의 첫수확물인 선명한 붉은 빛깔의 고추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붉게 익은 고추들이 햇볕에 반사되어 더할 나위 없이 도드라지게 보여 마음이 흡족했다.
그런 당찬 모습이 여름을 여유롭게 떠나보내려는 것 처럼 보여 믿음직스러웠다.

여름내 싸리문 앞을 지키던 대추나무에 당글당글하게 매달린 대추알들도 여름내 뜨거운 햇살에 그을린만큼 불그레한 빛을 아낌없이 띄워 익어가고 있었다.
장독대 옆에 자라나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던 꽈리도 때를 놓치지 않으려 붉은 빛으로 제모습을 완연하게 드러내었다.

무릇 주위에 보이는 모든 과수들은 부지런히 속살을 채워 몸집을 불려가며 하루하루가 다르게 그 표피를 붉은 빛깔로 물들였다.
그런 참실한 모습들에서 계절이 주는 포만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별빛이 쏟아져내리는 밤엔 뒷동산 왕소나무 우듬지에 하얀 달이 둥실 떠올라 마을을 차분하게 내려다 보았다.
밤이 깊어 갈수록 달은 밝은 빛을 성글게 드러내어 고연한 모습의 보름달을 형성하려고 서서히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즈음에 민족고유에 명절인 추석이 다가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숭고한 자연의 보살핌 속에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한해 농사가 풍성하게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런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탐스럽게 떠오른 보름달을 바라보며 각자의 마음 속에 담았던 소원을 빌기도 했다.

그러다 한로(寒露)가 되어 갑작스레 날이 싸늘해지자 이젠 가을이 다가왔음을 온몸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손때 묻은 장농과 고리짝을 뒤져 저마다 팔 소매가 긴 겉옷을 찾어 입기 시작했다.

여름내 구릿빛 햇살에 마냥 그을린 누런 호박들이 포만스럽게 살이 가득 차오를대로 차올랐다.
세상 아무런 걱정 근심 없는 것처럼 밭두덕 여기저기에 아주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빛바래져 가는 초가집 지붕 위에는 둥근 박이 아주 태평하게 누워 둥근 배를 불쑥 내어 밀고 더디 오는 가을을 탓만하고 있었다.

그쯤엔 텃밭에 심어 놓았던 배추가 하루하루가 다르게 속살을 실팍하게 채우며 몸을 잔뜩 불리고 있었다.
더불어 함께 씨앗을 뿌렸던 무도 성큼 자라 땅을 밀치고 불끈 솟아오른 밑둥치가 예법 굵게 보여 듬직함을 주었다.

더불어 뒷들녘 밭에 다소곳하게 머릴 숙이고 있는 수수 목들의 검붉은 빛에서도 성숙해져 가는 가을을 탐익할 수 있었다.

너른 금강평야의 앞 들녘에 고개를 착착 숙이고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들이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농부들 저마다에게 넌지시 풍년을 알려주는 듯해 너무도 참하게 보였다.

그무렵 마을 아낙네들은 물론 아이들까지 빈 댓병을 들고 들녘 논둑길로 나가 양쪽 논배미의 볏잎에 달라붙은 메두기를 잡았다.
해넘이께가 되면 배에 알이 통통하게 밴 방아개비와 풀무치도 잡아 빈 병에 하나 가득 채웠다.

가끔씩은 짬을 내어 밭주인의 눈을 피해 샛강 둑아래에 숨어 콩서리를 곧 잘 하였다.
그러다 보면 저마다 입가장자리에 온통 검은 검정이 시커멓게 묻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을에 풍년이 들면 동네에 사는 누나들이 시집 갈 때 두툼하게 솜을 넣어 비단이불을 해주려고 일 년동안 애써 가꿔 놓은 목화밭이 있었다.
그 목화송이에 물이 오르면 달작지근한 맛이 배어나 동네 어른들 몰래 목화송이를 따서 아작아작 깨물어 그리 말썽을 부리며 자랐다.

절기가 입추로 접어들자 여름내 충분한 햇살을 받은 모든 과수들이 저마다 속살을 틈실하게 채웠다.
그리고 가을의 깊이에 따라 과수의 등언저리 빛깔도 농익은 빛을 띄워 절로 식탐을 자아내게 하였다.

올곧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감나무들의 검푸른 잎사귀들이 번득거려 그 틈사이로 붉게 익은 홍시들이 탐스러운 얼굴을 서둘러 내밀었다.
마당 한구석에서 온종일 홀로 텅 빈집을 지키고 있던 석류도 마냥 심술이 난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붉게 익은 등언저리를 터트릴락 말락 하였다.

저마다 앞다퉈 붉게 농익어 가는 과수들의 모습과 돌틈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애닯은 소리에 어느새 가을이 완벽하게 도래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불고불한 동네 고샅길을 벗어나면 더없이 광활한 들녘이 앞 뒤도 모자라 좌우 양쪽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누런 벼이삭들이 황금빛으로 물든 채운들녘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렇듯이 가을은 우리들 모두에게 알찬 풍요를 고루 안겨주었다.

앞산자락과 언덕배기엔 억새풀들이 기다림에 허연 목들을 길게 내밀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뒤를 이어 온갖 가을 꽃과 더불어 코스모스도 만개하여 서운치 않을만큼 무리지어 있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소슬바람에 꽃송이들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와 함께 노란 은행잎들도 바르르 떨며 온몸으로 가을을 고분하게 받아드리고 있었다.

길섶 양쪽으로는 사계절내 변할 줄 모르고 검푸르게 뻗어나는 산죽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산죽을 등 뒤에 울타리 삼아 새하얀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무리지어 피어났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색이 바랜 남보라빛 꽃을 피운 쑥부쟁이가 도드라지게 보여 애틋함을 자아냈다.
그리고 다양한 색들을 참하게 띄우고 피어난 산국들이 투명한 아침 이슬을 머금고 함초롬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이런 모든 모습들이 석별의 계절답게 퍽이나 고즈녁하게 보였다.

언제나 앞 뜨락에 나서면 맞바라 보이는 매화산은 물론 들메마을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낮은 산들도 만추의 계절을 찬미하려는 듯 했다.
저마다의 모습들이 온통 담홍색으로 물들어져 가을의 운치를 가일층 자아내어 가슴에 뭉클한 감성을 불러 일으켰다.

마을 사람들 모두는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을 걷우러 끝모르게 펼쳐진 앞들녘과 뒷들녘 논배미에 나갔다.
서로 품앗이를 하여 서둘러 벼를 베고 타작을 하였다. 그렇게 저마다 기쁘고 풍족한 마음으로 가을 바심을 마무리 하였다.
저마다 겨울 양식을 준비하느라 마을 방앗간에서 순번을 기다려 방아를 찧었다.
윗 마을 아랫 마을 가릴 것 없이 밤 늦도록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온 들녘으로 풍성하게 퍼져나 마음이 한껏 뿌듯했다.
그와 더불어 모처럼만에 흰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마냥 부풀었다

그렇게 추수가 끝난 앞 들녘엔 드문드문 노적가리가 쌓여져 있어 동네 꼬마녀석들에게는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환한 달빛을 벗삼아 밤늦도록 술레잡기를 하였다.

그리고 쉴짬도 없이 들녘 밭에 나가 콩과 팥들은 물론 참깨와 들깨 대를 낫으로 베어 도리깨로 두들겨 수확을 했다.
추수가 끝난 논과 밭을 소가 모는 쟁기로 갈아 엎고 흙을 골고루 고르고 다졌다.
다음해의 풍작을 기원하며 온갖 정성을 드려 보리와 마늘을 심었다.

그리고 잠시 짬이나면 삽과 양철통을 들고 샛강 둑에 나가 땅을 파헤치고 겨울 잠에 들려고 하는 갈게를 잡았다.
늦가을철 몸통과 발가락에 살이 오를대로 오른 수게와 배 안쪽에 노란 알을 가득 실은 암게를 잡아 양철통을 가득하게 채웠다.
그렇게 잡아 온 갈게로 젓을 담아 작은 옹기에 넣어 장독대에 잘 보관하였다.
하얀 눈 속에 겨울을 나고 봄을 거치면서 다음 해 여름철이 될 때까지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푹 삭혀 발효를 시켰다.
이듬 해 한 여름철에 밥맛이 없을 때 꺼내어 먹으면 참으로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일미였다.
아마도 그런 깊은 맛은 고향집 어머니들의 손끝에서만 묻어 날 수 있는 모성애의 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쯤에 마을 노인들은 망태기를 둘러매고 틈틈히 산에 올라 산감을 따다 껍질을 깍아 줄에 매달았다.
양지 바른 곳에서 잘 말려 꼬들꼬들한 곳감을 만들었다.
더불어 감말랭이도 온 식구들이 넉넉하게 먹을 수 있을만큼 만들었다.
그처럼 공을 들여 만든 곳감은 적당한 크기의 항아리에 넣어 보관을 하였다.
온 들녘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하게 내릴 때 하얀 분가루가 나는 곳감을 사랑스런 살붙이들에게 간식으로 나누워 주셨다.

그럴 즈음이면 언제나 해거름녘엔 북쪽 머리 매화산자락 갈참나무 숲에서 계절의 불청객인 솔개란 놈이 어김없이 마을 하늘로 날아들었다.
낮은 듯하면서도 높게 그러면서도 때론 높은 듯하면서도 낮게 마을 하늘을 선회하며 가을 들녘에 먹이를 찾으며 한가로히 노는 약병아리를 잽싸게 채어가려고 회시탐탐 포획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럴라치면 솔개란 놈의 음흉한 마음을 익히 알고 있는 촌노는 양지 바른 텃마당에 엉덩이를 붙이고 속으로 이렇게 되뇌였다.
'너 놈 속을 휜히 꽤뚫어 보고 있으니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짓이랑 아예 하지를 말라'는 듯 마디가 짧은 장죽을 두 볼이 쑥 들어가도록 페속 깊히 힘껏 빨아드렸다. 그리고 여유롭게 담배연기를 하늘에 내뿜으며 솔개란 놈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봄에 어미 닭의 품을 빌려 병아리를 깨어 봄을 거쳐 여름내 애지중지 키워 놓은 약병아리를 솔개란 놈에게 거져 빼앗기지 않으려는 촌노의 소박하면서도 다부진 모습이 더디오는 가을빛에 차분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겨울의 입목으로 들어 서는 절기인 상강이 되었다.
온몸에 가벼운 한기를 느끼게 되면 저마다 옷을 한겹 정도는 더 껴입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면 온 주위에 히끗히끗하게 서리가 내리기도 하였다.

그럴쯤에 뒷들녘 밭에서 뿌듯한 마음으로 고구마를 캐어 등지게 바작에 한가득씩 담아 집으로 날랐다. 고구마는 농촌에서 긴 겨울을 나기 위한 보조 양식으로 큰 몫을 하였다.
겨울 양식이 모자랄 때는 점심밥 대신에 고구마를 쪄서 시원한 동치미 국물과 먹으면서 끼니를 때웠다.

겨울의 입목으로 들어서는 입동이 되자 마을 집집마다 회갈색으로 변해 버린 지붕을 걷어내었다.
그리고 마당 안에 둘러 앉아 탁배기를 나누면서 가을바심을 한 새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초가집 지붕을 새롭게 단장했다.
저마다 틈이 나는대로 앞산에 올라 싸리나무를 베어 울타리와 사립문도 새롭게 보강을 하였다.

가을 바심이 끝난 텅 빈 들녘은 풍요로움으로 가득 찼던 만큼이나 커다란 외로움이 그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 고즈넉하기만 하였다.
마른 흙먼지만 푸석이는 시오리 길 읍내로 뻗어 난 신작로가 그리도 냉정하게 보였다.
신작로 양쪽 가에 밋밋하게 줄져 서 있는 미루나무가 계절의 끝자락을 붙들고 울먹이던 떨잎마져 야별차게 떠나보내고 말았다.
그런 냉정함이 한데 어울려 가슴 뭉클한 허전함을 연이어 자아냈다.
늘상 외로움의 끝자락에 묻어나 가슴 울먹이게 하는 그리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험한 세상이 저질러 놓은 전란으로 그리 억울하게 숨을 거두신 내 아버지 때문이었다.
허나 나에게는 그런 간절한 그리움일지라도 끝내 돌아 오는 것은 뒤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운 아픔 뿐이였다.
끈질긴 아픔은 언제나 도돌이표였지만 그마져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야만 했다.
끝내 지우지도 못하는 그리움이 뒤엉켜 버린 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 검회색으로 변해버린 빈 들녘 길을 사붓사붓 걷기도 했다.

그렇게 허한 마음이 애틋함을 자꾸만 불러 일으켜 마냥 고적해질 무렵이면 해마다 어김없이 겨울 손님인 철새들이 찾아왔다.
금강들녘은 여늬 다른 곳에 비해 먹이가 풍부했다.
벼이삭에서 떨어진 낱알들과 그리고 크고 작은 잡다한 곤충들이 풍부했다.
그럼으로 해마다 시베리안산 가창오리 떼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금강 둑너머로 기우러 가는 저녁노을이 방만한 논산들녘을 불게 물들일 무렵이었다.
하늘엔 그 멀고 긴 여정을 날아 온 철새들이 이제 채운들녘을 도래지로 삼아 착지를 하려 하였다.
그 이전에 오리들의 각기 다른 율동들이 한데 어울려져 실로 형언키 어려운 장엄한 군무가 한동안 장관을 이루며 펼쳐졌다.
인간의 두뇌로는 그 수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한꺼번에 수천 아니 수만마리가 시커멓게 무리지어 날아와 히뿌연 겨을 하늘 일부분을 가득 메웠다.

다시 절기가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로 접어들면 기온이 떨어져 추워지고 주위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서둘러 김장을 하느라 젓국을 대리는 비릿하면서도 담백한 냄새가 김장이 끝날 무렵까지는 동네 고샅길에 가득 배어났다.
겨울 양식인 김장을 담그는 그날만큼은 온 집안이 풍성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그 시절엔 너나할 것없이 만만한 냉장고 하나 없이 살았다.
그래도 어렵고 힘든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나름대로 슬기롭게 버텨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동네 어른들은 겨우내 싱싱한 김치를 먹기 위해 울 안에 양지 바른 쪽을 골라 땅을 깊게 파서 김칫독을 묻었다.
또 다른 곳에 구덩이를 파 겨울 동안 두고두고 싱싱하게 꺼내 먹을 배추와 무를 얼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써 갈무리를 하였다.

김장을 마치고 나면 시레기를 만들기 위해 남은 무청과 배추잎들을 모아 볏짚으로 간지런하게 엮었다.
바람이 잘 치는 흙벽에 단단히 매달아 말렸으니 그 또한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의 일환(一環)이었다.

오후 늦무렵 배가 촐촐해지면 양지 바른 쪽에 앉아 부엌칼로 배추뿌리와 생무를 깍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처음 한 두개를 먹었을 때는 그저 달작지근했다.
그러나 욕심껏 많이 먹다 보면 뱃속이 더부룩해져 맵싸한 트름이 자꾸만 올라와 코와 입으로 거북하게 퍼져났다. 그래도 간식거리가 변변치 못 했던지라 그라도 감지덕지했다.

김장이 끝나 한시름 놓는가 싶었는데 다시금 집집마다 메주를 쑤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어 수확한 콩을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을 지펴 적당한 정도의 시간적 여유를 두고 삶았다.
그리고 잘 삶아진 콩을 절구통에 넣고 찧어 찰지게한 다음 알맞은 크기로 모양을 내어 메주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메주가 꾸들꾸들해지면 볏짚을 이용하여 열십자 모양으로 튼튼하게 잘 묶었다.
그리고 햇볕과 바람이 잘 통하는 추녀 밑에 매달아 메주를 띄웠다.
그쯤에 더불어 자연 발효식품인 청국장도 띄워 담백하고 고소한 맛으로 겨울철 입맛을 돋우웠다.
비록 처해진 삶이 가난했을지라도 온 식구들이 오붓하게 머릴 맞대고 앉은 저녁 밥상은 언제나 풍성했다.
밥그릇에 놋숫가락이 서로 맞닿아 부딪는 소리가 냉기가 가득 서린 고샅길로 선명하게 들려와 가슴 뭉클한 정감을 불러 일으켰다.

너른 들녘을 휩쓸고 온 마을을 삼킬듯이 겨울 삭풍이 매섭게 불어와 온몸이 움추러들어도 겨울을 든든히 날 수 있는 채비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고 바람이 적당하게 부는 날에는 동네 아이들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듯 동구 밖 언덕배기에 올랐다.
그리고 저마다 해맑은 모습으로 나름 방패연과 가오리연을 날리며 부푼 꿈들을 높다란 하늘 위로 마음껏 띄워 보냈다.
그러다 날이 추워지면 추수가 끝난 들녘 밭에 남아 있는 고추대와 수수대를 걷어오고 검불데기도 끍어 모아 우묵진 곳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 모닥불을 빙 둘러쌓고 추위에 얼려고 하는 양손을 녹이면서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연을 날리며 놀았다.
더러는 서로 연줄을 걸어 지지않으려고 연싸움도 어기차게 하였다.
연 싸움에서 연실이 끊어지면 지게되는 것이었다.
연실이 끊어져 바람따라 연이 둥실둥실 떠 내려가면 싸움에서 진 아이는 발을 동동구르다 투털투덜대며 연을 잡으려 뒤를 따라 들녘을 가로 질러 달려갔다.
바람결 따라 흘러간 연은 얼만큼 지난 뒤에 동구밖 둥그나무나 키가 뻘쯤하게 큰 미루나무 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연 싸움에서 이긴 아이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한껏 웃음을 지었다.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절정에 이르면 마을 아낙네들은 서로 마음이 맞는 이웃끼리 곧잘 어울렸다.
한차례 군불을 넉넉하게 지핀 따스한 안방 아랫목에 모여 각자 자기네 집 식구들의 겨울 겉옷과 스웨터를 짜느라 털실로 공을 드려 뜨게질을 하였다.
한편 혼기가 찬 처녀들은 동그란 수틀에 오광목 천을 끼워 형형색색의 찬란한 색실로 그 위에 한땀한땀 정성을 드려 수를 놓았다.
농한기를 맞은 남정네들은 석유기름 냄새가 싫지 않게 쪄든 동네 사랑방에 모여 잘 간추린 볏짚을 두 손바닥으로 비벼 새끼를 꼬면서 서로 정담을 나눠 우애를 더욱 키웠다.
그렇듯이 서로가 서로를 마치 제살처럼 보듬고 오순도순 도란도란 진솔한 정을 키워내며 돈독하게 살려했다. 그런 애틋한 사랑들을 버팀목 삼아 제아무리 모진 추위인들 굳게 견뎌내어 휴면의 겨울을 잘 넘기려했다.

기온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적설량의 차이일뿐이지 해마다 하얀 눈이 사방으로 드넓게 펼쳐진 금강들녘을 빈틈없이 가득 채워 뒤덮었다.
실로 섭섭치 않을만큼 내린 새하얀 눈은 경이로울 정도로 방만한 설원을 이뤄 눈에 시리도록 운치를 이뤘다.
그런 초자연적인 풍광을 바라보는 모든이들로 하여금 깊은 감성에 저절로 젖어들게 하여 끝내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고즈녁한 겨울의 매력을 듬뿍 지닌 매화산은 그 표정을 뚜렸하게 드러냈다.
방만하게 펼쳐진 설원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눈 속에 푹 파묻힌 원목다리가 그리도 고즈넉하게 보였다.
그와 더불어 들녘 한가운데에 미아처럼 홀로 서 있는 자그마한 채운역사가 아스라히 바라보였다.
사시사철 언제나 앞만 바라보고 우뚝 서 있는 시그널을 벗 삼아 고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골역사의 모습이 뜻 깊은 애잔함을 불러일으켰다.
마냥 더디 가는 완행열차는 선행을 하려는 열차에게 선로를 양보하고 바람 시린 프렛트홈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기차의 화통에서 뿜어내는 검은 연기가 메마른 겨울 하늘위로 퍼져나 꼬불거리며 스러져갔다.
바라볼수록 왠지 모르게 안쓰럽게만 느껴지는 시골역사는 끄트머리 계절인 겨울의 흰눈 속에 푹 파묻혀 고요의 굴레 안에서 그지없이 자릴 지키고 있었다.

온 사방이 탁 트인 들녘에서 세력을 키우며 불어오는 북서풍이 참으로 매섭고 드세기만 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으려 해도 바람의 힘에 밀려 저절로 몸이 움직일 정도의 위력이었다.
떨잎마져 떨어져 앙상하게 가지만 남긴 나목들이 바람에 휘둘려 흉흉하게 크고 작은 소리들을 신음처럼 냈다. 더불어 거센 바람에 마구 휘둘릴지라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려 바둥대는 것은 다음의 계절을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이미 터득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침잠의 겨울은 새하얀 눈 속에 뒤덮혀 내성 휴면을 취하려는 크고 작은 식물들과 더불어 다시금 도래될 태동의 시간을 차분하게 기다리며 내면으로 힘을 모우고 있었다.
그렇듯 저마다의 크고 작은 소망들을 설원은 단 한 번의 탓도 없이 기꺼히 보듬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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